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노동자에서 지역운동가로

노동사회

열아홉 노동자에서 지역운동가로

admin 0 5,645 2013.05.08 09:38

'YH사건'으로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최순영 지부장을 만났다. 열아홉에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YH노조 지부장을 거쳐 지역운동가로, 그리고 시의원으로 이어진 긴 삶이 어느덧 오십을 넘어섰다. 동료를 잃어야 했던 아픔을 딛고 선 그녀의 삶을 되돌아 가봤다.

무작정 상경한 서울

소녀 최순영은 열아홉에 서울로 올라왔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할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살아왔던 그녀는 '맏이'라는 책임감과 동생을 키워야 한다는 마음에 친구와 함께 낯선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 당시 가진 것이라곤 강원도 강릉에 살면서 집 근처 가발공장에서 배운 약간의 기술뿐이었다. 

yh_01.jpg처음에는 마장동에 있는 염색공장으로 갔다. 1970년에는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별 무리 없이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상상했던 서울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주 작은 방에서 밤낮 맞교대 하는 12명이 자야했고, 판자촌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으며, 공장은 냄새와 더러움으로 가득했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반대를 무릅쓰고 돈 벌겠다고 온 이상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마침 함께 올라왔던 친구의 언니가 YH무역에서 일하고 있었다. 마장동 공장에서 단 하룻밤을 머문 그녀는 바로 다음날 아침 친구언니를 만나러 YH무역이 있는 면목동으로 갔다. 

마침 가발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침 가발 및 봉제품을 수출하는 YH무역에 쉽게 취직할 수 있었다. 당시 YH무역 공장은 막 새로 지은 건물이어서 그녀의 눈에는 마냥 좋은 곳으로 보였다. 1970년 당시 YH무역에는 4천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한달 뒤에야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수제반에서 일했던 그녀는 도급제 하에서 일하는 만큼 돈을 벌 수 있었다. 아침 8시에 출근하여 저녁 10시에 퇴근하는 14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점심시간도 쪼개어 일을 했다. 그러기를 5년, 최 지부장은 어느 정도의 기술도 갖춘 고참 노동자가 되어 있었고, 쌓은 기술을 토대로 하청공장을 차릴 꿈으로 조만간 회사를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었다. 

YH노조 지부장이 되다

yh_02.jpg그러던 어느 날 노동조합을 세우는 데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는 1975년 3월 건조반 여성노동자들이 감독의 일방적인 인사이동에 항의하여 작업을 거부했던 일이 있은 후였다. 이 때 작업거부에 앞장섰던 4명의 건조반 조장들이 노조결성을 시도했고, 세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5월24일 노조결성식을 열 수 있었다. 최 지부장은 일이 힘들지만 예전 마장동 염색공장에 비해서는 월등히 나은 조건이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조를 준비하던 사람들과 만나 노동조합을 통해 연장근로수당과 퇴직금 등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이다. 

그러나 노조 결성식을 조직하는 데 도움만 주고 회사를 그만두려 한 그는 이 날 지부장으로 선출되었고, 노조 결성 일주일 후 해고되었다. 해고된 그에게 회사는 공장을 차려준다거나 결혼자금을 대주겠다며 지부장을 그만두라고 온갖 회유를 했지만, 최 지부장은 섬유노조로 출근하며 노동조합 활동을 하나씩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섬유노조에는 회사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라는 간부도 있었지만, 뜻있는 일꾼도 있었다. 특히 표응삼 교선부장은 그에게 원풍모방 박순희 부지부장과 동일방직, 반도상사노조 활동가들을 소개시켜 주었고, 일요일마다 산에 오르면서 노조가 가야할 길이나 회의진행법 등을 꼼꼼히 가르쳐주었다. 또한 크리스찬 아카데미와도 연결시켜 주었고, 여기서의 교육으로 최 지부장은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복직투쟁으로 시작한 노동운동

한 달간 복직투쟁을 계속했던 최 지부장은 1975년 해고문제와 관련해서 북부노동청에 방문하면서 노동자가 사회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사장들에게는 자리를 내주는 반면 노동자들은 그대로 세워두는 모습에, 그리고 노동자만을 질책하는 근로감독관의 행태에 서럽고도 화가 났다. 게다가 회사에서 제시한 해고이유를 듣고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회사는 최 지부장이 뇌물을 받고 불량품을 통과시켜 주었다고 주장했다. 평소 워낙 꼼꼼하게 제품을 살펴보는 그는 잘못을 발견했을 때도 손수 고쳐서 넘겼는데 예의상 하나만을 빼놓으라고 한 회사가 이런 식으로 그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다. 노조는 섬유노조와 함께 부당노동행위구제신청을 서울시 지방노동위원회에 제출했고, 이에 따라 최 지부장은 6월 복직될 수 있었다. 

회사는 복직을 시켜줬으니 이제는 조용히 지내라고 했다. 그러나 최 지부장의 노조활동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세 차례에 걸쳐 노사협의회를 요구하여 힘들게 마련한 자리에서 노조는 사무실과 전임자, 그리고 연휴보너스 50%를 얻어냈다. 

또한 최 지부장은 크리스찬 아카데미 교육에 모든 대의원과 상집간부를 보내 교육을 받도록 했고, 고대 노동문제연구소나 섬유노조에서 개최한 노조간부교육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는 나이 어린 여성노동자들을 교육시킬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지만 여성노동자들이 대다수인 YH무역에서 걸림돌 중 하나는 결혼이었다. 아무리 노조에서 교육을 시켜도 23살이나 25살이 되면 여성노동자들이 결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그녀는 1979년 결혼을 했다. 

1977년부터 YH무역은 심각한 경영난을 겪기 시작했다. 이는 경영진이 YH무역의 자본으로 무리하게 다른 사업을 확장하고, 은행빚을 늘려갔기 때문이었다. 

회사는 1977년 들어 가발산업이 사양산업이라 어쩔 수 없다며 반복적인 휴업을 실시했지만 사실은 작업물량을 하청공장으로 빼돌렸기 때문에 본공장을 휴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회사는 불안한 분위기를 조장하여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사표를 쓰도록 했으며,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YH무역에는 550여명만 남았다.

1975년부터 1978년까지 4년 동안의 지부장 임기를 마친 그녀는 재선으로 또다시 지부장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1979년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노조간부교육을 받았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는데 YH노조의 침묵시위와 연장근로거부 덕분에 이틀만에 석방되었다. 

YH노조 투쟁과 김경숙

회사는 8월6일 일방적으로 폐업을 공고했다. 당시 노조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이에 맞선 투쟁을 시작하기 전에 노조는 앞으로의 투쟁방향을 조합원들과 토론했다. 문제는 이를 계속 끌고 갈 것이냐, 아니면 여기에서 접고 다른 사업장에 가서 민주노조를 만들 것이냐 였다. 그러나 80% 이상의 조합원들은 모두 전자를 택했고, 최 지부장은 YH노조가 완전히 부서지더라도 다른 민주노조를 보호하자고 의견을 모을 수 있었다. 

노조는 8월7일부터 기숙사로 옮겨 농성을 시작했다.  
단전, 단수에 식사공급까지 중단됨에 따라 노조는 다음날 저녁 문동환 목사, 이문영 교수, 고은 시인의 도움으로 신민당사로 들어갔다. 노조는 회사정상화에 관한 확답을 받을 때까지 돌아갈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최 지부장은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조합원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했다. 

이틀 후, 8월10일 새벽2시 경찰들이 당사로 들어왔고, 4층에 모여있던 조합원들을 무자비하게 끌어내렸다. 23분만에 조합원들은 모두 당사 밖으로 끌려나왔고, 이 과정에서 노조 상집위원이던 김경숙이 사망했다. 

구속이 결정된 지부장, 부지부장, 사무장을 제외한 나머지 233명은 강제 귀향조치 되었다. 그리고 김경숙은 8월13일 가족과 경찰, 회사관계자만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이 치러졌고, 화장되었다. YH사건은 한 노동조합의 투쟁에 그치지 않고, 이후 신민당 농성, 김영삼 총재 제명, 그리고 야당의원 전원 국회의원직 사퇴 등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부마항쟁과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 피격으로 이어졌다. 

최 지부장은 농성이 진압될 당시만 해도 김경숙이 죽은 것을 알지 못했다. 농성이 진압된 후 조사를 받으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노조활동을 시작하면서 젊은 여성노동자들을 훈련해야 한다는 생각에 학습모임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김경숙을 만났다. 돌아가면서 살아온 얘기를 하는데 엄마와 남동생과 함께 살아온 김경숙은 가난에 너무 힘들었던 사람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그는 노조활동도 열심히 했다. 

최 지부장은 김경숙 추모사업회를 세우는 것을 몇 차례 시도했지만 경찰의 방해로 무산되었고, 1989년에야 비로소 모란공원에 가묘를 세울 수 있었다. 김경숙을 좀더 알려내지 못한 게 항상 마음에 걸린다는 최 지부장은 착찹한 심정을 토로했다. 

석방 후 지역운동가에서 시의원으로

YH노조 간부들은 박정희가 죽고도 네 달 가까이 지난 12월10일 보석조치로 모두 석방되었다. 감옥에서 나온 최 지부장은 김경숙 추모사업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0년 5월19일 YH노조를 도와줬던 여러 어른들을 모시고 회의를 하려 했지만 5·18 광주민중항쟁이 그 전날 일어남에 따라 추모사업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같은 해 8월 최 지부장은 남편이 YMCA 활동을 하고 있는 마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자유수출지역 여성노동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그러나 감옥에서 걸린 폐병이 심해졌고, 이 때문에 잠시 모든 일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2년 동안의 휴식을 마친 뒤 최 지부장은 1983년 서울에서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활동을 시작했다. 여기에서 여성노동자 분야를 맡았고, 탁아운동을 시작했다. 김경숙 추모사업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1986년 여성노동자회를 만든 그는 부천에 자리를 잡고, 1989년 여성노동자회 부천지부를 만들어 부천에서 탁아운동을 전개했다. 

한편 최 지부장은 1991년 YMCA에서 마련한 생활협동운동을 부천지역 주부들과 함께 이끌어갔다. 먹거리 운동과 환경운동이 주된 활동이었는데 이 운동을 하던 주부들과 함께 선거문화를 바꿔보자는 의도로 무소속으로 부천시의원 선거에 나가게 되었다. 그 결과 1991년과 1994년 두 차례에 걸쳐 부천시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이 시기 부천지역 담배 자판기 추방운동과 학교급식 조례제정 운동 등을 추진하여 성과를 얻기도 했다. 그리고 1993년에는 여성문제를 다루는 부천가정법률상담소를 세워 소장을 맡게 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yh_03.jpg잊을 수 없는 YH노조 조합원들

부천가정법률상담소 소장과 경기여성연대 공동대표, 민주노동당 부대표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최 지부장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는 것으로 두 가지를 말해주었다. 

하나는 YH노조에서 경험한 노동자의 힘, 조합원의 힘이다. 오랜 투쟁을 하면서도 조합원 300여명 중 어느 누구도 이탈하지 않은 채 결국 정권을 무너뜨리는 촉매제가 되었던 조합원의 힘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정치권에서 하지 못하던 것을 해내는 주부들의 힘이다. 물론 이것도 노동운동을 통해 그녀가 쌓아온 경험과 신뢰를 토대로 가능한 것이었다. 주부들과 함께 한 담배자판기 철거운동이나 학교급식문제 조례제정 운동을 하면서 대중의 힘이 정치를 바꿀 수 있음을 부천지역에서 경험한 것이다.

1979년 YH사건 후 경찰이 조합원들을 모두 지방으로 내려보냈기 때문에 그 후 만나기는 힘들지만 종종 전화로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그녀는 70민주노동자동지회 모임에서 당시 함께 민주노조 건설을 위해 싸웠던 노조 사람들을 만난다. 

현장에 갈 기회가 생기면 최 지부장은 노조간부에게 왜 노동운동을 하는지 묻는다고 한다. 그러면 평등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대답을 듣는다. 그녀는 정말 목적이 이러하다면 대기업 노동자든 중소기업 노동자든 비정규직 노동자든 함께 해야 할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을 염려한다. 이러한 상황을 진심으로 가슴 아파해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6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