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5일 철도가 멈췄다. 24시간 맞교대, 월 270시간의 장시간 근무와 주휴일도 없는 불규칙한 근무에 시달려온 철도노동자들의 분노가 국가철도망을 마비시켰다. 파업의 이유는 간단했다. 철도 노동현장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더불어 무책임과 졸속으로 진행된 정부의 철도 사유화 정책 때문이었다. 철도·가스·발전 3사의 연대 파업은 '민영화=효율성'이라는 근거 없는 미신을 유포하면서 밀어붙인 정부의 국가기간산업 사유화를 일단 저지했으며, 사회적으로 광범위한 문제 제기를 이뤄냈다. 그 속에서 공무원이란 허울 좋은 이름 아래 노동기본권의 사각지대에서 생명을 위협받으며 일해온 철도노동자의 현실이 알려졌다. 그리고 철도 파업은 사흘째인 2월27일 △ 철도의 공공적 발전을 위한 공동 노력, △ 24시간 맞교대 철폐 및 3조 2교대 시행과 주휴일 보장 등 근무형태 개편과 인력 충원 등 노동조건 개선, △ 해고자 복직 노력 등을 내용으로 하는 '2·27 합의'가 이뤄짐으로써 사흘만에 종결됐다.
노사합의를 한지 여덟 달이 지난 10월15일 대전 정부청사 앞에는 1천백 명의 철도노동자들이 모여 또다시 분노의 함성을 터뜨렸다. 이날 노동자들은 철도청의 '2·27 합의' 파기를 규탄하며 다시 총력 투쟁에 나설 것을 선포했다. 2·25파업에 이어 지난 8월 위원장 보궐선거에서 새 집행부를 구성한 철도노조는 11월7일의 정기단체협약 갱신을 앞두고, 10월4일 중앙위원회와 10월11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철도사유화 정책 완전 철회 및 공공철도 발전', '2·27 합의 관철, 현장인력 충원 및 구조조정 저지'를 결의했다.
[ '2.27' 합의는 철도청의 책임방기로 아직 이행되지 않고 있다. ▷ 출처: 철도노조 ]
사유화 정책 철회
현재 안전성·친환경성·정시성(定時性)이 있는 철도는 고속철도의 개통으로 신속성까지 갖춘 21세기 최적의 교통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더욱이 조만간 이뤄질 남북철도 연결은 한반도를 유라시아 대륙과 이어주는 '철의 실크로드'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정부는 '2·27 합의'를 통해 '철도산업의 공공적 발전을 위해 공동 노력한다'고 철도노조와 합의한 바 있다. 그런데 정부는 합의안의 문구가 무색하게도 '한국철도주식회사법(안)'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켜 국회에 제출하는 등 이미 '실효성 없음'이 드러난 철도사유화 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더욱이 개통부터 기존철도 시스템을 45%나 공유해 운영하게 돼있고, 세계 어느 나라도 분리운영하지 않는 고속철도를 분리 사유화하겠다는 협박을 서슴지 않고 있다.
철도사유화 정책은 국내외 독점 자본의 수익성을 보장하기 위해 국민을 위한 공공적 기능을 포기하고, 요금인상, 적자노선 폐지, 시설 투자 미흡으로 인한 안전사고 위협, 대량감원 및 고용불안을 피할 수 없을 것임이 충분히 예견되고 있다. 정부는 이제 철도사유화 정책에 철도노조의 반발이 거세고 정치권의 파행으로 연내 '철도구조개혁법안'의 통과가 어려워지자 '무늬만 공사화'하는 수정 입법을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유화로 나가기 위한 중간과정의 공사화이자, 광범위한 위탁경영과 외주용역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 법안이기에 철도노조는 기존법안을 폐기하고, 노사, 정부 그리고 시민사회단체까지 망라한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공공철도 발전 법안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지난 10월10일 철도·발전·가스·전력 노조가 국가기간산업 사유화저지 2기 공투본을 결성하고, 철도뿐만 아니라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정책의 철회를 위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구조조정 저지
철도의 현장인력 부족 사태는 도를 넘어선 지 오래다. 1996년 이후 7천7백 명의 철도노동자가 철도 경영개선과 '작은 정부'를 표방한 정부의 공무원 구조조정으로 감축됐다. 지난 2000년 한해 감축된 중앙공무원 4,299명 중 기능직이 3,675명(85%)이었으며, 감축된 기능직 인원 중 2,346명(64%)이 철도노동자였다. 기관사 1인 승무 등의 열악한 현실에서 타당성 검토나 연구 없이 진행된 정부와 철도청의 '막가파식' 인원 감축으로 노동강도는 높아지고 산재사망사고, 과로사가 빈발하고 있다. 법으로 보장된 연가·병가의 사용은 제대로 그 혜택을 누리기 힘들다. 부족한 현장 인력으로 인해 작년에만 34명의 철도노동자가 직무 도중 사망했다.
현재 철도청도 인원 충원의 필요성은 인정한다. 그러나 '철도공무원 총정원제'에 묶여 정규직을 충원하지 못하고, 계약직이나 일용직을 고용해 업무를 대신하고 있다. 결국 정규직을 줄이고 비정규직을 확대하고 있다. 1996년도에 911명이던 비정규직이 2001년 6월 현재 1,470명으로 늘어났고, 그 업무 또한 정규직원의 업무분야로 확대되면서 고용불안은 물론이고 열차의 안전운행마저 위협하고 있다.
철도노동자의 안전한 노동이 철도를 이용하는 국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 철도노조는 △ 철도청 총정원제 개정 및 인원충원, △ 기관사 1인 승무 철회 및 정원 환원, △ 비정규직·특별인부의 단계적 정규직화, △ 신호장화 중단 및 주재통폐합 철회, △ 관리지원분야 조근인력 현장 복귀 등을 요구하고 있다.
'2·27 합의' 이행 문제
철도노동자는 세계 최장시간 노동자로 손꼽힌다. 철도노동자는 24시간 맞교대(45%), 교번(21%), 일근(34%) 등으로 불규칙·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24시간 맞교대 근무자의 경우, 주당 노동시간이 63시간(월 270시간)으로 한국 노동자의 평균노동시간 주 47.8시간(월 204.8시간, 2000년 현재)보다 무려 16.2시간이나 많다. 또한 열차 승무원이나 시설원의 경우는 주당 노동시간이 75시간 이상(월평균 300시간)을 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러한 수치는 동종업계인 서울지하철과 도시철도노동자의 월평균 183시간, 동일본철도노동자의 월평균 155.5시간과 비교가 안될 만큼 가혹한 노동시간으로서 공무원이란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2·25 총파업을 통해 24시간 맞교대의 3조 2교대로의 전환, 주휴일 보장 등 근무형태 변경과 그에 따른 인력 충원을 노사공동 경영진단을 통해 진행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노사경영진단이 미뤄지고, 9월부터 인상키로 합의한 수당·여비 등의 지급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때문에 정부와 철도청이 합의안을 이행할 의지가 있는지 불신이 커지고 있다. 또한 철도노조는 근무형태 변경을 통한 노동시간 단축 등 노동조건 향상과 적정 인력의 정규직 충원을 주장하고 있다. 반면 철도청은 비정규직의 충원, 외주용역화의 확대, 변형 3조2교대 등으로 노동강도를 높이고, 충원인원을 줄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또한 9월 말까지 4자(철도노조, 철도청, 한국노총, 노사정위원회) 회의를 통해 해결하기로 한 해고자 복직은 철도노조가 '원직복직'이 아닌 '10등급 채용' 등 양보에 양보를 거듭했으나, 결국 철도청의 의지 부족으로 결렬된 상태다.
2·25 파업과 관련해 철도청은 당초 합의와는 달리 김재길 전 위원장을 비롯해 21명을 파면했으며, 10여명이 구속돼 집행유예 등의 형을 받았고, 100여명이 벌금형을 감수하고 있다. 조합비 또한 가압류(현재 16억가량)를 당한 상태며, 손해배상 청구 등은 아직도 철도노조를 위협하는 수단으로 남아 있다.
더욱이 철도청은 철도노조의 상급단체 변경 총투표와 관련해 '노정현안사항 대책'이라는 문건을 통해 "민주노총으로 상급단체가 변경될 경우… 2·27 합의사항 중 현재 추진중인 3조2교대제 도입 등 근무체제개선 및 각종 수당 인상, 후생복지 지원 등에 범정부적인 지원 획득이 난망해질 것인 바, 결과적으로 현재 관계부처에서 심의중인 수당·여비인상 등은 당장 중단될 수 있다"고 협박하고 있다.
노사가 합의한 단체협약을, 그것도 정부기관인 철도청이 지키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법을 지키겠는가? 철도노동자는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동지들의 희생으로 쟁취한 △ 해고자 복직, △ 조속한 노사공동경영진단 실시를 통한 근무체계 개편 및 인력 충원, △ 교번운영 규정 제정 △ 제수당 현실화 이행 등을 반드시 관철시킬 것이다.
그리고, 철도노조는 민주노조의 위상에 걸맞은 수준으로 단체협약을 갱신하려 하고 있다. 자유로운 노조활동 보장, 고용보장, 공정한 인사제도 확립, 임금·노동조건 명문화, 산업안전 및 여성조합원의 권익확보, 후생복지 등 최소한 동종업체 수준의 단체협약을 새롭게 체결함으로써 비정상적인 철도 노사관계를 바로 세우기 위해 투쟁할 것이다.
[ 철도노동자는 국가기간산업의 중추를 떠맡은 자랑스런 노동자다. 그러나 지금껏 기본권조차 박탈 당한 채 살아왔다. ▷ 출처: 철도노조 ]
민주노총 가입과 민주노조
철도노동자는 국가기간산업의 중추를 떠맡은 자랑스런 노동자다. 그러나 지금껏 기본권조차 박탈 당한 채 살아왔다. 그러나 2만5천 철도노동자가 함께 결정하고 함께 행동한 2·25 총파업을 통해 철도노동자의 단결된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확인했다. 2·27 합의는 어느새 휴지조각으로 변해가고, 정부와 철도청은 또다시 철도노동자에게 일하는 기계가 될 것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철도노동자는 더 이상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11월6일, 철도노동자들은 새로운 선택을 했다. 2001년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직선제 선거 투쟁, 그리고 철도 파업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철도노동자들은 상급단체 변경 총회(투표)에서 민주노총을 선택함으로써 그 지향을 분명히 했다.
11월4일부터 6일까지 진행된 조합원 총투표 결과, 총 21,722명 중 20,440명(94.1%)이 투표에 참가하여 11,043명(54%)이 상급단체변경을 찬성했다. 작년 설문조사에서 82% 정도가 민주노총으로의 상급단체 변경에 찬성한 예를 들지 않더라도 54%라는 찬성률은 예상에는 못 미치는 것이었다. 민주노조를 지향하는 많은 노동조합들이 겪었던 것처럼 이번 결과는 향후 철도노조의 투쟁에 부담으로 작용할 소지가 있다.
그러나 이번 총투표는 철도노조와 철도청의 사활을 건 한판 대결이었다. 철도청은 이번 총투표를 부결시키기 위해 기존 업무를 전폐하다시피 했다. 흑색선전물이 난무했으며, 철도청은 팩스로 그 선전물을 유포했다. 조합원 집집마다 편지가 배달됐으며, 교육은 민주노총과 철도노조에 대한 성토장으로 바뀌었다. 징계의 칼날을 세우고, 투표 당일에는 조합비와 조합원 92명에 대한 78억 원의 가압류까지 신청하면서 총투표를 부결시키기 위해 전력을 투구했다.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철도노동자들은 민주노조를 선택해 새로운 투쟁의 전기를 마련했다.
철도노동자들은 상급단체 변경을 '노동계 판도 변화'로 보는 과도한 평가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철도노조는 이제 민주노조를 향해 첫발을 내디뎠기 때문이다.
이번 총투표 과정에서 철도청의 무차별적인 공세로 철도노동자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표출되고 하나로 수렴되는 과정을 거치지 못했지만, 이것도 철도노조가 풀어나가야 할 문제다. 말로만 '민주'가 아닌 진정한 노동자의 자주성을 가진 '민주노조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시작
철도노동자들은 민주노총 가입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 민주노총이 노동조합의 생명인 자주성과 조직의 민주적 운영, 노동자의 투쟁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를 지녔다는 것을 믿고 있다.
민주노총으로의 상급단체 변경은 바로 이런 면에서 2·25 총파업으로 쟁취한 합의가 휴지조각으로 변해가고, 노조에 대한 탄압을 통해 철도사유화 및 구조조정을 밀어붙이려는 정부와 철도청에 투쟁으로 맞서겠다는 철도노동자의 의지 표현인 것이다. '철도 사유화 철회'라는 일전을 피할 수 없는 철도노조로서 민주노총으로의 상급단체 변경은 공투본 강화와 연대틀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철도노동자는 공공부문의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 공동투쟁전선을 유지·강화함으로써 내년 상반기 투쟁의 기틀을 마련해나가는 한편, 궤도노동자 나아가 운수·공공 노동자들의 조직적 단결을 위한 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