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노동자 대표가 국회나 지방정부로 진출하여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가진 집단으로 성장하는 과정,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만 보더라도 국가보안법에 근거한 보수세력의 탄압이나 방해로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번번이 좌절되었고 그 인사들은 투옥되기 일쑤였다. 여기에 선거를 치를 때마다 쌓이는 빚과 일반국민들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어려움은 더욱 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시도는 멈추지 않았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세계사적 추세이며, 이 시대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필연적 과제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의 약진
지금의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2000년 1월 민주노동당 창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96∼97년 총파업을 겪으면서 민주노총에서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전망을 분명히 하였고, 1997년 대선에 후보를 내세웠다. 결과는 실망스러웠지만, 14대 총선직후 당을 해체해 버렸던 이전 민중당과는 달리 이들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조직을 확대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으로 재출발할 수 있었다. 이렇게 창당한 민주노동당은 그 해 4월에 있었던 총선에서 일부 지역에서는 1∼2위를 다투는 선전을 하는 등 적잖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전국득표율은 2%를 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노동자 정치세력화 추진세력은 좌절하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와의 연대·협력을 강화하고 대중사업을 전개하면서 대국민 선전과 조직력 확대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지난 6·18 지방선거에서 전국적으로 고르게 8.1%를 득표하여 명실공히 '제3당', 지역에 따라서는 '제2당'으로 부상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끈질기고 적극적인 노력의 결실이었다.
대선을 불과 몇 달 남겨둔 지금,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일부 활동가들이나 맹렬 지지자들이 꿈속에서 그리는 환상이 아니라 보수언론에서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조만간 현실화될 구체적인 프로젝트가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IMF 경제위기에서 벗어난 지 오래지만, 고용불안과 빈부격차가 심화되었으며 환경파괴가 심화되고 교육여건과 경제인프라(특히 과학기술력)는 제자리걸음하고 있다. 한미관계는 전통적인 종속관계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으며, 기성 정치와 정치인들은 부패와 독선에 빠져 있다. 그나마 낫다고 하는 민주당조차 국민참여경선으로 쇄신을 도모했으나, 지금은 달라진 게 없다. 일반 국민, 특히 노동자의 입장에서 볼 때 기성 정치인과 정당 가운데 믿을 만한 곳이 하나도 없다.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우리 사회의 시대적 과제인 동시에, 그 성공은 역사적 필연일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토대는 노동자와 노동조합
시대적 과제요 역사적 필연일 수밖에 없지만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영국과 브라질 등 외국의 경험과 우리나라의 지난 몇 차례 선거경험을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노동자 또는 노동조합의 전폭적이고 적극적인 지지와 지원이 없이 '노동자정당'은 선거에서 승리할 수 없다. 영국노동당이 창당되기 전 사회민주연맹과 독립노동당이 있었으나, 노동자나 노동조합과 연결되지 않아 실패한 것이나, 독일 사민당이나 브라질 노동자당(PT)이 노동조합과 강건하게 결합하여 짧은 시간에 수권정당으로 성장한 것 등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나 노동조합과 조직적인 연계 없이 지식인이나 정치인들만으로 건설된 한겨레민주당이나 민중당은 선거에서 대단히 낮은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둘째, 노동조합의 기반이 넓고 견고해야 한다. 노동자나 노조의 전폭적인 지지가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필수적인 요건인 만큼, 노동조합의 조직적 기반이 넓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독일사민당이 1890년의 19.7%에서 1912년의 34%로 득표율이 급격히 높아진 데는 조합원이 29만 명에서 253만 명으로 증가한 것에 힘입었던 바가 컸다.
셋째, 일단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가능성이 확인되면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관계없이 계속 성장하는 경향이 있다. 1900년에 창당된 영국노동당이 1906년 선거에서 29명의 당선자를 낳자 그 후 불과 10년만인 1916년에 연립내각을 구성할 정도로 급성장하였고, 1875년 창당된 독일사민당이 1877년 선거에서 9%득표율을 보인 뒤 1890년에는 19.7%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최다득표정당으로 부상하였으며, 1918년에는 연립정부를 구성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브라질 노동자당(PT)도 1982년 창당 직후 총선에서 3.1%를 득표하였으나,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86년에는 6.5%의 지지로 16석을 확보하였으며, 1990년에는 다시 35석으로 늘어났고, 1998년에는 58석으로 꾸준히 증가하였다.
전체 노동자를 대변해야
2000년 1월에 창당한 민주노동당은 이전의 진보정당과는 달리 노동조합과 견고히 결합되어 있으며, 제16대 총선 이후 지지율도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지방선거에 이어 이번 대선에서도 '제3당'으로서의 위치를 지키려면 다음 세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우선,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지지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지난 지방선거에 대한 인천지역 노동자들의 투표 행태를 조사해본 결과 정당명부식 비례대표 광역의원투표에서 소속노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민주노총 조합원의 2/3정도가 민주노동당 후보를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합 활동이 활발하고 조사에 협조적인 노조만을 조사했기 때문에 실제 지지율은 이보다 낮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는 보다 많은 조합원들이 민주노동당 후보를 지지할 수 있도록 조합원들에 대한 교육과 선전이 필요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포함한 미조직 노동자의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 앞에서 인용한 조사결과에 의하면, 비조합원의 민주노동당 지지율은 대략 45% 내외로 조합원의 63%보다 크게 낮았으며, 비정규직 노동자의 지지율은 39%정도로 정규직의 67%에 비해 절반 정도로 그쳤다.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민주노총의 '변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즉 조합원들만의 노동운동이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나 미조직 노동자를 포함하는, 전체 노동자를 위한 노동운동을 이끌어 가는 민주노총의 이미지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한국노총은 물론 한국노총이 준비중인 '신당'과 보다 긴밀하게 연대하고 협력할 필요가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마지막으로, 대선에서는 다른 선거에서보다도 후보의 인물됨이 유권자의 투표 결정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이 이번 대선에서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민주노동당 후보의 민주성과 정책 마인드, 그리고 공개성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지금 한국 정치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점은 3김 정치의 부정적인 모습을 완전히 벗어 던지지 못한 것임은 잘 알려져 있다. 3김 정치의 가장 큰 폐해는 카리스마적인 1인 지도자에 의한 독선의 정치, 밀실의 정치, 연고의 정치다.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부패와 비리사건, 민생을 외면한 대립과 인신공격성 폭로 국회는 이러한 3김 정치에서 나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그 지도자는 이러한 폐습과는 전혀 무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타파하는데 앞장서고 있음을 부각시켜야 한다.
새 희망을 향해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는 그가 가진 '친노동자성'과 '개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 아들과 관련된 비리에 대해서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데다가, 김영삼 전대통령에게 화해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3김 정치와의 연관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으로 인식되어 강력한 다크호스로 부상되고 있고, 또한 대북 정책에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 정몽준과, 이전부터 3김 정치 타파를 외쳐왔던 한나라당의 이회창이다. 이 둘은 3김과의 연관성으로부터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약한 고리가 있다. 그것은 친재벌과 대미종속 성향이다. 정책대결로서 이 부분을 집중 공략해야할 것이다.
대선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추구하는 세력이 어떤 성과를 거둘 것인가는 상당부분 객관적 조건에 의해 규정되지만, 또한 상당 부분 그 주도세력인 민주노동당과 노동조합의 전략적 선택에 달려 있다. 그 동안 노동자 등 민중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고통을 당해 왔다. 기성 정치인과 정당은 전혀 희망을 주지 못했다. 민중들은 '유토피아'라 할지라도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민주노동당과 노동조합이 아니면 누가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