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새해를 맞는다. 노동현장이나 노동운동 측의 형편으로는 새해를 맞는 감회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노동자의 노동·생활조건 개선이나 노동운동을 둘러싼 안팎의 정황이 도무지 낙관적으로 전망되지 않기 때문이리라. 현재 한국 노동운동은 어쩌면 '좌절과 희망'의 고심 참담한 갈림길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좌절과 희망'의 교차 지점에서
노동운동이 부닥친 도전의 양상은 과연 어떠한가. 노동운동을 둘러싼 상황과 정세의 급격한 변화 그 자체가 큰 도전임이 분명하다. 더 구체적으로는 '지구촌화'의 파고가 세계를 휩쓸면서 노동사회를 무척이나 핍박하게 만들고, 신자유주의 공세가 현대 자본주의의 잔혹한 속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데다, 자본이 펴는 경영합리화가 노동통제를 극심하게 강화하는 형편이다. 한편으로 노동자계급의 요구 확대와 다양화도 도전의 한 갈래로 작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거대 도전들에 대응하여 이를 제압·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체 역량의 성장·강화가 핵심 과제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노동운동의 발전이 곧 도전과 당면 과제를 극복하고 해결하는 추진력이 된다는 의미다. 노동운동 발전에서 운동 주체의 주요 과제로 올라 있는 것은 산업별 노조 건설을 뼈대로 하는 조직형태 개혁과 조직의 확대·강화, 임금·노동조건 개선과 함께 정책·제도 및 정치 개혁을 위한 공동투쟁·통일투쟁의 결합과 투쟁역량 향상, 노동운동의 사회세력화와 노동자 중심의 정당 건설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정치세력화, 그리고 21세기 새로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노동운동 노선과 운동기조의 설정 등이다.
이런 중대 과제의 해결은 그 추진 주체인 노동자계급의 성장·발전을 전제로 한다. 말하자면 계급으로서 정체성(正體性) 확립과 자기 성장이 노동자계급의 시대적 책무 수행의 불가결한 요건이 된다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성장과 발전은 계급의식의 고양과 이해를 달리하는 계급 사이의 투쟁과정을 통해 진행된다. 현재의 노동운동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첨예한 계급 대립이 전개되는 가운데 계급 의식화와 계급 조직화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노조운동은 노동자계급의 성장·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노동자의 노동자의식과 노조의식을 높일 수 있어야 하고(의식화), 조합원이 노조의 주인으로서 노조활동에 적극 참여할 수 있어야 하고(주체화), 노조 활동과 투쟁을 현장의 각 단위에서 추진해야 하고(실천화), 대중 주체의 원리가 활동 속에서 실현되어야 하고(민주화), 전체 조합원들이 노조 활동의 크고 작은 몫을 담당할 수 있어야 한다(간부화). 이런 노동자계급의 성장과 사회적·정치적 역량 강화를 이끄는 일은 노동운동 지도부와 간부들에게 맡겨진 막중한 시대적 책무가 아닐 수 없다.
노동운동 자기개혁은 최우선 과제
노동운동 지도부와 간부들이 이런 책무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데서 긴요하게 요구되는 것은, 아마도 노동운동 발전을 위한 자기개혁, 투쟁전략의 올바른 설정, 노동운동의 권위 확립, 편향과 분파주의 극복, 노동운동 풍토의 획기적 쇄신 등을 위한 노력일 것으로 판단된다.
노동운동 발전에서 요구되는 근본적인 변화는 노동자계급이 어느 정도로 스스로의 지도력을 발휘하는가에 달려 있다. 노동자계급 지도역량의 구축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노동자들의 목소리와 조직 그리고 행동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노동자계급의 관점과 비전을 펴기 위한 폭넓은 사회적 지지를 획득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본다면, 노동운동 지도부는 노동자계급 지도역량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자기개혁의 노력을 집중적으로 쏟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운동 지도부가 사회체제 변혁과 정치개혁, 그리고 작업현장의 민주적 개편을 주장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개혁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기만일 수 있다. 그래서 사회를 개혁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과 조직을 개혁해야 마땅한 일이다.
노동운동 지도부가 자기개혁을 추진하는 데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무엇일까. 쉽게 해답을 구하려는 조급성을 버리고 성실한 물음부터 떠올리는 일이 중요하고,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아닌 진지한 고민과 토론 그리고 끊임없는 학습을 통한 자기 확신이 지도역량 강화에서 중요한 요건이 되며, 원칙과 경험 그리고 대중토의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사고와 행동방식의 체현이 자기개혁 수행에서 필수적일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지도부는 철저한 역사인식을 지녀야 하고, 다른 사람의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노동운동 지도부는 자기개혁과 관련하여 사회발전과 개인의 역할 사이의 관계를 바르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회발전은 따지고 보면 개인의 행위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개인은 자기가 태어난 사회가 이루고 있는,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조건들의 제약을 받으면서 그 사회관계 속에서 행위하는 것이다. 개인은 이런 전제조건에서 출발하여 이를 통제, 이용, 발전시킴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환경과 실천적 삶의 과정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변화시켜 개성을 발전시키고 능력과 관계를 개선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노동운동의 권위 확립을
다음으로 노동운동 지도부는 21세기 노동운동의 미래를 위한 전략의 올바른 설정과 그 실현을 위한 노력을 성실하게 경주할 필요가 있다. 민주노총 『노동운동발전전략 보고서』는 '사회변혁적 노동조합운동'을 운동기조로 내세우고 있으며, 한국노총은 '인본주의'를 강조하면서 "노동운동은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 이념에 바탕을 두고서 시장 제일주의로부터 인류와 인간적 가치를 지켜내기 위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밝혔다.
21세기는 역사의 진보를 둘러싸고 지배세력 또는 지배블록의 수구·반동과 피지배세력 또는 피지배블록의 저항과 투쟁이 엮어내는 모순과 충돌을 특징으로 하며, 한국 자본주의의 종속적·독점적 자본축적 구조의 심화·강화와 이에 대한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민중적 항거가 치열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 발전의 추진력으로서 노동운동이 걸머진 책무는 클 수밖에 없고, 노동운동의 과학적인 전략 설정에서 리더들의 역할과 사명은 실로 중대하다.
한편, 모든 사회운동이 그러하듯 노동운동도 어려운 국면에 놓여질수록 권위 확립이 절실한 과제가 된다. 권위는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어떤 개인이나 조직이 행사하는 공인된 영향력을 의미한다. 권위는 모든 형태의 조직에 내재하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노동운동이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개혁을 추구하고 자기 해방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조직과 지도자들의 도덕적·정치적 권위는 성립되고 또 중요시된다. 이런 권위는 노동자 대중과 국민의 이익에 봉사하는 올바른 정책을 수행함과 동시에, 조직의 기본 노선과 방침 그리고 사회적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데서 증대되는 것이다.
현 시기 노동운동 발전을 가로막는 제약 요인의 하나는 조직 내의 편향과 분파주의다. 노동운동이 정체 국면에 놓이게 되면, 흔히 타협주의와 경제주의가 합리화를 주장하게 되고 반대로 모험주의와 경험주의가 한껏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분파주의가 내부 혼란을 부추기고 경우에 따라서는 '편가르기'를 통해 파쟁을 불러일으킨다. 분파주의는 노동자계급의 통일 단결을 깨뜨리고 노동운동 발전을 가로막는 해악적인 경향이다.
대중을 안아들이는 넓은 품이어야
노동운동이 대중운동인 한, 다양한 견해와 주장 그리고 사상과 신조를 포용한다. 노동운동은 동일한 이념과 노선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조직된 정당과는 다르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대중성과 계급성을 바탕으로 공통의 이해관계를 추구하기 때문에 편향과 분파주의의 극복은 항상적인 실천 과제가 된다. 노동운동 지도부는 올바른 전략 목표와 운동 기조의 설정을 통해 총노선을 확립하고 조직 내 민주주의를 충실하게 실현하는 한편, 각급 조직 차원에서 '대중노선'의 관철을 일상화·체계화함으로써 운동 내부의 편향과 분파주의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노동운동 리더들이 노력을 쏟아 해결해야 할 주체적 과제가 또 있다. 다름 아닌 노동운동 풍토의 쇄신이다. 현 단계 노동운동이 큰 도전에 부닥쳐 위기 상황을 맞고 있는 가운데, 분파주의를 비롯한 그릇된 경향들이 고개를 쳐들면서 노동운동 풍토가 마치 겨울 대지와도 같이 황량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메마른 토양에서는 생명력 넘치는 운동 역량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노동운동은 노동자 대중들을 푸근히 안아들일 수 있는 넓은 품이어야 한다. 그래서 노동운동 리더와 간부는 모름지기 대중들의 가슴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구실을 해야 하는 것이다. 메마른 풍토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노동운동의 경우, 그것은 동료애이고 동지애일 터이다. 동료애는 서로에 대한 관심과 현장조직을 통한 일상적인 만남과 토의, 그리고 노동운동에 대한 참여와 조직 사이의 깊은 연대를 통해 넓어지고 깊어진다. 그런 점에서 노동운동 리더는 인간주의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