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정권 하에서도 민주국가 최대의 악법인 국가보안법은 그 생명력에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은 채 마음껏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어차피 문제의식도 없고, 그래서 기대할 것도 없는 국회의원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질 리도 만무하다. 그러면서도 국가보안법을 존재의 기반으로 여겨온 극우세력과 공안세력에게 미국 워싱턴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아랍인들의 자살 테러는 뭔가 자신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기득권을 강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국가정보원이 기초한 테러방지법안은 이러한 정치환경을 배경으로 하여 등장하게 되었다. 이 법안이 국회의 의결을 통과하면, 국가정보원의 입지가 한층 더 강화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테러에 대한 국민들의 공포심과 무비판적인 적개심을 이용하여 법안의 처리를 몰아부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것은 아마 식은 죽 먹기나 다름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국보법·집시법을 상회하는 공룡 법안
테러방지법안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법안은 제1조의 그럴싸하고 거창한 목적에도 불구하고, 제2조부터 법적 혼란을 겪고 있다. 제2조는 테러의 개념을 정의하고 있다. 테러의 개념을 일반적으로 정의한 다음, 다섯 가지의 테러 유형을 적시하고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테러에 대한 이러한 개념 정의는 입법의 기본원칙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이러한 개념 정의에 따르면,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국가보안법 또는 집시법으로 처벌을 당해온 상당수의 행위들은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넓은 범위의 행위들이 이 법에 위반하는 행위들로 처벌을 당하게 될 것이다. 법안 제2조의 테러 개념은 기본권제한 법률의 명확성의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있고, 기본권을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침해하고 있기 때문에 위헌이다.
법안은 몇 개의 테러관련기구들을 규정하고 있다. 국무총리가 의장이 되는 국가테러대책회의, 국가정보원 소속의 대테러선터, 외교통상부에 설치하는 국외테러사건대책본부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이 중에서 실질적 권한을 가지는 기관은 국가정보원 소속의 대테러센터이다. 나머지 기구들은 대테러선터에 대한 국민들의 초점을 흐리게 하는 기구들에 불과하다. 법안이 국가정보원의 권한 강화를 노리고 있다고 단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정원, 군 통솔 권한까지
법안은 경찰력만으로는 테러방지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 군병력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헌법상 대통령이 긴급명령을 발동한 상황에서도 군병력을 동원할 수는 없다는 것을 상정한다면, 법안은 헌법을 파괴하는 발상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 통해서 군병력의 투입이 일상화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군이 국가정보원장의 지휘통제하에 들어가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것처럼 우리나라의 경찰력은 주요 국가들의 경찰력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 숫자는 물론이거니와 국민의 일상생활에 대한 접촉의 면에서도 가히 공룡조직이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경찰력만으로도 진압하기 어려운 테러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은 곧 국가비상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 경우에는 대통령이 헌법이 정하는 절차에 따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의 통제를 받으면 될 일이다.
또한 법안은 불고지죄를 규정하고 있다. 개념 정의의 가능성조차 막연한, 테러의 계획 또는 실행에 관한 사실을 알고도 관계기관에 신고하지 않은 행위를 처벌하는 조항이다. 국가보안법이 규정하는 불고지죄의 배아복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조항에 의한 인권침해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테러방지법안은 국민에 대한 테러
테러방지법안은 현행 국가보안법과 집시법이 노리는 목적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두 법의 목적을 훨씬 상회하는 목적까지도 달성할 수 있다. 국가정보원의 수사권의 폭이 대폭 확대되고, 테러 방지를 명목으로 국가정보원이 정부의 14개 부처를 통합(지휘통솔)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군병력까지도 지휘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워싱턴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자살테러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들이 적지 않다. 그 사건이 힘은 힘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고 보는 것이 테러방지법안의 기본 발상이겠지만, 이는 이 사건의 본질을 철저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테러방지법안 자체가 국민에 대한 테러의 수단으로 정체를 드러낼 날이 멀지 않다고 예견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