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주기 사업 속에서 돌보는 전태일의 삶과 정신

노동사회

40주기 사업 속에서 돌보는 전태일의 삶과 정신

편집국 0 7,005 2013.05.30 12:09

중졸 학력이 전부인 나는 급한 성격 탓에 신문조차도 제목만 보거나 처음과 끝만 읽고 대충 감으로 때려잡습니다. 또 게으르고 무지해서 『노동사회』라는 잡지가 사무실에 배달되어 오지만 대부분 한 꼭지조차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합니다. 그런 나에게 글 청탁이 들어 왔습니다. 그것도 고급스러운 글이 실린다고 생각하고 있는 『노동사회』라는 곳에서, 글을 써 본 것이라곤 30년 전과 24년 전 감옥에서 쓴 몇 통의 편지가 전부인 나에게 말입니다. ‘전태일 40주기’에 대해서 써 달라 하니, 관계자(저는 전태일 40주기 행사위원회에서 재정과 교육을 맡고 있습니다)라서 피할 수도 없고, 결국 주눅이 든 채로, 마지막 날에 이 글을 씁니다.  

kh24_01.jpg
[ 전태일 다리 이름 짓기 범국민 캠페인 808 행동 3일째 모습. 초등학교 학생들이 현장체험학습 차 참여했다.  ▷ 출처: 전태일, 2010
]

40주년 사업, 전태일의 이름으로 하나 되어 보자

전태일 40주기를 맞아, 전태일 재단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20여 명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40주기 행사위원회(준)>를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비정규직과 청년실업 등 ‘소외받는 노동과 함께 한다’는 기조를 세우고, △광장팀, △홍보팀, △조직재정팀, △기억주간팀, △교육팀 등을 꾸려 40주기 행사 계획을 세웠습니다. 광장팀은 6월부터 매달 투쟁 현장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전태일 문화제를 하며 투쟁에 결합했습니다. 기억주간팀은 10월30일 시청광장에서 전태일 축전을 진행했고, 11월1일부터 11월6일까지는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보신각에서 문화행사를, 또 11월1일부터 13일까지는 민족미술인협회(민미협) 회원들의 작품들로 청계천 2가에서 6가까지 전시회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나머지 팀들도 이름에 걸맞은 사업계획을 세우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0주기 행사의 핵심 사업으로서 현재 ‘버들 다리’라 불리는 청계천 6가 평화시장 옆에 위치한 다리의 이름을 ‘전태일 다리’로 바꾸기 위한 대국민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태일 다리 이름 짓기 범국민 캠페인 808 행동>이라 이름 붙여진 이 사업의 주요 내용은 전태일의 생일인 8월26일 선포식을 시작으로 그가 분신한 11월13일까지 80일 동안 하루 8명이 참여하여 피켓 캠페인을 펼치는 것입니다. 
5년 전 청계천이 지금의 형태로 만들어지며 다리가 생겼을 때, 시민공모로 해서 버들 다리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 해는 전태일 35주기였는데요. 해서 버들 다리 일대에 약 3만여 명이 참여하여 전태일 동지를 기리는 글을 담은 5천여 개의 동판을 부착하고, 전태일 동상을 만들어 세워 그 정신을 기리는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버들 다리 바로 옆에는 평화시장이 있는데, 이곳은 1970년 11월13일, 스물세 살 청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불사른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전태일 동지의 영혼과 시민들의 전태일 대한 마음이 깃든 이곳에 아무 의미도 없는 버들 다리라는 이름보다는 전태일 다리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5년 전부터 진행된 전태일 다리로 이름을 바꾸기 위한 노력들은 40주기를 맞아 마침내 결실을 거둬,  서울시 시의회는 지난 10월19일 ‘전태일 다리’로 명명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고, 서울시는 시민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버들 다리’와 ‘전태일 다리’를 병행 표기하는 방안을 서울시 지명위원회에 상정한 상태입니다.

한편, 40주기 행사위원회를 꾸릴 때는, 다리명명사업, 광장사업, 기억주간사업, 시민축전 등 보이는 성과를 잘 완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지금 진보라는 이름으로 일을 하면서도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갈라져 있는데 ‘전태일이라는 이름으로 하나 되어 보자’는 취지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행사를 마무리해가고 있는 지금, 생각이 다른 여러 사람들이 함께 일해 온 보이지 않는 성과도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전체의 일부인 나”

전태일은 초등학교 4학년, 중학교 과정을 약 1년 정도만 다녔지만 글을 참 잘 썼습니다. 자기를 규정할 때 항상 독립적인 개체로 생각하지 않고, “전체의 일부인 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제라도 다른 사람과 자기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을 칭할 때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그랬습니다.

“나를 아는 나”는 누구냐 하면 평화시장에서 혹사당하고 착취당하던 어린 시다들 혹은 바보회 친구들입니다. 이처럼 나를 아는 친구는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를 모르는 나”는 누구냐 하면, 내가 모르는 곳 어디에서 평화시장 시다들처럼 착취와 빈곤의 장시간 노동에 고통당하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사람들, 혹은 내가 모르는 곳에서 전태일 동지처럼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고자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세상 어디에서 혹사당하고 착취당하며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전태일인 것입니다.

“너희들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전태일 동지는 나이 17살이 되던 1965년, 평화시장의 학생복 맞춤집인 ‘삼일사’에 시다로 첫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하루 일당이 50원에 불과한, 말할 수 없이 불평등한 곳이었습니다. 당시에 다방에서 차 한 잔 값이 50원이었으니, 하루 14시간을 힘겹게 일한 대가가 일반 사람들이 차 한 잔 마시는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당시 평화시장 1층은 점포였고 2층과 3층이 공장이었습니다. 10여 평 남짓한 공장들은 공간을 늘려 사용하기 위하여 따로 다락을 만들었는데, 다락 위에서는 재단을 하고 다락 밑에서는 하루 온종일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미싱과 시다 일을 해야 하였습니다. 

환풍기 시설 하나도 없는 곳에서 일하다 보니 위장병이나 폐병에 걸리기 일쑤였습니다. 건강검진은 형식적으로 했는데, 직원이 30명이면 2명 정도가 대표로 받고, 엑스레이를 찍어도 필름이 없었으며, 그나마 결과를 통보해주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전태일은 미싱사가 각혈을 하며 쓰러진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들은 위해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근로기준법을 공부하게 되는데 책이 온통 한자투성이였습니다. 그래서 전태일을 한자를 배우기 위하여 대학생 친구 하나 있었으면 하는 탄식을 하였습니다.

근로기준법을 통하여 노동자가 하루 8시간 일하고 주 1일 쉬게 하고, 1년에 한번 은 건강검진을 받아야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노동자를 보호하는 여러 가지 법이 있음에도 우리는 전혀 보호받고 있지 못하니 우리는 바보다, 하면서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하여 ‘바보회’를 만들고, 또 ‘삼동친목회’도 만들어 근로조건 개선에 앞장서기도 합니다. 자신이 일하고 있는 곳인 평화시장,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나이 어린 여공들,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 전태일 동지에게는 그것이 바로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마음은 전태일이 분신하기 3개월 전 삼각산 기도원에서 유서격으로 쓴 다음과 같은 일기에 잘 나타납니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 어린 동심의 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전태일의 ‘풀빵 정신’ 곱씹어야 할 정규직 노동조합

그 당시 평화시장에는 여러 종류의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재단사, 미싱사, 다림질하는 시아게사 등이 있었지만, 전태일 동지는 그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있는 12~15살 먹은 시다에 대한 사랑이 아주 구체적이고 극진했습니다.

그래서 노동환경을 개선함에 있어서도 시다들에게 주안점을 두었고, 청순하고 때 묻지 않은 이들에게 왜 이 사회는 모질고 어두운 면만 보이느냐며, 국가 경제성장의 원동력인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전태일 동지가 해고당해 삼각산에서 막노동을 하면서도 꼭 돌아가고자 한 곳도 평화시장의 어린 시다들이 있는 곳이었고,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한 곳도 이 세상에서 가장 밑바닥에서 착취당하고 장시간 노동에 고통당하는 시다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는 곳이겠지요.

오늘날 우리가 전태일 40주기를 맞아, 전태일, 전태일, 하며 ‘전태일 정신’을 부르짖는데요. 말로만 그럴 것이 아니라 전태일 정신이 정말 무엇인지, 혹은 거기서 얻어야 될 교훈이 뭐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진심으로 해봐야 할 겁니다. 

전태일 동지는 교통비를 털어서 산 풀빵을, 점심을 굶어 배가 고픈 시다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는 두세 시간을 걸어서 집에 가곤 했지요. 이 풀빵은 단순히 허기를 달래는 몇 조각의 빵이 아니라, 나도 어렵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노동자와 함께 하려는 사랑과 배려와 연대의 표시이기도 한 것입니다. 만약 전태일이 살아 있다면 바로 가장 밑바닥에 살고 있는 비정규직이 있는 곳이나, 청년실업 등 차별받는 곳으로 가고자 할 것이고, 그들을 위해서 투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소위 정규직 노동자들 가슴 속엔 전태일이 없는 듯합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으로 고통을 당해도, 정규직 사업장에 점점 비정규직이 늘어가도, 현재 내가 속해있는 정규직만 무사하면 된다는, 이런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참으로 개탄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40년 전 전태일 동지가 풀빵을 나누면서 밑바닥에 있는 시다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투쟁해 나갔듯이, 정규직에 있는 노동자들도 전태일 40주기를 맞아 전태일의 ‘풀빵 정신’을 생각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동지적 애정으로 사랑하고 배려하고 연대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운동이 그러겠지만 특히 ‘노동운동은 연대하는 것’입니다. 연대하지 않는 운동은  이익단체나 다름없습니다.

kh24_02.jpg
[ 1960년대 평화시장의 어느 공장의 모습.  좁은 공간에 작업대가 복층으로 꾸며져 ‘다락방’이라 불렸다. ]

 “나는 어려움이 있으면 전태일을 생각합니다”

전태일 동지는 가난하게 살아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가출도 하고 구두닦이, 신문팔이,  껌팔이, 삼발이 장사, 심지어는 동냥을 할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을 했음에도 절대로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절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이래서는 안 된다, 우리 노동자도 인간답게 살아야 된다, 우리 같은 밑바닥 인생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건설되어야 한다, 하는 높은 꿈과 이상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려고 하는 의지와 열정을 키워 간 사람입니다.

이것이 전태일이한테서 가장 위대한 것이고, 전태일 정신의 핵심 요체입니다. 나에게 있어서 전태일은 무엇이냐 하면, 기독교인들은 어려움이 생기면 예수를, 불자들은 어려움이 있으면 석가를 생각하겠지만, 나는 어려움이 있으면 전태일을 생각합니다. 내가 아무리 어려워본들 전태일만 하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는 거죠. 어려움 속에서도 큰 뜻을 가지고 살다간 태일이 형은 내 인생의 좌표입니다.

‘전태일 정신’ 핵심은 철저한 의지의 낙관

전태일 평전 맨 앞 구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하루 종일 우울한 편입니다.  내가 그 어려운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기 때문입니다.”

전태일은 자기가 어려운 생활을 너무너무 많이 해봤기 때문에 우울하기는 했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 사는 사람도 인간이다, 하며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건설되어야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다음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과거가 불우했다고 해서 그 과거를 원망만 한다면 그 과거는 너 인생에 사생아가 되는 것 아니냐?

과거가 불우했다고 해서 그것을 자꾸 후회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오히려 거기에서 더 큰 사랑과 더 큰 지혜를 얻어 나의 발전의 계기로 삼을지언정, 거기서 낙담하거나 절망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전태일, 우리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비추는 거울

전태일 동지가 바랐던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서로가 용해되어 있는 상태, 인간적인 정을 나누면서 살 수 있는 사회, 노동을 해도 즐거운 노동. 전태일 동지는 공부를 많이 안 했기 때문에 사회과학적 용어를 쓴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것들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해방된 노동 해방된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높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전태일 동지는 투쟁했습니다. 그리고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하며 죽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죽음이 헛되지 않을 줄 알았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전태일 동지가 죽고 나서 어머니부터, 청계노동 형제들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역사 발전의 계기로 삼았습니다. 

전태일 동지가 분신한 직후 1970년 11월25일, 신구 합동예배에서 김재준 목사는, “오늘 우리는 전태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서 모였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이 나라 정치인, 지식인, 노동운동 지도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말한 것이기도 합니다. 40년이 지난 오늘날 정치인, 지식인은 물론이고, 특히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은 없는지 깊이 성찰해 볼 일입니다

40주기 사업 이후 전태일 재단에서 할 일

40주년 사업 이후 전태일 재단에서는 일상적인 연대활동과 전태일 문학상, 전태일 노동상 등 기존 사업뿐만 아니라, 광장팀에서 매달 진행했던 ‘투쟁사업장과 함께 하는 전태일 문화제’ 등을 계속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재원이 없어 못하고 있지만, 노동상을 국제화시키는 사업도 하려고 합니다. 기업들은 이미 다국적화 되어 동남아는 물론이고 아프리카 등 착취의 구조만 있으면 지구촌 어디라도 들어가고 이주노동자들은 날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들도 자기의 나라에서 노동운동을 통해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전태일을 알리고, 노동운동이 활성화 되도록 노동상을 국제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 나라 말로 『전태일 평전』을 발간하는 사업도 필요합니다.

장기적인 사업으로는, 현재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전태일에 대하여 “1970년 근로조건을 외치다 분신자살한 자임”이라고 글 한 줄과 작은 사진이 실려 있는데, 전태일의 삶과 정신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에 온전하게 실리도록 하는 운동을 전개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전태일 기념관 건립사업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래서 많은 노동자들의 휴식 공간과 각종 연구 및 교육사업, 그리고 지금도 사무실이 없어서 고생하는 많은 노동단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기념관이 건립되었으면 합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5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