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법과 정의는 있는가?

노동사회

이 땅에 법과 정의는 있는가?

admin 0 3,397 2013.05.08 10:24

일년 넘게 레미콘 노동자들이 거리로 떠돌고 있다. 이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해 달라며 명동성당 한켠에서 두 달이 훨씬 넘게 천막을 치고 농성을 벌이고 있다. 매서운 바람 끝에서 봄기운이 돋아나고 있지만, 아직도 힘겨운 겨울나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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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12월20일부터 2002년 2월28일가지 노조인정과 부당노동행위 처벌을 촉구하며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노숙농성을 전개한 전국건설운송노조  ▷ 출처:비정규센터 ]

눈물겨운 레미콘 노동자들의 투쟁

레미콘 노동자들은 재작년 9월 어렵사리 노조설립신고필증을 손에 쥐고 노동자로서의 권리 찾기를 향한 첫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중앙대에서 3천여 명의 레미콘 노동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노조설립보고대회를 개최하고 단결된 노동자들의 힘을 확인했다. 그 후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 그리고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으로부터 연달아 합법적인 노조라는 결정을 받아내고는 국가에 대해서도 기대와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레미콘 회사들은 1970년대 식의 노조탄압을 서슴지 않았다. 앞다투어 부당노동행위를 자행했고, 노조의 단체교섭 요구를 거부하는 것은 물론, 노조 분회의 현판식마저도 물리력으로 가로막았다. 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식비와 고속도로 통행료마저 중단하더니 이에 항의하는 조합원들을 해고해 버렸다. 이에 조합원들은 노조를 인정하라며 지난 여름 내내 거리에서 투쟁을 벌였고, 이들의 투쟁은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의 단식농성, 당산철교 아래에서의 노숙농성이라는 눈물겨운 싸움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레미콘 회사의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이들은 시간을 끌면 레미콘 노동자들이 궁핍한 생활 때문에 결국 투쟁을 포기하고 굴복할 것이라는 오만을 부릴 뿐이었다. 그 바람에 투쟁은 더욱 장기화되었고, 노동자들은 가족들의 생계마저 위협받게 되었다. 그 중 몇 사람은 생활고로 인해 이혼이라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레미콘 사업주들은 이처럼 계획적이고 비인도적인 부당노동행위를 자행하였지만, 누구하나 구속되지 않았다. 결국 레미콘 노동자들은 우선 먹고 살아야한다는 절박함 때문에 당산철교 아래에서의 농성을 풀고, 사업장에 복귀하거나 막일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레미콘 노동자들의 투쟁의 열기가 조금씩 잦아지자 무작정 시간을 끌어오던 검찰은 지난 해 말 세밑의 부산함을 틈타서 부당노동행위로 고소된 레미콘 사업주들을 모두 무혐의 처분해 버렸다. 이어 서울고등법원도 검찰의 결정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부천지원의 결정을 뒤집으면서 '레미콘 운송기사는 노조법상 근로자가 아니다'라는 판단을 내렸다. 부천지방법원은 레미콘 노동자의 근로자성 여부에 대해 심층적으로 검토하고 치밀한 논리구성을 했었지만, 서울고등법원은 그것에 대해 심층적인 검토나 치밀한 반박도 없이 너무도 쉽게 사업주의 손이 되어준 것이다. 결국 레미콘 노동자들은 법과 정의에 대해 깊은 허무감을 안은 채 또다시 거리로 나서게 된 것이다. 

자구 해석에만 집착하는 사법부 

어떤 사람들은 레미콘 기사가 왜 노동자냐고 묻는다. 레미콘 차량을 소유하고 스스로 사업자등록증을 내서 일을 하며 자신이 일한 만큼 대가를 받는데 그렇다면 '사장'이지 왜 근로자이냐고 반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본래 레미콘 기사들은 회사와 고용관계를 맺고 있었고, 일부 사업장에서는 노동조합을 결성해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레미콘 회사측은 레미콘 기사들에게 차량을 불하받도록 강요하고, 그들과 운반도급계약을 체결했다. 그래서 외형적으로는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닌 것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한 걸음만 더 다가가면 문제의 본질은 저절로 드러난다. 즉, 레미콘 회사들은 두 개의 상반된 욕구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레미콘 운송기사들에 대한 임금 등 고용비용을 줄이고 노동조합의 결성에 따른 부담을 줄이고자 하는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레미콘공급의 특성 때문에 여전히 레미콘 노동자의 구체적인 업무에 대해 통제를 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레미콘 회사는 레미콘 기사에게 레미콘 차량을 불하하고 기존의 고용관계를 운반도급계약관계로 전환함으로써 첫 번째 욕구를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때 레미콘의 공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레미콘 운송기사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방식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은 여전히 남게된다. 수요자의 요구에 맞추어 언제든지 레미콘을 공급할 수 있어야 하고, 그 품질 또한 일정수준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미콘 회사들은 차량을 불하한 이후에도 변함 없이 출퇴근에 대해 통제했고, 근무기강을 확보하기 위해서 근무태도에 대한 다양한 규율을 했다. 레미콘 기사들도 일을 하든 안하든 회사에 출근해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심지어 레미콘 회사들은 취업규칙의 명칭만 사용하지 않았을 뿐 여전히 '근무수칙'을 마련하거나 운반도급계약서 중에 그러한 내용을 담아서 레미콘 노동자들을 규율했다. 결론적으로 레미콘 기사들에 대해 형식적으로는 사업자등록증을 갖고 있는 사장으로 만들고, 실질적으로 노동자로서 대우를 했던 것이다. 

비정규직 모두의 문제 

노동법상 근로자인가의 여부는 계약의 형식이나 명칭F?상관없이 그 실질적인 관계에 의해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법의 정신이고 대법원판례의 기본 취지다. 실질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근로자성을 판단한다면 레미콘 기사들이 노동자임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은 형식적인 홃만湧?근거로 근로자성을 부정해 버렸다. 이번 서울고등법원의 논리대로라면 특수고용형태 노동자들은 대부분 노동법상의 근로자가 아니라는 결과가 될 위험성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싶어한 사업주들은 너무도 쉽게 노동법의 적용을 피해나갈 수 있게 되고, 전체 노동자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법의 보호 밖으로 떠밀려 나갈 것이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레미콘 노동자들의 문제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시대 비정규직 노동자 모두의 문제이기에 결코 여기서 멈출 수 없는 싸움이기도 하다. 소송은 소송대로 계속 진행될 것이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노동법을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법개정운동도 계속될 것이다.

레미콘 노동자들은 지난 2월28일 명동성당에서 문화제를 열면서 70여일 간의 천막농성을 접었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노동자로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인권을 위해 힘차게 다시 깃발을 올리고 있다. 천막을 지켰던 레미콘 노동자들과 현장에 복귀한 레미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희망이 노조에 있다는 확신과 그 노조를 건설하고 지키기 위해 쏟았던 지난 여름의 뜨거운 열정을 변함 없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6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