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청거리는 진보운동 지도자들이여 대중이 지켜보고 있다

노동사회

휘청거리는 진보운동 지도자들이여 대중이 지켜보고 있다

편집국 0 3,249 2013.05.19 01:59

‘한국 진보운동의 리더십’이라는 너무 어려운 주제를 받고 막상 쓰려니 당황했다. 앞이 캄캄하고 무엇부터 시작하고 내용은 어떻게 구성해야 남들 앞에 글로 제출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감이 엄습하며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여 방향조차 찾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 글과 주제를 원망하며 도망치고 싶어하는 나 자신을 보며 무능력을 발견했고, 주어진 책임으로부터 회피하려 비겁하고 비열한 또 하나의 나를 발견하며, 무엇을 훔쳐보다 들킨 것처럼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글을 써야 할 방향성을 잃어버린 게 원인이다. 어쨌거나 나에게 주어진 글의 주제를 고민하다보니 어린 시절의 희미한 기억부터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길을 잃고 공포에 떨었던 경험이 누구나 한두 번씩은 있을 것이다. 북극성을 보고 북쪽을 알아내는 지혜와 경험도 부족할 때이다. 간신히 방향을 찾아 집으로 가는 길을 걸어가다 낯익은 산과 들판으로 들어설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배고픔과 고통은 다 잊고 지친 다리에 힘이 솟아 뜀박질로 집으로 들어서는 기분은 행복 그 자체였다.
그것은 집에 가면 엄마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반가이 맞아주는 곳이 있다는 것이 희망이며, 깜깜한 밤에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었다. 이처럼 어린 시절의 내가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가야 할 방향을 찾아냈기 때문이고, ‘갈 곳이 있다는 것’ 그 자체 때문이었다. 내가 목숨 걸고 뛰어가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ha_01.jpg
[ 지난 3월 14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반대파들이 단상을 점거하자 민주노총 집행부가 벽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 출처 : 프로메테우스 ]

방향성 상실과 전망부재의 진보운동

그런데 지금 노동운동에게는 갈 곳, 반가이 맞아주는 곳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 개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가야할 목표와 방향을 잃어버리면 당황하고 흔들리기 마련인데, 조직의 지도자들이 이끄는 방향에 대한 믿음이 깨졌을 때 이탈자가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처음에는 요구하고 건의도 해보겠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믿을만한 근거를 갖고 방향 수정이 안 된다면 분열이 생기고, 각자가 알아서 살아남기 위해 제 갈 길을 찾아 떠날 것이다. 그러다가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나면 이들을 집단화, 세력화하여 조직의 방향을 수정하거나 저항과 반란을 통해 전망이 없는 지배자를 갈아치우고 말 것이다. 현재 한국 진보운동을 대표하는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도 리더십이 흔들리고 위기에 처했다. 대중들의 동의확보를 통해 리더십이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진보운동이 방향을 상실하고 전망부재의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사건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1990년대 초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이다.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수많은 학생운동 출신들이 이 시기 노동운동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던 목표였던 사회주의가 망하는 걸 보며, 그것도 그들이 가장 큰 대의명분으로 내세웠던 민중들의 손에 의해 끌려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신념을 포기하고 떠나갔다. 다른 하나는 1997년 외환위기였다. 이 사태로 인해 노동현장은 또 한번 요동을 쳤고, 1998년 정리해고와 함께 수백만명이 일자리에서 쫓겨나며 노동운동은 다시 공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영원히 지켜주리라 믿었던 노동조합도 보호해주지 못했으니 세상에 믿고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노동자들의 충격과 상실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각자 개인별로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현실이 눈앞으로 닥쳐왔으며, 노동계가 힘에 밀려 합의해준 파견법은 오늘날 사회적 양극화와 비정규직 문제로 나타났다. 

그런데 문제는 2005년 현재 민주노총 건설 10년, 민주노동당 창당 5년이 됐음에도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전망을 세워내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대중들은 당연히 등을 돌리기 마련이다. 결국 위기의 상황은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비상대책위원회라는 불안정한 체제까지 몰아넣고 말았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내년 1월까지의 짧은 기간 내에 양측의 비상대책위가 위기상황을 탈출할 수 있는 대안을 만들거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것이라고 기대를 갖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이 극복되지 못하면 잠복기를 거쳐 대폭발이 일어나는 혼란의 시대가, 즉 민중들에게는 암흑기가 올 수 있다. 

민주노총, 일관성 있는 전망을 회복하라 

민주노총은 강승규 전 수석부위원장의 비리사건이 터지며 이수호 집행부의 사퇴로 비상대책위원회 체계가 들어섰다. 그러나 결정적인 내부 모순의 본질이 폭발한 것은 지난 2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폭력사태였다. 사회적 교섭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당선된 집행부이기에 사업의 성과를 놓고 평가하며 책임을 물어야했지만, 반대파는 사업을 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회적 합의주의 반대를 위한 전국노동자투쟁위원회’를 만들어 힘 대결로 나갔고, 그 결과가 대의원대회에서 충돌로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내부 모순과 위기가 현실화되었음에도 해결방향을 찾지 못하던 집행부에게 강승규 비리사건은 더 이상 형식마저도 유지할 수 없도록 만드는 ‘마지막 결정타’였을 뿐이다. 문제는 이후에 들어선 비상대책위원회 체계의 행보이다. 그토록 반대하던 사회적 교섭주의자들이 추진했던 방법 중 하나인 ‘노사교섭’을 아무런 해명도 없이 버젓이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니 민주노총을 지켜보는 노동대중들이 어떻게 믿고 따를 수 있단 말인가!

현 비대위가 노사교섭을 진행하고 있음에도 예전에 사회적 교섭주의 타도를 외치던 전노투 회원들은 전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노동운동을 그만두었는지, 아니면 우리편이니 믿고 지켜보고 있는지 반응이 없다. 자신들의 주장에 일관성 있게 반대를 하던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해보니 필요하더라”며 솔직하게 과거의 잘못된 판단을 인정하고 사과라도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인 아닌가! 이게 선행되지 않으면 비대위는 곧 새로운 반대파에게 타도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에 빠지고 만다.
지도부가 바뀌어도 전망은 계속 부재한 것이 민주노총 위기의 본질이다. 새로운 전망을 세우고 정책대안을 개발하기보다 패거리를 지어 권력투쟁에만 몰두한 결과가 70만 조합원과 1천5백만 노동자들의 보호막이 되지 못하는 무능력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첫 마음과 사명으로 돌아가라

2000년 민주노동당의 태동은 1987년 이후 노동운동의 성과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곧 노동조합운동만으로는 일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정의롭게 해결해 나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이 현실로서 입증된 전제 위에서, 이 문제를 ‘정치세력화’라고 하는 보다 높은 차원의 운동을 통해 더욱 힘있게 해결해보고자 만든 게 민주노동당이다. 그런 만큼 당은 자신의 출발적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노동조합운동이 직면한 한계를 직시해야 했다.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아니 노동자의 정치주체화라고 하는 보다 큰 틀에서 노동자들과 민중의 문제를 더 좋은 방향으로 해결하는 비전을 새롭게 창출하기 위해 노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갔어야 옳다.

그런데 그동안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오늘과 같은 현실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창당 4년만인 2004년 총선에서 10석에 당선되고 지지율은 최고 18%에 달할 만큼 과분한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 지지율은 거품임이 드러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국민과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으로서 자력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차떼기’로 대표되는 정경유착으로 부패한 정치에 대한 국민적 공분과 대통령 탄핵정국이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반사이익을 거둔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ha_02.jpg
[ 10.26 재보궐선거 패배를 확인한 후 침통해 하고 있는 민주노동당 지도부 - 출처 : 매일노동뉴스 ]

이번 울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의 패배도 정규직 중심 노동조합운동이 지니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는 모습을 민주노동당이 확실하게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자본의 공세 속에서 자기 방어적 대응에 급급하다보니 계급적 대표성과 민중적 지지기반이 갈수록 약화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적극적인 비전을 제출하지 못한 것이다. 또한 이번 재선거 패배의 또 다른 원인으로 지적되는 중앙당을 비롯한 우리 안의 ‘무사안일주의’는 보수정당과 차별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데 실패하도록 했다. 진보정치가 실질적으로 지역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울산 북구와 동구에서도 미숙한 집행으로 한나라당과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했고, 이것이 민심의 이반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결과적으로 민주노동당은 자신이 주력군으로 삼고 있는 정규직 조합원들에게조차 존재 의의를 확고히 세워내지 못해 지지를 끌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노동자서민을 위해 일하는 정당이 비정규직들로부터 냉소와 외면을 당하는 큰 충격을 받고 나서야 위기를 인정하는 둔감함을 보였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비상대책위원회체계 탄생 배경인 것이다. 

보여주겠다던 ‘뭔가’를 보여주지 못한 소영웅주의자들

한 시절을 풍미했던 유명 코미디언 이주일 씨의 유행어 중에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라는 게 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뭔가를 보여주지 못하고 죽었다. 우리는 코미디언 이주일 씨와 같은 운동을 해오지 않았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실력과 능력도 없으며 목소리 높이고 큰소리치며 세상의 문제를 다 해결해줄 것 같이 약속하던 ‘해결사’의 거짓과 위선이 오늘날 진보운동의 위기를 만들었다. 인간의 영혼까지 구제해줄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사이비종교 교주와 같은 허구적인 리더십이 이제 들통나기 시작한 것이다. “뭔가 보여준다”는 교주의 신통력을 기다리다가 지쳐 돌아서는 신도들 앞에서 쩔쩔매는 교주의 상황가 현재 진보운동의 모습이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노동자와 민중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희생하려는 자세보다 대중들의 위에서 군림하며 지배하려는 소영웅주의적 리더십은 결국 보상심리로 나타나고 있다. 오래 전에 민중들을 배신하고 보수정치권에 빌붙어 국회의원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더니, 얼마 전 쌀 개방 비준을 두고는 반대하는 민주노동당 의원들을 제지하는 선봉대에 전노협 출신 지도자들이 앞장서기까지 했다. 아직까지 믿음과 신념을 버리지 않고 진보운동권에 남아 있는 지도자들도 자신의 가슴 한켠에 ‘지도’를 위한 권력추구가 아닌 ‘지배’를 위한, 개인의 ‘출세’를 위한 욕망은 없는지 깊고도 깊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

진보운동의 위기를 불러온 것은 결국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시정하려는 태도보다 현재 차지하고 있는 기득권을 지키고 안주하려는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리더십의 부재현상으로 인해 진보운동이 대안제시 세력에서 밀려나고, 한나라당 지지율이 40%에 육박하는 불행한 사태가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모세’보다 ‘엄마’의 리더십을 원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첫째, 우리 진보운동 지도자들이 진정성을 갖고 대중들을 향해 솔직하게 반성하고 고백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무엇이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 지도적 위치에 있던 이들부터 스스로 반성하고, 아집과 군림하려는 태도가 있었다면 즉시 고치고 대중 속으로 들어가 귀를 열고 들어야 한다. 대중들의 요구와 바램이 무엇이고, 대중들의 불만과 불신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몸으로 부딪히며 신뢰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몇명의 권력추구를 위한 조직이 아니라, 민중중심의 철학을 재건하고 대중중심의 직접민주주의를 확립하는 조직이 되어야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답은 대중들에게 있다.

둘째, 민중들에게 평화롭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확신과 전망을 열어주는 새로운 지도력이 필요하다. “집에 가면 엄마가 있다”는 안도감과 비슷한 성질의 아주 쉽고 희망찬 전망이 제시되어야 한다. 대중은 모세의 기적처럼 홍해가 갈라지는 걸 바라지도 않으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원하지 않는다. 다만 보살핌 받을 수 있고 기댈 수 있는 확신이 드는 전망이 제시되어야 믿고 따를 수가 있는 것이다.

세번째, 지도자들이 솔선수범을 통한 모범을 보여야 한다. 노동자서민들은 평생을 짓밟히고 억압과 착취를 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앞에 선 자의 말 한마디나 행동 하나에서 정말 지도자로서 서려고 하는지 군림하고 지배하려 드는 것인지, 본능과 직관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민중은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데는 서툴지만 싸늘한 느낌만 가지고도 적과 동지를 구분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깜깜한 밤,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대중들은 등불을 들고 길을 밝히는 지도자가 이끄는 방향대로 따른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을 남한테 시키지만 말고 위험을 무릅쓰고 앞장서는 용기와 모범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그럴 때 대중들은 의심하지 않고 따른다는 간단한 원리대로 실천해달라는 바램이다.

우리 진보진영의 지도자들도 알게 모르게 김대중, 김영삼의 리더십을 닮아 가고 있다. 대중 위에 군림하며 개인의 이해관계 관철을 위해서 권력을 남용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소영중주의’ 사고를 버려야만 한다. 그래야 대중들의 신망과 신임을 다시 얻고 리더십을 인정받을 수 있다. 행동은 군림하는 지배자이면서도 스스로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지도자로 착각하기에 진보운동의 지도력이 흔들리는 것이다. 지도자는 모범을 보이고 지배자는 항상 군림하려 든다. 대중들에게 지도자는 존경의 대상이지만 지배자는 타도의 대상일 뿐이다. 지금 대중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 살아 갈 방도를 궁리하며 지켜보고 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