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대학교수의 글과 공화국의 위기

노동사회

어느 대학교수의 글과 공화국의 위기

편집국 0 2,974 2013.05.19 01:49

동국대 강정구 교수가 한 인터넷 신문에 쓴 글을 계기로 2005년 7월부터 10월까지 한국 사회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신문시장을 독과점한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가 스스로 ‘공안언론’을 자처하며 여론몰이에 나섰고, 여기에 제1야당인 한나라당이 국가 정체성을 정면으로 제기하며 가세했다. 그 과정에서 법무부장관과 갈등 속에 검찰총장이 항의 사퇴했으며, 청와대까지 ‘색깔공세’의 논란에 휘말렸다. 

그 뿐인가. 대한민국에서 그동안 ‘방귀’깨나 뀌며 행세해온 인사들이 1만명 남짓 ‘시국 선언’에 나섰다. “오늘 대한민국은 좌경화가 나라의 안방과 심장을 위협하고 있는 위험한 나라”라고 단언했다. 『조선일보』 류근일 칼럼은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뒤엎으려는 혁명 전쟁”이라면서 ‘전투적 극한용어’까지 남용해가며 ‘보수 세력’의 결집을 호소했다. 심지어 대한상의 부회장까지 전면에 나서서 강정구 교수의 수강생들에게는 신입사원 채용 때 불이익을 줄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들은 여론몰이를 한 뒤 실제 여론조사를 통해 다시 여론몰이를 하는 경지까지 나아갔다. 대표적 부자신문 『중앙일보』를 보라. 1면 머리기사(10월24일자)로 “자유민주체제 지켜야, 84%”라는 국민 여론조사 결과를 대문짝만하게 편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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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10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반역정권심판 국민저항 선언대회' ]

색깔 선동에서 구린 기득권의 냄새가 

참으로 뜬금없이 대한민국의 정치-경제-검찰-언론이 힘을 모아 ‘나라 지키기’에 나선 꼴이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충정’ 자체에 굳이 반론을 펼 생각은 없다. 다만 구국을 부르짖는 이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큰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사실 왜곡을 서슴지 않는다. 동국대 강정구 교수와 장시기 교수를 무조건 ‘친북세력’으로 규정한다. 가령 『조선일보』는 장시기 교수의 글을 거두절미해 “제2의 강정구?-김일성은 위대한 지도자”(10월14일자 1면) 제하에 보도했다. 여기서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문제의 핵심은 강정구 교수나 장시기 교수의 글에 대한 동의 여부에 있지 않다. 언론이 대학교수의 글을 멋대로 왜곡한다는 데 있다.

가령 강정구 교수의 ‘6·25는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라는 주장은 한국전쟁이 북침으로 시작했다는 평양의 시각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장시기 교수의 글 또한 김일성 주석의 유훈을 중시하는 조선노동당에게는 오히려 분노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김 주석을 근대적 지도자로 규정하고 앞으로 필요한 ‘리더십’은 ‘현대적 지도자’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을 왜곡한 주장은 노무현 정권을 좌파정권으로 규정하는 데서 다시 극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노 정권이 과연 ‘좌파’인가. 사실과도 맞지 않거니와 국회에 진출한 민주노동당이나 좌파 일반에 대한 모욕이다. 하기야 시국선언을 낸 1만여 인사들은 “KBSㆍMBCㆍSBS 등 공중파 TV까지 좌파의 손에 넘어가 있다”고 진단하는 사람들 아니던가. 그럼에도 짚어두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대한민국의 정치-경제-검찰-언론이 한 목소리로 사실을 왜곡해도 정말 나라가 괜찮을 걸까.

둘째, 사실까지 왜곡한 이들의 ‘색깔선동’의 귀착점은 결국 ‘기득권 수호’다. 시국선언에서 스스로 극명하게 노출시켰듯이 “과거사법ㆍ언론법 시행 및 국가보안법ㆍ사학법 입법의 무리한 추진”과 “시장경제를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강남’과 ‘삼성’ 때리기”를 “즉각 중지해야 한다”는 게 궁극적 주장이다. 여기서 가장 먼저 과거사법을 거론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친일의 과거에 대한 진상규명을 좌파로 몰아치는 ‘수법’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기에 더 그렇다. 실제로 해방공간에서 친일세력은 민족정기를 바로잡자는 모든 사람들을 ‘친일파’로 몰아세우지 않았던가.

우파를 살해한 ‘우파’와 공화국의 위기

하지만 명토박아 두자. 친일파 청산이나 친일의 진상규명 작업은 결코 좌우의 문제가 아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오히려 우파의 과제다. 프랑스에서 ‘친 나치 인사’들에 대한 준엄한 처벌을 주도한 세력은 우파였다. 자신의 민족과 국가의 영광을 강조하는 게 본디 우파가 아니던가. 우리 해방공간에서도 반민족행위를 하지 않은 우파가 있었다. 누구일까. 백범 김구다. 하지만 백범 김구는 어떻게 되었는가. 친일파 청산을 주장한 백범을 암살한 자들은 바로 친일세력이었다. 백범을 살해한 뒤 그들은 자신들이 ‘우파’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민족진영’이라고 강변했다. 반민족행위를 한 민족세력 또는 우파라는 해괴한 현상이 한국 사회에 나타난 셈이다. 

그렇다. 해방공간에서 진정한 우파는 우파를 가장한 친일세력에게 제거되었다. 그 뒤 반세기 넘도록 대한민국은 반민족행위자들이 우파를 자처하며 진정한 우파마저 좌파로 몰아치는 이상한 나라로 전락했다. 대한민국에서 거론되는 민주주의론이 더없이 천박했던 까닭도 여기 있다. 

헌법이 바뀌면서도 언제나 지켜온 대전제, 곧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1조 제1항은 사실상 사문화되어 왔다. ‘민주’는 한자말(民主)이나 영어(Democracy) 두루 ‘민중’이 주인임을 함축하고 있으며, 공화국 또한 말 자체에 ‘공공성’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모든 활동은 민중의 지배를 받아야 하며, 특정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을 위해야 한다는 역사적 합의가 ‘민주공화국’ 개념에 담겨있다. 사실과 달리 색깔공세를 펴고, 또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잘못된 과거를 숨기고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여론몰이’는 민주공화국의 수호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파괴임을, 하여 ‘공화국 위기’의 본질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시민사회의 성숙이다. 가령 앞서 소개한 『중앙일보』 여론조사를 자세히 살펴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 한나라당과 부자신문들의 여론몰이가 집요했음에도, 강정구 교수의 사법처리에 대해 국민의 34%만 ‘구속 수사’해야 한다고 답했다. ‘불구속 수사’가 31%, ‘처벌이나 수사 대상이 아니다’는 대답이 33%였다. 세대별 분포를 보면 희망은 더 커진다. ‘구속 수사’에 찬성하는 의견은 50대 이상에서 61%, 40대에서 39%였다. 반면에 구속수사든 불구속 수사든 사법처리에 반대하는 의견은 30대(51%)와 20대(44%)에서 높았다. 

수구정당과 수구언론이 한통속으로 ‘공안정국’을 조성하던 시기에, 전국 1백35개 사회단체가 참여해 사회양극화해소국민연대(이하 양극화해소연대)를 결성한 사실도 고무적이다. 8백만명에 이르는 ‘이등국민’인 비정규직의 차별을 해소하는 일은 물론, 단계적 무상의료-무상교육, 최저생활 및 안정적 노후소득 보장, 조세정의 및 소득파악 개선, 공공 및 사회서비스 부문의 적극적 일자리 창출, 보육의 공공성, 주거의 공공성 실현은 양극화해소연대가 아니더라도 민주공화국이라면 마땅히 추구해야 할 가치다.

노동자들이여 수구의 그물 찢고 앞으로, 앞으로!

두루 알다시피 민주주의를 탈역사화 하여 단순히 선거절차의 문제로 환원한 것은 지배세력의 일관된 노림수였다. 민주주의에 대한 폴란드 출신의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경구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노동자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까닭도 여기 있다. 

“우리는 결코 형식적 민주주의의 우상숭배자였던 적이 없다. 그것이 실제 뜻하는 것은 곧 우리가 항상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정치적 형태를 사회적 본질과 구별해왔다는 것이다. 곧 우리는 언제나 형식적 평등과 자유라는 사탕발림의 외피 뒤에 숨겨진 자유의 부재와 사회적 불평등의 단단한 본질을 밝혀내 왔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 말을 한 지 한 세기가 넘었는데도 대한민국의 정치-경제-검찰-언론은 “형식적 평등과 자유라는 사탕발림”조차도 모르쇠하고 있다. 오직 자유라는 사탕발림으로 형식적 평등이든 실제적 평등이든 모든 평등의 논의를 억압하고 있다.

저 무지한 그러나 거대한 지배동맹에 맞서 민주주의의 기본을 지켜갈 세력은 한국사회의 절대다수인 노동자들이다. 자유민주주의조차 노동계급의 줄기찬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게 역사적 진실이었다.

다만 낙관적 의지는 지니되 현실에 대한 환상은 없어야 한다. 민주노총의 ‘표류’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국의 노동운동은 아직 민주주의의 핵심조차 지켜내기 어려울 만큼 수구세력의 동맹이 촘촘히 짜놓은 그물에 갇혀있다. 그물을 어떻게 찢을 것인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인식과 새로운 정치적 실천이 더없이 아쉬운 계절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