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와 근세를 거치면서 상업거래가 활발해지고 자금수요가 많아지면서 은행은 경제사회에 서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다양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시장이나 상업거래가 매우 제한적인 계획경제며, 생산수단이 '전인민적 소유'나 '협동적 소유'로 돼있어 개인적인 소유가 허용되지 않고 있다. 또한 개인 소유의 대상도 근로자들이 받는 임금이나 노동의 질과 양에 따라 받는 분배 몫과 그것으로 구입한 소비품들뿐이다.
이러한 사회주의적 특성을 가진 북한에서 금융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고, 어떤 은행들이 있으며, 어떤 기관에 의해 관리되는지, 또한 배급체계에 따라 분배되는 북한 화폐의 종류와 기능은 무엇인지 쉽게 접해볼 수 없었다. 따라서 북한의 금융 개념과 체계, 은행의 종류 등을 남한의 은행들과 비교해 보면서 북한 금융제도에 대해 알아보고, 북한 화폐의 기능을 살펴보고자 한다.
계획경제 하에서 움직이는 은행
북한 경제는 중앙당국에 집중되어 있는 중앙집권화된 경제다. 북한에서는 내각의 국가계획위원회가 경제 전분야에 걸쳐 노동당의 정책을 계획하고, 집행을 감독하는 것을 담당하고 있다. 이를 북한은 계획의 일원화라고 한다.
북한의 금융 역시 국가은행이 중심이 되어서 화폐자금을 계획적으로 융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국가와 기업에 필요한 화폐자금을 조정하고 분배, 이용하기 위한 국가 재정계획이 원활히 수행되도록 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북한의 금융기관은 행정기관과 기업을 결합시킨 형태며, 기업이면서 정부의 행정기관이기도 하고 국가의 재정자금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기구이다.
북한 금융제도의 골간은 경제계획의 지원과 중앙집권제 원칙에 기초한 '단일은행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며, '원(북한화)에 의한 통제'로 이루어져 있다. 단일은행제도란 발권은행으로서의 중앙은행 기능과 투자은행·상업은행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을 의미하며, 모든 은행들을 조선중앙은행 돈자리(계좌) 설치를 통해 통화조절과 자금 유통면에서 이의 지도와 통제 하에 둔다는 의미다. 남한에서는 이 기능이 '이원화'되어 있는 것과 대비되는 점이다. '원에 의한 통제'란 화폐흐름과 실물의 움직임이 일치한다는 전제하에 화폐흐름을 은행에 집중시켜 통제함으로써 기업의 경영활동을 통제함을 의미한다. 이처럼 북한의 금융기관 체계는 다양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장경제의 금융기관 체계와 달리 매우 단순한 구조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북한 금융의 주요 기능은 우선 기업소의 활동에 소요되는 자금을 통제하거나 지원하는 것을 꼽을 수 있다. 또한 기관이나 기업소에 일시적으로 자금부족이 생길 경우 이를 국가에서 대부해줄 때, 이를 은행이 담당하고 관리한다. 이외에 외화거래의 합리적 조직 및 외화자금 보장 등의 기능을 담당한다.
조선중앙은행을 중추로 한 은행체제
북한의 금융기관들을 살펴보면 대내금융을 담당하는 조선중앙은행이 있으며, 이외에 대내 저축업무는 각 시·군에 설치되어 있는 저금소나 체신소가 수행하고 있다. 조선중앙은행의 업무를 보완하는 대외금융으로 전문은행이 있으며. 조선무역은행과 대성은행, 조선금강은행, 조선창광신용은행, 조선통일발전은행, 고려은행, 조선금성은행 등이 있다.
이 은행들은 대외무역결제 외에 외국은행과의 환거래 계약·결제 등의 업무를 수행한다. 이외에도 일본의 총련, 중국 등과의 합영금융은행으로 조선통일발전은행, 고려상업은행, 화려은행, 제일신탁금융합영회사 등이 있다. 한편 보험분야에서는 조선국제보험회사가 있어 국내외의 비생명보험과 국제보험 및 해외 보험회사들과의 재보험 업무 등을 수행하고 있다. 이들 은행은 내각이나 당, 인민무력부 산하에 있다.
북한은 1964년 단일금융시스템화를 구축했으며, 1970년대 들어서면서 제1차 7개년 계획(1961∼1970)이 실패로 돌아가고 중·소분쟁 등으로 구 사회주의권 국가들로부터의 경제지원이 점차 감소함에 따라 서방국가들로부터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본과 설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북한은행도 산업은행을 조선중앙은행으로 통합하여 단일금융시스템을 강화하는 한편 외화관리를 전담하는 대성은행과 금성은행을 설립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대외무역 및 경제협력에 대한 중요성을 더욱 인식하게 되면서 중반 이후부터 대외개방에 대비한 금융제도의 변화를 본격적으로 시도하였다. 또한 1993년 2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외국투자은행법'에 따라 합영은행의 설립을 인정하게 되었다. 즉 선진자본의 도입과 선진 금융기법의 전수를 위하여 조총련과 합영에 의한 조선합영은행을 비롯하여 ING-동북아은행과 페레그린-대성은행 등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들 은행들은 수익성 저조나 파산 등으로 현재는 철수한 상태다.
한편, 1992년과 1995년 사이에는 1988년부터 시행되어오던 금융제도의 신용계획화체계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용계획화체계란 기업소들이 자체자금으로 경영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고 모자라는 모든 자금을 은행에서 대부를 받는 자금보장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조선중앙은행 업무 처리시스템은 1980년대 후반 전산화가 이루어져 부기처리가 전산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등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저금소를 통한 '저금'과 개인간 거래 금지된 '대부'
북한에서 개인이 저금할 수 있는 곳은 조선중앙은행 산하 각 시군 단위의 저금소나 체신소(남한의 우체국)다. 저금에는 보통저금, 준비저금, 추첨저금이 있다. 주민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저금은 이율이 가장 높은 추첨저금이다. 이자율은 대체로 3%로 내외이나 추첨저금의 경우 원금의 30%∼50%까지 적용된다. 저금은 장마당에서 장사를 통해 번 돈과 중국·일본 등 외국에 친척을 둔 사람들이 외환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 이를 저금한다.
원래 북한은 기관이나 기업소, 개인간의 직접적인 돈거래는 제도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개인에 대한 은행대부도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대부는 대상에 따라 국영기업소 대부, 협동단체 대부 등을 실시하고 있으며, 기타 대부로 외화벌이 자금과 부업경리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대부, 부업반과 가내작업반, 기타 기업들에 대한 대부 등으로 나누어져 이뤄지고 있다. 대부 이자율은 대상에 따라 2∼6%를 적용하고 있으나 대부신청자의 대부사유에 따라 이자율이 달라지기도 하며 실제로는 은행의 원천고갈로 대부가 어려운 실정이다.
회계단위로만 기능하는 화폐
북한은 화폐를 "상품세계에서 모든 상품들의 가치를 표현해주고 교환을 중개해 주는 일반적 등가물의 역할을 하는 특수한 상품"으로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화폐는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며, 유통의 수단, 지불의 수단, 축재의 수단으로 기능한다.
먼저 가치척도의 기능이란 화폐는 경제 각 부문의 생산량을 화폐형태로 표현하고 있다는 의미이나 가격이 정책적으로 결정되고 사유재산제도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큰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다. 또한 기업소가 화폐를 은행에 보관하는 경우나 근로자들이 화폐소득의 일부를 저축한 경우 화폐는 저축수단의 일부로서 기능을 수행한다. 이외에 화폐가 기업소, 기관간의 현금결제, 노임지불, 자금공급 등에 이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불수단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처럼 북한에서 화폐는 경제의 계획적 운영과 생산물의 생산 및 분배에 대한 계산 및 통제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즉 중앙당국의 계획이 경제내의 생산가치 총합은 물론이고 물리적 투입 및 산출의 비중과 방법 등을 자세히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화폐는 단지 수동적인 계산 단위로만 기능할 뿐이다. 중앙은행은 통화공급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만 물가안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경제는 이러한 계획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며, 가격은 공급과 수요간의 실질적인 관계를 반영하지 못하고 단지 중앙계획의 의도만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화폐는 오직 회계단위로만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북한의 화폐에는 일반 화폐로 지폐 5종(1원, 5원, 10원, 50원, 1백원)과 주화 5종(1전, 5전, 10전, 50전, 1원)이 있다. 이외 특수 화폐로 '외화와 바꾼돈표' 8종(1전, 5전, 10전, 50전, 1원, 5원, 10원, 50원)이 있다. '외화와 바꾼돈표' 제도는 1997년 6월 나진선봉지대에 국한하여 폐지하고, 외화를 '북한원'으로 직접 환전해 주는 화폐단일화 조치가 시행되었다. 북한에서는 1차례의 화폐개혁과 3차례의 화폐교환이 있었다. 화폐는 조선중앙은행권으로 발행되었으나, 1988년 무역은행권으로 발행되고 있다.
점진적인 대외개방과 변화 모색
북한은 금융이나 화폐제도에도 여러 가지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데 그 시도를 요약해 보면 먼저, 합영 금융기관의 설립을 통해 외자유치에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여전히 투자유치 실적은 매우 저조하므로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또한, 기업·기업소의 일시적인 부족자금 대부분을 국가예산에서 지원받던 종전의 자금방식과 달리 자체자금으로 충당하거나 모자라는 것만 은행에서 대부받는 방식으로 전환해가면서 독립채산제 원칙과 기업의 효율성을 강화하고 있다는 것 등이다. 마지막으로 '외화와 바꾼돈표'를 부분적으로 폐지함으로써 전국적인 화폐단일화 및 환율 등의 가격현실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북한은 금융과 화폐제도에서도 근본적인 변화는 아니지만 점차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즉 북한은 현재의 경제제도에 대해 그것을 유지하는 범위내에서 부분적이고 점진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듯이, 금융제도에 있어서도 중국과 같이 이원적 은행제도를 도입한다거나 금융시장의 국제적인 개방 등을 수용하는 전격적인 변화보다는 점진적이고 부분적인 변화만을 시도해 갈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