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별노조 조합원이 되는 대공장노동자들에게

노동사회

산별노조 조합원이 되는 대공장노동자들에게

편집국 0 3,010 2013.05.19 07:47

대중은 새로운 변화를 선택했다. 6월 말까지 산별전환 투표를 앞두고 노심초사했던 마음을 기우로 돌리며, 완성차 노동자들로 대표되는 대공장노동자들이 산별노조를 선택했다. 개표 결과 앞에서 벅찬 감동에 흥분하며, 대중에 대한 끝없는 신뢰를 갖지 못한 채 흔들리며 의심을 했던 자신을 질책했다. 산별노조로의 전환을 신념으로 받아 안고 초지일관 현장을 누비는 노동조합 집행간부들에게 감복을 했건, 아니면 반노동정책과 보수언론들의 노조 죽이기에 위기를 느껴 노조 살리기를 위한 역선택을 했건 간에,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제 큰 산을 넘어 새로운 변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사실 대공장노동자 입장에서 1987년 이래 19년 동안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조직한 기업별노조라는 낡은 틀을 벗어 던지는 것은 아무래도 불안한 일이다. 민주노총을 믿고, 단위 노조간부들의 신념을 믿고 용기 있게 찬성표를 던졌지만 썩 내키지만은 않다. 기업별노조라는 익숙한 조직운영 방식에서는 직접민주주의가 실제로 실현되고, 조합원들이 손아귀에서 집행부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내 손을 떠나는 것 같아 불안해진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호소에 동의는 했지만 노동자들에게 닥쳐오는 불확실한 미래가 과연 산별노조로 조직형태를 변경했다 해서 순탄하게 잘 해결될 리는 만무하다.

산별노조로 안 가도 걱정이요 가도 걱정이다. 하지만 대공장노동자들은 부결될 것이라 확신하는 자본의 기고만장함을 깨고, 모험적이지만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며 산별전환에 찬성을 했다. 이제부터 산별전환을 부르짖고 노동운동의 위기와 혁신을 주창하던 세력들의 책임만 남아 있다. 조합원 대중들의 불안한 심리는 언제 역작용으로, 반동현상으로 나타날지 모른다. 그들의 불안감이 어디서 발생하고 무엇에 의문을 품고 있는지 찾아 해결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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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7일 현대자동차노동조합 총력투쟁 결의대회. 산별노조를 선택한 대공장노동자들의 삶도 변화할 것이다.   ▷ 현대자동차노동조합 ]

해답을 주지 못하고 건너 온 산별노조

6월에 들어서며 현대자동차노동조합의 산별전환 성공여부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노동운동 내부에서조차 ‘대공장 중심론’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고 반노동정권과 보수언론들의 의도된 사회적 고립전략이 왕성함에도, 여전히 현대차노조의 민주노총 내 위상과 역할이 그만큼 지대하기 때문이다. 현대차노조만 산별전환에 성공한다면 미전환 노조에 대한 설득이 그만큼 수월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예측불허라는 분위기에서 산별전환을 반대하는 사람들만 골라서 만나 보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며,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가결과 부결 여부를 떠나 알아 볼 필요가 생겼다. 그런데 현장에서 조합원들에게 형식적인 산별전환 찬성논리는 이미 여지없이 박살나고 있었다. 산별찬성의 가장 전면에 내세웠던 논리가 “크게 뭉쳐 크게 싸우자”였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지금도 충분히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4만3천 조합원이 작아서 정리해고 당하고 노조가 일을 하지 못 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대공장노조가 작아서 고용불안이 오고 산업정책에 개입하지 못한다는 ‘덩치와 쪽수의 논리’는 조합원들에게 설득력을 잃고 있었다.

다음의 찬성논리는 ‘위기론’이었다. 2007년 복수노조 시대와 전임자임금 미지급 사태가 현실화되면 “노동조합은 망한다”는 논리였다. 이 또한 조합원 대중들은 우습게 받아 넘겼다. “어느 놈이 복수노조를 만들어?”였다. 노조가 분열되면 19년 동안 투쟁해서 쌓아 올린 기득권이 무너진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으며, 제2의 노조를 만드는 것은 회사가 사주하여 만든 어용노조이기에 “절대 용서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조합원들은 정말 그럴듯한 자기방어 논리로 무장하고 있었다. 전임자임금 미지급에 대해서는 대부분 “안 된다”는 정도의 소극적 반응이었지만, 의외로 역질문이 많이 나왔다. “그거 대의원들도 해당됩니까?”였다. 전임 집행간부들에 대한 임금 미지급은 조합비 인상 등을 불러오고 노조운영에 타격을 줄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반대하겠지만 현장의 대의원들에 대해서는 불신을 드러냈다. “엄격하게 적용하면 대의원도 해당될 수 있다”는 답변에 조합원은 빙긋이 웃으며 돌아섰다.

사소하게는 대의원 배정 숫자와 조합비 분담 등 논쟁거리는 있었으나 쟁점은 형성되지 못했다. 조합원들은 교섭권과 파업권의 중앙 집중화 등 산별노조의 조직운영방식을 많이들 궁금해 했으나 누구에게도 속 시원한 답변을 듣지 못하고 산별전환 투표에 임했다.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장점은 말하고 단점은 감춘다”며 뭔가 속이고 있다는 주장도 상당수 제기되었다.

산별노조가 만능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산별전환을 추진하며 “왜 산별노조인가”에 대하여 정확히 전달되지 못하고 지극히 단편적인 조직형태 변경과 조직운영 형식의 논리만 들이대고 있었다는 점이다. 궁극적으로 노동운동이 왜 산별노조로 가고자 하는지, ‘산별정신과 사상’을 조합원 대중들의 가슴속에 녹여내지 못한 것이다. 대공장 노동자들은 천차만별로 제각각 산별의 상을 그리며 투표했다. 조합원마다 뭔가 미심쩍어 하면서 바라는 바도 다르고 요구도 틀렸지만 찬성표는 3분의 2를 넘어 통과된 것 또한 사실이다.

산별노조로 간다고 해서 기업별노조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가? 19년의 관성을 깨고 단번에 담합적인 노사관계와 조합원들의 실리주의 성향을 뛰어 넘어 평등과 연대의 정신이 회복되는가? 노조간부와 활동가들은 새로운 자세로 변화하고, 노조비리는 없어지며 투명하고 민주적인 조직운영은 가능해지는가? 노사관계는 조합원들의 바람대로 혁신할 수 있는가? 과연 산업정책에 개입하여 조합원들의 고용안정을 달성하고 비정규직 문제는 해결되는가? 국회의 비정규직 확대법안과 노사관계로드맵, 한미 FTA 저지 등의 목표는 달성되는가? 산별노조로 가면 ‘위원장 따먹기’하는 현장조직들은 없어지고 민주노총의 정파 간 대립과 갈등은 해소되는가? 기업별노조라서 노동운동의 위기가 왔으니 조직형태만 변경하면 위기는 해소되는가?

셀 수 없이 많이 제기되던 노동운동 내부의 문제들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기업별노조체제라서 발생된 문제도 있겠지만 사실 대중들이 모여 조직을 운영하다보면 항상 발생하는 문제들이기도 하다. 결국 사람이 문제다. 노동조합을 하는 간부나 활동가들이 철저한 자기성찰과 반성을 통해 혁신을 하지 못 한다면, 노동운동의 위기 상황은 기업별노조이건 산업별노조이건 별로 달라지는 게 없을 것이다. 조합원 대중들은 이를 뻔히 알면서도 산별전환에 찬성표를 던졌다. 19년 낡은 옷을 벗어 던지고 새롭게 다시 잘해보겠다는 의지를 따랐고, 다른 특별한 대안도 제시되지 못하기에 산별노조로 따라온 것이다.

평등과 연대, 산별정신과 사상이 중요하다

조합원 대중들을 설득하기 위한 산별전환 찬성논리는 이처럼 어눌했다. “산별로 안가면 노동조합 망한다”는 위기론의 확대 재생산과 찬성표로 유도하는 쥐어짜기 식의 동원전략이었음을 빨리 인정하고 이제부터라도 산별노조의 내용을 채워가야 한다.
우리가 기업별 노조를 벗어나 산업별노조로 가고자 했던 정신과 목표는 무엇이었던가? 그건 노동운동이 본래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인 ‘평등과 연대’의 정신일 것이다. 자본은 끊임없이 노동자 간 경쟁을 부추기고 분열을 통한 분할지배관리를 추구한다. 여기에 노동자들의 대응은 ‘노동자는 하나’라는 단결의 원리일 수밖에 없다. 산별노조는 기업별노조보다 평등과 연대의 정신에 입각한 단결을 쉽게 달성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노동의 문제는 어느 한 기업 속에서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과 업종을 초월하여 국가 경제의 관점에서 해결될 수 있다.

자본은 노동자들이 동일한 노동과 가치를 창출한다 해도 개인별로 분할하여 평가하고, 차등과 차별을 통해 지배관리하고 통제하려 한다. 노동자들이 노동력 제공의 대가가 개인별 차등과 차별로 나타나는 것에 반대하며 노동조합 조직으로 뭉쳐 투쟁에 나서는 게 전통적인 조합주의다. 기업별 노조는 기업내부에서의 이해관계 관철이라는 속성을 갖기에 그 체제 속에서는 기업 밖에 있는 전체 노동자들과의 평등과 연대는 원칙적으로 생성되기 어렵다. 이를 극복하고 모든 지역과 모든 산업을 망라하는 노동자들의 평등과 연대정신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산별노조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기심의 마수’에서 벗어나야한다

1987년 한국의 노동운동은 제조업 남성노동자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되며 공권력의 탄압에 맞서 억압과 착취의 현장을 일정부분 개선시키며 권리를 신장시키는 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1997년 IMF 사태와 함께 찾아 온 신자유주의와 비정규직의 확산은 더 이상 기업내부의 노동조합운동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산업의 고도화는 기업은 성장하지만 고용은 감소하는 현상에 빠지며 노동자들의 관심사는 임금과 복지에서 고용안정으로 옮겨져 왔다. 일자리를 놓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경쟁하는 관계로 발전하고, 정규직들은 자신들의 고용안정을 위해 비정규직을 방패막이로 생각하거나 저임금과 차별을 외면해 왔다.

비정규직이 대신 정리해고를 당해도 나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극도의 이기심이 드러나며 ‘대공장 고임금론’과 ‘노동귀족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60% 가까이 육박해 있는 비정규직 규모의 확산은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임금인상조차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일노동에 절반의 임금만 줘도 되는 비정규직이 존재하는 한, 정규직 1명을 해고시키고 비정규직 2명을 고용해도 된다는 계산에 오히려 정규직들의 고용을 위협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대공장노동자와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서로 견제하고 원망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마수’에 걸려든 것이다. 

따라서 산별전환 성공은 대공장노동자들이 자본의 마수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의 시작이다. 노동운동의 본령과 산별노조의 정신을 ‘평등과 연대’로 꼽는 이유도 노동자는 혼자서는 노예처럼 당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확인하며 단결의 원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개인을 넘어 대공장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어 있다하더라도 대공장노동조합 독자적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도 확인되고 있다. 쉽게 말해 노동운동은 “잘 먹고 잘 살기 운동”임에는 틀림없지만 혼자서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잘 먹고 잘 살기 운동”이 되어야 한다. 

다함께 잘 먹고 잘 살기 운동으로

이제 산별노조로 전환한 대공장노동자들은 투쟁의 목표가 개인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가 모두 함께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방향으로 생각을 고쳐야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각자 살기 위해 제로섬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공장과 중소영세기업 노동자가 함께 살기 위한 투쟁으로 변화해야 한다.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중소영세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양보와 나눔의 실천이 산별노조를 통한 새로운 단결과 투쟁,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의로운 칼’을 다시 곧추 세우는 출발임을 알아야한다. 대공장노동자들의 양보와 나눔은 세상의 진실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당연한 실천’이 되어야 한다. 이를 놓고 산별노조로 가면 ‘대공장노동자들이 손해’라는 인식은 자본가들이 유포한 잘못된 논리다. 노동자들끼리 경쟁하고 분열시키기 위한 자본의 논리일 뿐이다. 노동자들은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부추기는 자본의 논리에 더 이상 놀아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민주노총에서 해마다 제시하는 ‘하후상박 임금인상률 원칙’에 동의해야 한다. 예전처럼 대공장 정규직노동자 10만원 인상하고, 비정규직노동자는 7만원 인상하여 3만원의 격차를 더 벌린다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할 것이다. 당연히 비정규직노동자들이 3만원 추가 인상하여 차별과 격차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 이는 대공장노동자들이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조직력이 취약해 인상 속도가 늦은 쪽을 정상으로 돌리는 작업이다. 산별노조로 대공장과 중소영세기업, 비정규직노동자가 하나가 되어 그 커다란 힘으로 동일노동 절반임금의 부당함과 중간착취를 깨야 한다. 산별노조의 힘으로 저임금 노동자들이 참다운 노동의 대가를 가져가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양보하고 배려하는 마음은 노동자들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산별노조는 사회통합적인 노동운동

유럽의 산별노조와 관련한 역사적 경험은 숙련공 귀족노동조합과 미숙련공 노동자 간의 사회적 통합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들에게 기업별노조라는 조직형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기에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평등임금’의 추구는 너무나 당연했다. 노동운동의 전통이 깊은 유럽 국가들에서도 비정규직은 일부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은 정규직보다 더 불안정한 고용층이라는 합리적인 이유 때문에 임금이 동일하거나 오히려 더 높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나라 노동운동에 전달하는 메시지는 강력하다.

우리가 산별노조로의 전환을 더욱 재촉한 이유 또한 자본에 의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할지배였으며, 저임금 비정규직의 확산이 조직률의 하락과 정규직들의 고용불안을 불러온다는 사실이었다. 언제까지 비정규직의 희생으로 정규직의 기득권이 지켜질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우리에게 산별노조로 전환은 곧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공장과 중소영세기업노동자 간 사회통합적인 하나의 노조로 단결을 의미한다. 

이제 기업별노조를 통해 기업내부의 임금·고용·복지향상을 가져오는 것은 한계에 봉착했다. 지불능력 있는 재벌기업 대공장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많이 받아간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어렵다. 재벌의 치마폭 속에 숨어 상대적으로 약간 높은 임금을 인상하면, 그 인상분만큼의 추가비용을 중소영세기업과 저임금 비정규직들에게 전가하게 되는 구조는 이 사회가 용서하지 않는다. 재벌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고용안정을 위해, 더 많은 임금보장을 위해 노사가 담합하여 중소영세기업의 납품권을 빼앗아가 연장과 특근을 독식하는 구조 또한 유지하기 어렵다. 학자금과 진료비 등 재벌소속 노조로서 특혜와 특권을 누리는 것도 이제는 세상 사람들이 부도덕한 시각으로 바라본다.

이래서 노동자들의 처우도 기업 내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나만 잘 먹고 잘 살자는 특혜와 특권의식은 버려야할 구시대의 악습이다. 모두가 함께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무상교육과 무상의료와 같은 사회통합적인 복지체계를 추구하고, 국가와 사회시스템이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책임지는 방향으로 갈 수 이게 하도록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비정규직과 노조통합 및 실질노동시간 단축

산별전환 이후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첫 번째 과제는 비정규직노동자들과의 관계설정이다. 당위성만으로는 당연하게 정규직노조와 비정규직노조가 하나의 노조로 통합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현장은, 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며, 정리해고 순서를 놓고 우선순위를 다투는 관계에 놓여 있다. 아마 산별노조 전환 이후에도 결정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산별노조로 전환을 추구했던 집행간부와 활동가들의 책임이다. 조직형식의 논리보다 산별정신과 사상을 강조했다면 이런 어려움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조합원 대중들을 합심하여 설득에 나서야 하고, 반드시 10월로 예정된 산별노조 출범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공장과 중소영세기업노동자가 경계의 벽을 허물고 하나의 노조로 통합해야 한다.

두 번째 과제는 실질노동시간 단축이다. 명절에도 쉬지 않고 일하는 노동자가 산업역군으로 칭송받는 시대는 지나갔다. 열심히 일하다가 과로사로 죽었다고 해서 그에게 잘했다고 하는 세상도 아니다. 그들이 장시간 노동으로 일거리를 독식할 때 일자리가 없어 취업을 못하는 실업자가 넘치는 세상이다. 유럽과 미국의 경우 연간 1,700~2,000시간의 노동을 하는데 현대자동차의 경우 연간 3,300시간 이상 장시간 노동을 하는 사람이 1,500명이 넘고, 평균노동시간이 2,430시간에 이른다. 현재도 1,500명 이상의 노동자가 항상 과로사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15년 근속자 기준 8시간 노동의 경우 3,700만원이며, 주야 10시간 교대근무와 월 2회 특근철야 장시간 노동으로 연봉 5,500만원을 받아가며 ‘고임금’으로 낙인찍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어리석은 물량확보 투쟁과 특근철야 장시간 노동으로 임금 많이 받아갈 생각은 고쳐야 한다. 기업은 성장하되 일자리는 축소되는 시대가 이미 도래한지 오래다. 산별노조로 가면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실질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에 적극 나서야 한다. 현대자동차가 평균노동시간을 2,400시간으로 단축하면 추가 3,800여명의 신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 노동시간단축은 고용불안을 해소하고, 비정규직들과 일자리를 놓고 경쟁할 이유가 없어진다. 모두가 함께 살아갈 ‘공존전략’이 산별노조가 추구하는 정신이다.

8시간 일하고, 8시간 놀고, 8시간 잠자자!

산별노조로의 전환에 따라 노동조합의 정책을 획기적으로 변화하여 인간답게 살기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앞서 밝힌 두 가지의 해묵은 과제에 대한 해법을 초기부터 올바로 찾아가지 못하면 산별노조로의 전환 의미는 반감되고 만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노동하는 시간을 줄이고, 재충전을 위해 쉬고 잠자며,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보낼 만큼 적정한 임금의 보장이다. 노동을 많이 하여 그 길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검증된 사실이다. 

1987년 대투쟁 당시 우리가 목소리 높여 외쳤던 구호가 있다. 그것은 “8시간 일하고, 8시간 놀고, 8시간 잠자자”였다. 장장 19년의 기업별노조에서 달성하지 못한 인간다운 삶을 산별노조에서 실현하기 위해, 대공장노동자들은 낡은 관성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새로운 희망찬 미래를 위해 결단해야 한다. 바로 비정규직 문제와 실질노동시간 단축의 문제들이다.

물론 짧은 시일 내에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행해야할 방향은 분명하다. 대공장노동자들에게는 사회적 약자로 소외당하며 살아 온 중소영세기업과 저임금 비정규직노동자들에 대한 배려와 양보의 미덕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