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칠레 FTA 국회 비준 임박
우리나라와 칠레의 자유무역협정, 이른 바 '한·칠레 FTA'가 지난 10월24일 타결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 농민들은 정부의 한·칠레 FTA 체결 움직임에 대하여 반대 입장을 밝혀왔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농민들에게 들이닥칠 파급 효과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점 때문이었다.
정부는 우리나라의 국제 위상을 고려할 때 칠레와의 FTA 체결이 불가피하다고 조기타결을 밀어 부쳤다. 이에 대해 우리 농민단체 대표들은 칠레 이외의 다른 국가를 선택하도록 요구하였다. 그 이유는 칠레가 아닌 다른 나라와 FTA를 체결한다면 상대적으로 파급 효과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경제대국이라는 일본에서도 비농업국인 싱가포르를 FTA 대상국으로 선정하여 FTA를 체결하였고(발효시기는 미정), 그 조차도 농업부문을 FTA 대상에서 제외하였다는 사례를 제시하며 우리나라와 칠레의 FTA를 다시 한 번 생각하도록 정부에 간곡히 설득해 왔다.
이러한 과정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칠레 정부는 지난 10월 말 마침내 FTA에 대한 정부간 합의절차를 마친 후 협상 타결을 발표하고, 이제 의회의 비준절차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FTA의 성과와 의의를 강조하며 국내 여론을 형성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 글은 우리 국회의 비준절차를 앞두고 한·칠레 FTA 협상의 타결 내용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한·칠레 FTA가 우리나라 농업부문에 미치게 될 파장과 그 대책을 강조하고자 한다.
[ 10월 31일 국회 앞에서 열린 전국 이장단 기자회견 ▷ 출처: 전국민중연대 ]
FTA 주요 내용
한·칠레 FTA 협상 타결 이후 우리 언론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공통적으로 보도되었다. 먼저, 이번 한·칠레 FTA 협정에서 우리가 거둔 최대의 성과는 자동차와 핸드폰을 즉시 관세 철폐 품목에 포함시키는 한편, 쌀·사과·배는 관세 철폐 예외 품목으로 관철시킨 점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자동차와 핸드폰은 우리의 칠레 수출 1,2위를 달리는 간판 상품으로, 특히 한국산 자동차는 칠레 시장에서 점유율 2위를 달리고 있는데, 이번 FTA가 발효될 경우 1위 자리를 넘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밖에 기계류와 컴퓨터 등도 발효와 함께 관세 없이 칠레 시장에 진입할 수 있게 되어 가격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게 될 것으로 평가하였다. 가전제품 가운데 TV와 함께 빅 3로 꼽히는 세탁기와 냉장고 등 2개 품목은 이번에 칠레산 쌀·사과·배를 FTA에서 제외하는 조건으로 예외품목이 됐다고 양국간 민감한 사항에 대한 배려도 관철되었음을 개관하였다.
농산물 분야를 살펴보면, 우리 농업의 근간이 되고 있는 쌀·사과·배는 당초 알려진 대로 개방에서 제외됐으며, 포도의 경우는 계절관세를 적용하되 10년 내에 철폐하기로 했다고 알려졌다. 또한 쇠고기·돼지고기·감귤 등은 소량의 무관세 쿼터를 준 뒤 DDA(도하 개발 아젠다: 뉴라운드) 협상 이후 논의하기로 했다. 고추·마늘·양파 등 양념류는 DDA협상 이후 논의하기로 했다. 이밖에 복숭아·분유·과일쥬스 등 대부분의 품목들이 5년에서 16년 내에 무관세로 개방된다. 이번 협상의 막판 최대 쟁점이었던 금융서비스 분야는 이번 FTA에서 제외시키되 4년 후에 포함여부를 다시 논의키로 했다. 끝으로 이번 한·칠레 FTA 타결을 계기로 다른 국가와의 FTA 협상도 가속화할 것이라는 전문가 의견을 덧붙였다.
한·칠레 FTA의 파장
한·칠레 FTA의 파장은 농업부문에 미치는 영향, 전체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 향후 농업통상교섭에 미치는 영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중 농업부문에 직접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한·칠레 FTA의 파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농업부문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농업구조의 특수성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나라 농업구조는 영세소농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 농업은 쌀 농사를 기본으로 과수·채소·축산을 겸하는 복합영농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1980년대 이후 상업화가 급진전되면서 시설재배농가가 늘어났고, 이에 따라 생산의 계절성도 일부 사라지고, 저장기술이 도입되면서 생산과 소비가 상시화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농산물 수입개방이 확대되면서 상대적으로 수입하기 어려운 채소와 과실류를 중심으로 생산이 집중되었고, 품목간에도 수시로 작목 전환이 이루어짐에 따라 가격등락 현상이 심화되는 한편 수급이 더욱 불안정해지고 있다. 이러한 농업구조에서 한·칠레 FTA가 발효되어 칠레산 과실의 수입이 더욱 확대된다면 한국 농업에 엄청난 충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첫째, 국내산 과실가격이 하락하여 과실산업에 큰 충격을 줄 것이다. 칠레산 과실의 수입은 해당 품목의 저장 및 시설재배 과실 가격에 직접 영향을 주고, 나아가 과실가격의 하락현상을 초래할 것이다. 칠레 과실이 수입되는 시기는 국내산 과실이 출하되기 직전의 기간에 집중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국내산 저장과실의 판로를 잠식하고 연중 출하가 가능한 시설재배 농가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결국 수확기에 대거로 출하되어 가격파동도 유발될 수 있다.
다음으로 과채류의 가격이 하락하여 과채류 재배농가에도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농산물은 공산품과 달리 유사한 부류의 품목과도 매우 높은 대체효과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소비자의 과실·과채류 구매패턴을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일반 가정주부들은 장을 보러 갈 때 사과를 1만 원어치 구매하고자 계획했더라도, 매장에서 칠레산 포도가 9천 원에 나왔다면 실제로는 포도를 9천 원어치 구매하고 1천 원을 절약하는 것을 생활의 지혜로 알고 있다. 그러한 사례가 모이면 예기치 않게 국내 농가에게는 엄청난 피해가 돌아오게 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99년 12월 이후 대량으로 도입된 미국산 오렌지는 국내산 감귤은 물론 방울토마토, 수박 등 주요 과채류 가격을 예년의 절반이하로 떨어뜨리는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 칠레산 과실의 경우, 주로 상반기 중에 수입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딸기·토마토·참외·수박 등 주요 과채류의 출하시기와 겹치기 때문에 과채류 재배농가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끼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으로 국내 농업과 관련된 산업이 차례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과실·과채류 재배농가는 쌀농사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과실·과채류의 가격하락은 국내 농업 기반까지 위협할 수 있다. 쌀농사와 함께 농가경제를 지탱하는 한 축인 과실·과채류 부문의 소득 감소는 전체 농가경제의 악화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농산물 수입 증가에 의한 국내 농산물 가격의 하락은 그 동안 농어촌 구조개선사업의 일환으로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진 유리온실농업의 채산성 악화로 이어져 국내 농업의 경쟁력 기반 붕괴를 야기할 수도 있다. 또한 과실 및 과채류 재배농가의 어려움은 농업 내부에 머무르지 않고 농업 관련 산업의 연쇄 도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특히, 과실류 저장업자, 농업시설의 원자재 공급산업 및 농업시설 시공업자의 연쇄 도산도 우려된다.
대책은 무엇인가
이러한 파장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가? 접근 방법은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불가피한 선택의 결과이므로 국익을 위해서는 농업계가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자구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접근법이고, 다른 하나는 보상비용이 많이 드는 선택을 한 결과이므로 정부가 적극 피해를 구제하고 자구노력을 지원해야 한다는 방법이다. 물론 전자의 입장은 정부와 자본의 논리이며, 후자는 농민의 입장이다. 이 둘은 서로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 내년도 예정된 국회 비준시점까지 계속될 전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후 대책을 마련하는 데에는 다음 사항을 참고하는 게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 정권교체기에 임박해서 체결된 국가간 통상협정의 책임 문제를 분명히 해야 한다. 잘라 말해서 현정부에서 마련한 국내 보완대책을 차기정부에서도 이행할 것인가에 대한 확답이 필요한 것이다. 만일의 사태를 염두에 둔다면, 정권교체 이후에 FTA의 체결 자체를 지난 정부의 과오로 규정하고 이를 한풀이의 대상으로만 이용할 경우, 협정은 협정대로 발효되고 보완대책은 미흡한 채로 시행령을 마련하지 못해 농민들은 더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둘째, 계절관세의 보완대책으로 과채류 재배농가에 대한 피해구제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정부는 칠레산 포도에 대하여 계절관세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농업부문에 미치는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했다고 타결 결과를 발표하였다. 논리적으로 보면, 이는 노력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탁상행정, 관료주의적 발상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왜냐하면 칠레산 포도가 국내 과채류 농가에 미치는 영향을 소홀히 보았기 때문이다. 포도와 포도의 대체관계만 염두에 두었을 뿐, 포도와 방울토마토, 딸기, 참외, 수박, 메론 등 주요 과채류 품목과의 대체관계를 고려하지 않았다. 만약 이러한 논리가 계산이 어렵고 근거도 불충분하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현실에 충실하지 않고 규정에 집착한 탁상행정, 관료주의적 발상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이들 과채류는 칠레산 포도가 오히려 낮은 관세율의 계절관세를 적용 받는 3월부터 상반기 중에 집중 출하되는 작목인 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도 우리 농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부가 정책적으로 육성한 선도농가들에 의해서 주로 생산되는 작목인 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항이 다른 나라와 FTA를 체결했을 때보다 칠레와 FTA를 체결하였을 때 비용 면에서 불리한 선택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러한 비용을 0(無)으로 계산한 공식에 따라 무리하게 국익을 강조하고 농민에게 피해를 감수하도록 강요하면 거기에는 정치적 비용마저 추가로 부담하게 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농민의 바람직한 대응
태풍 루사로 인해 우리 농촌, 우리 농가는 막대한 재해를 입었고, 올 하반기 동안 재기를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예년보다 일찍 찾아 온 추위를 맞아 남모르는 설움도 느꼈다. 수확이 적어 고심하며 많은 원망도 했다. 하지만 수마에 잠겼던 농토를 복구하고, 태풍에 찢겨나간 하우스를 정비하며 생활터전을 복구해 나가고 있다.
우리 농민들은 이러한 어려움도 있지만 FTA 등의 난관도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극복해야 할 것이다. 먼저, 농촌의 고충, 농업의 중요성, 식품의 안전성, 우리 농민이 책임지고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국민에게 잘 전달하고 공감을 얻어내야 한다. 지난 번 어느 지역농민회의 간부 수련회를 참석하였을 때, 많은 지역 간부들이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고 토론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아직은 도시지역의 노동자 피부에 잘 와 닿지 않는다. 전국농민대회가 열리기 전날인 11월12일 수도권 도시의 노동자 모임 뒤풀이 자리에서 한·칠레 FTA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농업부문에 파장이 클 것이라고 말했더니 참석자들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이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교통되지 않는 현실의 막힌 곳을 뚫어 나가는 노력도 힘들지만 병행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