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 젊은 시민단체활동가는 그만둘 뻔했는가

노동사회

왜 그 젊은 시민단체활동가는 그만둘 뻔했는가

편집국 0 3,931 2013.05.19 01:12

“그만두겠다.”

이 한마디로, 얼마 전 내가 일하는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민언련)을 한판 뒤집어놨다. 언론을 모니터하고, 시민을 대상으로 언론교육을 하고, 집회와 토론회와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잡다하게 쏟아지는 실무들을 처리하면서 3년 정도의 시간을 정신 없이 보냈다. 그러다 보니 서른에 들어섰고,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평생을 걸고 해야 할 운동이 이것인지, 지금 나는 행복하고 만족스러운지, 이 길은 과연 옳은 길인지 등등 정리할 수 없는 물음들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만 두겠다”는 외침은 그런 의문들에 대한 어설픈 답이기도 했다. 

나, 그만둘래! 왜냐고?

그런 고민들에 빠져있던 중 지금은 디지털산업단지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변신한 ‘구로공단’ 현장의 노동자들을 만나게 됐다. 그들의 삶은 언론에 비쳐지던 노동문제와는 한참이나 달랐다. 더 열악했고, 더 불안했고, 더 가난했고, 더 처참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작업 중 잡담을 했다는 이유로, 조장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각을 했다는 이유로, 핸드폰으로 해고통지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진로와 운동에 대한 나의 고민은 얼마나 사치스러운가. 여전히 열정적으로 치열하게 고뇌하고 온몸으로 부딪쳐 현실의 어둠을 깨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곳곳에 이름 없이 묵묵히 싸우고 있는데! 나는 영향력 있는 시민단체에 앉아서 적당히 내 할 일만 해내며 진로를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건 아닌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하고 있는 시민단체 활동이라는 게 혹시 그들의 삶과 운동을 더욱 소외시키고, 기득권을 가진 자들에게만 결과적으로 이득을 주게 되는 건 아닌가라는 근본적인 물음. 언론의 왜곡된 의제를 바꿔가기 위해 노력하지만 겨우 ‘갈등보도’만을 문제로 삼아왔던 건 아닌지…, 이런 활동이 세상을 바꿔나가는 데 작은 힘이라도 될 수 있을까? 오히려 보수언론들을 적당히 견제하는 것에 만족해왔던 건 아닐까? 적극적이지 못했던 내 활동이 되려 보수언론들의 논리와 정당성을 확보해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시민운동은 더욱더 각자의 전문영역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것이 많은 성과를 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과연 시민운동은 역할은 거기까지인가? 물론 제대로 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이슈가 역사, 정치, 환경, 여성, 인권, 기업투명성 등 다종다양한 문제들로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오히려 우리 대다수의 생존과 직결돼 있는 문제들은 더 깊이 병들고 소외되고 있다. 정부가 그어 놓은 선 안에서 “법제도 개선”에만 매달려 ‘합리’적인 대안과 결과만을 생산하려 노력하고, 때로는 ‘대중성’이라는 단어로 스스로의 좁은 울타리를 합리화하며 우리 사회의 진보를 더디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단체도 여기서 자유로울까? 고민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러한 고민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를 더듬어보기 시작했다. 거창한 역사적 맥락은 우선 제쳐두고, 짧지만 내가 활동한 시간 동안 느꼈던 것으로부터 답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렇게 시민단체와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진영의 간극이 더 넓어진 것의 원인은 ‘무책임한 연대활동’과 ‘활동가들의 관료성’이라는 데 생각이 도달했다. 

무책임 연대, 관료적 활동이 우릴 지치게 해

얼마 전 꽤 진보적인 시민단체 활동가에게 그 단체의 연대활동 원칙을 들은 적이 있다. 활동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지 않으면 연대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연대를 하더라도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한다는 것이다. 다른 단체들도 비슷한 경향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연대를 하는지 잃어버리고 있는 경향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연대운동’에 대한 나의 기억들도 별로 좋지 않다. 연대활동에 참여해 보면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이름만 걸어놓고 실질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어느 단체가 공동대표가 되는지, 활동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 자신의 정파나 단체의 입장과는 얼마나 부합하는지 등의 세세한 목표와 방식에 대한 합의에만 큰 관심을 가졌다. 새롭고 풍성한 사업계획이나 대안을 내놓고 자신의 전문성을 토대로 서로의 역할을 책임 있게 수행하는 일은 등한시한 채 서로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경우도 태반이었다. 이렇게 ‘책임 없는 연대’가 계속되다 보니 서로를 포기하게 되고, 시민단체들은 자기영역 속으로 숨어들고, 연대고리는 느슨해지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리라. 

민중단체의 의제설정 역할이 시민단체로 넘어오면서 최근 더 많은 연대활동이 요구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지금처럼 노동문제가 심각해지고 사회 양극화가 극대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연대고리가 취약하거나 무책임한 연대를 할 경우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투쟁은 더욱 소외되고 그들만의 싸움으로 끝나버릴 수 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자본과 기득권세력의 이득으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 이제 연대운동의 기본 틀부터 활동가와 그 책임자들의 역할까지 재점검해야 할 시기가 아닐까? 

그 한가운데 민언련이라는 책임 있는 단체가 있고 또 그 안에 내가 있다. 돌이켜보면 막연한 생각들이 주변 조건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시민단체보다는 민중들이 있는 곳에 들어가서 부딪치고 살아야 한다는 막연한 결론을 끌어냈던 것 같다. 하지만 선배들의 이야기처럼, 이런 ‘힘’을 가진 조직조차 제대로 서지 못한다면 그 또한 희망이 없는 것일 터이다. 거기에 내 역할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 그 역할을 지금 내가 선 위치에서 더 빨리 해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막연한 꿈’은 잠시 접어놓기로 했다. 

단절과 관성을 ‘근육’으로 뚫고 가리라

그만두겠다던 나의 미숙한 결정은 선배들이 변하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불신’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선배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려 하거나 그들을 변화시켜 볼 자신감을 가져보지 못했던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되려 흔쾌히 내 문제의식을 받아들이고 여전히 거칠지만 함께 풀어가려고 노력하는 선배들의 모습은 나보다 더 진보적이었다. 

우리 사회를 더욱 침체시키고 있는, 시민단체를 더 자기영역 속에 가두고 시민운동과 노동운동, 민중운동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경향을 만들어내는 주범은, 다름 아닌 나태해진 나 자신과 관료화된 선배들과 동료 활동가들의 그릇된 삶의 방식을 용인하는 우리들이 아닐까? 결국 “이성이 통하지 않는 지점부터는 ‘입’이 아닌 ‘근육’이 현실의 어둠을 뚫고 가는 것”일 터이다. 

서른에 들어선 삶에 대한 고민, 그 시작은 어설펐지만 갈 길만은 구체적으로 찾아낸 것 같다. 항상 가슴 깊이 새겨야할 내 정체성도 찾아냈고.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