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미의 무풍지대라는 한국에서 반미의 열풍이 불고 있다. 지난 11월 말부터 광화문 일대에서 연일 벌어지고 있는 촛불시위가 언제 끝날지를 모르고 시일이 지날수록 오히려 촛불 든 시위 군중의 수가 늘고 있다.
[ 12월 14일 시청앞 '주권회복의 날' 시위에는 10만여명의 군중이 모였다. ▷ 출처:통일뉴스 ]
반미열풍은 '제2의 3·1운동'
반미투쟁의 분수령이 될 12월14일 시청앞 '주권회복의 날' 시위에는 10만여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를 두고 '제2의 3·1운동', '제2의 6월 항쟁'이라고 한다. 대선 후보들의 유세장에는 청중들이 모이지 않아도 광화문 촛불시위의 반미투쟁 현장에는 시위대가 자발적으로 모이고 있다.
시위 현장에는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또래의 중고등학생들이 많았다. 또한 6월항쟁을 겪은 386세대도 대거 참여했다.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부모들은 나이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시위현장에 나와 체험학습을 시켰다. 종교계, 노동자, 농민, 문인, 정치인, 인기연예인 등 각계각층이 동참했다. 수만명이 촛불을 들고 미 대사관을 둘러싸고 있다. 공중에서 찍은 사진광경은 흡사 수만의 반딧불 같았다.
이 추모 촛불시위는 꽃다운 나이의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어 숨진 게 그 기폭제가 됐다. 이른바 '여중생 미군 장갑차 사망사건'이 시간을 더할수록 국민적 공분으로 자리잡으면서, 이 파장은 일파만파를 거쳐 이제는 파도 차원이 아닌 폭풍의 수준으로 와 있다. '여중생 범대위'는 14일 '주권회복의 날' 10만명 시위에 이어, 한 해를 보내는 31일에는 백만집회를 성사시키겠다고 말했다. 시위는 끝이 없어 보이고 촛불 역시 멈춤없이 타고 있다.
이 끝없는 투쟁의 계기는 명확하다.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어 숨졌는데 미군에게 무죄평결이 난 것이다. 숨진자(피해자)가 있는데 가해자가 없는 것이다. 미군의 무죄평결을 두고 단순히 "미 군사법원의 무죄 선고는 한국과 미국의 법문화 차이에 기인한다"고 점잔빼고 말하는 것은 숭미(崇美)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한국의 주권회복은 곧 반미투쟁
시위가 국민적 정서로 자리잡자 진풍경인 것은 여·야나 보수·진보, 친미·반미를 떠나 모두가 한 목소리로 '부시 사과와 소파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죽하면 친미우익적인 어느 대선 후보는 진보층과 젊은층의 표심을 얻기 위해 '부시 사과, 소파 개정'을 요구한데 이어 촛불시위에도 참여하겠다고 오버액션을 했다.
정부는 소파 '개정'이 아닌 '개선' 정도에서 멈추려 한다. 부시 미 대통령은 두 차례에 걸친 간접사과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에게 심야전화를 통해 사과 표명을 했다. 한미 두 정부는 소파개정을 위한 실무차원의 접촉을 꾀한다. 두 정부 모두 이 시위가 본격적인 반미시위, 즉 '미군 철수' 등 이념적인 반미주의 확산으로 발전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지금 시위의 본질은 국민들의 자존심 및 국가 주권의 회복이다. 더도 덜도 말고 미국과 수직적 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불평등한 관계를 평등한 관계로 바꾸자는 것이다. 따라서 그 핵심은 소파 개정으로 모아진다. '잘못된 법이 왜 유지되고 있는가? 이 땅에서 미군이 죄를 범했으면 당연히 이 나라의 법에 따라 재판받고 처벌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이다.
한국에서 주권회복은 곧 반미의식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 무엇에 대한 주권회복인가. 주권을 누르고 있는 미국에 대한 반대인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주권회복은 미국반대와 동전의 양면이다. 지금 국민의 대미 악화감정이 본격적인(이념적인) 반미로 가냐 안가냐는 전적으로 미국측에 달려 있다.
미국의 오만함이 반미투쟁의 직접적 계기
하나의 사건은 없던 게 갑자기 터지는 법이 아니다. 오랫동안 눌리고 축적된 것이 어떤 걸 계기로 한꺼번에 분출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한국민의 반미의식 역시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매일 저녁 도심에는 추모 촛불이 꺼질 줄 모르고 급기야 '촛불 바다가 미 대사관을 덮치게 된 것'에는 몇 가지 직간접적인 이유가 있다. 먼저 직접적인 이유부터 살펴보자.
한마디로 여중생 사망사건 처리 과정에서 미국의 오만하고 고압적인 자세를 들 수 있다. 이번 사건의 처리 과정에는 모두 세 차례의 고비가 있었다. 첫 번째 고비는 재판관할권 문제이다. 한국 법무부는 지난 7월10일 여중생 사망사고에 대한 형사재판 관할권 포기를 주한미군에 요청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은 미군이 공무집행중 사고에 대해 다른 나라에 재판권을 이양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한 것이다.
두 번째 고비는 11월 두 미군에 대해 무죄 평결이 내려진 것이다. '피해자는 있지만 책임지는 가해자가 없는' 기이한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판사와 변호사, 검사, 배심원 모두 미국사람이어서, 마치 공범을 재판하는 것 같았다." 이 평결 후 오죽하면 '장갑차라도 잡아두자'라든지, 그렇다면 비행기 운항을 잘못 지시해 세계무역센터를 부딪히게 한 '빈 라덴도 무죄'라는 패러디가 나올 정도였다.
세 번째 고비는 부시 대통령의 찔끔찔끔 나온 간접사과이다. 부시는 촛불시위가 전국민적으로 진행되자 한번은 허바드 주한미대사를 통해 또 한번은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을 통해 간접사과를 했다. 그리고 '주권회복의 날' 대규모 시위를 하루 앞둔 13일 밤에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화로 사과표명을 했다. 특히 미국은 부시가 첫 간접 사과를 한 날 무죄 평결을 받은 두 미군을 본국으로 급히 송환했다. 속전속결로 급한 불부터 끄자는 심보였다.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재판권 이양을 거부한 점, 두 미군에 무죄평결을 내린 점, 부시 대통령이 간접 사과와 함께 두 미군을 빼돌린 점은 한국민의 감정을 거슬리면서 점점 상승작용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14일 '주권회복의 날' 시위의 공식 명칭은 '오만한 미국 규탄과 주권회복을 위한 10만 범국민평화대행진'이었다. 집회는 미국의 '오만함'을 성토하면서 부시 대통령이 무릎을 꿇고 직접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의 '오만함'과 관련해 뉴욕타임스는 12월8일자에서 "최근 반미감정의 직접적인 원인은 여학생 두 명이 미군 무한궤도차량에 깔려 숨진 사건이지만, 이보다 미국이 한국에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인식이 더 큰 갈등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해석한 바 있다.
'월드컵 학습효과'가 큰 역할 해
다음으로 간접적인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부시 행정부는 그동안 북한에 대해 일관되게 강경정책을 펴 왔다. 미국은 북한정권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북한정권과 북한주민을 분리시키고, 북한을 여전히 테러지원국으로 묶어놓더니, 핵선제공격 대상으로 규정했다. 최근에는 이른바 '북핵문제'를 일으켜 남북대화와 북일수교를 가로막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대북 강경책에 대해 같은 민족인 남한 국민들이 달가워 할 리 없다. 더구나 지난 2000년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 합의로 인해 남한 국민의 대북관에는 커다란 변화가 왔다. 6.15 공동선언 이후 남북 교류가 많아지고 특히 경의선과 동해선의 철도와 도로가 휴전선을 관통했다. 민족화해와 협력의 시대, 민족공조의 시대로 들어선 것이다. 남한 국민은 북한을 냉전시대의 '적'이 아니라 통일시대의 '동지'로 받아들이고 있다. "남이 불편할 때 동족인 북이 편안할 수 없고 북이 불편할 때 동족인 남이 편안할 수 없다"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둘째,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한 반대이다. 미국은 특히 9·11테러사태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세계를 테러국가.·테러지원국가와 반테러국가로 양분하고는 반테러전선에 설 것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다. 이러한 일방주의가 동맹국이라는 한국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났다.
스포츠이긴 하지만 지난 미국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의 한국 선수와 미국 선수간의 쇼트트랙 판정시비가 있었다. 한국민의 뇌리 속에는 금메달을 미국에 강탈당한 것으로 남아 있다. 주한미군은 이전을 약속한 용산 미군기지에 아파트를 건립하겠다고 하고, 이 나라 역사의 현장인 덕수궁 터에다 미 대사관과 직원용 아파트를 신축하겠다고 한다. 특히 F-15K 전투기를 사실상 강매하는 등 미국의 일방적 요구에 국민의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셋째, 6월 월드컵 축구대회의 경험이다. '월드컵 학습효과'는 두 가지다. 하나는 '탈이념'이고, 다른 하나는 '광장의 문화'다. 먼저, '탈이념' 현상은 온 국민이 응원단이 된 '붉은 악마'에서 나왔다. 국민들은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모두 붉은 옷을 입었다. 붉은 옷에는 '비 더 레즈'(Be The Reds)라 쓰여 있다. '빨갱이(공산주의자)가 되자' 쯤으로 해석될 수 있다. 냉전시대 때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가 스스럼없이 파탄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월드컵때 젊은 층들이 길거리 응원을 위해 광장에 수십만 수백만명이 모였다. 새세대는 인터넷 세대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책상 앞의 컴퓨터 자판이나 온라인 세계에 머무르지 않고 오프라인 세계인 광장으로 나온 것이다. '광장문화'를 경험한 이들이 이번에는 같은 장소에 붉은 옷 대신 촛불을 들고 나온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촛불시위를 처음으로 제안했던 한 네티즌(ID. 앙마)은 "월드컵때 우리 모두가 한 마음이었던 것처럼 이번(촛불시위)에도 하나로 뭉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빚'이 없는 새세대의 역동성
이처럼 한국민의 미국에 대한 관점의 변화는 한국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예고해 주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한미관계의 변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 부문, 특히 국민의식의 변화를 가늠해 준다. 여중생 사망사건과 촛불시위, 그리고 그를 통한 반미투쟁은 한국사회의 변화를 이미 시사해주고 있는데, 그 몇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반미=용공'이라는 등식이 무너지고 있다. '친미의 나라, 반공의 나라'라는 한국에서, 한마디로 국민의 대북관과 대미관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와 민족주의자를 비롯한 각계각층이 반미문제에 함께 일어나고 있다. 이는 특히 대선 시기인데도 이념논쟁이 색깔논쟁으로 번지지 않고, 또한 앞에서도 밝혔듯이 여·야나 보수·진보, 친미·반미를 떠나 모두가 한 목소리로 '소파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둘째, 한국민의 역동성을 다시 보여 주었다. 정치가 구 정치인들에 의해 지역감정으로 휘둘리고, 경제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미국 자본주의에 종속되는 현상이 일어나지만, 역동적인 국민들에 의해 나라의 주권이 지탱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한국민의 역동성은 외국인들에 의해 종종 회자돼 왔다. 1987년 6월항쟁이 민주화를 위한 역동적인 시민운동이었다면, 그 해 열린 공간에서 일어난 '7·8·9 노동자대투쟁'은 노동자의 삶과 권익을 위한 역동적인 투쟁이었다. 그리고 올해 6월 월드컵 응원은 젊은 세대가 이 시대의 주인으로 나서는 역동적인 행진이었다. 이제 두 여중생 사망사건에 대한 국민적 추모 촛불집회는 주권회복과 반미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역동적인 애국시위로 되고 있다.
셋째, 그 역동성의 중심에 젊은 층이 있고, 새 세대가 한국사회 변화의 주역으로 나서고 있다. 예전 같으면, 그리고 기성 세대가 이 사회의 여전한 주류라면 미국의 화해 제스쳐와 부시의 간접사과 정도에 시위가 잠잠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시위는 역동적인 젊은 층을 중심으로 시작되고 참여하고 번졌다.
'한국전쟁과 빈곤을 겪지 않은 세대'이자 '월드컵 유치와 경제발전을 통해 정체성을 확인한' 새 세대는 미국이 왜 은혜의 나라인지, 미군이 왜 이 땅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새 세대는 미국에 도무지 빚이 없는 것이다. 이들이 6월 월드컵에는 붉은 옷을 입고 응원의 광장에 나섰으나 지금은 손에손에 촛불을 들고 추모집회에 나선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국정부와 미국의 선택
이번 사건과 시위에 대한 해법은 간단하다. 이번 사건이 벌어지게 된 원인을 제거하고 또 처리 과정상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면 되는 것이다. 좁게는 형사재판 관할권 문제이고 넓게는 소파개정 문제이다. 더 나아가 지금의 반미기류가 '미군철수' 등 이념적인 반미투쟁으로 나아갈지 어떨지는 전적으로 동맹관계인 한미 정부당국에 달려있다.
여기에 한국정부의 역할이 있다. 어차피 미국과의 협상은 한국정부가 해야 한다. 그간 미국으로부터 받았던 정서와 감정상의 불만은 국민들이 스스로 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재발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부가 법적인 문제를 풀어주어야 한다. 따라서 정부는 소파 개선 정도가 아닌 개정을 요구해야 하고 미국은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사태해결을 위한 최저선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1970년대 청계피복 노동자 전태일 씨의 분신이 노동자의 권익과 노동법 개정을 향한 첫 출발이 되었듯이, 이번 두 여중생 사망 사건은 미국에 대한 한국민의 자존심 회복과 주권 회복, 보다 구체적으로는 소파 등 한미간 불평등한 법과 제도를 바로잡는 결정적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두 여중생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이고 또 미국이 우려하는 이념적인 반미투쟁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길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