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로 인해 IMF 관리체제로 들어선 이후 우리나라 금융회사는 1997년 말 2,102개에서 2001년 12월 1,400여 개로 줄어들어 33.3%가 사라졌다. 그리고 사라진 자리에 하나 둘씩 외국계 기업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여의도 고층 빌딩의 벽면에는 메르치, 굿모닝, 리젠트, KGI, AIG, 알리안츠, 텔슨 등 영자이름이 새겨지고 있다.
IMF는 낙후된 한국 경제를 개혁한다는 명분을 걸고 기업경영의 투명성이나 자산운용의 건전성을 (그들의 기준으로) 강요했지만, 실제로는 시장을 재편하여 초국적자본의 안정적인 투자처로 만들려 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 3년간 수많은 금융기관이 퇴출되거나 합병되었음에도 여전히 초국적자본의 대변기관들은 한국에서 금융기관에 대한 구조조정이 미흡하다고 외쳐대고 있다.
금융구조조정을 3개의 관문으로 나눈다면 첫 번째 관문이 IMF 이후 이른바 부실금융기관의 퇴출과 조기정리며, 두 번째 관문은 우량 금융기관의 해외매각이고, 세 번째 관문은 초국적 금융자본에 의한 상시적인 구조조정 시스템의 구축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의 금융구조조정은 세 관문을 계속 넘나들면서 진행되고 있다.
현재 진행중인 흥국생명의 정리해고 분쇄투쟁과 17일간의 파업으로 힘겹게 고용안정을 쟁취한 일은증권의 2001년 임단협 투쟁을 중심으로 금융기관 구조조정의 현재와 미래를 살펴보자.
브레이크 없는 정리해고 - 흥국생명
흥국생명은 생명보험업계 4∼5위의 기업이며, IMF기간에도 꾸준히 흑자를 실현해 왔다. 2002년 3월 대비 지급여력비율이 178%에 이르고 있는 상황에서도 사측은 2005년 지급여력비율을 맞추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해왔으며, 2001년 5월 희망퇴직을 실시하면서 노조와 '향후에는 인위적인 구조조정은 하지 않겠다'는 합의서를 작성했다. 한편, 사측은 작년부터 영업소를 통폐합하여 지점으로 전환하는 이른바 지점장제를 추진해 왔으며, 정리해고의 불씨는 지점제 추진에 따른 잉여인력과 함께 새롭게 생겨났다.
흥국생명의 대주주인 태광산업은 2001년 6월 태광산업 울산공장의 임단협 시기에 공세적으로 '정리해고'를 시도하여, 5백여 명의 인력구조조정을 단행하고 20여 명의 노조간부를 징계해고하여 노조를 무력화시킨 바 있다. 태광그룹은 울산공장의 정리해고에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흥국생명에도 거의 같은 방식의 구조조정을 계획했으며, 차근차근 수순을 밟아 나갔다.
실제 사측은 지난 12월21일 노조와 어떤 상의도 없이 전격적으로 정리해고를 공표한 이후, 곧바로 김&장 변호사 자문계약체결, 대우그룹 구조조정관련 노무관리 출신자 영입(이 사람은 제2의 제임스 리로 불린다), 흥국생명 사옥(최근 태광그룹에 매각됨)에 보안용역 30여명을 충원하는 등 한판 전쟁을 불사하려는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사측이 정리해고를 공표하자 전국생명보험노동조합은 흥국생명 지부의 교섭 및 체결권 일체를 사무금융노련에 위임하였다. 하지만, 사측은 여덟 차례에 걸친 사무금융노련의 교섭요청에 한번도 응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장실이 있는 24층은 중간에 서지 않는 전용 엘리베이터로 전환하고, 엘리베이터 양쪽에 '보안요원'이 출입자 신분을 일일이 검사하여, 노동조합 간부나 연맹 교섭위원의 출입을 원천 봉쇄했다. 심지어 노조 사무실조차 10명 이상의 출입을 금지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1월7일 노동조합 간부들이 건물 앞에서 조합원들에게 홍보물을 나누어주다가 건물 경비와 용역들로부터 폭행 당했으며, 이 과정에서 이범준 노조 지부장과 여성 간부가 전치 2주의 상처를 입고 엘리베이터 안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했다.
해외매각하려는 노림수
어떤 대화도 거부한 채 노동조합과의 전투에 돌입한 회사 앞에서, 흥국생명 노동자들은 '전의'를 불태우기 보다, 평생을 일해온 직장에 대한 실망감과 허탈에 빠져들었다. 회사가 1월14일 또다시 희망퇴직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퇴직을 종용하자, 퇴직종용을 받지 않은 노동자들이 '이런 회사에 무슨 비전이 있나', '더럽고 치사한 꼴 보기 싫다'며 무더기로 퇴직원서를 제출했다.
지난 1월25일 흥국생명지부 이범준 위원장이 남대문 사옥 8층 옥상에서 밧줄에 매달려 '날 죽이고 정리해고 해라'는 대형 플래카드와 함께 고공농성을 감행한 배경에는 이런 절박함이 있었던 것이다. 흥국생명의 정리해고는 두 가지 점에서 단순히 '기업차원의 인력조정' 수준을 벗어나고 있다.
첫째, 흑자를 실현하고 있는 금융기관의 정리해고라는 점이다. 수백 명의 정리해고로 인한 비용절감의 효과는 불과 연간 수십 억 원에 불과하지만, 정리해고가 공표된 이후 고객들의 불안감과 이탈로 인한 손실은 수십 배에 이른다. 따라서 상식을 가진 기업주라면 금융기관의 인력조정을 위해 '정리해고'라는 칼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노사간 협약을 전면 부정하고 노조를 거세하려 한다는 점이다. 사측은 변호사 집단을 동원하여, 단체협약과 '인위적인 구조조정은 안한다'는 부속합의서에 대해 '사정 변경의 원칙'을 들먹이며, 사정이 바뀌면 약속도 바뀔 수 있다고 주장하여 '고용안정 협약'을 사실상 무력화하려 하고 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그러면 태광그룹과 흥국생명 사측은 무엇 때문에 과도한 정리해고와 노조탄압을 자행하고 있는 것일까? 정리해고를 둘러싸고 노자간 공방이 치열해지는 지난 1월17일 흥국생명 유석기 사장은 한국에 없었다. 그는 흥국생명의 매각이나 외자유치 작업을 위해 프랑스에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이번 흥국생명의 정리해고는 사측이 강변하고 있는 것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팔기 위해서'다. 흑자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대주주의 매각차익을 위해서 수백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다.
국제 투기자본에 맞선 투쟁 - 일은증권
이미 오래 전부터 외국기업의 기업주들이 한국의 경영 현실과 정서를 무시하고, 노사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사례들은 간간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정부의 무분별한 해외자본 유치전략에서 파생된 해외투기자본의 준동은 앞서의 사례들에 비해 훨씬 깊고 심각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1월7일 시작된 일은증권의 파업투쟁은 해외투기자본에 대항한 싸움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알게 해준다.
2000년 12월 예금보험공사로부터 일은증권을 인수한 이른바 'KOL'은 아이리젠트(I-regent)와 위스콘신 연기금 등을 주축으로 한 헤지펀드다.
노동조합은 투쟁 속에서 오십 명의 비정규직을 노조에 가입시켜 노조를 사수했으며, 비정규직의 순차적 정규직 전환, 그리고 2년 동안의 고용보장을 합의서에 명문화 시켰다
해외투기자본-헤지펀드는 세계적으로 약 4천 개가 있으며, 국제금융시장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하루 1조 5천억 달러에 이르고, 미국 헤지펀드만도 2001년 12월 기준 4500억 달러(추정치·585조원)를 위탁받아 운용하면서 자금의 출처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밀에 부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KOL은 돈 세탁이 이뤄지는 곳, 세금을 거의 내지 않는 곳, 즉 국제투기자본의 온상인 말레이시아 라부안에 등록되어 있다. 태생 자체가 국제투기자본이다. 지난해 말 주가조작, 불법대출로 얼룩진 리젠트금융 스캔들이 터지자, KOL의 대주주였던 리젠트 그룹은 대주주로서의 책임을 회피하고 한국을 떠났다. 또한 주가조작 혐의를 받고 있는 짐멜론 리젠트그룹 회장은 한국 검찰의 소환요구에 불응하였다. 결국 그는 기소중지되어 스스로 범죄자임을 드러낸 바 있다.
KOL은 당시 부실금융기관이었던 리젠트종금과 리젠트화재에 대해 자금지원을 강권하여, 이에 응하지 않는 대표이사를 경질하고 2001년 5월 현재의 피터 애버링턴(당시 리젠트증권 등기이사)이 사장으로 부임했다. 피터 사장은 부임한 이래 노조의 임단협 요구를 회피했고, 증권산업노조의 통일임단협 요구에 대해서도 '선진국도 아닌 한국에서 무슨 산별노조냐'고 일축하며 거절했다. 길지 않은 기간동안 사측은 일관되게 성과급체계의 강화, 비정규직 확대, 노조활동 축소에 목숨을 걸었다. 이는 회사의 장기적인 운영보다 '매끈한 외형'과 '단기 수익'에 집착하는 투기자본의 속성상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증권사 합병의 전초전
지난 12월7일 사측이 리젠트증권으로의 피흡수 합병을 일방적으로 통보하자, 일은증권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전국증권산업노동조합은 일은증권지부의 2001년 임단협 교섭권과 체결권 일체를 연맹에 위임하였으며, 12월21일에는 비상 조합원 총회를 개최하여 조합원 308명 중 257명 참석, 81.4%의 찬성으로 총파업을 결의했다(찬성251표, 반대4표, 기권2표).
그러나 피터 사장은 총파업 결의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튿날 2주일 동안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나 조합원들은 격분시켰다. 피터 사장이 귀국하던 1월6일 일은증권 강당에 집결한 조합원들은 1월7일부터 파업에 돌입하였다. 지난 1996년 비상장기업이었던 건설증권의 전면파업이후,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되었던 증권회사에서 전면파업이 벌어진 것이다.
파업 첫날 양보안을 들고 나오던 사측은 파업 이틀째부터 태도를 돌변하여 '지금 즉시 업무에 복귀하지 않으면 합병이후 고용안정을 보장해 줄 수 없다'고 버티기 시작하였다. 사측은 영업정지신청을 하겠다고 협박했으며, 일은증권을 청산하더라도 충분한 청산가치가 있어 손해날 것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자본철수에 대한 위협, 낮은 기본급과 높은 성과급 중심의 급여체계 속에서 시간이 갈수록 영업 손실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하는 증권노동자의 현실 속에서도 완강하게 파업투쟁을 벌였던 노동조합은 지난 1월23일, 17일간의 파업투쟁을 마무리짓고 현업에 복귀했다.
노조는 ① 임금체계 개선, ②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③ 고용안정협약 체결이라는 요구사항 전체를 관철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투쟁 속에서 오십 명의 비정규직을 노조에 가입시켜 노조를 사수했으며, 비정규직의 순차적 정규직 전환, 그리고 2년 동안의 고용보장을 합의서에 명문화 시켰다.
일은증권의 파업투쟁은 앞으로 빈번해질 증권사 합병의 험난한 과정을 예견케 해준다. 일은증권의 투쟁은 전체 증권 노동자들의 대리전이며, 나아가 '회사의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운영과 수익창출'보다는 '합병과 분할, 구조조정'을 통해 단기간에 기업가치를 높여 매각 차익을 노리는 해외투기자본의 횡포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모든 금융노동자들의 미래를 짐작케 해준다.
흥국생명과 일은증권의 사례는 정리해고를 포함한 인력조정과 비정규직화, 그리고 매각·합병 등 불안정 고용상태에 놓이게 될 노동조합의 현실과 과제를 매우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기업차원의 문제조차도 기업단위노조의 투쟁으로는 해결하기 힘들다. 초국적기업의 규제를 위한 국제적 연대가 절실해지고 있다. 특히 최근 다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해외투기자본의 진입을 막아내기 위한 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전략 마련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