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화 조짐 보이는 사회포럼, 문제는 ‘정치’다

노동사회

관성화 조짐 보이는 사회포럼, 문제는 ‘정치’다

편집국 0 3,142 2013.05.17 08:51

2003년 1월 환희와 기대 속에서 집권한 룰라에 대해서 지난 2년 동안 국내에서 접할 수 있었던 소식들은 그리 좋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긴축정책과 공무원연금 개혁, 지체된 토지분배 등의 부정적인 보도들은 우리나라 언론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었고, 노무현에게 보수 언론들이 훈계를 할 때 동원되는 것도 룰라였다 보니, 인용의 부당함을 떠나서 여러 가지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룰라 정부가 기존 지지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은 국내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서도 전달받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전통 지지층이 그의 집권 2년을 어떻게 평가하고 노동자당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2005년 제5차 세계사회포럼으로 향하는 많은 참석자들의 공통된 관심사였을 것이다. 

jbbea_01.jpg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룰라’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와 같이 브라질의 진보진영은 룰라 정부와 노동자당에 대한 입장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과 정치적 투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개막 행진에서부터 10년 전에 노동자당에서 출당을 당한 통합사회주의노동자당(PSTU)와 작년에 출당을 당한 이들이 주축이 된 뻬솔(PSol, 사회주의와 자유당)은 대규모 집회를 조직했다. 이 집회에서는 “배신자”, “룰라는 신자유주의”, “룰라, 부자들이랑 노니까 좋은가?” 등 룰라를 향한 노골적 비난조 구호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행진 대열 내에서도 노동자당 지지자들과 뻬솔 당원들 사이에 야유가 오고갔으며, 일반 시민들과 뻬솔 당원들 사이의 격한 논쟁도 즉석에서 벌어지는 것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특히 뻬솔은 창당 이후 첫 국제적인 행사인 만큼, 당원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린 듯, 1000여명의 당원들이 집회에 참석했다. 2003년에 같은 행사의 개막 행진에서 사회변화에 대한 기대에 충만하여 노동자당원이 아닌 활동가들도 룰라에게 다양한 요구들을 건설적으로 촉구했던 것과는 달리, 올해에는 룰라와 명확하게 선을 긋고 그를 비판하는 대오의 규모가 상당했던 것이다.

개막 행진 때에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노동자당의 고참 당원 백여 명은 세계사회포럼 기간 동안 룰라 정부의 성격에 대한 논쟁과 함께 진지하게 집단 탈당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고 한다. 이들 중에는 노동자당 내의 지도자급 및 유명 인사들도 여럿 있었다고 하는데, 이 소식을 듣고서야 비로소 의문점 중에 하나가 풀렸다. 즉, 작년의 출당 파동으로 나타난 행정부에 대한 반발이 당내 일부 세력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룰라 정권의 행보에 대한 문제의식이 노동자당 내에도 비교적 폭넓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당을 지탱했던 두 축,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내부에서도 룰라 정부에 대한 불만이 만만치 않았다. 공무원 연금 삭감의 타격을 받은 공공부문 노조는 지금도 정부와의 관계가 껄끄러운 상태였고, 땅 없는 자들의 운동(MST)에서도 2년 전보다는 룰라 정부에 대해서 훨씬 비판적인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고 농민 프로그램에 참석했던 한국의 한 참가자에게 듣기도 했다. 

활동가들의 ‘야유’와 50% 국민의 지지 

많은 관심을 모았던 룰라와 차베스의 연설(같은 날 한 것이 아니라 같은 장소에서 이틀 동안 따로) 때에도 비슷한 현상들이 나타났다. 룰라는 2년 전과 마찬가지로 스위스 다보스에서 비슷한 기간 동안에 열리는 세계경제포럼으로 출국하기 직전에 사회포럼에서 연설을 했다. 

차이가 있다면 2년 전에는 포르또 알레그레의 메시지를 다보스에 전달하고, 경제포럼과 사회포럼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겠다던 룰라의 포부에 대해서 대중들이 환호로 답했던 반면, 올해에는 반응이 훨씬 더 냉담했다는 것이다. 연설 중 객석에서 간간이 야유가 터져 나왔다는 것은 이미 여러 언론을 통해서 보도된 바 있다(이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도 벌어져 몇몇이 구속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연설장이었던 히간진요(Gigantinho) 밖에서는 노동자당 탈당파들이 회의와 집회를 조직했고, 안에서도 PSTU와 PSol 등의 당원들이 들어와 룰라 연설 중에 ‘조직적으로’ 야유를 보내기도 했었다(룰라는 연설 중에 이들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을 하며 그들을 “노동자당의 자식들“이라고 부르며 ‘애정’을 표하기도 했다). 조직된 반대파가 아니라 ‘일반’ 참가자들 중에 얼마나 이들에게 동조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지만 말이다.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우고 차베스가 포럼을 찾았을 때에도 일부 참석자들은 연사로 참석했던 노동자당 인사들, 혹은 친노동자당 인사들에 대해서 때로는 심한 야유를 보냈다. 쿠찌(CUT, 브라질 노총) 위원장에 대한 불신이 특히 심하다는 사실이 외부인으로서는 놀라웠는데, 정부의 몇몇 정책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추종했다는 인식이 포럼 참석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고, 옆에 앉았던 브라질 사람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어용’이라는 비난도 곳곳에서 들린다. 비난하는 이들은 ‘페레고(Pelego)’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말과 안장 사이에 놓는 담요를 일으킨다. 노동자계급(말)을 통제하는데 동원된다는 의미이다. 노동자들을 이해관계를 자주적으로 대변해야 하는 노동조합 조직이 조합원들의 이해가 아닌 정부의 이해에 따라 움직인다는 비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룰라 정부와 노동자당에게 모든 진보적 인사들이 등을 돌린 것이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브라질 사회 전체를 세계사회포럼에 모인 사회운동 활동가들만의 평가로 대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룰라의 지지도는 여전히 50%를 넘고 있고, 결정적 실수가 없는 한 재선은 무난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대중적 지지뿐만이 아니라 당내 좌파 세력들의 주장도 아직까지 주류는 당내에서 잔류하면서 당과 행정부에 미치는 영향력을 확대하고 궁극적으로는 ‘당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민주적 사회주의’를 주창하며 비교조적, 민주적 좌익 대중 정당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고자 했던 사회주의자들은 당내 투쟁을 아직까지 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대외정책과 몇몇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당과 룰라 행정부의 우경화로 인해서 점차 진보진영의 상당부분이 기대가 룰라에게서 노동자당 내 좌파의 입장과 활동에 대한 기대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앞으로 무언가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민중들이 노동자당에 대한 기대 자체를 접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내년 브라질에서 예정되어 있는 총선과 대선 과정이 더욱 주목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중남미에 부는 좌파정부들의 새바람

현지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없다가 국내에 돌아와 그간 사회포럼에 대한 국내외의 보도를 검색하다보니 조금은 당황스러운 제목의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룰라 사회포럼에서 야유 받아’, ‘룰라에 실망한 지지자들 차베스에 열광’ ‘우고 차베스 슈퍼스타’ 등의 제목인데, 주로 초점을 룰라를 실패한 좌익 정치인으로, 그리고 차베스를 남미 좌파의 새로운 희망으로 대조해서 서술하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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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모인 청중들   - 출처: 프레시안 ]

언론의 가벼움이야 국내 보도에서도 익숙하지만, 이러한 단순 대비는 과장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부당한 측면도 존재한다. 물론 차베스가 토지개혁을 강하게 추진하고 있고 빈민지원 기금을 대폭 확대하는 과감한 행보를 보이고 있어 일각에서는 호감을 사고 있다. 하지만, 고유가 시대에 산유국으로서 어마어마한 양의 외화를 지속적으로 국가재산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국가, 그리고 그러한 국가에서 의회와 지방자치에서 다수석을 확보하고 있는 정당의 일원인 차베스와, 국가재정의 반이 넘는 외채를 이전 정부로부터 이어받았으며 원내 1당이긴 하지만 전체 의석수의 30%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어 9개 당과 연정을 꾸리고 있는 룰라 정부 사이의 단순 비교는 무리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무엇이 브라질 국내에서 사회주의적 개혁의 원동력으로서, 혹은 그것의 제약 조건으로서 작용하는지에 대한 엄밀한 분석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번 사회포럼에서는 또한 최근 ‘확대 전선’의 당선에 힘입어 우루과이 측 참가단이 눈에 많이 띄었다. 또 볼리비아의 좌파 지도자 에바 모랄레스가 참석하기도 했다. 국내 상황이야 모두들 복잡하겠지만, 어쨌든 한국인인 내가 보기에 남미의 좌파들은 요즘 행복하다. 1980년대의 ‘잃어버린 10년’과 1990년대의 경제 위기와 함께 폭발적으로 성장한 사회운동의 성과는 최근 곳곳의 좌파 정권 수립으로 이어지고 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우루과이 등에서 줄줄이 집권했을 뿐만 아니라 높은 지지도를 유지하고 있다. 볼리비아에서도 곧 좌파 정권이 탄생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민중친화적인 정부들이 줄줄이 집권하고 있다는 것 자체도 긍정적이지만, 비교 대상이 생기고 서로에게 협력의 대상인 동시에 자극이 될 수 있는 상대가 지역 내에서 여럿 존재한다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수확이 아닐까 싶다. 차베스의 토지개혁 및 사회복지 프로그램으로 인해서 룰라가 국내에서 더욱 많은 압력을 받게 되고, 역으로는 룰라의 대외정책 때문에 차베스나 우루과이의 정부가 미국에 비판적인 대외정책을 밀고 나갈 수 있듯이, 상호 상승 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실질적이고 장기적인 성과로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소통의 장 넘어 정치 방향성 제시 필요

명목상으로 정당 배제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사회포럼에 다녀와서 지나치게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역대 최고의 규모(15만 명 참가, 2000개가 넘는 워크샵과 세미나)와 브라질 정부의 적극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올해 포럼을 지켜보며 힘이 많이 빠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화와 소통의 장으로서 출범한지 5년, 반세계화 운동의 폭발적인 성장에 힘입은 초기의 신선함과 역동성은 사라지고 어느 정도 관성화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모든 진보 세력들에게 열린 공간, 소통과 논쟁의 장으로서의 포럼 자체도 운동의 소중한 성과이지만 이라크 침공 직전 폭발적인 반전 운동을 조직하는데 포럼이 수행한 역할을 떠올린다면 지금 수준에서 더 의미 있는 공간으로 성장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새로운 활력을 위해 포럼 자체의 방향성을 확보하고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견이 작년부터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참여의 폭을 줄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반대도 만만치 않아 당분간 포럼의 성격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포럼의 방향성과 대중성, 다시 문제는 ‘정치’인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9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