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적 배경

노동사회

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적 배경

admin 0 12,078 2013.05.08 11:51

이스라엘은 지난 6월22일 F-16으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지도자인 셰이크 살라 셰하데를 암살하기 위해 가자 지구의 주택가를 폭격했다. 이 폭격으로 그 지도자 외에 2개월에서 13세 사이의 어린이 8명 등 15명이 살해당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7월31일 ‘하마스’는 예루살렘의 히브루대학 구내식당에 폭탄 공격을 감행해 7명이 숨지고 86명이 다쳤다. 이런 폭력의 악순환은 몇 십 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무장단체 지도자를 암살하면, 얼마 후에 팔레스타인 젊은이의 자살폭탄 공격이 도심의 카페나 상가에서 발생하고,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24시간 안에 전투기나 무장헬기로 팔레스타인 마을을 폭격한다. 그리고 다시 팔레스타인 젊은이의 자살폭탄 공격이 일어난다. 

서방 제국주의와 이스라엘 건국

espark_01.jpg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는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1917년 발포어 선언 이후부터 1948년 이스라엘 건국까지의 영국 위임 통치 기간이다. 영국은 1차대전 이후 오스만 터키의 아랍 지배가 막을 내리자, 팔레스타인 지역의 위임 통치를 시작했다. 1차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영국은 독일 편에선 오스만 터키에 맞서 독립을 위해 싸우는 아랍인들에게 전쟁에 협조하면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에게 주겠다는 ‘맥마흔’ 선언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영국은 미국 유대인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을 참전시키기 위해 1917년 외무장관 발포어를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발포어 선언을 했다. 이런 영국의 기만적인 정책으로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이민오기 시작했고, 이에 반대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또한 영국은 위임통치 동안 이스라엘에 편향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무장을 억제하면서도 유대인들의 무장은 자위권 차원에서 눈감아 주었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을 탄압하였다. 

결국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연합(UN)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동정 여론을 업고 1947년 11월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국가로 분할한다고 결정했다. 특히 미국은 유럽에 거주하는 유대 난민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더 많이 이주할 수 있도록 하라고 영국에 요구했다. UN 분할안에 의하면, 팔레스타인 지역의 56.47%를 유대인이 차지하고, 나머지 43.53%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차지하게 되어 있었다. 당시 이 지역의 팔레스타인 인구는 전체의 65%였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 땅에 유대인 국가가 건설되는 데 분노를 느끼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방안이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크고 작은 충돌과 교전이 시작되었다.

영국의 묵인 하에 꾸준히 무장하고 있던 유대인 민병대는 1947년 12월 팔레스타인 마을 공격을 시작으로 1948년 5월14일 영국 위임통치가 끝나고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까지 팔레스타인 마을에 대한 무장테러 공격을 계속하였다. 이 때의 유대인 민병대는 이스라엘군의 모태가 되었고, 당시 두려움을 느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탈출은 팔레스타인 난민의 시초가 되었다.

이렇듯 발포어 선언에서 이스라엘 건국까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제국주의 세력은 팔레스타인 주권국가 건설을 방해했고, 유대인들은 제국주의 세력을 등에 업고 2천년 동안 떠나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에 자신의 국가를 세울 수 있었다. 

미국의 강력한 후원 

espark_02.jpg2차 시기는 1948년 1차 중동전쟁부터 1976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아랍연맹에 정식으로 가입할 때까지 이스라엘과 아랍세력의 전쟁 시기이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하자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라크가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써 1차 중동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랍연합군은 명확한 구심점 없이 전쟁을 단행하여 이스라엘에 패했고, 휴전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1차 중동전쟁 패배의 충격과 교훈으로 아랍 국가들에서는 이집트의 나세르 정부를 필두로 아랍 민족주의가 세력을 얻었다.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가 선언되는 등 아랍 민족주의는 미국과 유럽에게 우려의 대상이 되었고, 이는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56년 나세르 정권이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자 이스라엘은 영국 프랑스와 함께 이집트를 침공했다. 이것이 제2차 중동전쟁이다. 1967년에 일어난 3차 중동전쟁 역시 이스라엘의 승리로 돌아갔고, 전쟁 결과 팔레스타인 지역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전쟁 승리로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골란고원과 이집트의 시나이반도,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가자, 서안 지구, 그리고 동 예루살렘까지 점령하게 되었다. 이 결과로 50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그리고 이집트로 쫓겨나게 되었다. UN은 이스라엘이 3차 중동전쟁에서 점령한 지역에서 즉각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이는 지금까지 지켜지지 않고 있다. UN 결정을 이스라엘이 거부하자 1973년 이집트와 시리아는 자국 영토를 되찾기 위해 욤 키프르(혹은 라마단) 전쟁을 벌였지만 패배하고 만다. 

모든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된 배경에는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자리 잡고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의 후원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스라엘도 없다는 말이다. 미국은 아랍민족주의를 견제할 세력으로 이스라엘을 키워왔으며, 때문에 군사·경제 지원과 정치적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냉전 시절, 소련이 전략적으로 아랍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노력함에 따라 이스라엘은 미국의 중요한 동맹자로 더욱더 확실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결국 전쟁의 패배 이후 아랍세력들이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몰아낼 가능성은 사라지게 되었다.

PLO의 결성과 중동평화 협상 

3번째 시기는 1976년 PLO의 아랍연맹 가입부터 1993년 오슬로 협정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지배가 공고화되는 시기며, 동시에 PLO를 중심으로 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저항이 계속되는 시기다. 1978년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캠프데이비드 협정에 서명하였다. 이 협정으로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돌려주고,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고, 양국은 미국으로부터 거대한 경제 원조를 받게 되었다.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아랍은 분열되었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지역 점령을 전면 부정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평화협정과 미국의 강력한 지지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걸림돌이 되는 세력은 오직 PLO만 존재하게 되었다. PLO는 1964년에 결성되었으나, 이스라엘과의 전쟁이나 휴전협정에서 PLO의 존재는 미비하였고 아랍 정상들에게도 팔레스타인의 대표체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1967년 6일 전쟁 과정에서 전과를 세워 그 존재를 인정받기 시작했고, 1969년 아라파트가 의장이 되면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60년대 후반 요르단에서 군사조직을 결성해 활동하던 PLO는 1970년 요르단 정부와의 갈등으로 요르단에서 추방된 후, 1971년 본부를 레바논으로 옮기게 되었다. 1974년 아라파트는 PLO가 이스라엘과 관련 없는 국제 테러리즘에는 더 이상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국제사회는 PLO를 팔레스타인 국민의 정당한 대표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런 요청은 아랍 정상들에게 수용되었고, 1976년 PLO는 아랍연맹에 정식으로 가입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1948년부터 1977년까지 약 30년 동안 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내각이 구성되었으나, 1974년 욤 키프르 (혹은 라마단) 전쟁시 노동당의 미온한 대응으로 현재의 리쿠드 당의 전신인 우익 헤루트당이 1977년부터 내각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이후 이스라엘 정치는 두 당이 번갈아 내각을 맡던가, 아니면 두 당이 연립으로 내각을 구성해 왔다. 이스라엘 노동당은 타협 노선을 걸어왔고, 우익인 리쿠드당은 2천년 전 이스라엘 영토인 팔레스타인 전역을 양보할 수 없다는 원칙을 내세우면서 강경 군사 노선을 고집했다. 

리쿠드당 내각의 이스라엘은 PLO를 무력화하기 위해 1982년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를 끝내자마자 1982년 레바논을 침략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략 구실은 팔레스타인 과격단체가 런던의 이스라엘 대사 슬로모 아르고브의 암살을 시도한데 따른 보복이었다. 그러나 이 암살을 실행한 팔레스타인 과격단체는 PLO에 적대적인 단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곳에서 활동하던 PLO를 튀니지로 쫓아내고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파괴하였다. 더군다나 이스라엘군은,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가 베이루트 근처 사브라-샤틸라 난민촌을 습격하고 부녀자와 어린아이, 노인 등 2천명을 학살하는 걸 묵인하였다. 당시 이스라엘 국방장관이 현 총리인 아리엘 샤론이다. 샤론은 1983년 이 학살에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인티파다, 민중항쟁의 시작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략은 PLO를 팔레스타인으로부터 멀리 쫓아내 무력화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지만 잃은 것이 더 많았다. 이전까지 유럽과 미국의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로부터 서구 민주주의를 지키는 세력으로 비추어졌다. 그러나 레바논 학살은 국제 사회에 이스라엘의 추악한 본질을 보여주었고, 팔레스타인 독립 투쟁에 대한 국제적인 지지를 확산시켰다. 
한편, 이스라엘은 PLO를 무력화하는 정책 외에 팔레스타인 영토에 대한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지배를 꾀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1977년 리쿠드당의 전신인 헤루트당 내각이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이 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샤론은 1977년부터 레바논 침략 전인 1981년까지 농업장관을 맡으면서 유대인 정착촌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이 결과 1988년까지 서안 지구의 55%와 가자지구의 30%가 유대인 정착촌으로 채워졌고, 그 안에서 유대인들은 모든 경제력을 장악하고 정착민의 안전을 구실로 군대를 동원해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탄압했다. 

이에 견디다 못해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1987년 12월부터 인티파다, 즉 민중항쟁을 시작했다. 1993년 인티파다가 끝날 때까지 이스라엘군의 탱크와 미사일에 대응해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돌과 화염병으로 대항했으며, 이들의 대항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PLO를 중심으로 단결시켰고 팔레스타인 문제를 국제적인 의제로 부각시켰다. 반면 팔레스타인 주민들과 끈질긴 악연을 지닌 샤론은 인티파다 와중에도 1990년부터 1992년까지 건설주택장관을 맡으면서 서안,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마을을 ‘불도저’로 밀어내고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해 '불도저'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냉전의 해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냉전시기 중동에서 미국을 견제하면서 PLO를 지원해주던 소련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반면 1991년 걸프전 승리로 미국의 중동 영향력은 커졌다. 특히 PLO에 경제 지원을 해주던 이라크의 약화는 팔레스타인에 경제적 궁핍을 가져왔다. 이에 따라 PLO는 두 국가 방안을 받아들이게 되어 평화협상이 진행되었다.

1991년 10월30일 마드리드 정상회담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시리아, 레바논, PLO와 이스라엘 등 중동분쟁의 당사국과 미국, 러시아, 유럽의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여 중동평화협상을 시작했고, 이는 1993년 오슬로 협정으로 이어졌다. 오슬로 협정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서로의 생존권을 인정하는 바탕 아래서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여리코 지역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자치 허용,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을 위한 팔레스타인 주민의 총선 실시, 국경·난민문제 및 예루살렘 귀속문제에 대한 협상 실시,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의 이스라엘군의 단계적 철수 등을 합의했다. 

이등 국민 

세번째 시기는 이스라엘이 미국의 확고한 지원 하에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의 유일한 국가로서 확고히 하려는 의도를 진행시키는 시기였다. 이러한 의도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국가건설을 꾀하면서 이스라엘에 저항하는 PLO를 소멸시키려 했으며, 서안과 가자지구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해 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토지 장악력을 높이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자신의 이등 국민 또는 하청노동자로 전락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PLO를 중심으로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필사적인 저항을 계속하면서 이스라엘의 의도를 약화시켰다. 90년대 들어 냉전의 해체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주민들간의 평화공존을 바탕으로 하는 두 국가 방안이 유력하게 논의되었고, 이는 1993년 오슬로 협정으로 활기를 띠게 되었다.

마지막 시기는 1993년 오슬로 협정부터 현재까지다. 이 시기는 상호공존을 통한 중동평화 모색의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모색의 노력에는 많은 난관이 있었다. 이스라엘의 리쿠드당을 중심으로 한 우익들은 팔레스타인 국가건설을 계속 방해하고 지연시키려고 노력했으며, 팔레스타인에서도 하마스를 비롯한 강경파들이 유대인의 국가인 이스라엘을 전면 거부하였다. 또한 미국 역시 팔레스타인 국가건설을 비롯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주권보다는 중동지역의 지배력을 유지하는데 평화협상을 이용하였다.

결국 평화협상은 이스라엘의 수상이던 노동당의 라빈이 1995년 11월 이스라엘 종교 극단주의자에게 암살당하고, 1996년 이스라엘 총선에서 우익인 리쿠드당의 네탄야후가 승리함으로써 다시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한편,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서 1996년 선거를 통해 아라파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스라엘에서 라빈 암살 이후 리쿠드당의 우익정부가 오슬로 협정을 무시하고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정착촌 건설을 계속 강행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 국가 인정을 거부하는 하마스 의 영향력이 커가면서 이슬람 과격단체의 이스라엘에 대한 자살폭탄 공격이 증가하였다. 그리고 2000년 9월 우익 리쿠르당의 당수인 샤론이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인 알-악사 모스크에 이스라엘 정치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들어가서 이스라엘 영토임을 선언함으로써 2차 인티파다가 시작되었다. 또한 샤론은 2000년 말 선거에서 수상에 당선됨으로써 중동 평화협상은 고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스라엘에 이어 미국에서도 강경파인 공화당의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팔레스타인의 평화협상은 빈사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한편, 냉전의 해체이후 유럽연합(EU)은 중동 지역에서 자신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다. 특히 EU는 1995년 11월 지중해 연안의 아랍 국가들과 함께 2010년 유럽과 지중해연안 국가들의 자유무역지대 창설을 목표로 하는 협정을 맺었다. 2010년 자유무역지대의 창설을 위해선 지중해 연안국가들의 경제적·정치적 자유의 정착과 안전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의 평화를 주요 과제로 상정하고, EU는 팔레스타인에 경제 원조를 개시했다. 팔레스타인 경제 원조는 도로, 공항, 건설 등 인프라를 조성하고, 서구적인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며, 팔레스타인의 사기업을 돕는데 쓰이고 있다. 한편 EU는 이스라엘의 최대 무역 상대로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영향력을 점점 확대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향해 

오슬로 협정이후 현재까지의 지지부진한 평화협상과 무자비한 이스라엘군의 공격은 이스라엘을 완전 추방할 것을 주장하는 과격무장단체에 대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지지를 넓히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자살폭탄 공격이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고 그들의 주권을 되찾는 올바른 방법인가를 떠나서, 무엇이 그들을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면서 자살폭탄 공격을 하게 만드는가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팔레스타인은 정치 군사적 측면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이스라엘에 종속되어 있다. 먼저 이스라엘의 화폐를 쓰고 있으며, 팔레스타인 경제인구의 25%가 이스라엘의 건설현장 등에서 비숙련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실제로 2000년 9월 2차 인티파다 이후 이스라엘이 국경을 봉쇄해서 2001년 말 팔레스타인의 실업률이 약 51%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팔레스타인에 건설된 경제 인프라가 파괴되어 그에 따른 피해도 막대하다. 경제적 빈곤을 겪는 젊은이들이 이스라엘군의 만행을 보면서 자살폭탄의 전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여성까지 자살폭탄 테러에 가담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비상의료센터에서 구호활동을 하던 여성이 매일 부상당해 들어오는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보다 못해 자살폭탄 공격을 직접 실행하기도 했으며, 팔레스타인 과격 단체인 하마스는 어린 청소년까지 자살폭탄 공격을 지원하자 이는 훈련된 어른만 할 수 있다며 자제를 당부하는 상황이다. 

2000년 9월 알 아크사 인티파다 이후 지난 7월 말까지 팔레스타인측의 자살폭탄 공격과 이스라엘의 강경 대응으로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인 1,400명과 이스라엘인 500명 이상이 희생됐다. 폭력의 악순환을 타개하기 위한 최우선 과제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건설이다. 1993년 오슬로 협약에서 98년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합의했으나, 지금까지 팔레스타인 국가의 건설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국제 여론과 압력으로 어쩔 수 없이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용인한다고 하면서도 계속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동의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어 이를 지연시키고 있다.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은 팔레스타인 주민의 최소한의 요구며,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팔레스타인 과격 무장단체의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고 자살폭탄 공격은 계속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6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