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가진 상상력은 때론 현실의 벽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가 그랬고, '매트릭스'가 그랬다. 이들의 상상력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사실은 거대 시스템에 의해 직조되고 있는 허구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점을 와이어 액션의 화려함 이면에 보여 주었다.
화산고는 요즘 학교가 직면한 여러 가지 문제를 무협지와 만화적 상상력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에 발을 붙이고 선 이런 판타지의 계보에 속한다. 물론 판타지란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현실보다는 상상력 쪽에 훨씬 더 무게 중심이 실려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학교라는 이름의 무림
학교는 이상한 공간이다. 이는 한국에서 나고 자라, 나라에서 인정해 주는 교육기관을 12년쯤 착실히 다니다 보면 선지자적 깨달음이나 투사적 각오가 없이도 자연스레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다. 일단 외양에 있어 대부분의 관공서와 인상착의가 똑같은 콘크리트 건물이 보통의 관공서보다 좀 더 넓은 부지에 위치해 있다. 그 안에 천여 명의 성장기 아이들이 바글거리면서 성장기의 70% 가까운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의사와는 일말의 관계도 없는, 어른들에 의해 그 공간을 지배하는 모든 것이 결정되고 집행된다.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는 나름의 삐딱선을 탈 수밖에 없다. 퇴학을 당하거나 스스로 나가거나, 아니면 집에서 못 잔 잠을 확실하게 보충하거나, 그러다 스트레스 쌓인 애들이 몇몇 힘없는 애들을 따 시키기도 하고, 선생은 선생대로 애들 눈치 보랴, 저임금에 시달리며 가계를 꾸리느라, 촌지 안 주는 발칙한 부모를 가진 아이들에게 제 성질을 풀기도 하며 지내는 것이다. 학교를 다니면서 학생을 팰 때만 펄펄 나는 한 명의 미친개 없이, 남의 지갑을 제 용돈의 출처로 착각하는 막후의 고수들 없이, 그리고 유독 화장실이나 하교길 골목길에서 재능을 발휘하는 아이들 없이, 조용하던 시절이 단 1달이라도 있었던지 한번 되돌아 보라.
화산고의 설정 근거가 되는 학교가 논리로는 납득이 안 되는 불합리와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는 점에서 영화 '화산고'는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개연성 있는 허구다. 간혹 현실이 말도 안 될 경우, 상상력의 도움이라도 받아 그 현실을 재구성해 보고 싶은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가령 한국 아이들이 보내는 하루 일과를 다큐멘터리로 찍어 스웨덴에서 방송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 자체로 쇼킹 아시아 류의 엽기 무비 한 꼭지를 구성하는데 손색이 없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무협지의 일상이 나올 만한 공간으로 학교를 설정한 것은 납득할 만한 선택이 된다. 현실이 이미 충분히 엽기이기 때문이다.
정파와 사파가 맞서
이 영화의 대결 구도는 교사와 학생, 교권과 학생들의 권리로 대표된다. 흔히 무협지에 등장하는 정파의 무술은 학생의 것이고, 교감과 그의 사주를 받아 투입되는 진압조 교사들이 오히려 사파(퇴마물에서 말하는 흑마술 계열)적 무공을 선보이는 악의 무리로 설정되어 있다. 인터넷 예고편을 통해 개봉 전 지나치게 많이 유통되었던 영화의 오프닝 장면을 예로 들어 보자. 교사가 졸고 있는 학생에게 던진 분필이 공중에서 움직임을 멈추더니 발사 지점인 교사에게로 되돌아가 교사를 완전히 박살내는 그 장면에서, 대다수 관객들은 땅에 떨어진 교권을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통렬한 반격에 심정적인 동의를 보내게 된다. 소싯적 우리가 무수히 꿈꾸어 왔으되 제도권에 머물러야 한다는 소심함으로 결코 시도할 수 없었던 물리적인 반격이 '화산고'에는 빼곡이 차 있다.
간혹 친구의 장동건처럼 학교 유리창을 내키는 대로 깨부수고는 퇴학을 맞은 친구들의 이름이 아이들 사이에 전설처럼 유통되고는 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대걸레로 개 패듯 패는 교사의 팔목을 잡아 팽개치고 검정고시를 택한 친구의 이름이 비밀스레 구전되던 사례는? 고수의 무용담이 강호에 전설로 유통되는 무협지와 위 사례들과의 차이가 무엇인가 말이다. 그러므로, '화산고'는 화산 108년이라는 가상의 연대에 국적이 모호한 가상 공간 어디에서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AD 2001년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감성에 호소력을 가질만한 근거를 충분히 획득하고 있다
국적 불명, 소속 불명의 상상력
화산고의 한 발이 현실에 닿아 있다면 나머지 전신은 무협지와 만화에 걸쳐 있다. 또한 이 영화의 정서는 비주류의 상상력에 더 가깝다. 만화에서나 가능했던 일들이 눈앞에 전개될 때 평소 엄격하고 정통파에 가까운 영화 예술론을 지향하는 이라면 자리가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상상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는 건 늘 이렇게 불온한 상상력을 가진 이들의 몫이다. '펄프 픽션'이 그랬고, 'X-파일'이 그랬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 비장하게 들려 오는 나레이션 내용은 무협 만화의 오프닝과 전혀 다르지 않다. '화산 108년 17년 간 이어온 전교 사화의 대환난 이래 교권은 땅에 떨어지고…무림 최고의 비술, 사비망록을 손에 넣는 자 학원을 제압한다는 전설이 화산고에는 전해 내려져 오고 있으니….' 이 말 줄임표에 이어 주인공이 등장하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각 인물의 설정은 무협지의 설정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새벽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어 장오자로 개명하고 자유 방임파의 고수가 된 교장, 교권 수호파를 대변하는 교감 장학사, 교감에 의해 학원 질서 유지를 위해 투입되는 학원 5인방(각 국어, 영어, 수학, 음악, 체육 과목을 맡고 있는 교사들), 화산고 역사상 최단 기간에 지존의 자리에 오른 송학림, 송학림에 맞서는 장량 등 고수들이 박빙의 세력으로 팽팽하게 대결하고 있다.
이러한 '학원'에 엄청난 무공을 가지고 있으되 본인은 자각을 못 하는 그런 미확인의 고수, 김경수(장혁 분)가 등장한다. 학원 5인방이 학생 고수들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거의 득세해 가는 것처럼 보일 무렵, 주인공은 절정의 무공에 눈을 뜨고 괴력을 발휘해서 판도를 단 한번의 전투로 뒤집어 버린다. 이런 스토리의 기본 뼈대에 덧붙여 화산 제일 미인인 유채이(신민아 분)와의 로맨스가 가미되는 것까지 플롯 자체는 무협지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영화 화산고를 색다른 경험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플롯에 살과 뼈를 붙이는 기본적인 장치들과 이들이 은유하고 있는 현실적 대상들을 견주어 보는 것이다. '학원'은 강호를 대체하고 있으며, 교감의 이름은 장학사고, 장학사란 이름이 충분히 암시하듯이 이 사람은 정통 질서 수호파다. 학원 5인방 중 음악 선생은 '연초단폐장'이라 하여, 아이들의 발성 연습을 통해 담배 피는 아이들을 귀신같이 골라내고 정확하게 응징하는 무공을 선보인다. 담배 피다 들켜 두들겨 맞아 본 기억을 가진 이들이 이 대목을 볼 때 웃지 않을 방법은 별로 없다. 선생님을 선생님이라 부르지 않고 수학, 영어, 국어 등 과목명으로 대체하는 것도 아이들이 하는 것 그대로다. 전교사화의 대환난이라 칭해지는 것이 1989년의 전교조 투쟁을 은유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짐작까지 덧붙여, 이 영화는 현실의 장치들을 마음대로 뒤집고 비틀고 새로 명명하며, 현실을 비꼬고 있다.
반이성적 권위에 장풍을 날려
'꼴찌에서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여고괴담' 등 학원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영화의 리스트는 꽤 길다. 하지만 무협지의 플롯에 만화적 상상력을 업고 학원 현실을 마음대로 장난치듯 가지고 논 건 화산고가 처음이다.
물론 무협지답게, 공중 부양 상태에서 물줄기를 불러일으키고 대나무 잎을 날리게 하는 절정의 무공으로 인한 쾌감이 이 모든 은유들을 덮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조차 숨은 그림 찾기 같은 이런 재미를 압도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의 재미를 덧붙인다면 그건 정통적인 사고가 결코 닿을 수 없는 변칙적 상상력이 이뤄 낸 발랄하고 허를 찌르는 장면들의 존재다. 비장해도 시원찮을 주인공 김경수(장혁 분)의 얼굴 옆에 난데없이 '쎄서 슬픈 사나이'란 자막이 떠억 하니 뜰 때면, 모든 정통적인 것들에 반기를 들고, 어떤 정해진 경계도 없이 막 나가는 상상력의 일말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상상력이 닿을 수 있는 새로운 영토를 기꺼운 마음으로 답사해 볼 마음이 있는 이라면, 그리고 일상에서 부딪치는 반이성적인 권위(일부 정신나간 교사, 조선일보, 기타 모든 비이성적인 존재들)에 상상 속에서나마 초절정의 장풍을 날려보고 싶은 욕구를 한번이라도 품어 본 사람이라면 화산고의 이 즐거운 모반에 다 함께 동참해 볼 만하다. 화산고를 본다는 건 현실을 뒤틀어 보는 재미에다가 머리 속으로만 그릴 수 있었던 풍경에 날개를 달아 주는 즐거운 경험까지 선사해 주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런 생각을 해내는 사람들의 상상력이야말로 어떤 초절정 무공으로도 당할 수 없는 고수의 경지가 아닌가 싶다.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어찌 하리오? 일개 범부가 가늠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고수의 내공이 아닌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