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금노동제도의 발생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봉건제도 안에서 발생했으며,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의 전개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시대의 막이 열리게 된 것은 16세기였지요. 이 시기부터 자본주의의 출생지인 유럽에서 매뉴팩처가 발달하고, 자본주의 제도가 정착되는 긴 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자본주의 하에서 행해지는 상품 생산의 보편적 성격은 인간의 노동이 임금노동으로 변화하고, 인간의 노동력이 상품으로 전화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임금노동제도의 발생과 노동자계급 형성의 시대가 실제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16세기부터였지만, 그것은 자본주의 발생단계가 완료될 때까지, 즉 산업혁명이 마무리될 때까지 계속되지요.
노동자계급의 형성에 관해서는 E. P. 톰슨과 에릭 홉스봄의 주장이 대표적이면서 또 대조적입니다. 톰슨은 계급을 어떤 구조나 범주로 보지 않고,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현상으로 파악합니다. 그는 "계급은 어떤 사람들이 (이어받은 것이건 또는 함께 나누어 가진 것이건) 공통된 경험의 결과, 자신들 사이에는 자기들과 이해관계가 다른 (대개 상반되는) 타인들과 대립되는 동일한 이해관계가 존재함을 느끼게 되고, 또 그것을 분명히 깨닫게 될 때 나타난다"고 주장합니다(톰슨, 2000: 7). 이런 주장과는 달리 홉스봄은 마르크스의 계급관에 바탕을 두고 계급이 갖는 두 개의 측면을 확인합니다. 첫째로는 생산수단에 기초한 인간관계라는 객관적 기준과, 둘째로는 계급의식이라는 주관적 기준을 동시에 고려한다는 말입니다. 그는 계급이란 언제나 있어 왔지만 계급의식은 근대 산업사회의 산물이라고 규정합니다.
톰슨과 홉스봄은 공통적으로 계급경험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의해 크게 결정된다고 보고, 계급 자체를 역사적 현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톰슨은 전통, 가치체계, 사상, 제도적 형식들 속에서 구현되는 이른바 '문화'를 중시하고, 노동자의 주체성을 강조합니다. 반면에 홉스봄은 사회·경제적 존재형태를 강조하지요. 노동자계급 형성을 고찰하는 데서는 이런 여러 측면과 요소들이 숙고되어야 합니다.
[ 자본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노동자계급은 역사의 전면에 떠오른다. ]
시초축적
여기서 임금노동제도 형성의 선행조건이 되는 것은 이른바 시초축적(始初蓄積, primitive accumulation)입니다. 시초축적을 '원시적 축적' 또는 '본원적 축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지요. 이 시초축적은 전(前)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자(이를테면 신분상 자유를 지닌 농민과 수공업자)를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합니다.
시초축적의 결과는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계급, 즉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계급과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여 생활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대립으로 귀결됩니다. 말하자면, 시초축적의 과정은 "아주 다른 두 종류의 상품소유자-한편에서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가치액을 증식시키기 위하여 타인의 노동력을 구매하려고 갈망하는 화폐와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소유자와,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 자신의 노동력 판매자(따라서 노동의 판매자)인 자유로운 노동자-가 서로 대립하고 접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고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설명했습니다(K. 마르크스, 김수행 번역, 『자본론』[하], 1993, 비봉출판사, 898∼899쪽을 읽어보세요).
영국에서 진행된 시초축적은 15세기 말부터 대규모로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해 전개되었으며, 18세기말까지 3세기 동안 잔인하고도 격렬하게 추진되었습니다. 신분상 자유로운 농민에 대한 악명 높은 엔클로저 운동(enclosure movement, '종획운동'으로 불림)이나 강제적 법령들이 수많은 근로인민들을 소유로부터 분리시켜 무산자로 만들었습니다. 엔클로저 운동은 섬유공업의 팽창으로 양모 가격이 치솟자 대지주들이 자기 토지를 식량 경작지 대신에 양 사육을 위한 '종획지'로 만든 운동을 말합니다. 아시다시피 양 사육은 소수의 사람으로 충분하지요. 이윤을 위해 대지주들은 농민을 희생시켜 토지점유를 확대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 과정의 본질은 농민을 토지로부터 강제로 축출시켜 노동자로 만들거나, 그렇지 않으면 도시나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도록 내모는 것이었어요. 이런 성격의 엔클로저 운동의 전개로 수많은 농민이 토지로부터 쫓겨나 기아와 걸식상태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시초축적의 과정은 프랑스나 독일 등 여러 나라들에서도 시기와 방식에서 차이를 보이기는 했으나, 본질에서는 동일했습니다.
경제외적 강제
임금노동제도 생성 시기에 자본주의적 관계 형성을 위한 또 하나의 길이 큰 의의를 갖는데, 그것은 '경제외적(經濟外的) 강제'의 역할입니다. 말이 좀 어렵긴 합니다만, 경제외적 강제란 것은 국가권력이 앞장서서 농지에서 쫓겨나 유랑하던 농민들을 자본주의적 노동에 종사하도록 물리적 압박을 가함으로써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생산양식을 만들어내는 데 강력한 구실을 한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말합니다.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상호관계 형성에서 '자유의지적' 계약 원칙이 '굶주림의 규율', 즉 경제적 강제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면, 경제외적 강제는 국가권력을 동원한 '몽둥이의 규율'이었습니다. 국가권력은 자본에 대한 노동의 '정상적' 종속의 확립과 이런 '정상적인 상태'의 실현, 즉 형성 과정에 있는 자본가계급의 이윤추구를 법률을 제정하여 보장했습니다.
영국의 경우, 민중에 대한 대량수탈을 위해 채택된 이른바 '피의 입법', 1495년 법은 지방권력이 극빈자들에게 노동의 의무를 지우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찾도록 하며, 그들의 자녀에게 작업기술을 가르칠 것을 권고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아서는 좋은 내용 같지만, 사실 농민들이나 유랑민들로 하여금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노동하도록 강제로 내몬 것입니다. 1562년에 채택된 도제에 관한 법률은 극빈자들과 특히 그들의 자녀들을 도제제도에 참여하도록 강요했습니다. 17세기 중반 부르주아 혁명 후 영국 의회는 강제 정책의 새로운 방법을 장려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법률로서 정한 노역장(work house)의 창설입니다. 1662년 채택된 정주법(定住法)이나 강제취로법 등은 농지에서 쫓겨나 떠돌이 신세가 된 농민들을 강제로 노동에 종사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경제외적 강제'의 전형입니다.
프랑스에서는 16세기 중반 들어 노역장이 설치되었고, 스페인에서도 16세기 전반에 부랑자와 거지들을 임금노동자로 전화시키려 시도했습니다. 식민지 시대 미국에서는 빈민들을 대상으로 한 '방적학교'가 설립되었고, 18세기 무렵에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여타 나라에서 여러 형태의 '학교', 수용소, 고아원 등이 만들어져 아동들에게 기능을 습득케 하여, 결국 이들을 기업주들의 노동력으로 제공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복잡한 과정(시초축적, 수탈되고 법률의 보호 밖에 놓인 프롤레타리아의 희생에 따른 노동시장 확대, 그리고 결국 새로운 자본주의적 착취에의 종속)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과 강화의 기초인 임금노동제도의 확립을 이끌었습니다.
형성기 노동자계급의 특징
임금노동제도의 형성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상대적으로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각종 기업에 존재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당시 수준에서 본다면, 규모가 큰 산업시설들이 16∼17세기 영국에서 경제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국내시장과 수출을 위해 생산하던 나사 제조업, 많은 투자를 필요로 한 광산업과 금속가공업, 조선업, 유리성형산업, 제지업, 해외시장 관련 많은 부문 등이 대표적이지요. 대형 나사 제조업에서는 수백 명의 노동자가 일했습니다. 영국에서 천명 단위의 노동자를 고용한 기업의 수가 현저하게 증가한 것은 18세기 중반부터였습니다.
자본제적 단순 협업, 집중·분산·결합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매뉴팩처가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 있었던 산업 조직이었습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초인 협업은 초기 단계에서는 안정적이고 전형적인 내용을 갖추지는 못했습니다.
16∼17세기 프랑스의 섬유, 대포, 병기공장에서는 수백 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었습니다. 16세기 중반 들어 리용의 인쇄소는 약 1,500명 가량의 임금노동자들을 고용했습니다. 식민지 시대 미국의 경우, 가장 큰 제철 작업소에는 1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고용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16세기부터 18세기 마지막 1/3기까지 서유럽의 발전된 사회들에서 선진적인 산업조직의 지속적이고 특징적인 형식은 매뉴팩처였습니다. 이 매뉴팩처는 다른 나라들에서는 19세기 중반 또는 19세기 말까지 지배적인 형태로 존재했습니다. 매뉴팩처 형태의 생산 시스템이 시초축적의 '희생자'들을 흡수하게 되지요. 16세기 중반에서 18세기 후반까지 자본제적 생산의 특징이었던 매뉴팩처는 그 첫 단계에서 여러 직종의 숙련공이 한 자본가의 지휘 감독 하에 미숙련 노동자들과 함께 한 작업장에서 노동하는 형태를 띱니다. 매뉴팩처는 점차 숙련공이 분담된 작업만 맡아 협동하는, 즉 분업에 기초한 협업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지요(볼프강 아벤드로프, 신금호 번역, 『유럽노동운동사』, 1983, 석탑, 9쪽).
2. 초기단계의 노동자 투쟁
착취에 대한 투쟁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투쟁은 자본관계와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14∼15세기 고용주를 상대로 벌인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새로운 적대관계의 최초의 모습입니다. 노동자 투쟁은 자본주의적 매뉴팩처 단계(16∼18세기) 전체를 통해 지속됩니다. 노동자 투쟁에서 가장 널리 사용된 것은 파업이지만, 그밖에도 폭동과 나아가서는 봉기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반면에, 저항의 수동적 형태는 도망이나 '기만' 방식의 상품 제조 등이 있습니다.
1501년 프랑스 리용의 인쇄공들은 그들의 고용주에게 임금인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일을 멈추겠다고 압력을 넣습니다. 1539년에는 매뉴팩처 노동자 선진부대 최초의 완강하고 장기파업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5개월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리용 인쇄공의 주요 요구는 임금인상, 식사 개선(임금의 일부는 현물이었음), 작업제도의 변경(노동시간의 더한층 균등한 배분: 그들은 1년의 대부분 기간에 걸쳐 주야로 17∼18시간 일했으나, 1년간 약 3분의 1은 교회 축일 때문에 일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도제들의 사용 제한이었습니다. 한편, 당시 노동자계급 가운데 심하게 억압받는 계층에 들었던 도제들도 독자적인 저항을 벌이게 됩니다.
낮은 임금에 대한 소극적 항의는 여러 가지 형식으로 나타났어요. 예컨대 성과급 임금을 받고 일하던 가내 방적노동자들은 방사의 무게를 불리기 위해 실을 기름이나 물에 적시기도 했고, 18세기 식민지 시대 미국의 신문에는 도망친 노동자들에 대한 공고가 실렸는데, 이런 경우 도망자들은 추격을 당했고 붙잡히면 엄하게 처벌당했습니다. 독일에서는 18세기 초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도시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공공연하게 투쟁에 참가함과 동시에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조직으로 결합하고자 하는 강한 지향을 나타냈습니다. 1534∼1536년 리용 집정관의 문서는 석공, 목수, 일용공들이 임금인상을 위해 조직을 결성하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형태 가운데 전형적인 것은 해체된 길드 제도의 전통에 바탕을 두었던 직인들의 우애조합(友愛組合)입니다. 이런 우애조합은 영국에서 널리 보급되지요.
식민지 시대 미국에서 노동자 조직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684년 뉴욕 짐마차꾼 조직입니다. 1790년대 미국 노동자 조직의 대부분은 우애조합이었고, 노동조합이 조직된 것은 그 후의 일입니다. 프랑스에서는 거의 모든 산업에서 동업조합(companionages)이 존재했는데, 이것은 노동자의 상호부조와 투쟁을 위한 조직이었으며, 파업을 준비하는 데서나 투쟁을 진행하는 데서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리용과 파리의 인쇄공들의 동업조합은 군대식으로 편성되었고, 선출된 지도부는 공동금고를 갖고 있었으며 비밀집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독일에서는 18세기 초 직인들의 조직이 파업과 보이콧을 조직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18세기 후반에 노동자들의 우애조합 '협회'가 결성되었으며, 이 조직의 임무에는 파업 준비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아직 진정한 의미의 노동자 계급 운동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노동자계급 자체가 미처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매뉴팩처 시기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잠재적이었고, 고립 분산적이었으며 우발적인 현상이었습니다. 매뉴팩처 시기 노동자 투쟁은 그 형태에서도 기본적으로 자연발생적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계급투쟁의 맹아형태였던 셈이지요.
부르주아 혁명 시기의 노동자 투쟁
서유럽의 후기 봉건사회에서, 즉 임금노동이 산발적으로 출현하던 당시부터 노동자계급은 봉건제도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습니다. 반봉건 투쟁이 절정에 이르렀던 무렵, 즉 초기 부르주아 혁명 과정에의 노동자 참가는 특별한 의의를 갖습니다.
16∼18세기 초기 부르주아 혁명 시대의 단초를 연 것은 독일 농민전쟁(1524∼1525년)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종교개혁의 사상적 기치 아래 개시되었으나,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혁명적 농민과 도시 하층계급이 결합하게 되었고, 도시와 농촌의 반봉건 세력의 연대 전망이 열리게 됩니다.
농민전쟁의 중심인물인 대중적 종교개혁가 토마스 뮌쩌(Thomas M nder)가 참여했던 서클의 문서는 착취제도의 파괴를 위한 과제를 제시한 한편, 빈궁한 농민과 도시빈민 등 인민의 최하층이 억압자들을 공격하는 데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는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농민전쟁은 독일 전역에서 패배로 끝났는데, 이는 농민과 노동자계급이 공동행동을 위해 강고한 동맹을 형성하지 못했던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무튼 독일 농민전쟁은 봉건제도에 반대한 농민 투쟁과 더불어 근대 노동자계급의 전신(前身)인 도시 근로대중을 역사의 무대 위로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이후 펼쳐질 노동대중의 강력한 투쟁을 예고하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초의 부르주아 혁명-17세기 중반의 영국혁명-에서도 주요한 역할은 민중들이 담당했습니다. 매뉴팩처와 소규모 사업장의 노동자, 직인과 도제 그리고 도시와 농촌에서 수탈 당해 노동자계급으로 전화한 수많은 대중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이들의 투쟁은 조직적인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 자연발생적이고 비조직적인 형태를 취했습니다.
미국의 경우 독립전쟁을 부르주아 혁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데 여기에도 노동자계급이 참가합니다. 노동자의 전투성이 발휘된 것은 1760∼1770년대였지요. 독립전쟁 이전에도 여러 종류의 협회, 조합, 클럽들이 생겨났으며, 그 가운데는 애국사상이나 독립투쟁 계획, 민주주의 제도와 사회경제적 개혁을 위한 계획들이 구상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행동 규모가 가장 컸던 것은 뉴잉글랜드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지부를 설치했던 협회인 '자유의 아들'(1765년)입니다. 이 조직에는 노동자들과 더불어 (주도적 지위를 차지한) 혁명적인 부르주아 계급과 대농장 소유주 및 수공업자, 여타 노동대중들이 참가했습니다. 여기서 '자유의 아들' 회원들이 부른 노래 가사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합니다.
와서 모여라 자유의 아들들아
하나된 가슴으로 모두 오라
우리의 표어는 '우리는 기필코 자유로우리
결코 쉽사리 두려워 않으리'!
이러한 민중의 적극성은 대농장 소유주들로 하여금 미국에서 식민지 제도를 철폐하기 위해 급진적인 방법을 선택하고, 나아가 정치·사회·경제 개혁을 추진하도록 부추겼습니다. 미국에서 벌어진 독립전쟁은 '혁명적인 전쟁'의 하나였으며, 노동자들에게 이 전쟁은 조직적 단결과 정치적 자각을 높이기 위한 학교 구실을 하기도 했습니다.
[ 1830년 7월혁명을 묘사한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18세기 말 프랑스에서 진행된 부르주아 혁명은 '위대한'(Great)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정도로 대표성을 갖고 있습니다. 민중은 프랑스 대혁명의 진행과정(1789∼1794)에서 자신들의 요구와 투쟁방법을 적극 반영합니다.
당시 노동자들은 아직 계급으로서 확고하게 형성되지 않았으나, 다른 하층 대중들과 더불어 '파리를 지배'했고, 파리는 또 절대왕정의 '정치적 중앙집권의 결과로서 프랑스를 지배'하고 있었지요. 파리 시민 가운데 노동인구는 절반에 달했습니다. 당시 파리에는 48개 구가 있었는데, 각 구별로 노동자 수는 1,530명 가량이었으며, 부르주아 혁명 시기 파리 각 구의 혁명위원회에서 차지하는 노동자의 비중은 1/10 정도였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세 단계로 나누어지며, 그것은 민중봉기의 형태를 취했습니다. 제1단계는 1789년 7월 14일∼1792년 8월 10일 사이로, 이 때 노동대중의 전투성은 바스티유 감옥 장악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 감옥을 함락하기 위한 7월 10∼14일에 걸친 시가전에는 건축공, 통 제조공 등의 노동자들도 참가했습니다. 노동자들은 혁명 과정에서 선거권 보장과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노동조직의 건설 등을 요구합니다.
1791년 봄과 여름에 걸쳐 파업투쟁이 격화했는데, 이것은 1791년 6월 14일 헌법제정의회가 반노동자법 '르 샤플리에 법'을 채택한 데 따른 항의였습니다. 이 법은 노동자들의 결사의 자유를 부정한 법이었습니다. 혁명 초기부터 부르주아 계급은 일찌감치 그들의 특유한 계급적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제2단계는 1792년 8월 10일∼1793년 5월 31일의 기간으로, 역시 중대한 국면들에서 노동자들이 한결같이 참가했습니다. 1792년 봄 무렵 진행된 상뀔로뜨(sans-culotte)운동은 파리 노동대중의 혁명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상뀔로뜨란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서 독립 소생산자층과 노동자계급이 뒤섞인 '역사적 복합체'로 파리의 노동대중을 일컫습니다. 이들은 혁명을 경험하면서 정치적으로 각성하게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에 민중성과 역동성을 부여하는 기본 세력으로 역할 하게 됩니다. 이들 상뀔로뜨에게 동질적 계급의식은 없었지만, 이들은 소유와 자본 집중에 강한 반감을 가졌으며, 평등주의를 이상으로 여겼습니다. 이들은 1793년 이후 인플레이션과 물가고를 겪으면서 식량가격의 최고한도 설정과 투기자에 대한 엄벌 등을 요구하기도 합니다(알베르 소불, 『상뀔로뜨』, 1990, 일월서각 참조). 1793년 봄에 노동자 투쟁이 높아지게 되었는데, 이 투쟁에서 노동자들은 투기자들에 대해 그리고 고용주에 대해 투쟁을 벌입니다.
이상에서 설명한 대로, 노동자들은 다른 민중계층과 더불어 프랑스 대혁명의 고양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지배를 확립하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초기 부르주아혁명 진행과정에서 분산적으로 등장한 노동자는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에서 노동자 특유의 투쟁인 파업을 일으켰으나, 이런 투쟁은 점차 혁명 세력들의 정치투쟁 속으로 합류하게 됩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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