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가 안 된 것은 현장이 아닌 활동가의 자세”

노동사회

“준비가 안 된 것은 현장이 아닌 활동가의 자세”

편집국 0 2,737 2013.05.19 01:19

“위원장님께서 산별노조 전환 총회를 추진한다면 분명히 성공할 것입니다. 그러면 위원장께서는 기업별노조의 역사를 끊고 산별노조 시대를 열은 사람으로 남을 겁니다. 제가 왜 산별노조 전환이 자신 있다고 말하느냐, 그것은 저희 현장조직들이 2003년 당시 현장조직보다 훨씬 미친 듯이 달려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3년도엔 3분의 2 결의에 약 2% 정도가 모자랐지만, 이젠 그 정도야 충분히 넘어서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현재 위원장과 사적으로 나눈 대화 중에 내가 한말로 기억한다.
“토론회에서 조직 대안으로 기업별노조를 끝내고 산별노조로 나가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제가 발제하도록 하겠습니다. 박 동지가 토론회에서 그 이야기를 다시 강조하면 ‘저 인간 또 산별노조 타령이구나’ 이렇게 들릴 수 있으니까요.”
일전 현장 토론회를 준비하면서 이런 ‘애정 어린 충고’를 들었을 때, 나도 산별 만능주의자로 취급되는 것 같아 좀 씁쓸했다. 아무튼 나에게 주어진 주제가 “대공장 조합원들에게 산별노조 전환을 설득하는 데 어려움은 뭔가?”라는 것인데, 이 문제의 즉답은 아주 간단하다. 대공장 기업별노조 지도부나 간부, 활동가들부터 산별노조에 대한 확신에 찬 전망이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본다. 

너무 뻔한 답인가? 그러나 내가 볼 때 “조합원의 정서나 의식에 문제가 있다” 또는 “자본의 방해공작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같은 답변을 ‘어려움’의 원인으로 내세우기는 산별노조 전환에 대한 우리들의 일상 활동이 너무 민망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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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현대자동차노동조합 전현직 위원장들이 모여 불법파견 철폐를 위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 출처 : 현대자동차노동조합 ]

전면 중단된 산별노조 사업

2003년 6월27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에서 기업별노조 15년 역사상 처음으로 산별노조 전환을 위한 조합원 총회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규약이 요구하는 3분의 2 찬성에 약 2%정도의 표가 모자라 산별노조 전환에 실패했다. 

그리고 난 후 2년이 훨씬 지난 지금, 그동안 현자노조 내에서 산별노조 전환을 위한 사업이 있었을까? 만약 있었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떠오르지 않는다. 2003년 11대 임원선거 당시를 돌아봐도 후보들 가운데 한두 명의 후보를 제외하고는 산별노조 추진에 대한 언급조차 없었던 게 현실이었다. 특히 현재 집행을 맡고 있는 민투위 소속의 이상욱 위원장의 공약(정책자료집)을 아무리 살펴봐도 ‘산별노조 전환’과 관련한 뚜렷한 공약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리고 2년 집행기간이 마무리되어 가는 현 시점까지 조합원 대중을 상대로 한 산별노조 사업이 거의 전무한 상태이다. 이는 비단 집행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장조직들이나 활동가들도 그동안 산별노조 사업을 거의 팽개치다시피 한 것은 피차일반이다.

노조운동의 위기, 채용비리, 기업별노조운동의 위기 등이 여론에서 불거지면 토론회 자료집에서나 “기업별노조를 깨고 산별노조로 가자”는 내용을 볼 수 있을 뿐, 현장에서 조합원 대중을 상대로 기업별노조의 한계와 위기를 설명하면서 산별노조라는 대안과 전망을 제시하고 추진하는 활동은 지리멸렬이다. 즉, 2003년 상반기 대의원대회에서 현장조직이 전부 참여하는 ‘산별노조 추진위원회’ 구성을 만장일치로 결정하고, 대대적인 선전과 교육, 집회 등을 통해 산별 전환을 위한 조합원 총회를 한 지 2년이 지나도록 조합원을 상대로 한 산별노조 사업은 전무해 보인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대기업노조 조합원에게 산별전환을 설득하는데 가장 큰 어려움이 뭐냐?”고 묻는다면 답은 뻔한 것 아닐까. 지도부나 간부, 활동가들부터 산별노조 전환을 위한 아무런 일상 사업을 계획하지도, 진행하지도 않으니 조합원의 결의를 이끌어 내기가 어려운 거, 맞죠?

투쟁 통한 산별건설, 떳떳하게 주장할 수 있는가

89년부터 노동조합 활동에 참여한 나의 기억으로는 90년 1월 전노협을 만들 때부터 ‘산별노조 건설’은 노동조합운동의 뚜렷한 목표였다. 당시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현총련에 소속된 그룹노조 총연합 산하였다. 그리고 1995년 민주노총을 결성할 당시 현자노조 집행부 안에서는 상급단체를 어디로 할지를 두고, 현총련이냐, 민주금속이냐, 자총련(자동차연맹)이냐 하는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조합원 투표를 통해서 현총련을 상급단체로 하여 민주노총에 가입하게 된다. 그 후 1998년 현총련이 해산되고 자총련과 민주금속 등이 합쳐져 오늘날 금속연맹이 출범하였다. 그리고 금속노조의 규약제정 과정과 2000년 금속연맹 대의원대회의 산별노조 전환 결의를 거쳐서 2003년 처음으로 조합원 총회에 이르기까지 산별노조 전환과 관련하여 줄기차게 제기된 ‘반대’의 이유들이 있다.

“대산별이 아니라 소산별이다.”
“상층부의 일정 내리박기식의 산별은 안 된다.”
“무늬만 산별은 안 된다.”
“투쟁을 통한 산별이 아니기 때문에 안 된다.”
“상층 관료화와 현장의 공동화로 망하는 길이기 때문에 안 된다.”

금속연맹이 출범한 1998년부터 줄곧 이러한 주장을 해 왔던 조직(정파)들은 다들 8대, 9대, 10대, 11대 집행부를 장악하고 노조 집행을 해왔다. 그러나 10대 집행부(위원장 이헌구)를 제외하고 산별노조 사업을 대중적으로 추진한 흔적은 별로 없다. 

이분들이 현자노조 집행권을 장악하고, 일정 내리박기식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노력한 흔적이나 진정 투쟁을 통한 산별노조 건설 사업을 제대로 추진한 흔적은 찾기 힘들다. 또한 “민주노총이 현자노조의 하부기관이냐”라는 비난이 나올 정도로 권력화(?)된 대공장 기업별노조 지도부의 권력 문제와 현장 조직력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어떤 대안을 제시하거나 스스로 실천에 옮겼는지도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기업별노조 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일정박기식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 계급적 산별노조로 전환해야 한다”며 산별전환 총회를 반대하거나 미온적이었던 그 동지들의 산별노조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어린 눈초리로 볼 수밖에 없다.

지금의 대공장 기업별노조의 현실을 냉정히 살펴보자. 비정규직, 부품사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에 대해서 얼마만큼 연대하고 함께하고 있는가? 대공장 조합원들을 경제적 실리에 가둔 채, 더욱 계급의식을 약화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정규직 조합원의 이해관계에 집착한 나머지 사회적으로, 계급 내적으로 더욱 고립을 자초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러한 자문속에서 현실을 냉정히 짚어보면, “투쟁을 통한 계급적 산별노조”를 누가 감히 떳떳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 싶다. 아니, 말로는 투쟁을 통한 계급적 산별노조를 외치지만 현실은 기업별 종업원 의식을 강화하며 기업별노조의 고립을 자초하고, 그 속에서 기득권을 향유하며 거꾸로 회귀하고 있는 건 아닌가.

위기의식은 있으되 구체적인 대안이 없는…

현자노조에서 정당한 임금인상을 요구하면서 파업투쟁에 나서면 나라가 시끄럽다. “배부른 노동자들의 이기주의”라는 여론몰이가 그것이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 “비정규직 처우개선 해라”고 요구하면 자본측은 이렇게 말한다. “정규직이 그만큼 받으니 좀 양보해서 처우개선 합시다. 정규직은 한푼도 안 내놓고 더 내놓으라고 요구하면 어떻게 저들의 처우개선 합니까?” 이말에 일반 국민들도 고개를 끄덕거리고, 심지어는 비정규직노동자나 중소기업 노동자조차 “그렇다”고 끄덕이고 있는 현실이다.

뿐만 아니다. 부품업체 노동자들은 “현대자동차 정규직노동자가 성과금을 몇 백 프로 챙겼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CR(비용절감)이니, VE(자체절감계획)니 하며 단가인하해서 부품업체 갈취해 가더니 저그들 배 채우는 구나”하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은 여론에서 고립될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내부에서조차 갈수록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자본이 쳐놓은 덫에 걸려서 철저히 갈라지고 있다. 

끔찍한 상상이지만, 지금 현대자동차 자본이 해외공장 생산량으로 수출시장을 대체하면서 국내 생산공장을 대대적으로 축소하겠다며 구조조정(정리해고)을 들이대면 어떻게 될까? 아마 노조는 즉각 파업을 선언할게다. 여론이 노조를 지지할까? 중소기업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는 어떻게 나올까? “한 몇 년 자기 몫 챙기기 바쁘더니 꼴좋다”. 이렇게 팔짱껴 버리면 정말 끝장인 거 아닌가. 나는 이런 상황을 가장 큰 위기 상황이라고 본다. 파업권을 제약하고 사용자 대항권을 높이겠다는 노무현 정권의 로드맵을 필두로 2007년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등 대공장 기업별노조의 총체적 위기가 이미 우리 코앞에 다가와 있음을 우리는 안다. 대의원, 소위원, 활동가, 심지어 조합원 교육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면 심각하게 위기의식을 느낀다. 

그러나 대공장 기업별노조를 이끌어 가는 지도부나 활동가들부터 노조운동, 특히 기업별노조운동의 위기가 다가오는 것은 인정을 하면서도 위기극복의 방안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는 듯싶다.

“우선 사회적 연대를 강화하고, 계급적 단결을 확대 강화하고, 기업단위를 뛰어넘는 사업을 배치하고, 정규직·비정규직·중소기업 노동자들이 공동투쟁으로 나가야 한다.” 뭐 이러한 원론적인 방향성에 대해서는 누구나 하는 이야기 같은데, 좀더 구체적인 방향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대공장 기업별노조 운동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 조직체계를 산별노조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산별노조로 가면 다 해결되냐?”, “지금 금속노조 보니까 우리가 들어간다고 해서 뭐 제대로 되겠나?”, “기업단위 복수노조 말하는데 우리가 산별노조 전환하면 우리 회사 안에는 다른 노조 못 만드나? 만들 수 있다면서….” 이런 의문이 쏟아진다.

위기 진단과 대안 모색이 좀 더 구체적으로 토론되고, 선전되고, 교육되어야 할 것이다. 당장 산별노조 전환을 통해서 현재 기업별노조의 위기국면을 대응하고자 하는 것은 법제도 개악을 통한 노조탄압과 자본의 해외이전에 따른 산업공동화와 이에 따른 고용불안 문제, 비정규직 양산을 통한 노동계급 내의 분절과 저임금노동자 양산 등 기업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산업적 의제에 대응하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 진단을 통해서 문제를 들춰내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산별노조 전환은 이러한 총체적 대안 가운데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매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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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원현장간담회를 실시하고 있는 현대자동차노동조합 - 출처 :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

‘끝장’ 날 수 있는 현자노조?

대기업 노동자들에게 “산별노조로 전환하는 데 걸림돌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막연하지만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답변은 “대기업 노동자가 손해를 본다던데” 이런 대답이다. 이러한 생각의 저변에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마치 상대적으로 높은 대기업 노동자의 임금을 깍아서 ‘하향평준화’ 하는 것 아니냐, 혹은 대기업 노동자들이 중소기업 노동자들을 지원하느라 천만 날 투쟁에 동원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 하는 식의 막연한 불안감이 깔려 있다. 한마디로 대기업 노동자들은 산별노조로 가면 “천만 날 돈 대주고, 몸 대주는 역할을 떠맡아야 된다”는 논리를 자본이나 기회주의 세력들이 퍼뜨려 왔고 여기에 쉽게 빠지는 것이다.

조합원들의 막연한 불안감을 극복할 수 있는 사업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라고 본다. 산별노조로 가면 손해라는 잘못된 사고방식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산별노조 운영의 원칙을 제대로 설명하고, 현재 기업별노조의 한계를 정확히 설명하고, 앞으로 만들어 나갈 산별을 위한 사업을 통해서 조합원들에게 새로운 전망을 제시할 수 있다면, 조합원 대중들은 충분히 동의할 것이라 확신한다.

특히 2007년 기업단위 복수노조가 허용된 마당에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 기업별노조로 머문다면 중간급 관리자와 초급 관리자들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리라는 것은 십게 예상되는 문제다. 기회주의 세력들이 이에 가세해 버리면 기업내 최대 규모 노조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관리직 중심 노조가 교섭권을 독점할 것이고, 소수로 전락한 민주노조 진영은 교섭권조차 박탈당한 채, 현대자동차 민주노조운동은 송두리째 무너질 것이다. 여기다가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까지 밀려온다면 민주노조 운동이 설자리가 있겠는가. 

당장 대기업 노동조합이 사회적으로나 계급 내적으로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상황까지 이 상태로 맞이한다면, 현대자동차 내부의 민주노조운동은 끝장난다는 것을 대부분의 활동가들은 어느 정도 직시하고 있다.

자각된 대오부터 실천하고 준비하자

12월이면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12대 임원 선거가 열린다. 이번 임원 선거에서는 현자노조가 처한 위기상황과 다가오는 기업단위 복수노조문제에 대한 올바른 대책을 모든 후보들이 쏟아낼 것이다. 그런데 어떤 후보가 “현대자동차 기업별노조의 깃발을 끝까지 움켜쥐고 해결해 나가겠다”고 ‘용감하게’ 주장할 수 있겠는가?

금속연맹 대의원대회에서 결의된 산별노조 전환, 민주노총에서 추진하는 2006년 상반기 산별노조 전환이라는 대의를 바탕으로, 현자노조의 산별노조 전환 결의는 12월 임원 선거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제시될 것이라고 본다.

다만, 산별노조 전환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검토해서 조합원들이나 일반 활동가들이 궁금해하는 의문 -노조운동의 위기를 타파하고, 계급적 산별운동을 이끌어나갈 금속노조 지도력이 가능한가-에 대해서 명쾌하게 답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지도부와 선진 활동가들의 과제로 남는다. 

지금부터 12대 임원선거, 2006년 상반기까지 지도부나 활동가 동지들부터 솔선해서 산별노조 사업을 대중적으로 힘있게 추진하면서 조합원들을 설득하고 뭉치게 할 수 있다면,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18년의 기업별노조시대를 끝내고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 철의 노동자가 하나되는 진정한 계급적 산별노조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충분히 그리되리라 믿는다. 자각된 대오부터 실천하는 것만이 길을 만드는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