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만 금속노조의 연대정신과 실천정신을 15만 금속노조로!

노동사회

4만 금속노조의 연대정신과 실천정신을 15만 금속노조로!

편집국 0 4,778 2013.05.19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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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전국금속노동조합 창립(30,795명)
2002년 집단교섭 실시, 산별협약의 전 단계인 기본협약 체결(108개 사업장)
2003년 역사상 첫 산별중앙교섭 실시, 기존임금 저하 없는 주5일제 합의
2004년 노조활동을 이유로 손해배상·가압류 금지, 금속산업 최저임금 비정규직·이주노동자까지 적용
2005년 불법파견 확인 시 정규직화, 비정규직 노조활동을 이유로 해고 시 고용 보장 합의  
2006년 비정규직 4사 해결 금속노조 총파업, 역사상 첫 사용자단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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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금속노동조합은 2001년 2월8일 창립 이후 5년 동안 한국 노동운동 역사에 기록될 굵직한 사건들을 만들어왔다.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대공장들이 모두 빠져있는 상황에서 중소규모 하청회사 노동자들이 중심인 금속노조가, 민주노총 투쟁을 이끌어 가는 핵심부대로 자리 잡고, 산별교섭에서 역사적인 사건들을 만들고, 나아가 민주노조운동의 미래를 밝힐 수 있었던 그 힘은 무엇이었을까? 이 글은 지난 5년간 금속노조가 걸어온 발자취를 되돌아보면서 그 과정에서 흐르는 ‘금속노조 정신’을 찾아내, 이후 15만 금속노조운동의 소중한 자양분으로 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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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6월30일 하이닉스매그나칩 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금속 노동자들    ▷ 전국금속노동조합 ]

금속노조의 왼쪽날개 연대정신

2006년 3월29일 금속노조 경주지부 발레오만도, IHL, 일진베어링 등 9개 지회 1,700명은 오후 1시부터 지부파업을 벌이고 1천명이 광진상공 앞으로 모여 <강제사직 전면무효와 원직복직 쟁취를 위한 총파업 결의대회>를 열었다. 광진상공 사측이 현대자동차의 납품단가 후려치기를 핑계로 35명의 여성조합원을 강제해고한 것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금속노조 경주지부는 강제사직 철회를 요구하며 29~31일까지 파업을 벌이기로 결정했고, 결국 2일차 파업을 앞둔 30일 오후 3시 금속노조는 강제사직 35명 여성조합원 재입사 등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지난 5월11일, 금속노조 경남지부 조합원 5천여명은 GM대우차창원 비정규직 해고자들의 복직을 요구하며 4시간 파업을 벌일 예정이었다. 그러자 금속노조의 연대파업을 앞두고 사측이 교섭에 나섰고, 11일 새벽에는 비정규직 해고자 35명 재입사와 손해배상·가압류 철회 등을 합의할 수 있었다. 

위와 같은 사례가 드러내는 것처럼, 금속노조가 걸어온 5년의 역사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연대의 정신’이었다. 구로동맹파업과 마창노련파업 등 과거 전노협의 ‘지역연대파업’의 정신이 산별노조인 금속노조 속에서 ‘지부파업’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한 것이다. 옆 공장 여성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해고는 우리 금속노조 조합원에 대한 해고이고, 곧 나에 대한 해고이기 때문에 파업으로 맞서야 한다는 연대정신이 금속노조 조합원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비정규직문제와 노조탄압, ‘지부파업’으로 돌파하다

물론 단일노조인 금속노조의 파업을 연대파업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전노협 이후 10년 넘게 기업별노조의 울타리 안에서 활동해왔고 산별노조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사업장을 뛰어넘는 파업과 투쟁의 정신을 이 글에서 연대정신이라고 표현했다. 

금속노조 조합원들이 지부파업을 통해 연대정신을 보여준 것은 지난 2001년부터 지금까지 10여 차례를 넘는다. 2001년 12월 충남지부의 세원테크 연대파업을 시작으로, 2003년 대구, 2004년 충남과 대전충북, 포항의 지부파업이 이어졌다. 특히 2005년은 비정규직과 악질사업장의 문제는 지부연대파업으로 돌파한다는 것을 전국적으로 보여준 해였다. 대전·충북지부는 하이닉스-매그나칩 비정규직 투쟁과 연대하기 위해, 전북과 인천지부는 KM&I 비정규직 투쟁을 함께하기 위해, 경남지부는 통일중공업 노조탄압을 막아내기 위해, 울산지부는 대덕사 폐업철회를 위해 지부파업으로 맞섰다. 

이렇게 공장의 담벼락을 넘은 연대정신은 지역의 장벽마저 허물고 금속노조 조합원들을 하나로 묶어 세웠다. 2003년 1월9일 두산중공업지회 배달호 조합원이 회사의 노조탄압에 맞서 분신자결하자 단 일주일만인 1월16일, 2만명의 금속노조 조합원이 전국 총파업에 돌입했다. 서울과 창원에서는 각각 4천여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규탄대회를 가졌다. 2006년 3월15일에는 하이닉스-매그나칩, 현대하이스코, KM&I, 기륭전자, 오리온전기 등이 집단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전국총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단위사업장의 문제로 2만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임금손실을 감수하며 파업을 벌이고 전국 5개 지역으로 집결해 악질사용자들에 금속노조의 매운 맛을 보여준 것이다.

산별교섭에서 최저임금·비정규직 보호 성과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지난 5년 동안 금속노조가 해낸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정신이 바로 연대정신이었다. 이 정신은 금속노조 중앙교섭에서 합의된 금속산업 최저임금을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청소, 경비, 식당, 이주노동자까지 적용시키도록 만들었다. 또한 이 연대의 정신은 “불법파견 확인 시 정규직화”라는 합의를 이끌어내 대우상용차에서 134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단계적으로 정규직화 하도록 했다.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활동을 이유로 해고됐을 경우, 원청회사가 고용을 보장하도록 합의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노조활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만약 금속노조에 현대자동차가 들어와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현대자동차에 납품하는 세원테크 회사의 노조탄압에 맞서 금속노조 충남지부가 연대파업을 벌이기로 결정해 현대차 아산공장이 파업에 돌입하기로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현대차 사측은 파업을 막기 위해서라도 세원테크를 압박해 문제해결에 나섰을 것이다. 그랬다면 세원테크 이해남 지회장이 온몸에 기름을 끼얹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따라서 오는 10월 출범하는 ‘15만 금속노조’가 지향해야 할 첫 번째 정신은 무엇보다도 연대정신이다. 옆 공장 조합원에 대한 탄압은 우리 모두에 대한 탄압이라는 정신으로 대공장 조합원들이 연대파업에 나선다면, 한국의 노사관계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부당노동행위와 노조탄압은 상당히 줄어들고, 15만 금속노조의 연대정신과 막강한 힘을 확인한 많은 노동자들이 속속 금속노조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정신을 외면한다면 ‘무늬만 산별’인 종이호랑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금속노조의 오른쪽 날개 실천정신

금속노조의 왼쪽 날개가 연대정신이라면 오른쪽 날개는 ‘실천정신’이다. 금속노조 간부들은 ‘결정하면 반드시 실천한다’는 정신을 “한다면 한다”라고 불렀고, 이런 조직 풍토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결정하면 반드시 실천해야 하기 때문에 결정은 신중했고 토론은 치열했다. 한 번의 파업을 결정하기 위해서 반드시 현장 조합원들의 의견을 모았고, 지부 운영위원회의 치열한 토론을 거쳤다. 꼬박 밤을 새우면서 논쟁했고 결정하면 반드시 실천하려고 했다. 현장의 어려움을 이유로 실천하지 않는 지회에 대해 ‘경위서’를 제출하도록 하고 징계를 하는 등 책임을 물으려고 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조직 전체가 쉴 새 없는 노력을 경주했다. 

금속노조는 결정하면 반드시 실천한다는 정신으로 지난 5년 동안 민주노총 총파업 지침을 한 번도 빠짐없이 수행했다. 창립 50일 만인 2001년 2월28일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금속산업연맹 총파업을 시작으로, 2002년 2월과 4월 민주노총 발전노조 연대파업, 11월 경제특구법 반대파업, 2003년 1월 두산중공업 배달호 열사 분신에 맞선 파업, 2003년 10월 한진중공업 김주익 열사와 세원테크 이해남 열사 파업, 2004~2006년 비정규직 법안 관련 민주노총 총파업 등 민주노총의 지침이 떨어지면 언제나 파업에 떨쳐 일어섰다. 민주노총 총파업 집회에는 항상 푸른 금속노조의 깃발이 휘날렸고, 수많은 구속자를 낳으면서도 강력한 가두투쟁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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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KM&I 군산공장 비정규직 조합원들이 본사인 인천공장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이에 인천공장 정규직 노조도 연대파업을 벌였다.   ▷ 전국금속노동조합 ]

‘한다면 한다’ 정신으로 산별교섭 돌파

이러한 ‘한다면 한다’는 정신은 사용자들에게 금속노조를 인정하게 만들었고, 한국 노동운동에서 산별교섭의 모범을 만들어냈다. 2001년 임단협에서 금속노조는 각 사업장 단체협약 전문에 금속노조를 유일교섭단체로 인정하도록 했고, 이것을 따내지 못 하면 단체협약을 승인하지 않았다. 2002년에는 산별협약의 전 단계인 ‘기본협약’을 내걸고 문구 하나 수정 없이 관철시키도록 했으며 “기본협약 관철 없이 임금타결 없다”는 방침을 세워 108개 사업장에서 이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2003년 한국 노동운동 역사상 처음으로 산별중앙교섭을 실시했으며, 9일간의 파업을 통해 대공장보다 앞서 “기존임금 저하 없는 주5일근무제”를 쟁취했다. 

그리고 금속노조는 “중앙교섭 타결 없이 지부교섭 타결 없다”는 방침으로 2004년에는 “노조활동을 이유로 손해배상·가압류 금지”와 “금속산업 최저임금의 비정규직 적용”을, 2005년엔 대공장도 전혀 손대고 있지 못했던 “불법파견 확인 시 정규직 채용”과 “비정규직 노조활동 보장”을 따내 노동운동 안팎으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물론 어려움도 많았다. 대공장의 산별전환이 실패하면서 헌신적인 노력을 경주해왔던 간부들이 지치기도 했고, 조직력이 취약한 대공장 사업장에서 ‘한다면 한다’는 정신이 실종되기도 했다. 그러나 2001년 2월8일 창립 대의원대회에서 결의했던 결정하면 반드시 실천한다는 정신은 금속노조 5년의 역사를 유유히 관통해왔다. 

지역지부가 투쟁·조직·사업의 중심으로

금속노조의 연대와 실천정신은 지역지부를 통해 실현됐다. 지역지부는 금속노조 투쟁과 조직과 사업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매주 월요일 지회장이 참석하는 지부운영위원회는 금속노조의 투쟁지침을 책임 있게 토론하고 실천하며 평가하는 회의로 자리 잡았다. 지부운영위원회는 현장 조합원들과 금속노조 중앙을 잇는 핵심적인 가교로 금속노조에 대한 평가와 비판을 통해 중앙과 현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지회에 있던 간부들은 지역으로 나와 지부를 강화시켰다. 금속노조는 대의원대회를 통해 3명 이상의 상근간부가 있는 지회는 이중 3분의 1을 지부 및 본조에 파견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지부 집행력을 강화시켰고, 업무의 효율성을 높여냈다. 임단투가 시작되는 매년 3월부터 가을까지, 지회 교섭위원들은 6개월 가까이 지부로 출근해 활발하게 지부사업을 펼쳤다. 교섭위원들은 각종 교육을 통해 정치의식을 함양했고, 지역의 노조탄압 사업장을 찾아 연대투쟁을 벌였으며, 미조직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공단 선전전을 진행했다. 

자주적이고 독립적이며, 아래로 열린 조직

또한 금속노조의 정신은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노조라는 점이다. 금속노조는 2006년 6월16일 징계위원회를 열어 회사에서 돈을 빌리고 이유 없이 값비싼 선물을 받아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한 간부에게 정권 1년이라는 무거운 징계를 내렸다. 당시 징계위원회는 ‘경고’라는 징계를 내렸으나 해당지부와 당사자가 징계형량이 너무 낮다며 재고해 줄 것을 요청했고, 중앙위원회 회의를 거쳐 조합원의 권리를 1년 동안 정지시키는 중징계를 내렸다. 금속노조는 대공장노조 일부 타락한 간부들에 대해 다시는 노동운동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일벌백계하고, 이를 통해 현장에 스며든 노사담합주의를 거둬내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노동운동을 만들어내야 한다. 

한편, 금속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조합원이 될 수 있다는 산별노조 정신에 따라 금속노조에는 그동안 노동조합을 만들지 못했던 비정규직과 사무관리직 노동자까지 조합원으로 받아들였다. 현재 비정규직은 현대, 기아, 대우, 하이닉스, 하이스코 등 17개 지회 5천여명이 가입해있고, 이들은 금속노조의 지원에 따라 임단협 투쟁을 벌이고 있다. 사무관리직 노동자들도 GM대우, 대우버스사무직, 기아사무관리직, 두산인프라코아사무직 등 5개 지회 2천명이 금속노조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이 외에도 금속노조는 조직 내 평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도 많은 토론과 논쟁을 벌였다. 금속노조는 제2기 5차 중앙집행위에서 “조합의 임금정책 방향은 성과급을 인정하지 않는 것”임을 확인했고, 기본급을 인상하고 성과급을 줄여나가도록 노력했다. 또 임금인상에 대해서 정률이 아니라 정액으로 인상해 우리 내의 격차가 더 벌어지지 않도록 했다. 또한 중앙으로 모여진 금속노조의 예산은 꼭 필요한 투쟁사업에 집중적으로 사용됐다. 특히 2004년부터 쉴 새 없이 터져 나온 비정규직 투쟁에 파업기금을 사용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돈이 없어서 투쟁을 중단하는 일은 없도록 만들어냈다. 

한계를 넘어 전진하기 위하여 

물론 지난 5년을 돌이켜보면 금속노조의 한계와 문제점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산별노조 고유의 임무인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자본의 탄압이 금속노조에 집중됐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조결성이 잇따르면서 간부들이 수도 없이 동원돼야 했기 때문이다. 또 간부들이 투쟁사업에 빈번하게 불려 다니면서 현장 조합원들을 조직하고 토론하는 일이 소홀해지기도 했다. 금속노조 지침에 따라 사업을 하는 관성이 생기면서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토론하고 조합원과 함께하는 다양한 사업들을 만들어내지 못 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두산중공업이나 삼호중공업 등 금속노조 내의 대공장들이 중앙교섭과 지부집단교섭에 참가하지 않아 4만 조합원이 하나의 힘으로 단결하지 못했다. 

그러나 금속노조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전체 노동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 한 걸음씩 전진해왔다. 4만 금속노조 조합원이 지켜온 연대와 실천의 정신이 15만 금속노조로 퍼져나간다면, 이 땅의 노사관계와 노동운동은 1987년에 버금가는 ‘제2의 노동운동시대’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