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14일 심야에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가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전격 합의했다. 1987년과 1997년에 후보 단일화를 하지 않은 정치인들이 입었던 정치적 피해가 너무도 컸다는 학습 효과가 작용했을 것이다. 민주당과 국민통합21간의 후보 단일화는 단일화 방안을 둘러싼 진통이 있겠지만 성사될 거라는 예측이 많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선두를 독주하는 1강2중의 현재의 구도로는 노후보나 정후보나 모두 필패한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후퇴인 후보단일화
집권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결정되었던 노무현 후보가 이렇게 정몽준 후보와 후보단일화에 합의한 것은 정치적 후퇴와 양보를 의미한다. 노후보의 후퇴는 그만큼 기득권세력의 정치적 힘이 강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노-정 단일화 합의는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재벌 후보 정몽준에게 양보한 것이고, 결국 재벌 자본가들에게 정치적으로 굴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치적 분열과 통합은 왜 일어나는가. 대변하거나 지지를 받는 계층이 다르면 당연히 분열할 것이다. 정치적 이념이 다를 때 분열한다. 이념이 같더라도 실천방법이 다를 경우 분열한다. 이것들이 모두 같다 하더라도 이해관계가 다르면 분열한다. 지역에 기반한 정당으로 나뉘는 것은 이해관계의 다름에서 오는 분열이라 할 수 있다.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정몽준 후보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우파세력을 대표한다.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기본 인식은 경제가 성장해야 소득 재분배의 여력이 생긴다는 신자유주의 입장이다. 한나라당도 구시대의 파시즘 요소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고 영남 지배세력이 주도하고 있지만 철저한 시장 경제의 실현이라는 친재벌 입장을 견지하여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부르주아 분파이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역시 고성장을 통한 일자리 창출로 가난한 자에게도 성과가 돌아간다는 신자유주의 입장이다. 정몽준 후보와 같다. 그러나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역비리 은폐혐의 등에 실망하지만 노무현 후보에 대해서는 급격한 개혁의 가능성 때문에 불안을 느낀 안정 희구 부르주아 세력들이 정몽준 후보에게 모였다. 정몽준 후보는 국민통합을 내세운다. 다양한 계층의 지지를 동시에 확보하겠다는 의도이자 지역주의의 빈틈을 파고드는 전략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아직 지역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약점을 갖고 있다.
재벌과 연합한 '개혁'
노무현 후보는 과거 청산에 가장 적극적이고 부패청산과 지역통합을 내세운다. 열광하는 지지자들을 갖고 있다. 젊은 자영업자, 소부르주아층을 대변한다. 민주당은 호남지역 주민들을 주된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다. 호남의 지배세력이 민주당으로 집결한 것이다. 노후보는 민주당을 뛰어넘어 지지자들을 모으고 있고, 이것이 민주당 헤게모니그룹과 충돌하고 있다. 노무현 후보는 처음에는 다소 친노동자적 자세를 보이고, 분배를 성장보다 우선했지만 재벌과 기득권층의 공격을 당하자 점차 성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래서 모든 면에서 절충적이다. 빈부격차 완화를 위해서도 일자리를 많이 만든다는 것과 공적인 사회보험을 동시에 내세운다. 유럽식 조합주의 복지국가를 내세우지만 미국식 자유주의 복지국가의 요소도 부분 수용한다.
노-정 후보 단일화는 노무현 후보가 더욱 오른쪽으로 이동한 것을 의미한다. 노-정 양 후보의 공통성을 기반으로 정책노선을 잡는다면 절충적인 요소는 더욱 약화되고 친재벌 요소가 강해지는 것이다. 이로 인해 유시민 등의 개혁국민정당은 대혼란에 빠졌다. 노후보의 상대적 개혁성을 근거로 정책연합을 했는데 노-정 후보 단일화가 되면 계속 노후보의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는가 하는 점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이회창 후보 대 노무현-정몽준 단일후보간 대결구도는 본질적으로 부르주아세력 내의 분파간 헤게모니 쟁탈전의 성격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역간 헤게모니 쟁탈전의 성격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철저화에 대해서 상대적 차이를 갖는 부르주아 분파간의 헤게모니 쟁탈전의 성격이 혼재되어 있다.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은 같은 부르주아정당, 보수정당이다. 이러니까 시민 유권자들은 대거 기권한다. 누가 당선되어도 자기의 삶의 개선과 관계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촘스키 교수는 미국에 실제 하나의 정당만 있다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민주노동당의 정책들
빈부격차와 고용불안정이 심화된 오늘 한국에서 일하는 사람들, 노동자·농민·도시서민의 정치적 과제는 기득권 세력인 우파의 횡포를 견제할 좌파의 정치적 힘을 키워 가는 것이다. 좌파란 무엇인가. 우파가 강요하는 인간 사이의 불평등을 극복하고 평등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 진보정당이 요구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조건을 기초로 건설되었고 성장해가고 있다. 한국노총까지 민주사회당을 결성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노동자들의 주된 관심은 일자리와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복지이다. 문제는 외환위기 이후 이것이 기업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민사당의 창당도 근본적으로는 복지 문제를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데 그동안 정부를 보수정당들이 장악해왔기 때문에 이뤄진 것이다.
여기서 현실성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진보좌파정당이라 할지라도 현실적인 노선을 취해야 한다. 주체 역량에 맞아야 하고, 근본적 지향을 벗어나지 않고 강화시키는 정책이어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평등 복지사회'를 실현하려 한다. 김대중 정부는 생산적 복지(work-fare)정책을 내세웠지만 민주노동당은 보편적 복지(universal welfare)를 추구한다. 무상의료, 무상교육의 단계적 실현 등으로 사회적 약자 누구나 복지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기초법의 차상위 계층에게 주거보조금을 지급한다는 것은 민주노동당만이 공약하고 있다.
평등과 자주를 겨루는 선거여야
민주노동당은 '민주적 참여경제'를 통해서 안정적 성장을 추구한다. 시장경제란 본질적으로 강자가 주도하는 경제이다. 민간주도 경제란 곧 재벌주도 경제임이 드러났다. 민주노동당은 '분배를 통한 성장', '참여를 통한 성장'을 추구한다. 부유세를 도입하는 등 복지에 소요되는 재원을 확보한다. 정부 일반회계 예산을 최근 국회를 통과한 현재의 111조원보다 수십조원 더 늘려 교육과 의료, 사회복지, 농업분야 예산을 크게 증가시킨다는 계획이다. 재벌대기업의 경우 이익의 일정 부분을 출연토록 하여 노동자소유기금을 조성하고 주식을 구입토록 하여 점차로 민주적 참여기업으로 전환시킨다. 노동자의 참여는 오늘날 한국경제가 단순한 자본과 노동의 투입 증가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지식 축적과 창의성 발휘를 통한 생산성 향상에 중심을 둬야 하는 상황에서 경제발전의 중요한 원천이 된다. 공기업은 유지하되 정부·노동자·시민의 3자가 참여하는 의사결정구조를 갖도록 한다.
민주노동당은 '일하는 사람들의 정치'를 통하여 이를 달성하려 한다. 부패 인사들에 대해서는 부정축재의 철저한 환수와 공무담임권 장기간 제한으로 부패를 청산하려 한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여 완전한 정치 자유를 보장한다. 또 정당 민주주의를 위해서 당비납부 당원 수에 따라 국고보조금을 지급하는 '매칭펀드제'를 도입한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를 의원의 50% 이상으로 하여 일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의사가 제대로 반영하도록 한다. 그리고 국민발안제, 국민소환제, 참여예산제 등을 통해 일반 국민의 참여를 보장한다.
민주노동당은 '자주적인 나라'를 실현하려 한다. SOFA 개정 등 미국에 대한 군사적 종속관계를 청산하고, 복무기간 단축과 군축으로 남북간 화해와 협력, 평화체제 구축을 추구한다. 또한 투기자본 이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경제가 외국경제에 휘둘리지 않도록 한다.
무임승차는 안 된다
한 사회의 주인 노릇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부담을 져야 하는 일이다. 무슨 일이든 일을 진척시키려면 관심과 시간과 돈을 내어야 하고, 일이 잘못되면 책임을 져야 한다. 하물며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정치에 있어서랴. 기득권 세력의 보수정치에 맞서서 일하는 사람들의 정치를 키우려면 진보정당에 가입하고 정당을 키우는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모두 무임승차하려 하면 아무 것도 안 된다. 우리의 노동자·농민·도시서민들은 과연 주인 노릇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번 대통령 선거는 노동자·농민들에게 절호의 정치적 기회이다. 집권을 둘러싸고 분파들끼리 이합집산을 일삼는 부패한 보수정당들에 맞서서 민주노동당을 부각시키는, 진보와 보수가 대결하는 선거구도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의 순간의(물론 진지한) 선택은 십년의 세월을 앞당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