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가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 전태일처럼!

노동사회

노동자가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 전태일처럼!

편집국 0 4,706 2013.05.30 12:12

 

gman_01.jpg“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貧)한 자는 부(富)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빈한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안식일을 지킬 권리가 없습니까? 
왜 가장 청순하고 때 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 묻고 더러운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전태일 평전』 가운데에서


1970년대 전태일이 쓴 글인데 마치 요즘 시대에 쓴 글처럼 보인다. 서민들이 점점 더 살기 어려워지는 이 시대, 그때로 돌아가는가. 전태일 40주기를 맞이해 전태일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노동계에서는 『전태일 평전』을 다시 읽자는 운동도 벌이고 있다.

197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 밑에서 열악한 노동으로 신음하던 암울한 시기에 지식인과 노동자들의 의식을 일깨운 건 전태일의 분신이었고, 1980년대 이후 학생운동,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에 영향을 끼치고 노동자들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만든 것은 1983년에 돌베개에서 나온 『전태일 평전』이었다. 아마도 『전태일 평전』이 없었다면 전태일의 항거 정신은 지금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촛불처럼 사그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전태일 평전』은 조영래 변호사가 썼지만, 전태일 열사가 ‘글’을 남기지 않았다면 나오지 못했을 책이다. 전태일은 자기 일도 힘들었지만, 다른 여공들이 열여섯 시간씩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했다. 그런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 주고 차비가 없어 걸어서 집에 가다가 통금시간에 걸리기도 했다. 그렇게 환경이 열악하고 시간에 쫓기면서도 전태일은 늘 일기를 썼고, 글을 남겼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 전태일이 한 것처럼

전태일기념사업회는 1988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전태일문학상을 만들었다. 제정 취지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전태일 문학상이 공장에서, 농촌에서, 학교에서, 각각의 삶터와 일터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고 함께 나눠 갖는 문학상이 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전태일문학상은 1988년에 시와 소설, 생활글, 보고문학 부문으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무슨 까닭인지 1990년 3회에 생활글 부문이 없고 시, 소설, 보고문학만 있었다. 당선작이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1993년 5회에는 보고문학 부문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1997년부터 다시 생활글 부문이 생겼다.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로 우수상을 탄 것이 그때였다. 

그 인연으로 2001년 9회부터 2004년 13회까지 생활글 부문 심사위원을 맡았고, 2005년과 2007년에는 전태일청소년문학상 심사를 맡았다. 심사위원을 하면서 느낀 것은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늘 문학을 중시한다는 사실이었다. 늘 시나 소설 부문을 우대하고 생활글은 그저 끼워 넣는 느낌이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노동자들이 꼭 문학을 해야 하나? 그 당시에 전태일 열사가 쓴 글이 문학이냐 생활글이냐 하고 논쟁을 했던 걸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생활글이 글의 한 갈래로써 자리를 잡지 못했던 시기였다. 돌아가신 동화작가 이오덕 선생이 “노동자는 생활글을 써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한 뒤, 생활글은 글의 한 갈래로써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 전까지 생활글은 좀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글은 지식인만이 쓸 수 있는 것’, ‘글은 고상하고 꾸며 쓰는 것’이라고 머릿속에 뿌리박혀 있었다. 그러다가 월간 『작은책』을 만나면서 글은 지어내는 게 아니라 나 같은 노동자의 삶을 있는 그대로 써야 한다는 걸 알았다. 내가 살아왔던 이야기, 공장과 일터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들은 개인의 잡다한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바로 우리 노동자들의 역사였다. 

이 생활글이 우리 노동자들의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글쓰기를 배웠다. 그게 1996년이었다. 그리고 2005년에 버스 운전을 그만 두고 월간 『작은책』 발행인을 맡았다. 그런 경험으로 요즘에는 가끔 글쓰기 강연을 한다.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는 1년에 네 번 정기로 하고, 공무원노동조합, 어린이책시민연대와 구속노동자후원회 같은 곳에서 요청이 들어와 글쓰기 강연을 하러 다닌다. 

글쓰기 강연을 다니면서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사람들은 늘 글이라고 하면 시나 소설, 수필, 혹은 비평 같은 문학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문학이 특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실용적인 글은 글쓰기의 영역에서 밀려나 있었다. 소설가나 시인이 되고 싶은 사람만이 글을 배운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지식인들(지배자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학’에 들어가지 않은 실용글은 우리 생활의 중심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기획서, 보고서, 광고문, 신문 기사, 칼럼, 인터넷, 문자, 일기, 편지, 생활글, 이런 글들이 다 실용글들 아닌가.

뉴욕 『헤럴드 트리뷴』 기자 출신이고, 뛰어난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 예일 대학 등에서 글쓰기를 강의해온 윌리엄 진서는 자신의 저서 『글쓰기 생각쓰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글을 쓰는 방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가끔 시대착오적인 오해에 부딪히곤 하는데, 그것은 소설이나 시처럼 19세기에 ‘문학’으로 인정된 형식만이 그 정의상 문학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사실 작가들이 쓰려고 하는 것, 출판사와 잡지사가 출간하려 하고 독자들이 요구하는 것 가운데 상당수는 논픽션이다.”

권력이 대중의 진솔한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이유

생활글 같은 실용적인 글이 천시받고, 글 하면 문학적인 글만 생각하게 되고, 그 결과 대중들이 글을 못 쓰게 된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우리나라 근대사 전개 과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한국어가 근대 국어로서 자리를 확보하기 시작하는 시점은 1910년대 이후이다. 우리나라는 1910~1945년까지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글은커녕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던 시기였다. 1945년 해방됐지만 1950년 6?25전쟁으로 분단이 됐다. 

청산당해야 할 친일파들이 미국에 빌붙어 거꾸로 정권을 잡은 뒤로는 대중들이 말과 글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빨갱이로 몰려 목숨까지 잃었다. 1960년대와 70년대는 박정희의 언론 탄압으로 ‘말’과 ‘글’의 자유를 빼앗겨 버린 시기였다. 그리고 이어진 전두환 독재 정권은 보도지침을 내려 검열에 걸린 기자들을 해직하거나 대중들을 옥에 가뒀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나오면서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수구세력들이 지배하고 있다. 

그 지배 세력들은 대중들이 올바른 글쓰기를 배우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런 글을 아예 쓰지 못하게 잘못된 글쓰기 교육을 주입했다. 오로지 반공 사상이 담긴 국정 교과서만 외우도록 강요했다. 대중들은 세뇌당할 수밖에 없었다. 글은 아름다운 것, 고상한 것, 지어낸 것이라 고정관념이 머릿속에 뿌리박혔다. 글짓기 대회나 백일장에 나가면 글감은 늘 정해져 있었다. 멸공과 반공을 주제로 한 글이나, ‘벌’과 ‘나비’나 ‘꽃’ 또는 좀 더 자세한 제목으로는 ‘하양 나비’ 또는 ‘진달래’와 ‘개나리’ 같은 제목들, 좀 더 학년이 올라가면 ‘아침 이슬’이나 ‘달맞이 꽃’ 같은 제목들로 글을 써야 했다.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쓸 거리 찾기 단계부터 잘못되어 있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글이라는 건 ‘지어내는 것이다’, ‘아무 거나 쓸 수 없다, 그러니 특별한 걸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꾸 꾸미게 만들고 모방하게 만들고, 말장난하는 글을 쓰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현실을 비판하는 글은 아예 쓸 수가 없었다. 

역사는 말과 글을 통해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것이다. 최근 20대는 독재정권의 억압과 검열과는 깊은 연관 없이 살아왔다. 그런데 이들조차도 쉽고 재미있는 생활글을 천박하게 생각하고, ‘나’가 들어가지 않은 관념적인 글을 쓴다. 그리고 현실을 비판하는 글을 쓰지 못한다.  그런 글을 쓰면 개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역사적 경험이 무의식을 통해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구 세력의 정점에 서 있는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미네르바 필화 사건이나 천안함 사건에서 보듯이 실제로 불이익을 받는 이들이 많으니, 더욱 말과 글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젊은이들이 몸으로 느끼고 있다. 

게다가 아직도 국가보안법 같은 악법을 쥐고,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수구 지배 세력은 여전히 대중들에게 글쓰기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글을 가르치고 있지만 머리에서 지어내는 관념적인 글이 좋은 글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고등학교도 글쓰기 교육을 한답시고 논술을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논술은 글쓰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논술은 글쓰기 교육이 아니라 부자들의 자녀들을 대학에 입학시키려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논술은 글의 여러 갈래 중의 한 갈래 형식에 불과하다. 논술문은 다른 여러 종류의 글을 써본 뒤에 써야 한다. 책도 못 읽게 하고, 글이라곤 전혀 써본 적이 없는 학생들한테 처음부터 논술문 훈련을 시키는 것은 글쓰기를 싫어하게 하는 일밖에 안 된다. 지배 세력은 이렇게 별로 글쓰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 논술이나, 뜬구름 잡는 문학만을 가르쳤고, 사실을 기록하는 논픽션이나 생활글을 천박한 글이라고 가르쳐 왔다.

전태일문학상, 생활글·르포에 비중 둬야 … 수상집도 좀 잘 만들었으면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시발점이 된 전태일기념사업회도 마찬가지이다.  ‘글’ 하면 문학이라는 생각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 전태일문학상 운영위원회는 여전히 문학을 좇는 사람들로 구성이 돼 있다. 이번에 제18회 전태일문학상 수상 작품집 『그대 혼자가 아니랍니다』가 출판사 ‘사회평론’에서 나왔다. 처음으로 생활글과 기록문이 시와 소설보다 훨씬 많았는데도 여전히 책 뒷부분에 실려 있다. 이선옥 씨는 KTX 여승무원, 진방스틸코리아, 코오롱, 동희오토, 로케트전기, 콜트콜택 노동자들과 함께 다니고, 길에서 노동자들을 만나 인터뷰한 글을 실어 기록문에 당선됐다. 이런 논픽션은 우리 노동자들이 지어 내는 시나 소설보다 가장 많이 쓰고 읽어야 할 글이다. 이렇게 노동자들이 실제 겪는 일을 쓴 생활글과 르뽀는 질과 양 면에서 우수한데도 왜 뒤에 실려야 하는가. 

장정일은 소설가이지만 이런 논픽션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에서 주장한다. 

“글쓰기의 가짓수는 무척 많고, 교양이란 굉장히 폭이 넓은 세계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글쓰기 하면 곧바로 시나 소설을 떠올리고, 그걸 읽는 게 교양의 다인 양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양한 글쓰기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특정 장르의 문학이 글쓰기의 피라미드 가장 높은 꼭대기에서 좌정하고 있으면서 그 외의 글쓰기를 억압하는 사회, 고작 시집이나 소설 몇 권을 읽는 것으로 교양인 행세가 가능한 나라는 가망이 없다.
BBK 같은 사건이 터졌을 때 제대로 된 사회에서라면, 거의 반년 안에 스무 권이 넘는 논픽션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그 가운데 어느 한 종이 100만 부 이상 팔리고 그 사건이 시중의 화제가 되고 칼럼에 오르내리는 사회가 『엄마를 부탁해』 같은 소설이 100만 부나 팔리는 사회보다 훨씬 바람직할 수 있다.
소설 『도가니』도 그렇다. 청각장애자 학교에서 일어났던 성폭력 사건을 유명 작가가 논픽션으로 썼다면, 사회적 파급력은 상당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영향으로 진실이 발본되고 미비한 법들이 고쳐질 확률도 높았으나, 문학이 너무 강한 사회는 온갖 사회적 의제와 다양한 글감을 문학이란 대롱으로 탈수해 버린다.”
 

또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 전태일 수상 작품집도 이제 전태일재단에서 내야 하지 않는가? 『전태일 평전』도 돌베개 출판사에서 ‘아름다운 전태일’로 판권이 넘어 오지 않았나. 수상 작품집을 내 주는 사회평론 출판사가 너무 성의가 없기에 하는 말이다. 수상 작품 표지를 보라. 대체 그 자료집 같은 똑같은 표지를 몇 년이나 써 먹고 있는가? 게다가 안에 들어 있는 사진들을 보라. 일명 ‘뽀샵’이라고 하는 포토샵 작업만으로도 그렇게 시커멓게 나오게 하지 않을 수 있다. 이걸 책이라고 낸다는 말인가. 그저 구색 맞추려고 낸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는다. 그 어떤 책보다 더 많은 대중들에게 읽혀야 할 책을 이렇게밖에 만들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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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어느 노동문화단체에서 이뤄진 글쓰기 강연 모습.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 ▷ 출처: 새노리 ] 

노동자들이 말과 글을 되찾아야 세상이 바뀐다

문자를 장악한 세력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신문과 방송을 장악해 대중들의 의식을 지배한다. 우리나라는 수구 신문 ‘조중동’이 신문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그 『조선일보』는 늘 노동자들을 비아냥거리는 내용이 담긴 사설을 싣는다. 2008년 3월23일치 조선일보 사설에 실린 글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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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륭전자, 1095일 농성 기록 세우고 노사 함께 망하다’

“……3년 농성은 회사와 노조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내비게이션, 위성라디오를 만드는 기륭전자는 2004년 매출 1700억 원에 220억 원의 흑자를 봤다. 2007년엔 매출이 447억 원으로 4분의 1로 줄고 수지는 269억 적자로 돌아섰다. 대주주는 세 번, 대표이사는 네 번 바뀌었다. 회사는 작년 10월 생산라인을 아예 중국으로 옮겨 버렸다. 정규직 170명 가운데 75명은 올 봄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떠났다. 비정규직은 급여 수준, 근무 환경, 고용 조건에서 정규직에 비해 열악한 처우를 받고 있다. 기륭전자 비정규직도 농성 시작 당시 월 급여가 최저임금에서 10원 더 많은 64만 1,850원이었다고 한다. 그런 데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같은 생산라인에 섞여 일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울분이 쌓일 만하다. 6월과 7월 노사가 잠정 합의안을 만들었지만 정규직과 노조 강경파의 반대로 무산된 일이 있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노사 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벌어진 감정의 골이 화합을 어렵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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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이렇게 노조원들이 “협력회사 입사를 거부하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만 요구”해 회사를 거덜냈다고 평가했다. 기륭전자에 대한 노동부의 특별근로감독 결과 불법파견 판정이 내려졌다는 사실도 썼지만 법인과 대표이사가 각각 500만 원의 벌금을 냈다는 말로 본질을 가렸다. 

노조가 들어서기 전 기륭전자는 한 해 220억 원의 흑자 기업이었다. 그러나 그 흑자는 비정규직 70명에게 최저임금보다 딱 10원이 더 많은 64만 1,850원의 월급만 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게다가 회사는 노동자들에게 옆 사람과 말도 못하게 할 정도로 탄압을 하면서 일을 시켰다. 그리고 노조 때문에 망한 게 아니라 공장을 위장 이전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더 참을 수 없어 노동조합을 만들어 항거한 것인데, 이런 사실을 『조선일보』는 교묘히 왜곡해 노동자들 때문에 망한 것처럼 보도하고 책임을 돌린다. 

노동자들은 이런 신문을 구독한다. 그런 신문을 끊어야 하는 건 물론이고 나아가 노동자들이 직접 글을 써야 한다. 노동자들의 의식을 깨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글쓰기이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글을 쓰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벗어나게 해야 할 곳은 노동조합이고 간부들이다. 

하지만 노동조합과 간부들도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글쓰기를 가르치는 강좌를 여는 노동조합은 별로 없다. 요즘엔 인터넷 발달로 인쇄물로 된 노보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사라지고 있는가? 오히려 인쇄 매체의 중요성이 더욱 드러나고 있다. 인터넷에서 보는 글과 인쇄물로 나오는 노보는 차이가 있다. 인터넷 매체에서는 가벼운 글쓰기만 판치고 있다. 주제가 깊이 있어도, 한 번 읽고 별 생각 없이 넘어가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은 다시 인쇄물을 내는 매체가 늘어나고 있다. 지역 인터넷매체인 『은평신문』 같은 곳처럼 종이 신문을 다시 발행하는 곳이 나오고 있다.

글을 쓰고 나누자! 고통과 기쁨을 나누고 연대하자!

모든 노동자들이 글을 쓰고 그 글을 우리가 공유하고, 고통을 나누고 연대할 때 이 세상은 변할 것이다. “진실을 말하지 않고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이 있다. 핍박받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우리 노동자들이 스스로 글을 써서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노동자가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5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