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간 단일화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이번 대선 최대 변수는 '합종연횡'이 될 것이라는 게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노무현 후보, 정몽준 후보라는 3강 구도가 짜여진 이래로 계속돼온 전망이었다. 그러나 기존 정치 공학적 계산에 따르면 노-정 후보단일화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따라서 지난 11월 16일 대선을 불과 한 달을 앞두고 노 후보와 정 후보가 후보단일화에 전격 합의하기 전까지 이회창 대세론이 팽배한 상황이었다. 한나라당은 이번 대선 득표 목표치를 사상 최대인 54%로 잡을 만큼 수월하게 이길 것이라 자신했다. 그러나 노-정간 합의 이후에도 수 차례 결렬 위기를 넘기고 어렵사리 단일화가 성사되어가는 모양새라 이제 승부는 누구도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
기존 정치 논법 깬 노-정 단일화 합의
당초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가 15일 밤 회동을 시작할 때만 해도 단일화는 어렵다는 전망이 우세했다. 이런 부정적 전망은 그간 한국정치를 지배해온 논리적 근거에 기초한 것이었다.
87년 양김 분열에서 보여지듯 후보단일화에 대한 국민적 압력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개인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기반한 선택을 했다는 전례도 존재했다. 노-정 후보간 단일화에 대한 국민 여론은 87년과 달리 반드시 하나로 모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노 후보는 자신의 지지율이 정 후보에 비해 현저히 뒤쳐져 있던 지난 10월까지만 해도 "정몽준 후보와 나는 살아온 길도, 함께하는 사람도 다르다"며 '후보단일화 불가' 입장을 여러차례 밝혔다. 당내 반노파에게도 포용력을 발휘하기 보다는 "때로는 뺄셈정치도 필요하다"면서 분명하게 선을 긋는 행보를 계속했다.
지지율이 뒤쳐진 노 후보 입장에서 단일화 논의에 휩싸일 경우 자신에게 유리할 게 없기 때문이다. 또 이는 설령 대선에 패배하더라도 민주당을 개혁세력 중심의 노선이 분명한 정당으로 탈바꿈시켜 미래를 도모하겠다는 장기적인 전략에 기초한 행보로도 볼 수 있다. 지난 9월말 노 후보가 선대위를 발족시키면서 '민주당의 환골탈태'를 제일 과제로 들고 나온 것, 개혁국민정당과 정책연합을 시도한 것 등은 모두 이런 전략에 기초한 움직임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단일화는 오히려 선명성을 잃어버리는 마이너스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게다가 노 후보 지지율은 상승세인 정 후보 지지율은 하락했다. 조만간 노 후보가 정 후보를 제치고 2위를 탈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상황이었다.
한편 정몽준 후보는 그간 자신이 양보해도 그 표가 노 후보에게 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었다. 이는 노 후보로의 단일화는 대선 패배가 명백하기 때문에 자신이 노 후보에게 양보해야 할 현실적 이유가 없다는 지적이다. 정 후보는 계속 자신으로의 단일화를 강하게 주장했다.
이에 따라 만약 정 후보로 단일화되지 않을 경우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고려한다면 노 후보를 지지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전망이 우세했다. 오히려 이회창 후보 지지, 3위라도 감수하겠다는 독자행보, 아니면 아무런 지지없는 후보사퇴 등이 정 후보의 행보로 점쳐져 왔다.
그러나 이런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16일 새벽, 두 후보가 TV토론과 일반국민 대상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단일화를 합의한 것은 민주당 김경재 선대위 홍보부장 말대로 '언빌리버블(믿을 수 없는)'한 일이었다.
또 이후 여론조사 방식을 둘러싼 갈등으로 무산 위기에 처했던 후보단일화가 22일 노 후보가 후보 선호도가 아닌 이회창 후보와의 경쟁력을 묻는 문항 중심으로 여론조사 설문문항을 수정하는 등 정 후보측 요구를 모두 받아들이겠다는 '정치적 결단'을 내려 극적으로 타결됐다. 여론조사 결과를 놓고 또 한번 논란이 일 가능성이 있지만 이제 단일화 합의를 깨기엔 양측 모두 정치적 부담이 크다.
한나라당, 단일화에 '영남권 反DJ 연대'로 맞서
노-정 후보단일화는 수구냉전세력의 집권을 저지하기 위한 평화개혁세력간 연대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정책이나 정치적 행보에서 엄연한 차이가 존재하는 두 후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틀은 '남북간 평화정착'을 시대적 과제로 꼽는다는 데 있다는 지적이다.
어쨌든 두 후보는 이 후보를 수구냉전세력으로 규정, 이번 선거를 昌 대 反昌의 구도로 가져가겠다는 것이다.
이에 맞서는 이회창 후보 측의 전략은 '영남권 反 DJ 세력'의 결집이다. 한나라당측이 후보단일화에 대해 "DJ 후계자의 부패정권 연장기도"라고 비판하고 나선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반창연대를 명분으로 하는 노-정 후보 단일화는 DJ 세력인 민주당 호남 세력과 JP세력인 충청세력과 연대하는 것으로 이는 '호남-충청연대인 DJP 연합의 재결속'의 의미도 갖기 때문이다.
이 후보는 지난 11월 9일 박태준 전총리와 회동을 통해 공식적인 지지를 얻어냈으며, 같은달 19일 박근혜 의원 영입도 성공했다. 박 대표는 지난 2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를 "제왕적 총재"라고 비판하며 탈당한 이래 9개월 만에 한나라당에 복당, 이 후보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을 것으로 알려졌다.
또 11월 21일 김영삼 전 대통령도 이 후보에 대한 지지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대변인격인 한나라당 박종웅 의원은 통해 "한국에서는 현정권에 대한 불만이 너무 커서 김대중 대통령과 가까운 사람은 당선이 어렵다"며 "야당인 한나라당이 승리하는 것이 순리"라고 말했다. 박 의원은 "이 후보에 대한 YS의 지지입장 표명은 시점의 문제였다"며 "특히 최근 단일화 문제로 정국이 어수선할 때 지지입장을 밝힌 것도 정치적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즉 YS의 이 후보 지지선언은 '영남 결집'의 의미와 동시에 '반 DJ세력 결집'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박근혜, 박태준 등 TK세력과 YS를 비롯한 PK 세력의 지지를 모두 이끌어내 영남권의 지지를 결집시키겠다는 것이다.
이회창 후보는 또 민국당 김윤환 대표, 이수성 전총리, 조순 전 부총리, 이기택 전 의원 등 과거 '악연'으로 소원한 관계에 빠져있는 중진들과 화해하는 방안도 적극 추진중이다. 자민련 소속 의원 및 민주당 탈당파 의원 영입도 모색하는 등 몸집 불리기를 통해 단일화 바람을 막고 대세론을 지키겠다는 게 이 후보의 전략이다.
단일화로 대역전극 펼쳐질까
일단 노-정 후보 단일화는 두 후보의 산술적 지지도 합산을 넘어선 상승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두 후보의 단일화 합의 소식이 알려진 직후 각종 언론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도 후보 지지율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임을 예고했다. 후보단일화 합의 이후 노 후보 지지율이 상승, 조선ㆍ중앙ㆍ동아ㆍ한국일보와 MBC 등에서 지난 17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다자대결에서 정 후보를 앞질러 2위를 탈환했다. 노 후보는 단일화 선호도에서도 정 후보를 약간 앞섰다. 또 정몽준 후보가 MBCㆍ동아ㆍ국민일보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와 가상 양자대결을 벌일 경우 소폭 앞서는 것으로 나타난 것도 단일화 후보의 경쟁력 부분에서 주목할 대목이다.
특히 두 후보가 단일화에 합의하면서 천명했듯이 "낡은 정치의 틀을 깨 정치혁명을 이루겠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울 경우, 사상 초유의 실험인 후보단일화는 그간 지지후보를 결정하지 못했던 부동층의 마음을 움직일 가능성이 클 것이라는 게 정가의 분석이다.
국민경선 이후 불었던 노무현 바람과 월드컵 이후의 정몽준 바람은 국민들의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기존 정치판에선 별로 주목받지 못 했었고, 올 초만 해도 유력한 후보군에 들지 않았던 두 후보가 모두 한때 이회창 후보를 압도했던 것은 이 같은 열망에 기반한 것이었다. 50대 중반인 두 후보의 단일화가 60대 후반인 이 후보와 대비되며 '세대교체' 바람이 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또 관망만 하던 민주당 탈당파, 자민련, 하나로 국민연합 이한동 후보 등 '제3세력'이 '반창(反昌) 연대 공동 구축'에 결합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 3자는 공동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해 중부권 신당을 창당하는 방안 등을 모색해 왔으나 이는 노-정 후보 단일화가 무산될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구상됐던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낙관적 기대가 현실화될지는 미지수다. 우선 단일화 타결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이 후보 지지율이 36%를 상회하는 등 지지자 결집 현상을 보이고 있다. 또 단일후보가 결정된 직후부터 여론조사 공표가 금지되는 점도 상승 효과를 반감시킬 수 있다. 여론조사 결과와 실제 지지도가 연쇄 반응을 일으켜야 하는데 11월 26일부터는 여론조사 공표가 금지돼 "단일화로 거둔 성과를 모두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단일화로 '노무현식' 정계 개편 물 건너가
한편 노-정 후보단일화로 정치적 지향성에 따른 정치세력 재편은 다시 요원해 질 것으로 보인다. 단일화는 정몽준으로 대표되는 보수적 개혁과 노무현으로 대표되는 혁신적 개혁의 혼합을 의미한다. 여기에 민주당 동교동계, 자민련 등 구정치권도 가세할 전망이다.
후보단일화를 반대하는 이들은 이번 대선의 최대 명분은 '정치의 재탄생'이라고 주장했지만 역시 대선 승리라는 현실적 명분 앞에선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로써 '지역분열로 흩어진 개혁세력을 모아야 한다'며 민주당 후보로 결정되기 이전부터 주장해왔던 노무현식 정계개편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
만약 정몽준 후보로 단일화된다면 노 후보는 정 후보를 위해 뛰어야할 것이다. 이른바 개혁세력을 대변하는 정치적 주자로서 노무현은 끝이다. 노 후보 개인으로서 엄청난 정치적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것임과 동시에 노 후보가 의도했던 정치권 재편은 대선 이후에도 힘들 것으로 보인다.
대선 승리와 정치권 재편이라는 두 가지 목표 모두 실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노-정 후보단일화는 의미 있지만 동시에 위험한 모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