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의 대안적 체제 모델로서 ‘한국형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 구상

노동사회

한국경제의 대안적 체제 모델로서 ‘한국형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 구상

편집국 0 4,813 2013.05.19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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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동향과 전망』통권 65호(2005년 가을 겨울호)에 실린 논문입니다. 게재를 허락하신 필자와 한국사회과학연구소 및 박영률출판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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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1997년 말의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현황을 진단하고 발전방안을 모색하는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왔다. 특히 IMF의 권고와 압력 하에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해 온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의 성과와 문제점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어왔다. 이 논쟁은 자연스레 한국 경제가 향후 지향해야 할 경제체제(economic regime) 모델 또는 발전 모델이 무엇인가에 관한 논쟁을 포함하게 되었는데, 대체로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주체인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지향해온 영미 모델(Anglo-American model) 또는 신자유주의적 발전 모델을 지지하는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을 한 축으로 하고, 유럽형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을 지지하는 제도경제학자 및 케인즈 경제학자들을 다른 한 축으로 하는 구도로 논쟁구도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논쟁의 쟁점이 광범위하고 복잡한 관계로 쟁점별로 매우 복잡다기하게 입장들의 이합집산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논쟁은 재벌개혁이나 외자 문제 등 구체적 현안들 중심으로 전개된 관계로, 논쟁에 참여한 논자들이 지향하는 경제체제 모델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제시된 경우는 드물었다. 

이 논문은 한국경제가 중장기적으로 지향해야 할 경제체제 모델 또는 발전 모델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시각을 보태려 하는 시론(試論)적 성격의 글이다. 기존 논의에서 종합적인 대안적 경제체제 모델 제시 사례가 드물다는 점을 고려하여, 다소의 무리를 무릅쓰고 가능한 한 대안적 경제체제 모델의 종합적 상(像)을 그려보려 시도하였다. 이 논문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대안적 경제체제 모델은 ‘한국형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인데, 이 모델의 사회철학적 기초를 제시하고 이 모델을 구성하는 제도요소들과 모델의 작동방식을 개략적으로 그려보는 것이 이 논문의 핵심 내용이다. 

2. 한국형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 설계의 제약조건과 모델의 사회철학적 기초

대안적 체제나 제도에 대한 구상을 제시할 때에는 그것이 전제로 하고 있는 시지평(time horizon)의 차원과 그것이 가정하고 있는 제약조건들을 명시해야 한다. 우선 이 글이 전제로 하는 시지평은 아주 장기는 아니다. 이는 우선 모종의 사회주의 체제나 생태주의적-공동체주의적 대안 등 자본주의 체제와 원리적으로 다른 체제에 대한 구상을 배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남북통일 이후의 경제체제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에는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통제하기 어려운 중요한 외부변수가 많고 이것이 중요한 제약조건으로 작용하는데, 이 글에서는 세계화 추세가 장기간 지속되며, 북한의 급속한 경제회생을 기대하기 어렵고, 중국의 고도성장이 지속되고,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이 유지될 것이라는 점을 대안적 경제체제 모델 설계에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외부 제약조건으로 간주한다. 

한편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한국형 사회적 시장경제’에서 ‘사회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라는 용어는 어느 정도 고유명사화 된 구 서독식 사회적 시장경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사회적 시장경제에서 ‘사회적’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함축한다. 

  1) 경제운영의 지도적 원리로서 ‘연대의 원리’를 중시하는 시각을 함축한다. ‘자유’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자유주의적 또는 시장주의적 관점에서는 경제운영의 지도적 원리로서 압도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유의 원리’이다. 개인들의 자발적 선택과 교환에 기초한 시장경제질서 자체가 자유의 원리를 내장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시장경제원리를 존중하고, 명백하고 심각한 ‘시장실패’가 발생할 경우에만 국가의 개입 등을 통해 시장경제를 보완ㆍ교정해주면 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반면에 ‘사회적’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입장은 자유의 원리를 존중하되 이에 못지 않게 연대의 원리를 중시하며, 시장경제질서 자체는 연대의 원리를 구현하는 데 큰 한계를 갖고 있다는 시각을 취한다. 연대의 원리란 개인의 운명에 대한 사회의 책임, 즉 다른 개인들의 책임의 범위와 깊이를 확장ㆍ심화시킨다는 것이다(신정완, 2002: 333). 연대의 원리를 중시하는 입장은 사회를 원자적 개인들이 맺은 자발적 계약의 총체로 보기보다는 개인들이 그에 대해 지속적 소속관계와 폭넓은 권리-의무관계를 갖는 하나의 ‘공동체’로 보는 시각을 강하게 함축한다. 이 입장에서는 개인들은 개별적 계약 이전에 사회구성원으로서 상호간에 ‘메타(meta) 계약’을 맺는데 이 메타 계약의 내용에는 모든 구성원의 생존권, 약자 보호의 의무, 어느 정도 결과적 평등 추구의 필요성 인정, 타인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대한 계약과 의사결정에서 계약당사자 이외의 사회 구성원들의 참여권 인정, 즉 광의의 민주주의 등이 포함된다. 

‘평등’은 연대라는 가치의 하위범주로서 연대라는 가치가 구현ㆍ표현되는 한 형태이자 연대의 활성화를 위한 조건이라 할 수 있다(신정완, 2002: 332). ‘사회적’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입장은 사회구성원간의 사회경제적 평등 실현을 중요한 목표로 삼는다. 그리하여 사회복지제도나 노동법 등을 통해 사회경제적 약자층에게 의도적으로 경제적 지원을 제공할 뿐 아니라, 시장경제원리 하에서는 묻혀 버리기 쉬운 사회경제적 약자층의 사회적 발언권을 높여줄 수 있는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려 한다. 또 시장경제 작동의 조건과 결과 모두 공동체로서의 사회에 대해 동등한 ‘회원권(membership)’을 갖는 사회구성원들의 민주적 의사결정에 의한 승인절차를 필요로 한다고 본다. 이러한 입장은 개인에게 있어 사회라는 것이 그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환경’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삶의 의미의 귀속처’로서 존재한다는 시각을 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경제조정양식의 측면에서 시장 이외의 조정기제들을 광범위하고 적절하게 활용한다는 입장을 함축한다. 사회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는 시각은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국가’의 사회경제적 역할을 폭넓게 인정하는 입장으로 귀결된다. 이는 사회구성원들이 자신의 선호와 이해관계를 표출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이탈선택(exit option)’ 외에도 ‘발언선택(voice option)’을 비중 있게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구 여러 나라들에서 발전한 바 있는 사회 코포라티즘적 사회 운영은 그것이 사회적 의사결정의 중심축이 될 경우에는 민주주의 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에 수용할 수 없으나,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는 부차적 의사결정양식으로는 용인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3) 국민경제의 통합성 확보를 중요한 정책목표로 고려한다는 입장을 함축한다. 국민국가간 경계가 약화되어가는 추세이긴 하나 현재의 세계화 수준이 ‘탈국민국가 시대’를 운위할 만큼 진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전 지구적 수준에서의 정치공동체가 부재한 상태에서 ‘공동체로서의 사회’라는 관점을 제도적으로 구현해낼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단위는 국민국가일 수밖에 없다. 정치공동체의 경계가 너무 약화될 경우에는 공동체로서의 사회,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발언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사회가 소멸하게 된다. 이는 상당 기간 ‘사회적인 것(the social)’과 ‘국민적인 것(the national)’의 영역이 상호 중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일정한 규범에 기초하여 구속력을 행사하는 단위로서의 국민국가의 자율성이 유지되려면 그 물질적 기반인 국민경제의 통합성이 어느 정도 확보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은 제도 설계에 있어 경험적으로는 스웨덴, 독일 등 유럽대륙의 여러 나라들에서 발전했던 복지자본주의(welfare capitalism) 또는 사회적 시장경제의 경험을 긍정적 사례로 중요하게 참조한다. 그러나 구체적 제도 설계는 공간적으로 한국 실정에 맞게 짜여져야 하며 시간적으로 세계화된 경제질서의 도래라는 조건에 부합되게 짜여져야 한다. 

한편 ‘한국형’이라는 말은 대안적 경제체제 모델 구상에서 한국사회의 특수한 조건들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는데, 이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조건으로 간주한다. 첫째, 서구의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 형성기에 비해 고도성장의 필요성이 높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진행되는 인구 고령화에 따르는 잠재성장률의 저하, 통일에 대한 준비과정 및 통일 이후에 치러야 할 막대한 경제적 비용, 또 한국경제가 고도성장하는 중국경제와 산업적 보완성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산업구조의 빠른 고도화가 요구된다는 점등이 고도성장을 요구하는 대표적 요인들이다. 둘째, 세계화, 개방화의 압력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수출주도 경제성장을 이루어 온 한국경제의 역사가 강하게 규정하는 경로의존성이 있을 뿐 아니라 세계화와 시장개방을 선도하는 미국의 영향력이 앞으로도 한국사회에 강하게 작용하기 쉬운 것이다. 

셋째, 국민경제의 통합성 해체의 압력이 높다는 것이다. 세계화된 경제질서 하에서 국민경제의 완결적 순환구조를 확보할 수 있는 나라는 없겠으나 한국의 경우 최근 들어 수출/내수간, 대기업/중소기업간 연결고리가 현저하게 약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넷째, 사회안전망 구축의 필요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GDP 대비 사회복지지출 규모가 선진국에 비할 바 못되게 저위에 머물러 있는데다, 경제의 세계화, 정보화, 금융화 추세와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 기조 속에서 빈곤층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 물적 부존자원이 매우 빈약한 편이라는 점이다. 반면에 인구의 초고학력화로 인해 인적자원의 질 고도화의 중요성과 가능성이 매우 높은 편이다. 이는 노동정책과 사회복지정책도 인적자원의 질 고도화와 긴밀히 연계되는 형태로 추진될 필요성이 높다는 것을 함축한다.

3. 한국형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의 제도요소와 작동방식

 1) 제도 설계에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들

(1) 제도적 보완성과 복선형 제도 클러스터
경제체제를 구성하는 하위 제도들 사이에는 ‘제도적 보완성(institutional complementarity)’이 확보되어야 한다. 예컨대 금융제도와 노동시장 및 노사관계제도, 사회복지제도가 각기 전혀 다른 별개의 원리에 따라 구성되거나 심지어 서로 충돌하는 원리에 따라 구성되어서는 경제 전체의 원활한 작동을 기대하기 어렵다. “하나의 제도와 존재가 다른 제도의 효율성을 증가시킬 경우 이 두 제도간에는 보완성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Amable, 2003: 6)”. 다양한 자본주의 경제들을 유형론적으로 비교ㆍ평가하는 최근의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들은 모두 제도적 보완성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Hall, P. A. & Soskice, D., 2001;  Amable, B., 2003). 

홀과 소스키스(Hall, P. A. & Soskice, D.)는 선진자본주의국가의 경제체제를, 영미를 대표로 하는 자유시장경제(Liberal Market Economies; LME)와 독일을 대표로 하는 조정시장경제(Coordinated Market Economies; CME)로 대별하여 분석하는데, LME와 CME는 각기 높은 수준의 제도적 보완성을 가진 제도들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Hall, P. A. & Soskice, D., 2001: 17-44). 

LME의 대표격인 미국경제의 경우, 금융시장에서 자본이동은 단기 수익성 원리에 따라 이루어지고 M&A가 활성화되어 있어 기업 경영진은 기업 경영에서 단기 수익성 제고를 통한 배당률 제고와 주가 부양에 주력하게 된다. 기업과 금융기관 간에는 밀접하고 장기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아 금융기관들이 기업의 상세한 내부정보를 취득하기 어렵다. 따라서 주로 공표 된 자료에 기초하여 투자나 대출을 결정하게 된다. 기업지배구조에서 경영진은 높은 수준의 경영전권을 가지고 있어 경영상의 의사결정과 관련하여 노동자와 협의할 필요가 없다. 생산물시장은 매우 경쟁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고, 노동시장은 매우 유연하여 고용과 해고가 자유롭다. 고용보호 수준이 낮은 노동자들은 특정 기업이나 산업에서나 활용 가능한 특수숙련을 형성할 유인이 작으므로 숙련형성체계가 주로 일반적 숙련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학기술적 지식과 같은 일반적 숙련의 중요성이 크고 자본과 노동의 이동성이 높은 LME는 과학기술적 지식에 기초하여 기술의 근본적 변환을 중심으로 하는 혁신, 즉 ‘급진적 혁신(radical innovation)’에서 비교제도우위(comparative institutional advantages)를 갖는다. 그리하여 미국은 의료, 생명공학, 반도체, 소프트웨어, 정보통신, 방위산업 등 과학기술적 연구에 크게 의존하며 기술 내용이 빠르게 변화하는 산업에서 경쟁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CME의 대표격인 독일경제의 경우, 은행을 중심으로 하는 금융기관과 기업들 사이에 안정적인 장기거래가 이루어져 금융기관은 기업에 대한 내부정보에 기초하여 단기 수익성에 너무 좌우되지 않는 ‘인내하는 자본(patient capital)’을 제공한다. 기업지배구조에서는 노동자 경영참가가 이루어져 있어 경영자는 경영상의 의사결정과 관련하여 노동자와 협의해야 하므로 양자간의 지속적 신뢰관계 형성이 중요하다. 고용보호 수준이 매우 높고 노동비용이 높은 관계로 노동자들은 자신이 고용된 기업이나 산업에서 활용되는 특수숙련을 형성할 유인을 가지고 있고, 기업들도 노동자들의 특수숙련 수준을 높여 노동생산성을 높임으로써 높은 노동비용을 상쇄할 유인을 가지고 있다. 

기업특수적 또는 산업특수적 숙련의 중요성이 크고 자본과 노동의 이동성이 낮아 경제주체 간에 장기적 신뢰에 기초한 안정적 거래가 유지되는 CME는 생산현장에서의 경험적 지식의 축적에 기초한 ‘점진적 혁신(incremental innovation)’에서 비교제도우위를 갖는다. 그리하여 독일은 기계, 공장설비와 같은 자본재 산업, 내구소비재 산업 등에서 높은 경쟁력을 보여왔다는 것이다. 즉 어떤 형태로든 하나의 경제체제는 나름대로 서로 제도적 보완성을 갖는 하위제도들로 구성되어야 좋은 경제적 성과를 낳을 수 있으며, 제도적 보완성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해당 경제체제가 어떤 산업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핵심 요인이라는 것이다. 

아마블(Amable, B., 2003)은 ‘혁신과 생산의 사회적 체계들(social systems of innovation and production: SSIP)’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각 자본주의 경제들이 생산물시장에서의 경쟁, 임노동체계와 노동시장제도, 금융중개 부문과 기업지배구조, 사회복지, 교육 부문이라는 다섯 가지 핵심 영역에서 어떠한 특성을 보이느냐에 주목하여, 선진자본주의 경제를 다섯 가지 하위 체제로 유형화한다. (1) 영미를 대표로 하는 시장기반경제, (2) 스웨덴, 핀란드 등 북유럽국을 대표로 하는 사민주의적 경제, (3) 일본을 대표로 하는 아시아 자본주의, (4) 독일, 프랑스를 대표로 하는 유럽대륙 자본주의, (5) 남유럽 자본주의가 그것이다. 그리고 각 경제체제 유형에서 서로 보완성을 갖도록 구성된 제도들을 연결시켜주는 지배적 원리가 무엇이냐에 따라 각 경제체제 유형에 속한 나라들이 어떤 산업에 특화되느냐가 크게 좌우된다는 것이다. 또한 아마블도 홀과 소스키스와 마찬가지로 제도적 보완성의 확보ㆍ유지가 좋은 경제적 성과를 낳는 데 핵심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본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들은 한국의 대안적 경제체제 모델 또는 발전 모델을 구상하는 데 있어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첫째, 대안적 경제체제 모델을 구상하는 데 있어, 그 체제를 구성하는 하위제도들 사이의 제도적 보완성 확보를 매우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금융제도는 미국식, 사회복지제도는 독일식, 노동시장 및 노사관계제도는 일본식이 좋아 보인다 하더라도 이러한 이질적 원리들을 가진 제도들을 그저 모아놓아서는 좋은 경제적 성과를 보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둘째, 하위제도들을 어떤 원리에 입각하여 서로 제도적 보완성을 가지도록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해당 경제가 어떤 산업에서 경쟁력을 갖고자 하는가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급진적 혁신이 중요한 첨단산업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주안점을 두면서, 독일식 경제체제를 도입하고자 하는 것은 넌센스라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적 보완성에 관한 논의를 한국에 적용해 보면 어떤 함의를 얻을 수 있을까? 한국의 경우 현재 자동차, 석유화학, 조선 등 전통적인 생산재 산업 및 내구소비재 산업에서  경쟁력을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부문에서의 고용비중도 큰 편이다. 이러한 산업들은 대체로 점진적 혁신이 큰 중요성을 갖는 분야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반도체, 이동통신 등 IT 산업의 비중도 매우 크며 이 부문의 비중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현재 노동력 양성체계상 노동력의 초고학력화가 이루어져 있어 일반적 숙련의 비중이 큰 반면에 기업특수적 숙련체계의 형성이나 중위 기능 노동자 양성에 필요한 직업훈련체계의 발전은 취약한 편이다.

이러한 사정은 장기적으로는 한국이 점진적 혁신보다는 급진적 혁신이 중요한 첨단산업 분야에서 경쟁력을 가지는 방향으로 산업구조가 변화되어 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는 아마블의 분류체계에 따르자면 유럽대륙형 자본주의보다는 영미를 대표로 하는 시장기반경제나 IT 산업, 의료업 등에서 경쟁력을 보이는 스웨덴, 핀란드 등 사민주의적 경제와 유사한 경제체제로 나아가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생산재 산업 및 내구소비재 산업의 비중도 상당히 큰 편이고 발전가능성도 작지 않기 때문에 점진적 혁신에 적합한 제도의 유지나 도입도 무시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필자는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에서 강조한 제도적 보완성 개념과 관련지어 ‘제도 클러스터(institutional cluster)’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최근 빈번히 사용되는 용어인 ‘산업 클러스터’가 특정 산업에서 상호 보완성을 가진 기업 및 기관들이 일정 지역에 모여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면, 제도 클러스터란 ‘상호 보완성을 가진 채 연결되어 있는 제도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IT 산업 등 급진적 혁신이 중요한 산업들의 비중이 커가는 가운데 점진적 혁신이 중요한 전통적 제조업의 비중이 현재로선 매우 크고 또 향후 발전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있는 상황으로 판단되므로, 제도 설계에 있어 단일한 제도 클러스터가 아니라 ‘복선형 제도 클러스터(double-tracked institutional clusters)’를 구상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판단된다. 

 (2) 국민경제 수준에서 유연안정성 확보의 필요성
유연성(flexibility)과 안정성(security)의 적절한 결합을 의미하는 ‘유연안정성(flexicurity)’은 본래 노동시장 영역에서 사용되어 온 용어이나, 국민경제 전체 차원에서 사용해도 무방한 용어라 판단된다. 세계화, 정보화, 금융화 등으로 대표되는 세계경제의 변화방향은 국민경제의 유연성 제고를 필수적 요구로 만들고 있다. 반면에 이러한 세계경제의 변화방향은 국민경제의 안정성 제고의 필요성도 높이고 있다. 안정성이라는 것 자체가 본래 국민경제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가치이기도 하지만, 세계화, 정보화, 금융화 등의 흐름은 국민경제 및 그 구성원들의 경제적 여건을 매우 불안정하게 만들기 쉽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선 안정성을 강화하는 제도적 인프라가 마련되어야 할 필요성이 높아진다. 문제는 유연성을 높이는 제도적 인프라와 안정성을 높이는 제도적 인프라가 상충하지 않는 방식으로 제도설계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선진국들의 경험을 보면 이 문제 영역에서 가장 우수한 성과를 보이고 있는 나라들은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등 북유럽국들이다. 아마블의 용어에 따르면 ‘사민주의적 경제’들이다. 스웨덴의 경우엔 유명한 스웨덴 모델의 전성기인 2차대전 이후 1960년대 말의 기간에 렌-메이드네르 모델(Rehn-Meidner model)이라는 종합적 경제정책 패키지를 통해 유연성과 안정성을 순조롭게 결합시켜 본 경험이 있다. 1970년대 이후 경기침체를 겪고 고용안정을 중시하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안정성이 보다 제고된 반면에 유연성이 약화된 경험을 가지기도 했지만, 1990년대 이후 복지국가의 부분적 규모 축소와 노동시장 유연화 조치의 부분적 수용, 그리고 IT 산업의 발전 등을 통해 다시금 유연성과 안정성의 적절한 결합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덴마크도 구체적 제도와 정책은 다르나 보편주의적 복지국가라는 튼튼한 사회안전망을 배경으로 노동시장 유연화, 또 국가가 제공하는 ‘학습복지(learnfare)’의 강화에 따른 노동력의 질 및 적응력 제고를 통해 유연성과 안정성의 상보적 결합을 이루어내었다.

이 나라들이 이러한 성취를 이룰 수 있게 한 핵심적인 제도로는 규모가 크고 잘 정비된 복지국가, 특히 이전지출보다는 사회서비스의 제공에 무게중심이 두어진 복지국가체계, 전국이나 산업 수준에서 중앙집권적으로 조직된 노동조합과 사용자단체를 중심으로 형성된, 잘 조정된 노동시장 및 노사관계질서 등을 들 수 있다.   

반면에 유연성에 초점을 둔 경제체제 모델의 대표격인 영미의 경우에는 과도한 노동시장 유연화, 불충분하게 발전한 복지국가, 노동조합의 조직률이 낮아 파편화 된 노사관계질서, 금융부문의 비대성 등으로 인해 경제적 불평등 수준이 높고 서민대중의 경제적 불안정성 수준이 매우 높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한편 안정성에 초점을 둔 경제체제 모델의 대표격인 독일, 프랑스의 경우에는 사회서비스 제공보다는 이전지출에 무게중심이 두어졌으며 경제참가율 제고와 완전고용보다는 실업자에 대한 생활보장에 치중하는 복지국가체계, 기업 수준에서의 고용안정에 대한 과도한 가치 부여 등으로 인해 유연성 확보에 어려움을 보여 저성장, 고실업의 문제를 보이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경제가 향후 지향해야 할 모델은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등에서 정착된 ‘사민주의적 경제’ 모델과 가까운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모델은 앞 절에서 이야기한 ‘사회적’ 시장경제의 사회철학적 지향에 잘 부합되는 모델이기도 하다. 

 2)  제도 요소 

(1) 금융제도와 기업지배구조
금융제도와 관련하여 핵심 쟁점의 하나는 자본시장 중심의 금융제도를 가질 것인가, 아니면 은행 중심의 관계지향형 금융제도를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외환위기 이후 진행된 금융개혁은 자본시장 육성을 지향한 것이었으나 주식시장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핵심 저축주체인 가계가 여전히 은행예금을 선호해온 것 등으로 인해, 주식시장은 주로 외국인 투자에 의해 부양되었다. 또 외자의 지배력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재벌총수의 취약한 지분율로 인한 경영권 상실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재벌기업들에서 자사주 매입이 성행하여 주식시장은 자본조달 창구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해오지 못했다. 이러한 사정을 배경으로 은행 중심의 금융제도가 여전히 한국 현실에 부합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었다(이찬근, 2001; 조영철, 2001a). 그러나 자본시장의 비중 증대는 독일, 프랑스 등 유럽대륙형 자본주의국들에서도 뚜렷이 확인되는 추세이며, 금융기법의 발전은 앞으로도 자본시장의 비중을 증대시켜 갈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에서 자본시장의 중요성 제고 추세와 관련하여 그 동안 제기되었던 핵심 쟁점은 금융 불안정성 심화 가능성, 급속한 외자의 지배력 증대로 인한 국적기업의 경영권 상실 위험, 일방적 주주권 강화 문제 등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학계 일각에서는 재벌총수의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해 주는 다양한 장치들을 마련할 것과 외자, 특히 투기적 금융자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것을 주장해 왔다(이찬근, 2003, 2004; 장하준, 2004a). 그러나 외환위기를 통해 경험한 바와 같이 재벌총수의 경영권 안정화가 늘 국민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보장도 없을 뿐더러, 제도와 정책의 설계는 가능하면 일관된 룰에 기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에서 외자에 대해 국적자본을 특별히 우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외자와 국적자본을 막론하고 일반적인 규제규칙을 마련하는 것이 옳다. 내ㆍ외자를 막론하고 이동성이 매우 강한 투기성 자본에 대해서는 자본거래에 대한 조세 부과 등을 통해 규제할 수 있으며, 국민경제의 핵심적 산업이나 기업에서 외자의 과도한 지배력이 우려되는 상황에서는 국민연금을 해당 기업에 투자하고 주주로서의 국민연금의 발언권을 통해 국적자본을 보호하는 방식이 정도일 것으로 판단된다. 

기업지배구조, 특히 재벌기업의 지배구조와 관련해선 현재와 같은 재벌총수 중심의 지배구조를 유지할 것이냐, 아니면 순수한 주주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 모델로 갈 것인가의 양자택일적 구도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실정에서 고려해볼 만한 기업지배구조 개선방식은 이사회에 노동자 대표가 소수 위원으로 참여하는 것과 주주로서의 국민연금의 발언권 행사, 그리고 현행 사외이사제의 내실화라 생각된다. 그리고 주주로서의 국민연금의 발언권 행사는 국민연금 거버넌스(governance)의 민주적 개편을 동반해야 한다. 

은행의 경우엔 외환위기 이후 대대적 구조조정과 개혁과정을 통해 ‘관치금융’에서 벗어났지만, 이제는 오히려 수익성과 안정성을 쫓다보니 가계금융에 치중하여 기업금융 기능이 약화되고 금융의 ‘공공성’이 결정적으로 훼손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아래 [표1]은 그러한 사정을 잘 보여주는데, 특기할 만한 것은 1999년에 비해 2004년에 기업대출의 상대적 비중은 크게 줄었지만, 절대액으로 볼 때 대기업 대출은 정체상태인 데 반해 중소기업 대출은 대폭 증가했다는 점이다. 이는 대기업들이 부채비율을 줄이려 한데다 외환위기 이후 순조로운 성장을 통해 주로 사내유보이윤과 자본시장에서 쉽게 자금을 조달하게 됨에 따라 발생한 현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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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황은 대기업은 주로 사내유보이윤과 자본시장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고 중소기업은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는 형태로 금융시장이 양분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향후 대기업들이 투자증대를 위해 은행대출을 증가시키려 할 경우엔 중소기업 대출이 쉽게 구축되기 쉬우므로 중소기업에 대한 은행대출을 안정적으로 확보해주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과거와 같이 시중은행에 ‘정책금융’을 부과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뿐 아니라, 과거와 달리 치열한 경쟁에 노출된 민간은행에 수익성과 공공성이라는 양립되기 어려운 복수의 성과기준을 부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국민경제적 목표 달성을 위해 중소기업 육성용으로 공급되는 중소기업 대출은 국책은행 등 공공금융기관이 담당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공’과 ‘사’의 경계를 명확히 설정하고 필요하다면 ‘공’의 영역을 확대시키는 방향이 정도일 것 같다. 

그런데 금융제도와 기업지배구조는 노동시장 및 노사관계, 그리고 산업특성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대체로 자본시장 중심의 금융제도와 주주권이 강한 기업지배구조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강제하는 효과가 있으며, 급진적 혁신의 중요성이 큰 산업과 친화력을 갖는다. 반면에 은행 중심의 금융제도와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기업지배구조는 안정적인 노동시장질서 및 점진적 혁신의 중요성이 큰 산업과 친화력을 갖는다. 그런 점에서 각 산업부문의 기술적 특성에 적합한 제도적 보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복합형 금융제도와 기업지배구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앞 절에서 이야기한 ‘복선형 제도 클러스터’의 형성 원칙에 따른 금융제도와 기업지배구조의 형성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2) 산업관련 제도 및 정책
한국 상황에서 향후 필요한 산업정책의 대표적 사례로는 중소기업 육성정책과 사회적 학습망 형성정책을 들 수 있다. 전체 고용에서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고 대기업들의 고용흡수력이 점점 약화되는 현 상황에서 중소기업 육성정책은 우선 고용정책적 고려 차원에서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 또한 국민경제의 통합성 제고 차원에서도 필요한데, 특히 소재ㆍ부품 부문의 중소기업 발전은 국민경제의 통합성을 제고시킬 뿐 아니라 만성적인 대일 무역적자를 해소하는 데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국민경제의 통합성을 제고하는 방안으로서 최근에 다소 약화의 기미를 보이고 있는 대기업과 하청 중소기업 간에 수직적 분업연관을 재강화하는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완제품 수출에 주로 의존하는 대기업들이 소재ㆍ부품의 조달과 관련하여 글로벌 아웃소싱(global outsourcing)에 크게 의존하더라도, 국내 대기업 외에도 해외 완제품 대기업 등 독자적 판매대상을 가진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들이 발전한다면 국민경제는 나름대로 완결성 있는 산업구조를 가질 수 있다. 또 이렇게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들이 많이 존재할 경우엔 필요에 따라 완제품 생산 중심의 국내 대기업과 소재ㆍ부품 부문의 중소기업간의 수직적 분업연관도 쉽게 재복원, 재강화 시킬 수 있다.

수요독점기업인 국내 대기업과 하청 중소기업간의 불공정한 거래관계를 시정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공정거래정책의 엄격한 집행 외에도 노사간 단체교섭구조를 변화시키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현행 기업별 단체교섭 대신에 산별 단체교섭이나 수직계열화된 기업들을 포괄하는 계열기업군별 단체교섭이 주된 단체교섭 형태로 발전한다면, 대기업이 임금인상 부담을 하청 중소기업으로 전가시키는 것을 어렵게 하는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개인, 기업, 정부 등 경제주체들 전체의 지식ㆍ숙련 수준을 높이는 정책은 좁은 의미에서의 산업정책에는 포함되지 않겠으나 산업 발전을 위한 핵심적인 인프라를 구축하는 정책으로서 고급 인적자원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지식기반경제’ 시대에 꼭 필요한 정책이다. 또 기업과 인력의 국제적 이동이 활발해지는 세계화 시대에는 특정 산업이나 기업을 지원하는 정책보다 인력개발을 지원하는 정책이 자국 국민의 생활수준 개선에 더 효과적일 수 있다(이근 편, 2005: 357).

 최근에 고안된 개념인 ‘사회학습망(social learning net)’은 사회구성원 모두가 평생에 걸친 삶의 주기에서 중층적으로 구축된 그물망적인 학습체계에 걸리도록 사회적으로 촘촘하게 짜여진 제도적 장치를 의미한다(강순희ㆍ박정섭ㆍ장원섭, 2003: 20). 사회학습망 형성의 일차적 주체는 국가이다. 국가는 공교육에 대한 투자 강화를 통해 사회구성원들이 평균적으로 보유하는 일반적 숙련 수준을 제고하고, 학교 교육의 내용과 산업수요 간의 간극을 줄여주고, OJT(on-the-job training) 등 기업특수적 또는 산업특수적 숙련 형성에 많이 투자하는 기업들을 우대하며, 국가가 주도적으로 운영하는 평생학습기관들을 설립하여 사회구성원들의 지식수준과 학습능력, 기술구조 및 산업구조 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주어야 한다.    

(3) 노동시장 및 노사관계 관련 제도 
노동시장 및 노사관계 관련 제도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근본적인 고려사항은 생산요소로서의 노동의 효과적 활용과 시민으로서의 노동자의 권리 보장을 어떻게 적절하게 조화시킬 것이냐는 문제이다. 

영미 모델의 경우엔 노동시장 규율원리가 매우 시장원리 지향적이다. 노동시장 유연화 수준이 높아 노동자의 채용과 해고가 자유로워, 노동시장 유연화전략과 관련하여 수량적 유연화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노조 조직률은 낮으며 노사관계가 매우 분권화 되어 있다. 반면에 독일의 경우엔 기업 수준에서의 고용안정을 매우 중시하여 노동시장 유연화 수준이 낮고 노사관계는 산별 교섭을 중심으로 상당히 집권화 되어 비시장적 방식으로 조정된 노동시장과 노사관계의 비중이 큰 제도를 갖고 있다. 스웨덴의 경우엔 노사관계의 집권성 정도가 독일보다 높지만 기업 수준에서의 고용안정 보장에 치중하기보다는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을 통해 노동자의 고용가능성(employability) 제고에 주력함으로써 노동시장의 유연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주력해 왔다. 일본의 경우엔 최근 들어 다소 노동시장 유연화의 흐름이 나타나곤 있지만 여전히 대기업들의 경우 고용안정 수준이 국제적으로 매우 높아 노동자들의 기업에 대한 헌신 수준이 높고 노사관계는 기업별 노사관계 중심으로 매우 분권화 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경우엔 일부 일본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 측면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영미 모델과 매우 유사한 형태로 노동시장구조가 발전해 가고 있으며, 노사관계는 기업별 노사관계 중심으로 편성되어 외환위기 이전부터 OECD 국가들 중 가장 분권화 또는 파편화 된 형태를 취해 왔다. 한국은 현재 OECD 국가들 중 가장 시장원리 지향적인 노동시장 및 노사관계질서를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노동시장질서 및 기업별 노사관계제도는 기업 간의 시장경쟁을 기본원리로 삼는 자본주의 경제의 구성원리와 잘 부합된다는 점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장원리 지향적인 노동시장질서와 노사관계제도가 갖는 약점도 크다. 이러한 노동관련 제도는 본래 시장원리에 완전히 부합되기 어려운 ‘특수한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이 제기하는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을 잘 수용해 내기 어려우며, 사회의 핵심 구성원으로서의 노동자의 시민적 권리를 노동현장에서 구현해 내는 것을 매우 힘들게 한다. 경제적 효율성의 측면에서도 부정적 측면을 여럿 보이는데, 예컨대 한국의 경우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의 비정규 노동자 비율을 보이고 있는데 이로 인한 노동자들의 숙련 및 노동의욕 저하 문제가 심각하고, 기업별 단체교섭에 따르는 높은 교섭비용의 문제도 있다. 따라서 한국의 노동시장질서 및 노사관계제도는 비시장적 원리에 의한 조정(coordination)의 도입을 상당히 높은 수준에서 필요로 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조정된 노동시장 및 노사관계제도를 가진 대표적 모델 사례인 독일식 모델과 스웨덴식 모델 중에서는 스웨덴식 모델을 지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된다. 독일의 경우 기업 수준에서의 고용안정에 치우친 결과 기업경영의 유연성 확보가 어렵고 높은 실업률을 보이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또 청년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고령노동자의 조기퇴직을 유도하고 높은 수준의 이전지출을 통해 고령 퇴직자의 생활을 보장하는 독일식 모델은 인구 고령화의 압력을 장기적으로 견디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기업 수준에서의 고용안정보다는 노동자의 생애 전체를 통한 고용가능성 제고와 고용기간 연장, 또 실업자에 대한 생활보장보다는 완전고용 달성에 더 무게중심을 둔 스웨덴식 모델이 지속가능성의 측면에서나 노동자의 장기적 생활조건 개선의 측면에서나 우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노동시장은 현재 유연성 수준이 너무 높으므로, 중단기적으로는 고용안정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바람직한 수준의 ‘유연안정성’에 도달하기 위한 옳은 순서일 것으로 판단된다. 이를 위해서는 대기업의 경우에는 노동자의 다기능화를 위한 인력투자를 늘려 기능적 유연성을 제고하는 데 주력할 필요가 있다. 현재 국제적으로 혁신적 대기업들에서 ‘기술다각화(technological diversification)’가 빠르게 진행되는 추세인데(이근ㆍ박규호, 2005: 359-360), 기능적 유연성 제고 노력은 이러한 추세에도 잘 부합되는 방향이다.     
  
산업 부문별로는, 급진적 혁신의 중요성이 크며, 일반적 숙련 수준이 높은 고학력 노동자의 고용비중이 큰 산업들에서는 유연성이 강조된 노동시장 및 다소 분권화된 노사관계 질서를 형성하고, 점진적 혁신의 중요성이 크며, 기업특수적 또는 산업특수적 숙련을 구비한 중위 기능 노동자의 고용비중이 큰 산업들에서는 안정성이 강조된 노동시장 및 다소 집권화된 노사관계 질서를 형성하는 것, 즉 ‘복선형 노동관련 제도 클러스터’를 형성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판단된다. 

노조 조직체계 및 단체교섭체계와 관련해서는 산별 노조 및 산별 교섭체계를 골간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 이후 서구에서 단체교섭체계의 분권화가 진행되어 왔지만, 이는 스웨덴에서처럼 중앙단체교섭이라는 가장 집중화된 교섭체계가 무너지고 산별 교섭체계 중심으로 교섭체계가 개편되었거나, 독일 등 산별교섭체계가 유지되고 있는 나라들에서 기업 수준 교섭의 중요성이 다소 강화되었다는 것이지, 한국처럼 기업별 교섭체계 중심으로 교섭체계를 개편한 나라는 없다.
또한 산별 교섭체계는 현재 한국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은 대기업/중소기업간, 정규직/비정규직간 노동자들 사이의 과도한 고용조건 차이를 완화시키며, 잘 운영될 경우에 교섭비용을 크게 줄이고, 노동자들의 사회적 영향력을 강화시켜 계급간 세력균형 관계를 확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장점이 있다. 문제는 산별 교섭체계에서는 임금 등 고용조건의 균등화가 이루어져 중소기업에게는 인건비 상승 압력을 높이기 쉽다는 점이다.

스웨덴의 경우엔 기업의 규모나 수익성 수준에 관계없이 동일 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에게는 동일 임금을 지급하도록 요구하는 ‘연대임금정책’이 1950년대 중반 이후 강력히 추진된 결과 대기업의 수익률을 제고시켜 경제력 집중을 가속화한 반면에 중소기업의 경영여건 악화와 이로 인한 이 부문의 고용 감소 문제를 낳은 경험이 있다. 

중소기업의 고용비중이 크고 중소기업 육성의 필요성이 크며, 세계화, 정보화의 흐름 속에서 대기업의 성장이 고용증대로 연결되는 효과가 현저히 떨어진 한국의 현실에서 스웨덴에서와 같은 강한 연대임금정책을 시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기업/중소기업  간에 임금 등 고용조건 격차를 줄이는 것은 바람직한데, 이것이 중소기업 부문의 과도한 약화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다양한 제도적, 정책적 보완조치가 필요하다. 우선 중소기업 육성, 특히 혁신형 중소기업 육성이라는 산업정책적 조치가 병행되어야 하고, 산별 단체교섭에서 주로 임금지불능력이 높은 대기업의 재원에 기초하여 해당 산업의 중소기업을 지원하고 대기업-중소기업간 협력을 지원하기 위한 ‘산업발전기금’ 등을 조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사회복지제도를 통한 ‘사회임금’의 비중을 높여 중소기업 노동자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할 필요성이 크다. 

한편 인구의 빠른 고령화로 인한 잠재성장률 저하가 문제되는 현 상황에서는 고령자의 조기퇴직을 유도하고 이전지출을 통해 퇴직자의 생활을 보장해 주는 방식보다는, 정년 연장, 임금피크제 도입, 연공서열이 아니라 직무내용과 직업능력을 중심으로 하는 임금체계의 정착, 평생교육 강화, 고령자 친화적인 ‘사회적 일자리’ 마련 등을 통해 고령자의 은퇴시점을 늦추는 정책이 더 바람직하다.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확대와 내실화는 노동시장의 유연안정성 제고를 위한 대표적 방안이다. 국가 주도로 평생교육체계와 직업훈련체계를 확대ㆍ정비하여 그 중요성이 점증해가는 ‘학습복지(learnfare)’를 강화하고, 직업훈련기관이나 공공 고용안정기관을 노ㆍ사ㆍ정이 공동으로 운영함으로써 취업촉진효과를 제고하고 고용증대를 위한 노ㆍ사ㆍ정 협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4) 사회복지제도 
에스핑-안델센(Esping-Andersen, 1990)의 유명한 복지국가 유형론에 따르면, 복지국가체제(welfare-state regime)는 ‘자유주의적(liberal)’ 복지국가, '보수주의적(conservative)‘, ‘조합주의적(corporatist)’ 복지국가, ‘사민주의적(social democratic)’ 복지국가로 삼분된다. 미국, 캐나다, 호주를 대표로 하는 자유주의적 복지국가는 대체로 복지국가의 규모가 크지 않고, 주로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자산조사(means-test)에 기초한 부조가 이루어지며 비교적 작은 규모의 이전지출이 이루어지고, 비교적 약한 사회보험제도가 들어서 있다. 자유주의적 노동규범이 강하여 복지국가는 시장을 어느 정도 보완하는 수준에 자리 잡고 있다. 

오스트리아, 프랑스, 독일 등 유럽대륙국들을 대표로 하는 보수주의적, 조합주의적 복지국가는 자유주의적 복지국가와는 달리 시장지향성은 약하나 가족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즉 전통적 성별관계를 중시하여 남성 가장이 시장에서 소득을 얻고 부인은 가사를 돌보는 전통적 가족모델에 기초한 가족복지제도를 갖고 있다. 또한 계급 및 계층간 격차가 복지국가체계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구조를 갖고 있어, 사회보험에 있어 직역(職役)보험의 비중이 크고 시장에서의 소득수준 차이가 보험급여수준 차이로 직결되어 복지국가를 통한 계급 및 계층간 경제적 여건의 균등화효과가 약하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