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동맹과 노동자 정치세력화

노동사회

정치 동맹과 노동자 정치세력화

admin 0 3,249 2013.05.08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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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는 11월 8일 '노동조합의 구조조정 대응'과 '정치 동맹과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두 주제를 갖고 1부와 2부로 나눠 국제노동정책포럼을 열었다. 지난 호에는 1부 발표 및 토론 내용을, 이번 호에는 2부 발표 및 토론 내용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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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정치 동맹과 노동자 정치세력화

남아프리카 - 사켈라 부흘룽구


자세한 내용은 자료집에 제가 쓴 글로 대신하고(영어 원문과 한글 번역본은 연구소 사이트 자료실에서 볼 수 있다 www.klsi.org - 편집자), 이 글을 쓴 배경을 중심으로 노조와 정당 사이의 전략이 갖는 모순적 측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치 동맹의 출현 

forum_01_6.jpg정당 조직 안에서 노조는 중요한 정치 세력이 될 수 있어요.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노조와 정당 사이의 동맹은 위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정치 동맹에서 노동이 소외되고 주변으로 밀릴 소지가 있는 거지요. 남아프리카의 경우, 아프리카민족회의(ANC), 공산당(SACP), 남아프리카노동조합회의(COSATU, 이하 코사투) 사이에 정치 동맹, 즉 3자 동맹이 만들어졌습니다. 

ANC는 1994년 민주화 이전까지 남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해방운동 세력이었습니다. 그 목표는 민주주의, 국민화합(unified nation), 성차별 철폐에 바탕한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ANC는 1912년, 공산당은 1921년에 만들어졌습니다. 공산당은 사회주의 사회를 목표를 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목표로 한 ANC와 달랐죠. 공산당은 노동조합 건설에 주력했습니다. 지금 코사투는 200만 명의 조합원을 가진 노총이고, 1985년에 만들어졌어요. 이 때부터 지금까지의 기간에 초점을 맞춰 말씀드리려 합니다. 이 기간은 4단계로 나눠집니다. 제1기는 1990년까지, 제2기는 1990년∼1994년까지, 제3기는 1994년∼1999년까지, 제4기 1999년부터 지금까지입니다. 

1990년까지의 제1기에서 노동조합은 자신의 정치 역량을 강화하는데 초점을 두었어요. 이 시기 동맹은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어요. 대신 노조는 정치 투쟁에서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노조가 유일한 합법조직이었기 때문이에요. ANC와 공산당 등은 불법 조직으로 남아 있었어요. 노조는 해방투쟁 전선의 최전선에 섰고, 효과적인 투쟁을 수행했습니다. 

1990년∼1994년까지 제2기는 ANC나 공산당 같은 정치 조직들이 합법성을 얻었기 때문에 3자 사이에 정치 동맹을 공식적으로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합법화 이후 ANC가 남아프리카로 돌아왔을 때, 바로 노조의 정치력을 대체하지는 못했다는 점입니다. 노조가 가진 정치적 영향력을 대체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죠. 당시 코사투를 비롯한 노동 세력은 남아프리카 민주주의의 기본 틀을 만드는데 핵심 정치세력으로 활약했어요. ANC가 초기에 공약으로 내걸었던 재건개발계획(RDP)은 원래 노조가 주장했던 것으로, 당시 노조가 핵심 정치 세력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 시기는 노조와 ANC가 운동의 주도권을 갖고 각축을 벌인 단계며, 사실 ANC는 코사투를 필요로 했어요. 노조가 낸 많은 제안을 ANC가 채택했는데, 이후에는 상황이 많이 변합니다. 

고조되는 긴장 

1994년∼1999년까지 제3기는 당과 노조 사이의 관계에서 이전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모습이 나타나고 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처음으로 ANC가 국가권력을 장악했다는 것이고, 이제는 노조 없이도 혼자서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한편 노동 역시 ANC, 공산당과의 3자 동맹에서 파트너로 인정받았고, 재건개발계획(RDP)을 진행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 노동이 제안한 많은 정책들이 법률과 제도로 만들어졌어요. 1부에서 에디 웹스터 교수도 말했지만(『노동사회』 2001년 11월호 참조), 파업권의 헌법 명시는 대표적입니다. 1995년에 새 노동법이 통과되었고, 노사정위원회인 전국경제발전노동위원회(NEDLAC)도 만들어졌어요. 대통령이 된 만델라는 화해와 건설을 향해 나라를 이끌어야 했고, 이런 측면에서 코사투는 정부에 중요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1996년 ANC 정부가 새로운 거시 경제 정책인 성장·고용·재분배 정책(GEAR)을 채택함으로써 정치 동맹에 이상 기류가 흐르게 돼요. 이때 처음으로 민영화 정책이 정부의 공식 방침으로 채택되었고, 노동을 무시하는 정부의 행태가 잦아집니다. 

어정쩡한 공산당

1999년 이후인 제4기는 GEAR 정책의 본격 추진으로 특징 지워집니다. 만델라에 이어 타보 음베키가 새 대통령이 되고, 그는 1996년 채택된 정부의 GEAR 정책을 계승합니다. 제3단계, 즉 1999년까지 노조는 강력한 정치 세력이었지만, 이 시기부터 정치적 영향력을 점점 잃어갑니다. 새 경제 정책의 채택으로 동맹의 성격이 변한 것이죠. ANC가 채택한 신자유주의 정책인 GEAR은 노동자의 삶과 노조를 황폐하게 만들면서 3자 동맹의 기반을 약화시킨 거죠. 

여기서 공산당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3자 동맹에서 공산당이 맺고 있는 관계는 복잡해요. 모든 공산당원은 동시에 ANC당원이기도 합니다. 또한 많은 공산당 고위 간부가 ANC와 정부의 고위 간부이기도 하며, 많은 공산당원이 당직을 버리기도 했어요. 더군다나 여당이나 정부에 남아 있는 공산당 간부들도 노동을 위해 좋은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민영화를 가장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부처인 통상산업부 장관이 공산당원입니다. 국영기업부 장관도 마찬가지예요. 이러한 사례는 공산당과 ANC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것은 동맹이 붕괴될 경우에 공산당의 절반은 ANC에 붙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지난 몇 달간 3자 동맹 안에 긴장이 격화되어 왔습니다. 지난 8월에 거대한 규모의 민영화 반대 파업이 있었어요. 당시 남아프리카에서 UN이 개최한 세계인종차별철폐대회가 겹쳤는데, 이 때문에 ANC와 코사투의 긴장 관계가 더욱 격화되었어요. 

사회 동맹 강화해야 

이러한 긴장 관계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가능한 선택들을 짚어봅시다. 첫째, ANC가 동맹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신자유주의 정책을 버리고 노동 우호 정책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둘째, 동맹을 계속 유지하지만, 노동을 소외시키면서 주변으로 밀어내는 것(marginalisation)입니다. 지금처럼 말이죠. 1999년 이후 노동은 정치 동맹의 현 상황에서 대해 다시 평가하면서 민영화와 구조조정에 강력하게 반대해 왔습니다. 셋째, 동맹의 와해를 점쳐볼 수 있습니다. 공산당과 코사투가 좌익 연합을 형성할 수도 있습니다. 넷째, 공식적으로 3자 동맹의 붕괴 선언이 없더라도 서서히 동맹이 사라지는 경우입니다. 대신 코사투를 비롯한 노동은 정치 동맹(political alliance) 대신 사회 동맹(social alliance)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죠. 저는 네 번째 선택이 가장 가능성 있다고 봐요. 

끝으로 남아프리카에서의 정치 동맹 경험을 정리하면서 세 가지 점을 지적하겠습니다. 첫째, 노동은 매우 중요한 정치세력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남아프리카 경우에 드러나듯, 정치적 민주화가 노동조합을 주변부로 밀어낼 수도 있습니다. 남부 아프리카 지역 국가들인 잠비아나 짐바브웨에서도 노동은 민족해방과 민주화 이후 주변부로 밀려났습니다. 

둘째, 세계화 상황에서 정부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채택할 경우에 노조와 정부 사이의 긴장은 필연적인 것이 됩니다. 이 경우, 노조와 정당 사이의 정치 동맹은 노동조합에 득이 되기도 하지만, 노조가 자주성을 상실하는 순간 부정적인 효과를 미칠 수 있습니다. 

셋째, 노동과 정당의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노동운동의 핵심 역량이 정치권으로 들어가 버리는 '두뇌 유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셉템버위원회(September Commission)는 1997년 만들어져 노조 지도자 12명이 위원회에 참여해 모두 노조의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위원회 활동 보고서에 서명을 했지만(보고서 내용은 『셉템버보고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옮김, 1999년 참조), 모두 노조를 떠났습니다. 

한국 사례 - 김태일 

forum_02_2.jpg한국은 진보정당의 불모지대입니다. 1990년대 중반인가 동남아의 노조 간부가 한국을 방문해 이런 질문을 했어요. 한국 노조는 어떤 정당으로부터 지도 받고 있는가. 어떤 진보정당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대답에 그 친구는 대단히 의아하게 생각했어요. 한국은 냉전 체제와 분단 구조라는 제약을 받았고, 집권 세력은 반공을 통치 이념으로 진보 세력의 정치적 진출을 철저히 봉쇄했어요. 정부는 노조운동도 탄압했고, 일반 국민은 대단한 레드 콤플렉스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보정당을 향한 도정 

어려운 조건에서도 진보정치 세력을 결성하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1950년대 말의 진보당 결성 경험이 있었고, 1987년 6월 항쟁을 통한 정치 민주화 이후 몇 번의 진보정당 결성 시도가 있었어요. 1988년에 한겨레 민주당, 1990년 민중당, 1992년 한국노동당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어요. 실패 원인은 다각도로 분석해봐야 하지만, 이 정당들이 대중적인 지지 기반을 갖지 못하고, 일부 지식인 중심의 정당이었다는 점도 중요한 원인입니다. 

1987년 이후 활성화된 노조운동은 1995년 민주노총을 결성하게 됩니다.  

민주노총은 강령 제2항에 노동조합의 정치세력화를 달성할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에 1996년에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노동법 총파업'이 있었습니다. 당시 노동법개정 반대 투쟁은 굉장한 규모로 진행되었는데, 총파업의 성공적인 수행과 아울러 노조운동의 한계도 드러냈습니다. 즉,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정부의 법개정 움직임을 막아냈지만, 정치권에서 이뤄지는 법개정 논의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는 현실을 바꿔내지는 못한 것이죠. 

이런 각성 속에서 민주노총은 1997년 2월 정기 대의원대회에서 노동자들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결의하고, 1998년∼1999년 사이 노동자 독자 정당 결성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런 조직적 결정을 바탕으로 1997년 대통령 선거에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이 대통령 후보로 나섭니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해서 2000년에 들어서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노동자 독자정당이 출범하는데, 그것이 민주노동당입니다. 민주노동당은 2000년 총선에 21명의 후보를 냈고 평균 득표율 13%를 기록하여 가능성을 보여주었어요.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관계 

민주노동당은 국회의원 223개 선거구 가운데 80개 선거구에서 지구당을 조직했습니다. 당원은 1만8천 명으로 이 가운데 7천 명 이상이 민주노총 조합원입니다. 전체 당원의 비중에서 민주노총 조합원 비중이 큽니다. 그러나 민주노총 조합원 전체 규모와 비교하면 전체조합원 가운데 당원 수는 1.3%에 불과합니다. 

민주노총은 당과 노조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하되, 본 궤도에 오를 때까지 적극 지원하는 것을 기본 입장으로 하고 있으며, 민주노동당의 정책에 민주노총의 입장이 적극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민주노총은 산하 가맹조직 및 단위노조에 정치세력화 노력을 경주할 정치위원회를 두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런 조직들을 통해 조합원 가운데 당원을 모집하고 교육하고, 선거 시기에는 자금을 모아 당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노동자의 정치 진출을 방해하는 제도 개혁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각종 의결기구에 민주노총 조합원이 30% 이상 참가하도록 되어 있어요. 나아가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이나 노동자들만의 정당이 아니라 민중 모두를 위한 정당이 될 수 있도록 연대 폭을 넓히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진보정당의 불모 지대로 아직도 일천한 수준에 있지만, 민주노총은 노동운동만으로는 안 된다는 한계를 잘 알고 있기에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적극 나설 것입니다. 

브라질 사례 - 켈트 야콥슨

forum_03_2.jpg올해로 브라질 노동자당(PT)은 창당 21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창당 당시 군사독재에 시달리고 있었고, 진보정당은 노동운동에 깊이 뿌리박고 탄생했어요. 한국의 1987년 시기와 비슷했다고 보면 됩니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걸친 대파업 투쟁을 거치면서 노동조합운동이 힘을 얻게 되지만 노조의 힘만으로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고, 당시 노조, 가톨릭 교회, 지식인,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진보정당을 결성하게 됩니다. 

PT가 겪은 어려움들 

초창기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어요. 공산당 등 좌파 정당이 있는데 어떻게 노동조합이 아래로부터 정당을 건설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제기가 좌익 진영으로부터 제기되었습니다. 우익은 노조가 무슨 정치 활동이냐고 공격한데 비해, 좌익은 자기들이 노동운동을 대표한다고 주장했지요. 야당의 일부 세력은 노동자당을 건설할 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노동자들의 선입견도 문제였습니다. '룰라를 위해 투표하라! 룰라는 노동자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는데, 정치는 똑똑한 사람이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들은 정치하겠다고 나선 노동자를 믿지 못한 것이죠. 룰라는 여러 번 선거에 나왔지만 행정을 모르고 대학도 못나왔다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캠페인을 조직하거나 홍보물을 낼 자원이 부족했어요. 단지 노동조합만이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이 있었어요. 노예처럼 사는 농장 노동자들에게 노동자당(PT)이 무언 지를 알리기 어려웠어요. 이렇듯 초창기에는 우리의 꿈을 실현하는 게 불가능해 보였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전체 투표수의 1/3분을 얻었으며, 작년에는 정당 가운데 최대 득표 당이 되었습니다. 

지금 PT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어떻게 보수정치를 압도할 수 있는가, 전국 중앙 차원의 문제를 어떻게 제기할 것인가, 당과 노조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등의 문제가 있습니다. 

당과 노조의 관계
 
브라질의 민주노총인 CUT가 PT의 강력한 기둥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조직 노동자가 당에 존재한다는 것은 득표와 당의 전투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기반입니다. 많은 토론을 거쳐 기본적으로 자율과 독립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두 조직의 자율성은 CUT의 강령에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CUT가 정치적 논쟁에서 중립을 지켜야 함을 뜻하는 건 아닙니다. 

CUT는 대선과 지자체 선거에서 다양한 후보들을 지원했습니다.  

후보가 PT 출신이 아니더라도 신자유주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토대로 어느 후보를 지지할 것인가를 결정했어요. CUT는 1994년과 1998년 대선에서 PT의 후보인 룰라를, 각종 선거에서 PT를 지지했지만, PT 후보만 지지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1998년 대선의 경우 CUT는 룰라를 지원했고, 우익 노조는 카르도주를 지원했어요. 노동운동 내부에서도 지지 정당과 후보가 나눠졌고, 아직 집권 경험이 없다는 점에서 브라질의 정치 동맹 경험은 남아프리카와는 다릅니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당과 노조 사이에 갈등 관계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책임 있는 당이라면 노동자의 요구를 반영하는 동시에 지역주민의 요구를 정치적으로 반영해야 합니다. 또 다른 갈등은 CUT 조합원 일부가 공산당이나 사회당 등 다른 당에 참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점은 대통령 선거에서 큰 문제가 안 돼요. 일종의 선거 연합을 형성하기 때문이죠. 

마지막으로 전국 중앙 정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CUT를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은 물론, 시민운동과 학생운동, 농민운동 등이 함께 연대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정치 동맹과 사회 동맹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사회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폭넓은 동맹을 형성하면서 대화하고 협력할 필요가 있어요. 브라질은 2002년 대선이 있고 현 시점에선 룰라가 당선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정치 동맹과 사회 동맹을 폭넓게 형성하는 것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성공을 위해 대단히 중요합니다. 

마감말 - 김금수 

오늘 포럼을 마치면서 네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브라질·남아프리카·한국 노동운동 사이의 3국 교류는 민주노총이 건설된 1995년부터 시작되었고, 형태를 조금씩 바꾸면서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습니다. 교류 과정에서 세 나라 노동운동이 서로 다른 특수성을 갖고 있었고, 매우 다른 딜레마를 갖고 있었지만, 당면 목표에서 동질성과 공통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둘째,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바탕으로 한 구조조정은 그 양상이 각기 다르지만, 본질적인 성격은 자본주의 체제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셋째, 이에 대한 노동조합의 대응은 매우 다층적입니다. 대응 방식과 형태도 다양하고요. 공통적인 것은 방어적·수세적이며, 승리보다는 패배가 많았습니다. 

넷째, 정치 동맹, 즉 정치세력화 문제가 제기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사회 동맹 문제도 자연스럽게 제기되었습니다. 정치 동맹의 문제는 정당과의 직접적인 관계가 설정되어야 합니다. 또한 정당은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대중적 토대를 구축하는 게 중요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노조운동의 발전 수준에 비해 정당의 발전 수준이 뒤쳐지는 상황입니다. 

민주노동당과 민중연대와 같은 동맹체가 존재합니다. 한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정치 동맹을 통한 의회 활용과 사회 동맹을 통한 민중 항쟁의 공간이 결합되는 형태를 띨 것으로 전망합니다. 

엄청난 도전이 밀어닥치는 전환기를 맞아 각국 노동운동이 새로운 전략 목표를 수립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있음을 오늘 포럼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세 나라 노동운동가들의 건투를 빌어봅니다. 감사합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6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