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여성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

노동사회

아시아 여성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

편집국 0 4,978 2013.05.17 10:30

아시아여성위원회(Committee for Asian Women, CAW)는 아시아에서 여성문제만을 중심에 두고 활동하는 유일한 국제 조직이다. 1977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국제회의를 출발점으로 하는 이 조직은 현재 태국 방콕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아시아여성위원회 탄생의 역사적 배경은 1960~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아시아 국가들, 특히 동아시아 각국 정부는 경쟁적으로 산업화를 정책 목표로 삼았다. 1970년대 한국, 홍콩, 대만과 싱가포르의 전자, 의류 산업의 노동조건은 열악했고, 영국 식민지 하에 있던 홍콩을 제외하고는 모두 독재 정부의 그늘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주목한 가톨릭교회는 비밀리에 각국 활동가들과 접촉한 끝에 1977년 최초의 아시아 여성 노동자들의 회의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말레이시아, 대만,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활동가들은 여기에 참여하지 못하였는데, 이들 정부들이 비자 발급을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비밀리에 진행되었던 이 회의에서 필리핀, 일본, 태국,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참가자들은 여성 노동자들의 상황을 바꾸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결정하였고, 마침내 1979년 여성노동 문제 전담 데스크를 설치하였다. 이 회의가 1981년 CAW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 중반에는 기독교를 넘어 보다 다양한 종교 조직의 여성들과 접촉면을 넓히고, 보다 젠더 이슈에 중심을 두기 위해 교회 조직으로부터 독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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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W ]

아시아여성위원회(CAW)의 탄생

CAW는 현장의 변화를 주도하면서도 현장의 변화에 따라 활동 영역을 확장하면서 아시아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해 왔다. 현실은 늘 CAW의 준거점이기도 하고 출발점이기도 하다. CAW가 여성 노동 문제에 집중하고 있지만 그 명칭에 노동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설립 당시의 현실 때문이었다. 아시아 각국 독재 정권의 불필요한 관심을 받지 않기 위해 그 명칭에 노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의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집약적 수출 산업이 주도하는 산업 구조에서 값싸고 유순한 노동력으로 대거 노동시장에 진출했지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여성 노동문제를 전문으로 하는 조직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1980년대의 CAW는 각 나라 여성 노동단체들 사이에 연계를 만들어 연대의 기반을 조성하고, 노동운동과 노조조직 내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문제를 보다 이슈화 하고자 힘을 쏟았다. 다른 한편으로 CAW는 여성 노동자들의 여성 의식을 강화하고, 여성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이 연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많은 여성 활동가들이 결혼 이후 집과 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당하면서 노동시장에서 그리고 노동운동에서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산업구조조정이라는 이름 하에 행해진 아시아 국가 간 자본의 이동, 특히 동아시아로부터 동남아시아로의 공장 이전은 여성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노동시장에서 내몰리고 있는 동아시아 여성 노동자들과 보다 값싼 노동력을 찾아 이주한 외국자본에 의해 형성된 저임금 시장으로 진입하는 동남아시아 여성 노동자들의 상황이 교차하게 된 것이다.  CAW의 중점 사업도 이런 도전에 맞서, 조사연구를 통한 상황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와 여성 노동자들의 지도력 형성 지원으로 전환되었다. 어떻게 여성이 노동운동 내에서 리더십을 형성하고, 여성들의 조직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조직하고 자료들을 출간하였다. 일례로, 여성 노동자들과 조직가들 사이의 국가를 넘어선 교류 프로그램을 조직하였는데,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현장 여성 노동자들과 활동가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나누고 그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전략들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교류 프로그램에 참석했던 한 인도네시아 여성 노동자가 한국의 활동가에게 했던 질문은 지금까지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당신들은 일자리를 빼앗긴 것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지 않나요?” 

세계화와 여성 노동자

90년대 중반 이후 CAW는 세계화가 산업 구조, 노동 패턴 그리고 여성 노동자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보다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벌였다. 노동의 비공식화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비공식 노동자의 조직 경험을 중심으로 한 교류 프로그램 조직, 산업구조조정과 세계화가 아시아 여성 노동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필름 제작, 산업구조조정이 여성 노동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연구 보고서 제작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90년대 말 아시아의 경제 위기는 여성 노동자들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거나 협상력을 약화시켰고, 2000년대 들어 여성 노동자들의 주변화와 비공식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기존의 고용 패턴이 아닌 다양한 형태의 고용 관계가 생겨나는 한편, 가내 노동, 하청, 노점상 등 전통적 형태의 비공식 경제 부문 역시 줄어들지 않고 있다. 또한 법적, 제도적 보호는 한층 열악해지는 상황이다. 그 구체적인 양태는 아시아 내에서 지역별로 다르게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과 일본, 홍콩, 대만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임시직, 파견직, 하청, 파트타임 등으로 구분되는 고용의 비정규직화, 정규 고용의 비공식화 경향이 강하게 드러나며,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의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고용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전통적인 비공식 영역의 존재와 더불어 노동의 외부화, 하청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고,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등의 남아시아 지역과 캄보디아, 베트남 등의 메콩강 지역에서는 의류, 섬유 산업을 기반으로 했던 산업 구조 전체가 섬유 쿼터제의 종결로 인해 그 기반부터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다. 

고용 관계 변화와 산업 구조 변화의 일차적인 희생양은 여성 노동자들이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언제나 비정규 노동 시장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남아시아와 메콩 지역에서는 대규모의 실직에 직면하고 있다. 이와 함께 냉전 체제의 종식은 각 지역별 분쟁을 표면화시켰고, 이러한 분쟁들은 여성 노동자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어, 스리랑카 내의 오랜 종교적, 인종적 분쟁으로 인해 타밀 지역에 거주하는 여성들은 그 지역을 벗어나 일자리를 찾을 길이 없다. 이는 여성들이 공식 경제로 진입하는데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아시아 여성 노동운동의 과제들

이러한 현실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계속 되고 있다. 법제도를 개선하고, 정부 정책을 바꾸고자 노력하는 한편,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현재 CAW의 주요 활동은 법제도 개선과 조직화 지원이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집중되고 있다. 캠페인 등을 통해 각국 여성 노동 조직들과 노조의 법제도 개선 노력과 현실 적용 활동을 지원하고 있으며, 새로운 고용 형태와 조직 영역에서의 조직화 노력들을 지원하고자 한다.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중국, 홍콩, 한국, 일본 등이 참여한 최저임금 캠페인은 최저임금 문제가 일국의 문제가 아닌 아시아 전체 노동자들이 겪는 공통의 문제라는 인식을 넓히는데 기여하였다. 새로이 등장한 다양한 고용 상태의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하고자 하는 시도들도 현장에서 계속 되고 있다. 이러한 경험들을 모으고 분석하며, 현장 활동가들에게 그 정보를 제공하는 일은 CAW의 중요한 활동 중 하나이다. 홍콩의 청소 하청 노동자 조직화의 경험, 인도네시아의 지역 노조 운동의 경험, 인도의 가사서비스 노동자 조직화의 경험, 한국의 여성 노조의 경험 등은 현재 CAW에서 연구를 진행 중이거나 진행 예정인 주제들이다. 

또한 분쟁 지역의 여성 노동자들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무장 분쟁 지역 문제는 현재까지 인권 혹은 여성의 관점에서는 많이 제기되었으나, 노동권 특히 여성 노동권이라는 측면의 접근은 전무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무장 분쟁 지역은 아니더라도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는 지역의 문제 역시 주요한 주제이다. 지난 2월 네팔에서는 국왕이 비상령을 선포하여 의회를 해산하고 스스로 내각의 수반이 되는 쿠데타가 있었다. 그간의 경험은 민주주의가 없이는 인권도, 노동권도, 여성 노동권도 없다는 것을 말해 주기에 충분했다. CAW는 네팔에 대해 외부적인 압력을 넣기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CAW에서 일을 하고 있는 나의 고민은 한 사람의 활동가로서 어떻게 하면 보다 현장에 가까이 갈 것인가, 내가 만들고 기획하는 프로그램들이 어떻게 하면 현장 활동가들에게 좀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인가이다. 소위 국제 조직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인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자신들만의 이야기판을 만들지 않기 위해, 더 많이 만나고 많이 듣고, 열린 마음을 가질 것을 언제나 스스로 다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조직적으로는 지역별로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현실과 이에 기반해서 어떻게 구체적인 연대를 형성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비정규 노동 관련 법의 개악 저지 투쟁을 하고 있는 한국 노동자의 상황과 상시 업무에는 계약직을 고용할 수 없도록 명시하고 있지만 현실 적용에 문제가 있는 스리랑카 노동자가 제기하는 문제는 다를 수밖에 없다. 서로가 처한 현실이 다르지만, 국제 연대를 통해 아시아 여성 노동자들이 같이 갈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실질적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또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나타나는 일련의 경제 통합 과정은 일국 내의 격차와 함께 국가 간 격차를 크게 벌리고 있으며, 자유무역협정은 민중들을 배제한 채 속도를 더해가고 있다. 이러한 거시적 변화들은 여성 노동자들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출발점은 언제나 현실이어야 한다. 거대 담론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의 큰 벽 앞에서 절망하지도 않고, 현실에서 한 걸음씩 나갈 수 있는 전략들을 모색하는 것 역시 현재의 고민 지점이다. 

한국의 국제연대 운동에게 주는 조언

외국에 있다보면 한국이 내부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위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생각하는 한국은 ‘잘 사는’경제 선진국이고,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활발한 나라이다. 특히 한국의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에 대한 관심과 기대는 상상 이상이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 내에서 국제연대에 대한 관심들도 생겨나고 있고, 모임들도 생겨나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아시아를 휘젓고 다니면서 노조 탄압, 폭력 행사, 임금 체불, 야반도주 등 온갖 부당노동행위로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한국계 자본을 생각할 때 국내의 이러한 움직임들의 활성화는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 한편에는 우려도 없지 않은데, 우연히 듣게 된 ‘운동 수출’이라는 단어는 그러한 우려를 구체화시켰다. 이 단어가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섣부른 비판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는 상호 이해보다는 ‘일방적’이라는 것이다. 연대는 상호적이어야 한다. 수출이 아니라 교류여야 한다. 교류에 기반한 이해가 없는 ‘수출’은 이식이며, 그렇게 이식된 운동은 새로운 땅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또한 국제연대를 말할 때, 우리 내면에 우월감은 없는 지도 확인해 보아야 한다. 거칠게 말해서 운동의 선진국인 한국이 후진국인 다른 나라를 한 수 가르치겠다는 심리는 없는 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6월에는 한국에 잠시 갔다가 빈민 운동에 관심이 많은 활동가 한 사람과 모 빈민운동 단체를 방문하게 되었다. 단체의 대표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활동 내용을 소개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인도의 운동 상황이 우리나라의 80년대 중반일 것이라는 자신의 짐작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마지못해 내가 “길을 낼 때 지역 주민의 반대에 부딪히면 한국 정부는 정면 돌파하지만, 인도 정부는 길을 돌아 낸다. 인도와 한국의 사회, 정치적인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단순 비교하기 어렵다”고 한마디 할 때까지 그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처한 현실이 어렵고 더디 가더라도 모든 나라의 운동은 자신이 처한 조건과 역사, 그리고 맥락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왔다. 이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기반하지 않을 때, 국제 연대라는 허울을 쓴 또 다른 제국주의가 되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