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유니온’은 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의 별칭이다. 방송작가유니온은 2016년 3월부터 본격 활동을 시작해, 2017년 11월11일 토요일에 공식 출범했다. 직위와 분야, 지역을 망라한 방송구성작가 1백여 명이 가입 되어 있으며, 현재도 가입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18년 2월24일 지부 산하 영남지회가 출범했으며, 봄에는 대전충청지회가 출범할 예정이다. 그동안 관행으로 치부됐던 방송작가들의 불합리한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이슈파이팅, 사업장별 투쟁, 법제도 개선, 노동 상담 등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가 노동자인가’라는 첫 의심
2007년 노동절로 기억한다. 지역의 한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서울 집회에 참석 행진 중에 누군가 “감정노동자도 인간이다”라고 적힌 피켓을 나눠줬다. 2년차 작가였던 필자는 피켓을 덥석 받아들고 목청을 높였다. 함께 가던 지인이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필자를 바라봤다. “방송작가니까 당연히 감정노동자가 아니냐”고 물었던 필자에게, 지인은 행진 30분간 노동강의를 시작했다. 감정노동자의 정의와 불합리한 환경에 대해, 방송작가는 왜 감정노동자에 포함되지 않는지 말이다. 생각은 다른 차원으로 넘겨졌다.
‘그럼 방송작가는 무슨 노동자일까, 아니 노동자이긴 한 걸까?’
이에 대답은 연차가 높아져도 쉽게 풀리지 않았다. 방송작가도 ‘기획·취재·구성·글’이라는 노동을 방송사에 제공한다. 그리고 바우처나 원고료의 형식으로 방송사 혹은 제작사에 노동의 대가를 지불받는다. 생산물은 방송제작물이 되어, 소유권과 잉여가치를 방송사가 취하게 된다.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에 대입해도 분명 ‘노동자’임이 맞는데, 우리는 노동자가 아.니.었.다.
18년 전의 싸움을 기억하며
방송작가들의 ‘노동자성’ 여부에 대한 첫 싸움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산MBC 방송작가들은 자사의 MC, DJ, 리포터 22명과 함께 방송사에 처우 개선을 요구하고 나섰다. 회사가 요구에 불응하자, 이들은 1999년 전국여성노동조합에 가입하고 ‘마산MBC분회’로 공식적인 단체교섭을 요청했다. 방송사가 구성작가 등이 방송사를 위해 일함을 인정하고, 진행료 인상·채용 및 해직기준을 마련해 달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또다시 방송사는 구성작가 등이 “근로자가 아니므로 교섭당사자가 될 수 없다.”라며 교섭 자체를 거부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8년 전에 시작한 이 싸움은 법적 투쟁을 포함해 무려 4년여 동안 이어졌다. 사건은 중앙노동위원회, 서울행정법원, 서울고등법원을 거쳐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진행됐다. 먼저, 마산MBC분회는 방송사가 단체교섭에 응하지 않자, 경남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구제신청을 했다. 그러나 이는 기각됐다. 그리고 2003년 법원은 “구성작가, MC 등은 노조법상의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어, 단체교섭 요구를 거부했다 해도 부당노동행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최종 판결을 내렸다. 방송작가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한편, 그 과정에서 유의미한 결과도 있었다. 중앙노동위원회가 “구성작가는 PD를 포함한 제작진들과 팀을 이루면서 프로그램의 전반적인 과정에 참여하고 있으며, 근무 시간과 장소도 실질적으로 담당 PD에 의해 결정되는 점을 고려할 때 종속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라고 판단한 것이다. 노동자성을 부분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다. 방송작가들의 노동자성에 대한 법적인 싸움은 지고 말았지만, 이 사건은 방송사에 숨어있던 수많은 방송작가의 가슴에 희망의 군불을 피웠다. 방송작가들의 노동환경 개선에 대한 요구가 들불처럼 번졌고, 2005년에는 대전, 대구, 광주 등에도 자발적으로 방송작가들이 모여 전국여성노동조합에 가입했다.
그러나 거대한 방송 권력은 법적으로도 이미 노동자성을 부정당한 방송 구성작가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았다. 방송작가들의 처우 개선의 속도에 반비례하게도, 방송제작 환경과 규모·제작프로그램과 제작비 등은 2000년대 후반부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세상은 넓고, 방송작가는 많아졌다. “너 아니어도 할 사람은 많다.”라는 말은 방송사 PD들의 ‘18번 갑질 멘트’가 됐다. 방송사들이 수백억을 벌고 한류를 이끌며 세계에 진출해도, 방송작가들의 원고료는 제자리걸음에 가까웠다. 새벽 별을 보고 출근해 새벽 택시를 타고 퇴근하는 신입 작가들의 삶은 계속됐다. 부당하다는 목소리를 내면 자칫 ‘아웃(프로그램에서 하차함)’ 되는 경우도 왕왕 생겼다. 작가들이 더 뭉치지 못했다. 서로 다른 출퇴근 시간과 불규칙한 업무 때문만은 아니었다. 급변하는 방송환경과 거대한 방송 권력 안에서, 방송작가들은 뭉치기보다 각자 스스로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다.
‘섬’처럼 일하던 방송작가들, 다시 모이다.
방송작가도 노동자라는 이야기가 다시 대두된 건 최근 2~3년 전이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은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으로 방송작가들을 조직하기에 나섰고, 방송작가유니온이 탄생했다. 초기 활동가들의 헌신과 많은 방송작가의 관심이 이어졌다. 방송계에서도 쉬쉬하던 방송작가들의 노동환경 문제도 차츰 수면 위로 올라왔다. 방송사 PD들이 마음대로 채용하고 해고하는 관행, 물가 인상률도 따라오지 못하는 박한 원고료, 4대 보험 미적용, 계약서 한 장 없이 일하는 노동환경 등을 방송작가도 스스로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각자 하나의 ‘섬’처럼 일하던 방송작가들이 함께 만나고 다시 힘을 모으게 됐다.
2017년 11월11일 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지부장 이미지, 별칭 방송작가유니온)가 출범한 것이다. ‘이번 생은 노조가 처음이라’는 20여 명의 작가가 모여, 출범 준비위원회를 꾸리고 각자 역할을 맡았다. 홍보를 맡은 작가들은 틈틈이 시간을 내 출범식 포스터를 상암, 여의도, 목동, 대전 등지에 붙였다. 조직을 맡은 작가들을 모든 인맥을 총동원해 조합원 모집에 박차를 가했다. 노동 분야의 정부기관 관계자, 국회의원들을 섭외하고, 출범식 진행 원고를 쓰는 것도 작가들의 몫이었다. 우리가 뭉치면 아무것도 못 할 게 없다는 것을 보여준 눈물의 출범식이었다. “화장실에서 울지 말고 노조에서 폼 나게 웃어보자!”라는 출범식 구호는 “투쟁”이라는 말보다 우리를 더욱 연대케 했다. 출범식에 오기 위해 새벽부터 출발한 안동·춘천·여수 작가들의 참여는 또 하나의 감동을 주었다.
물론 방송작가유니온이 공식 출범하며 꽃길만 걸은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 정말 열심히 헌신한 소수 활동가들이 아쉽게도 많이 함께하지 못하기도 했다. 이들의 수많은 법제도 개선 활동과 이슈파이팅은 방송작가유니온을 성장시킨 동력이었다. 그러나 소수 활동가들의 선도적 투쟁은 작가들이 방송작가유니온에 강한 소속감을 갖고 연대를 하기에, 스스로의 문제를 자신의 사업장과 공간에서 싸우고 개선하기에, 무언가 부족했다. 출범의 형태와 시기를 두고도 내부에서 많은 진통이 있었다. 뭉치지 않는 방송작가들에게 ‘정말 노동조합이 될까?’라는 우려도 제기됐다. 노조 상급단체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이견이 있어 격렬하게 논쟁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초기 선도적 활동가 일부는 발전적 이탈을 선언했다.
남은, 아니 ‘남겨진’ 작가들이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처음부터 노동조합의 체계를 잡아야 했다. 어려운 길이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살아온 방식도, 일해 온 공간도, 프로그램의 분야도, 심지어 뒤풀이 안주에 대한 호불호마저 각자 다른 우리가 단 하나만큼은 흔들리지 않고 같은 생각을 했다.
‘거대한 방송 권력 아래 많은 작가의 눈물과 열정으로 제작되는 이 판을 한 번쯤은 바꿔보자!’
불공정한 판을 바꾸기 위한 우리의 과제
방송작가유니온은 2017년에 결성한 신생 노조로 많은 숙제를 안고 있다. 먼저 초기부터 진행해 왔던 ‘방송작가 표준계약서 도입’을 들 수 있다. 방송작가들은 구두로 계약하거나, 노동조건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일을 시작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방송작가들을 노동자로 보호할 수 있는 가장 기본은 종이 한 장, 계약서에 있다. 이에 지난해 말, 문체부는 「방송 스태프 표준계약서」를 발표하고 방송제작사에 권고한 바 있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방송사들이 얼마나 이를 이행할지가 관건이다. 여기에 한 발 나아가 방송작가유니온은 방송작가들에게 적합한 표준 근로계약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내고, 실제 방송사가 적용토록 하는 법제도 마련과 사회적인 압박을 해야 한다.
방송작가들의 원고료 현실화 또한 절체절명의 과제다. 현재는 방송사별로 제각각 다른 원고료 기준과 등급, 인상 규정이 없는 상황이다. 다수의 방송작가는 물가상승에도 못 미치는 원고료(급여)로 일을 하고 있다. 방송작가유니온이 지난 2월에 단독 실시한 ‘지역방송작가실태조사’에 따르면, 특히 지역방송작가들은 상당수가 생계 자체를 걱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매해 순차적으로 원고료를 인상하고, 최저임금 인상분을 따르도록 요구해야 한다. 현재 방송작가유니온은 KBS, MBC 등에 이를 포함하는 3대 요구안을 제출했으며, 지역별로 처우개선안을 방송사 및 제작사에 요구하기로 결의했다. 이외에도 기획료, 재방료의 문제 개선 요구, 부당노동, 성폭력, 임금체불 등에 감시와 상담 활동도 일상적으로 이어갈 것이다.
방송작가유니온의 내부적 과제는 모든 노조의 숙제이기도 한 조직의 내실 다지기다. 경력과 연차, 장르, 지역을 불문하고 모든 사업장의 작가들이 가입하는 만큼, 이들을 다양한 관심사와 층위로 나누어 함께 모이고, 스스로 공통의 의제와 개선점들을 찾아내고, 소통하도록 하는 것이다. 출·퇴근이 일정치 않고, 방송시간과 근무 시간이 달라 쉽게 모일 수 없는 방송작가들을 어떻게 더 많이 규합하고, 오프라인으로 끌어내느냐는 앞으로 꾸준히 고민해야 할 사안이다.
방송작가들의 처우 문제와 개선안 마련 등을 중앙에서만 펼칠 것이 아니라, 각자 사업장에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고 해도 노동법에 걸리지 않는 매우 불안전한 환경에서 쉽지 않은 일임엔 분명하다. 그러나 먼저 ‘방송작가들은 모이지 않는다, 뭉칠 수 없다, 해봐야 안 된다.’는 뿌리 깊은 절망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불합리한 관행을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그것이 크든 작든 조합원인 나에게서 시작된다는 용기를 방송작가유니온이 함께하며 심어줘야 할 것이다. 이에 방송작가유니온 중앙집행위는 상위 방송사들을 상대로 요구안을 만들어 내고 실질적인 법제도 개선, 방송작가 처우 개선 이슈파이팅, 지회 및 분회 지원 업무를 통해 조합원들의 삶으로 성과가 스미도록 할 것이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지역별, 사업장별 지·분회에서 스스로 공통된 의제를 형성하고 요구하며 교섭할 수 있을 것이다. 2월24일 출범한 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영남지회는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노동자성 인정,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방송작가유니온의 모든 활동은 결국 방송작가의 ‘노동자성 인정’으로 귀결될 것이다. 18년 전 마산MBC 방송작가 선배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표준계약서 작성, 원고료 현실화, 4대 보험, 고용 안정, 공정 노동은 한국사회의 방송작가들이 노동자로 누려야 할 권리다.
18년 전 법원은 “채용의 결정, 근무 시간과 장소, 업무의 독자적 영업 가능성” 등을 이유로 방송작가를 노동자로 인식하지 않았다. 강산이 두 번 변했다. 이제 노동자의 기준은 달라져야 한다. 방송작가유니온이 노동을 제공하고 원고료(급여)를 받으며 방송프로그램을 맡아 일하는 누구에게나 노동조합 가입의 문을 열었듯이, 우리의 노동법도 방송작가들에게 활짝 문을 열어야 한다.
50년 이상 계속되는 가뭄과 황사, 세계적인 식량부족, 붕괴된 미래를 그린 영화 <인터스텔라>. 인류의 처참한 미래사회를 표현했다는 뿌연 먼지 폭풍 속의 첫 배경은 마치 방송작가들의 오래된 미래라 생각됐다. 18년 전 선배 방송작가들은 노동환경 개선과 노동자성 인정을 위해 싸워왔다. 그러나 선배들이 꿈꾸던 미래는 오지 않았고, 오늘의 방송작가 노동환경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끄덕하지 않는 거대한 방송 권력에 방송작가들은 절망하고 각자도생하며 지내왔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꿈을 놓지 말아야 한다. 희망을 찾아 인터스텔라로 떠난 주인공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요구하고 행동해야 한다. 우리에겐 함께 이야기를 공유하고, 연대하고, 힘을 보태는 동료가 있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렇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