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60년 노동사회에 남겨진 숙제

노동사회

해방 60년 노동사회에 남겨진 숙제

편집국 0 3,031 2013.05.19 12:58

올해 8월15일은 민족해방 60년이 되는 날이었다. 서울에서는 남과 북, 해외의 동포가 어우러져 ‘자주 평화통일을 위한 8·15 민족대축전’이 열렸다. 그것은 화해와 공존을 진전시키고 통일의 내일로 다가가기 위한 잔치마당이었다. 많은 행사들을 치르는 동안 민족화합의 열기가 곳곳에 가득하였다. 무엇보다 북쪽 대표단이 남한의 국립 현충원을 찾아 묵념을 올린 모습은 충격과 감동을 던져주었다. 서로 총부리를 겨눴던 분단의 장벽을 허물고 참된 화해를 향해 가는 징검다리가 될 수도 있고 통일을 향한 한차원 높은 출발점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정부 당국자가 말한 대로 “화해로 가는 하나의 역사적 전기”, “남북이 민족의 역사를 공유하기 시작한 것”, “새로운 미래로 가자는 충정과 결단” 등등 아무리 그 뜻을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일이다. 

냉전 보수 기득권 세력들의 시기와 의심에 가득 찬 생떼 때문에 불안하기는 했지만 통일을 향한 민족의 열망은 이를 누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번 광복 60년은 갑자(甲子)의 주기순환이 뜻한 대로, 거듭나는 새로움의 의미를 되새기는 때로 기록될 것이다. 

나라경제는 커지고 절차민주주의는 발전했는데

60년 전 해방의 시작은 민족 자주 독립을 향한 환희의 열정이었다. 그러나 곧 비운의 먹구름이 몰아쳐 왔다. 남북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갈라져 남한에는 일제 대신 미군이 들어왔고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였다. 3년이 지나 남북에는 각기 정부가 들어섰으나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상대” 관계에 서게 됐고 민족의 장래는 이들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엇갈리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8·15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벗어난 날이기는 하지만 목숨을 건 치열한 민족해방투쟁에서 꿈꾸었던 신천지는 아니었다. 환희는 짧고 비극은 길었던 것이다.  

외세에 의한 분단은 남한에 지독한 반공주의와 독재정치를 가져왔고 그것은 친일 반민족세력을 지배자로 다시 안착시키는 결과로 귀결되었다. 반공은 일제와 미국 지배자 둘 다 지향하는 이념 목표이었고 공산주의자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이승만 정권에게는 친일파 등용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친일청산이 실패로 끝난 것은 반공을 생명처럼 여기는 세력이 권력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 민족자주와 계급해방을 시도했던 민중의 저항투쟁이 참담하게 패배한 상황에서는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후 이 나라에서는 청산대상인 친일세력이 모든 기득권을 쥐었고 민족자주와 참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세력은 반세기를 음지에 갇혀 지내며 소외와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친일파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교 교과서에 독립운동가, 민주지도인사로 추앙되기도 하였다.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가 자생할 토양은 애당초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로부터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지는 독재정치의 사슬은 갈수록 잔혹함을 더하면서 형식민주주의와 절차민주주의마저 철저하게 희롱하였고, 이 나라 민중은 반세기를 무권리상태에서 통치의 대상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특히 군사정권은 30여년을 폭력으로 자유민주주의의 틀마저 무시해버렸다. 권력자들은 친일 지주계급으로부터 시작되는 특권계급들에게 경제적 특혜를 주고 부의 독점과 지배권력의 유지 강화라는 공생관계를 확대 재생산해 왔고, 민중들에게는 빈곤의 세습을 운명처럼 강요하였다.  

그러나 오랜 세월 남한의 민중들은 좌절하지 않고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민중들은 극악한 탄압에 맞서 끊임없이 권력에 저항하며 민주화와 자주통일을 추진하였다. 권력의 탄압이 가중되면 움츠러들기도 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끈질기게 저항의 불길은 다시 치솟았다. 민주화로부터 변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지배권력을 위협하였고 거대한 외세의 방해를 무릅쓰고 분단의 벽을 허물어 내면서 민족통일의 꿈을 일구었다. 마침내 정치적으로는 친미 경찰독재, 군부독재의 권위주의 정권이 꼬리를 내리고 절차 민주주의가 크게 신장되었고 남북 민족 사이에는 2000년 6·15 공동선언을 통해 민족화합과 통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게 되었다. ‘북핵’을 빙자하여 한반도를 불바다로 만들려는 미국의 음모가 끊임없이 출몰하였지만 북한의 자주외교역량과 남한 민중들의 결연한 대응으로  전쟁 위기를 그런 대로 넘겨왔다.

또한 자원도 자본도 변변치 않은 조건에서 남한의 민중들은 그야말로 개미처럼 땀을 흘려 일하여 한국을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 키워 놓았다. 일한 성과는 고스란히 한줌도 안 되는 독점자본에게 돌아갔고 그들이 나라살림을 좌지우지하는 재벌공화국이 되어 있지만 나라살림을 이만큼 성장시킨 우리 민중들의 저력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모자란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몇 세기에 걸쳐 이루어 놓은 일들을 100년도 안된 사이에 우리는 이루어 낸 것이다.

아직 국가보안법 같은 비민주적 반민족적 악법이 엄존해 있고 권위주의 기득권세력이 완강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다. 또 일제 식민지배가 조국근대화의 출발점이라고 강변하는 배운 자들의 큰 소리가 곳곳에서 홰를 치고, 이른바 ‘박정희 신드롬’이 젊은이들의 환각을 지배하면서 망국적인 지역패권의 악령이 정치를 멍들게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차피 냉전 수구세력의 몰락은 피할 수 없는 추세이고 낡은 것은 새로운 것으로 대치되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그리고 우리 민중들은 새로운 상황변화에 대응하여 불굴의 의지와 집념으로 역사의 가르침을 실천해 갈 것이다. 

변혁을 거세당한 노동운동 40년의 질곡을 넘어

해방 60년의 변화는 곧 노동의 변화과정이다. 노동은 삶 그 자체이자 이 사회 변동의 중심 축이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 그 시작에서부터 노동운동은 변혁을 지향하였다. 해방 후 노동자들은 일제가 남기고 간 산업의 폐허와 배고픔을 딛고 민족자주와 노동해방을 시도했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는 그 의지의 집약이었다. 전국 노동자의 대부분을 망라한 조합원 55만명이 이를 말해주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열망은 미국의 냉전 분단전략과 미군정의 잔혹한 탄압으로 좌절되고 변혁의 꿈은 철저하게 거세되었다. 그리고 ‘노동’이란 말조차 쓰기 어려울 만큼 노동운동은 금기의 대상이었다. 노동조합의 자주성과 민주성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고 오로지 자유당 독재권력을 유지,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인정되었다. 1950년대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권익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권력의 비호를 받은 자본의 무자비한 보복이 이어질 뿐이었고 1960년 4월 혁명 후 새로운 노동운동의 모색도 1961년 5월16일 미명에 총칼로 무장한 군인들의 쿠데타에 의해 처참하게 단절되고 말았다. 

다카기 마사오라는 이름의 일제 장교 출신 박정희와 그 추종자들이 지배한 제3공화국 정권은 국가안보와 근대화라는 미명 하에 국민들에게 기본권 포기와 철저한 순종을 강요했다. 노동운동의 제약과 억압은 그 핵심이었다. 군사정권은 노동조합 해산에 이은 노조 재편성과 통제 위주의 노동법 개정을 통해 노조를 경제성장을 위한 산업역군으로 동원하였다. 기존 노동조합에게는 복수노조 금지라는 달콤한 미끼와 더불어 정치활동 금지와 반공주의 경제주의 이념이 강제되었다. 이로부터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구조가 정착되고 노동기본권은 형해화되었으며 그 기반 위에서 ‘선성장 후분배’의 개발 신화가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되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으로 표출된 1970년대 노동자계급의 울분과 요구는 필연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국가보위법과 유신헌법, 긴급조치를 통해 형식적으로 주어지던 노동기본권마저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렸다. 일은 시키는 대로 품삯은 주는 대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자본의 황금시대에 노동자들은 민주노조 결성과 처절한 투쟁을 통해 스스로의 주장을 펼쳐 나갔고 종교계, 지식인들과 결합하면서 민주화운동, 반유신운동으로 그 지형을 넓혀 갔다. 갈수록 노사, 노정간 모순 대립은 첨예화됐고 그 모순은 YH무역 노동자들의 투쟁과 박정희의 피살 그리고 1980년 봄의 폭발적인 노동투쟁을 통해 지배권력을 위기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런 속에서 벌어진 전두환 신군부 정권의 쿠데타는 지배계급이 지닌 위기감의 표출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시대를 능가하는 극단의 폭력조치로 노동자들을 때려잡았다. 노동조합 정화조치, 강제연행, 고문, 구속, 삼청교육 등을 통해 민주노조 간부들을 몰아낸 뒤 민주노조를 송두리째 파괴하였다. 그리고 노동법을 전면 개악하여 노동운동의 숨통을 눌러버렸다. 기업별노조의 강제, 노동쟁의 무력화, 제3자 개입금지 등이 그 대표적인 예들이었고 이를 통해 나라 안팎의 독점자본을 위기로부터 구출해냈다.  

1980년대 초반 노동운동은 질식상태에 빠졌지만 그렇다고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방향에서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권력이 강제한 경제적 조합주의를 젖히고 사회변혁의 관점에 선 노동운동이 광범하게 모색되었고 수많은 지식인들이 노동현장에 들어가 사상적 금단의 벽을 허물어 내렸다. 현장 노동자들의 투쟁은 날로 격해졌으며 급진적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었다. 비록 현실적인 두드러진 큰 성과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노동운동이 사회변혁과 민주화운동의 핵심의제가 됐음을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깊고 깊은 양극화의 골 멀고 먼 실질민주주의의 길

1987년 여름 노동자 대투쟁은 이런 변화 속에서 폭발하였다. 노동자들은 1987년 6월29일 전두환 정권의 항복선언 직후 생겨난 정치적 정적을 일시에 깨뜨리고 격동의 전면에 돌출하였다. 노동자들의 분노의 함성이 노도와 같이 전국을 휩쓸면서 감격의 환호성으로 바뀌어갔다. 노동조합은 노동해방의 깃발을 내걸고 대중의 민주적 결정에 바탕을 둔 강한 단결력으로 요구를 관철시켰다. 임금인상과 노동조건의 개선이 대폭적으로 이루어졌다. 노동소득 분배율은 1987년 53.0%에서 줄곧 상승하여 1996년에는 63.4%로 정점에 올랐다. 노동조합 조직률도 1989년 20%에 육박할 만큼 급격하게 신장하였고, 그 이후 줄곧 하향곡선을 그렸지만 경제와 권력의 핵심지대인 대기업과 공기업에서는 여전히 노동조합이 완강하게 버티며 그 위력을 유지하였다.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직장의 군대식 권위주의를 무력화시키고 노동조합에게 현장의 권력을 쥐어주었다. 또한 노동자들은 “악법은 어겨서 깬다”는 다짐처럼 수많은 구속자, 수배자, 해고자를 낳으면서 반노동자적 법체계와 제도에 감연히 도전하였다. 인류 보편의 가치인 노동기본권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오랫동안 우리 역사가 정치민주주의와 절차민주주의를 확보하기 위해 피 눈물을 흘려왔듯이 노동자들 또한 노동기본권과 정당한 노동력의 대가를 쟁취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노동자에게 있어 노동기본권 쟁취는 단순한 절차상의 문제를 넘어 실질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핵심고리였다. 그 결과 아직 직권중재나 긴급조정과 같은 독소조항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노동기본권은 크게 신장되었고 노동자들은 비로소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90년대 말 노동운동은 실질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경로로서 사회개혁을 당면과제로 제기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97년 말 엄습한 외환위기는 노동자들의 피땀어린 성과들을 일거에 물거품으로 만들면서 노동운동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권력과 자본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희생과 양보를 강요하였다. 김대중 정부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론을 내세우고 노무현 정부가 사회통합적 노동정책을 천명하지만 무한경쟁과 시장주의에 밀려났고 노동은 전례 없는 위기에 봉착하였다. 노동시장은 ‘고용의 수량적 유연화’라는 이름의 정리해고로 아수라장이 되고 실질 실업률은 두 자리 수를 훨씬 넘어섰다. 비정규직은 전체 노동자의 50% 수준을 훨씬 넘어서 고착되고 있고 이들의 열악하기 그지없는 임금, 노동조건은 언제 개선될지 기약할 수가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이 이어지는 가운데 노동강도의 급격한 강화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임금인상은 노동생산성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수준에서 맴돌았다. 

전체 노동자의 경제적 지위는 하락하고 노동자 내부의 격차, 다른 계층과의 격차는 갈수록 확대되었다. 노동소득분배율은 매년 하락하여 2004년 현재 1990년 수준으로 후퇴하였고 소득불균형이 갈수록 격화된 결과, 전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노동자들의 상대적 지위는 작년 말 현재 1970년대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도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은 매년 늘어나 적대적 노사관계를 고수하는 자본의 속성을 실감케 하고, 수많은 구속 노동자는 관대하기 그지없는 자본가에 대한 처벌과 대비되어 법치의 허구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사회양극화의 심각함은 빈곤층이 전체인구 4천9백만명 중 14.6%에 해당하는 7백만명에 이른다는 데서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다. 

결국 우리 사회는 제도와 절차의 민주주의를 넘어서 실질의 민주주의로 나아가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 뿐만 아니라 오히려 후퇴하고 있는 것이다. 권력과 재화는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 있고 노동의 빈곤화, 차별화는 사회양극화라는 이름으로 심각한 균열과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운동혁신 방안 실천으로 현장신뢰 회복해야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급격히 성장했던 노동운동이 현재 이렇게 어렵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환경변화가 너무나 빠르고 거세다는 지적도 있고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들에게 전가시킨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이러한 지적 가운데는 자본의 세계화, 빈곤의 세계화, 불평등의 세계화와 이를 뒷받침하는 신자유주의정책이 공통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공격은 노동운동의 기반 자체를 파괴하는 속성을 갖기 때문에 이를 방치할 경우 노동운동은 사실상 기본적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 노동운동은 이에 대항하여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여 왔다. 그러나 투쟁은 방어나 수세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노동자들의 처지는 현상유지도 힘겨운 실정이다. 거기다 노동자 내부에 여러 가지 격차가 커지고 있고 노동조합 조직률은 정체된 채 대표성마저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노동운동은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경제위기의 원인이라거나 망국의 근원으로 쉴 새 없이 공격을 받아왔다. 그런데다 올해 초부터 터져 나온 노동계의 각종 비리로 노동계는 전례 없는 비판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광주 기아자동차와 현대자동차의 채용비리, 항운노조 고위간부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한 배임, 한국노총 복지센터 건설을 둘러싼 전임 위원장과 부위원장의 수뢰, 현직 사무총장과 택시노련의 비위사실 등 마치 ‘의도된 폭로’처럼 연이어 노동운동의 윤리성과 순수성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렸다. 게다가 민주노총이 사회적 교섭 참가를 둘러싸고 대의원대회가 두 번이나 폭력이 난무하는 난장판이 됨으로써 조직 안팎으로 거센 비판과 논쟁의 회오리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러한 노동계의 내부 파동은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온 자본 쪽의 거친 공격과 더불어 노동운동의 위기감을 증폭시켰고 노동운동의 주체들만이 아니라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위기 논쟁’이 전개되었다. 현장 노동자들도 상당수가 위기감을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위기의 원인이 조직 안팎에서 여러 가지로 분석되고 그에 따라 치유책도 제시되고 있다. 어느 것이든 노동운동이란 주어진 조건에 적응하면서 또한 이를 극복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그 궁극적인 원인은 운동의 내부에서 찾아져야 하고 그 대안도 내부에서 마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양대 노총이 나름대로 진단을 내리고 그에 따라 총체적인 운동의 혁신을 위한 대안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혁신방안은 조직형태, 운동이념, 정치세력화, 운영체계 등과 관련하여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고, 그 속에는 당면한 비리청산과 도덕성 회복 그리고 재정자립도 강조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은 없다. 운동의 혁신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각기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결합, 보완하면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의 연속이다. 또한 긴박한 당면투쟁이 요구되는 상황과 관성의 법칙에 묻히기 쉬운 조직적 속성 때문에 해결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따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조직 전체의 과업이 아니라 상층부만의 개혁의지의 천명에 그치거나 도덕성, 윤리성을 강조하는 데 그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상황에 대한 인식을 모든 현장이 공유하고, 이미 마련된 대안을 혁신의 필요성을 공감할 수 있는 운동을 벌이는 것을 적극 실천하는 데서부터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구성원들에게 변화를 보여주고 그것이 갖는 희망의 메시지를 제시해야 한다. 위로부터 당위적인 혁신방안이 전달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인 대중토론을 통해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찾아내 실천하게 함으로써 밑으로부터의 책임과 지지와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방 60년 노동자대투쟁으로부터 20년, 1997년 노동운동 위기로부터 다시 10년을 지척에 둔 지금, 남북화해의 감격에 버금가는 ‘세상을 바꾸는 투쟁’은 위가 아니라 현장에서부터 시작된다는 평범한 진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할 시점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