한해를 보내는 문턱 회색의 우울한 추억을 벗겨내기 위해

노동사회

한해를 보내는 문턱 회색의 우울한 추억을 벗겨내기 위해

편집국 0 3,162 2013.05.19 02:04

또 한해가 저문다. 이 때쯤이면 누구나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며 앞날을 추스르기 마련이고, 대체로 그 기준은 두 가지이다. 우리 사회는 어떻게 달라졌으며, 그 속에서 나의 처지는 얼마나 좋아졌는가? 이를 위한 구체적인 가늠자로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 할 민주주의 발전과, 나와 주변 사람들의 삶의 질이 얘기된다. 돈이든 권력이든 가진 사람들이야 늘 신명나는 형국이니, 결국 사회발전의 가늠자는 없는 사람들의 삶과 생각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허기진 민주화에 대한 회의

흔히들 우리 사회는 엄청나게 민주화되었다고 지적한다. 못할 얘기가 없고 행동에 거칠 것이 없으며 일정한 조건을 갖추고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참여할 수 있고 최소한 라면이라도 먹을 수 있어 배고픔은 면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확실히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는 매우 빠르게 신장되었고 기본권의 숨통을 눌렀던 권위주의 지배도 무너지고 있다. 참정권도 크게 넓어졌으며 가진 자의 출세를 위한 돈선거도 많이 개선되었다. 얼마 전까지도 '빨갱이'로 몰렸던 사람들이 권력의 중심 자리를 대신하는 예도 흔히 볼 수 있고, 남북화해가 진전되어 통일이 곧 올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기도 하다. 수구세력들은 가슴을 치며 이 변화를 원통해 하지만 민주화와 남북화해의 햇살은 사회 구석구석에 훈김을 불어넣어 온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아직도 독재시대의 야만이 독취를 풍기고 있다. 남북화해를 시기하여 파탄내보려는 음모와 억지들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고, 노동과 자본 사이 불공평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노동자에게는 '법치주의'의 이름으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재벌의 범죄에 대해서는 '국가발전에 대한 공로'를 이유로 관대한 처분이 일상화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천신만고 끝에 국회에 진출한 민주노동당 지역구 의원을 하찮은 이유를 들어 기어이 몰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경직된 권위주의가,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똬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이런 일들은 반세기를 지배해온 외세와 독점의 전횡이 깨져나가는 과정이고, 민주화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은 민주화의 진전에 대해 그토록 헛헛해하며 회의를 갖는가? 바로 빈곤과 사회적 모순 때문이다. 10억의 현금을 가진 사람이 1만8천여명이라는데 최저생계비를 밑도는 빈곤층은 700만을 넘어섰다. 직장도 불안하고 벌이도 형편없이 사회보장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훨씬 넘어섰다. 부익부 빈익빈의 다른 이름인 사회적 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지고, 생활고에 지쳐 자살하는 사람의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상위에 속한다. 농촌의 황폐화는 노령화사회의 급진전과 함께 많은 사람들을 좌절과 실의에 빠뜨리고 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특히 정부 경제부처와 기업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이 모든 것이 경제가 나빠서 그런 것이라고, 경제가 살아나면 다 해결되는 것이라고. '경제살리기'는 경제성장이니 여기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하니 참아달라고. 하지만 경제가 성장하면 과연 문제는 모두 저절로 풀릴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 할만한 근거는 이론상으로도 역사의 경험으로도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도의 압축성장을 했다 하여 개발도상국의 경제모델로 칭송되고 있지만, 1970년대에 얘기됐던 절대적 빈곤문제와 부익부 빈익빈이 사회적 양극화라는 다른 이름으로 30년이 지난 지금 훨씬 심각하게 지적되고 있다. 경제성장은 저절로 삶의 질을 향상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경제성장과정에서 사회적 불균형과 불평등은 확대되어 왔고 강요된 미국식 세계화는 이를 가속화하였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1980년대 후반이래 절차상의 민주화에 심취하여 잔인하기 그지없는 세계화를 용인하고 경제성장론의 환상에 젖어 사회민주주의 발전을 소홀히 한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역대 정부는 경제도 살리고 사회양극화도 해소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고 주장한다. 수구 기득권세력의 완강한 반발을 무릅쓰고 개발독재시대의 모순들을 제거하기 위해 많은 개혁조치들을 감행했다고 강변한다. 노무현 정부 역시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보수언론의 극성스러운 공격과 거대 자본의 사보타지에 몰리면서 경제살리기와 개혁을 추진 중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경제성장과 사회양극화 해소가 달성되고 있다는 증좌를 찾기 어려운 데서, 그리고 가까운 시간 안에 그럴 수 있으리라는 예증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결국 노무현 정부는 신자유주의, 거대재벌에 포위되었다는 주장과 아직도 민중 쪽에 미련을 가진 위험분자라는, 서로 대립된 비판의 가운데로 몰려 수많은 논자들의 자판 위에서 멋대로 재단되고 있는 것이다. 

노사관계 악화의 중심에 있는 것

어디를 보아도 실망스러운 이런 현상의 한 가운데에 불안하기 그지없는 노사관계가 있다. 자본 쪽은 산업간 업종간 기업규모간의 불균형이 가속화하고 있다. 전자, 자동차, 조선, 석유, 금융업종과 다섯 손가락에 드는 재벌기업들은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리는가 하면, 다른 업종과 중소영세기업들은 불황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다. 전반적으로 실업과 불완전취업률이 높아져 가는 가운데 중소영세기업에서는 갈수록 인력난이 심해지고 있다. 양극화가 여기도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노동 쪽의 불안정 요인은 격동과 다사다난(多事多難)이라는 말처럼 훨씬 넓고 깊다. 무엇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참담함과 노동운동의 혼란은 그야말로 노동의 위기를 실감케 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곳곳에서 조직을 만들고 단체협약 체결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법률상의 제약과 사용자의 억압에 부닥쳐 악전고투를 감내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거의 목숨을 거는 처절한 싸움을 벌이지 않고서는 조그만 성과라도 거둘 수가 없었다. 특수고용직 종사자들은 지위와 신분에 대한 애매한 법률상 해석 때문에 훨씬 고통이 심했다. 한국노총 충주지부 김태환 열사의 죽음은 바로 이러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참담한 현실을 집약해서 표출시킨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올해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노동문제의 심각성을 사회의 가장 큰 쟁점으로 부각시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문제 해결의 중심 축이어야 할 노동조합운동은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연초부터 터져 나온 대기업과 부두의 취업비리, 양대 노총 정상부의 부정은 노동운동을 차단하기 위한 권력의 기획작품이라는 혐의가 있기는 하지만, 여러모로 노동운동 조직의 신뢰도를 조직안팎에서 추락시키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거기다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벌어진 폭력사태와 몇몇 중앙조직에서 일어난 조직싸움들은 노동운동의 장래에 대해 불안감을 넘어선 총체적인 위기의식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정부는 노동분쟁의 감소라는 호재와 노정관계의 악화라는 악재를 동시에 경험하였다. 노동쟁의는 2005년 10월 말 현재 262건으로, 작년 동기 444건, 작년 한해 462건과 비교했을 때 60% 미만에 머물렀다. 쟁의 참가자 수도 지난해 동기 대비 182,252명에서 올해 112,941명으로 근로손실일 수도 1,114,833일에서 760,632일로 크게 줄었고, 불법쟁의는 54건에서 13건으로 감소하였다. 이러한 통계가 진정 노사관계의 안정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불경기로 인한 노동계의 일시적인 자제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6월 초 김태환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촉발된 노정관계의 악화는 전례없이 심각하였다. 우선 노동계는 노동부장관 퇴진이라는 사상 초유의 요구를 제기하여 연대를 형성하고 양대 노총의 노동위원회 탈퇴 및 한국노총의 노사정위원회 철수로까지 확전되었다. 노정간 갈등의 심각성은 그 기간이 매우 길어지고 있다는 데서도 드러나고 있다. 그 원인에 대해 노동부장관의 소신성 훈계조 언동이 답답하게 갇혀 있는 노동운동 지도부를 자극했다는 지적이 많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참여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한 불만이 가로놓여 있었고, 그 충돌은 이미 비정규직노동 관련법의 국회 처리과정에서 집약되어 일어났다. 노동부가 '비정규직보호법'이라는 데 대해 노동계는 '비정규직확산법'으로 규정한 것이나 노정간 논쟁을 사용자측이 즐기는 듯한 형상이 그 예였다. 노동계는 정부의 노동정책이 노동자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고, 참여정부의 정책기조가 신자유주의에 있는 한 정부와의 관계에 일정한 선을 그을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사회통합적 노동정책 확립해야

여러 가지 면에서 노사정관계가 불안한 상태에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게다가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는 구조조정과 이른바 '로드맵'이라는 노사관계선진화계획이 격돌의 위험요소로 대두되고 있다. 노사간 이해대립이야 이 사회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정부의 정책 기조와 역할 여하에 따라서는 전화위복의 기회를 만들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확립하는 일이다. 

이미 참여정부는 출범부터 사회통합을 정책의 기본명제로 제시하였고 또 그렇게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회통합을 이루기 위한 진전된 장치는 찾아보기 어렵다. 사회안전망이 그렇고 비정규직노동에 대한 제도의 현실이 그렇다. 사회통합이 무엇인가? 공동체에서 구성원을 쫓아내지 말고 같이 어울려 살게 하는 것, 어쩔 수 없어 밀려난 약한 구성원들을 사회가 보듬어 안고 같이 살게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일자리 창출이라는 목표를 앞세워 마냥 유연화를 허용하는 것은 결코 사회통합일 수 없고 로드맵은 바로 이 기조 위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노동기본권은 확장하고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요소들은 최대한 억제해야 한다.

여기에는 정부의 방향전환을 위한 결단이 필요하고, 노동조합의 경영참가와 같은 참다운 협력방식을 도입할 수 있는 자본 쪽의 경영 혁신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강조되어야 할 것은 노동운동의 신뢰회복일 것이다. 노동운동이 스스로 혁신해 내고 내부로부터의 지지를 바탕으로 사회발전의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을 때 요구의 정당성은 확보될 수 있고 정책 전환을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해를 보내는 문턱, 회색의 우울한 전망을 벗겨내고 희망과 보람이 가득한 삶과 민주적 노사관계의 발전을 위해 노동운동의 개혁이 너무도 절실한 시점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