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근대성을 향하여
근 대성을 이야기할 때 가장 대비되는 국가가 바로 이탈리아일 것이다. 중세라는 멍에를 가장 오랫동안 짊어진 서구 국가였던 이탈리아에는 애당초 노동운동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힘들었던 척박한 토양을 가지고 있었다. 카톨릭의 본산으로 종교적 영향력이 가장 컸고 국토의 분열과 외국세력의 각축장이었다는 역사적 배경은 근대 산업혁명이 싹트지 못했던 원인이기도 하다. 그저 수공업과 장인들을 중심으로 조합이 일찍부터 존재했던 이탈리아에서는 노동하는 이들의 권익이라는 측면보다는 생산 주체들의 이익집단이라는 성격이 더 강했다. 산업혁명과 그에 따른 근대 노동운동의 역사가 비교적 일찍 시작한 영국이나 다른 유럽의 국가들과 달리 이탈리아에서 노동운동은 따라서 매우 늦게 시작되었다.
[ 이탈리아 금속노동자들 ]
보 통 19세기를 그 역사적 기점으로 삼는 이탈리아에서는 노동시장이 개인적이고 불안정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노동 계약은 고용주와 노동자가 일 대 일로 체결하고 그에 대한 집단적인 요구나 행동이 불가능했던 시기였다. 동시대의 영국이나 다른 유럽국가들에 비하여 너무나 후진적인 노동시장이었다. 특히 생산품이 정기적으로 생산되지 않고 계절에 따라 유동적이었다는 사실은 노동시장의 고용불안과 계속되는 이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는 가족 경제를 어렵게 만들었는데, 일반적으로 5인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는 가장만의 수입으로는 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보통 10살 이상이 되는 어린 자녀 중에서 한 사람은 일을 하거나 주부가 일을 해야 하는 식으로 어린이와 여성 노동착취가 발생했다. 실제로 섬유나 식료품 산업들에는 노동자들의 신분 불안과 이를 악용한 여성과 어린이들에 대한 노동착취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특히 10세에서 15세 미만의 아동 노동과 여성 노동은 많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최소한의 기본적인 노동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 어린이와 여성의 노동은 고용 불안정과 함께 노동시장의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 당시의 자료를 보면 실제로 활동중인 전체 노동인구에서 총 38%를 차지할 정도로 이들 어린이와 여성의 노동인구 비율은 매우 높았다. 이와 같은 노동조건과 상황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보장정책이 존재하지 않았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작업 중 사고로 인한 재해나 고용에 대한 안정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이고 기구적인 보호장치가 없는 상태가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역사상 최초로 근대적인 결사 형태가 탄생하게 된 것은 바로 열악한 당시의 이탈리아 노동계의 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장 최초로 노동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결성된 단체는 상호부조회(societ? di mutuo soccorso)였는데, 1870년 이후에 처음으로 결성된 결사로 일종의 공제조합의 성격을 가졌다. 설립과 운영방식은 지역이나 사업장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 후원자들과 회원들로부터 일정한 금액을 받아 기금을 적립한 뒤 실직과 질병 또는 기타 비상의 경우에 사용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지역이나 단일기업 또는 일정한 공업지대 및 단일 업종 등이 주체가 되어 결성되었지만, 순수한 의미에서의 노동단체라기보다는 일종의 자선협회와 상호공제 협회의 중간 성격을 갖는다. 노동자들의 권익이나 스스로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재력가나 회원 중심으로 운영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목적이 주로 비상시에 대처하기 위한 활동에 국한되었다는 점등은 중세적 성격의 길드와 현대적 성격의 노동조합 중간에 위치하는 과도적 단계의 결사체 형태였다.
최초의 노동조합의 성격을 갖는 기구의 형태가 만들어진 것은 이보다는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였다. 최초로 결성된 단체 상호부조회(societ? di mutuo soccorso)가 조합원 상호간의 부조와 보장이라는 본래의 목적에서 점차로 파업을 위한 재정적 지원기구 역할을 수행하면서 보다 발전된 형태의 노동운동 기구가 된다. 바로 이와 같이 노동자들이 자율적으로 임금투쟁이나 노동조건을 위한 투쟁 등에 조합의 기금을 사용하면서 본격적인 현대적 성격의 노조 형태가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일정한 지역과 사업장 및 계열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전지역적이거나 전국적 규모의 노동 투쟁이나 보다 명확한 통일적 입장을 정리하고자 할 때는 커다란 노동세력으로 발전할 수 없다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즉 전국적인 규모의 잘 짜여진 조직체의 구성이 절박하게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상호부조회가 파업을 위한 노동자들만의 노동조합으로 발전되어가면서 그에 따른 명칭도 변하게 되었다. 저항연대(leghe di resistenza)란 이름의 기구가 생긴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설립의 목표가 단순하게 ‘고용주들에게 하루라도 더 저항한다’라는 것일 정도로 파업 투쟁에서 연대와 결속이 주요 목적이었다. 이들 기구들은, 비밀리에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출범한 당시의 상황 때문에, 정확한 설립연도를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보통 1880년대를 전후하여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업주들과 피고용인 노동자들 사이의 이해를 조정하고 노동자들의 경제적 법적 지위에도 관심을 갖게 된 이와 같은 노동단체들이 보다 전국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이탈리아 통일운동 과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저항연대와는 달리 비교적 전국적인 규모를 가지고 있던 단체가 바로 노동자 동맹조합(Le Socie? operaie affratellate)으로 상호부조회가 전국적 조직으로 발전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 노동자 동맹조합의 중요성은 조직이 전국적인 규모였기 때문이 아니라 19세기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파악하고 그 토대를 제공한 요인을 살펴볼 수 있다는데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정확하게 제시되어야할 부분이 바로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사상적 기반이기도 한 마찌니(Mazzini)주의와 사회주의의 도입이다.
2. 사상적 기반과 사회주의의 접목
흔 히 리소르지멘또(Risorgimento)라고 하는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사상적 기반은 마찌니주의이다.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였던 마찌니의 사상을 집약한 것인데, 간략하게 말해, 그는 이탈리아 통일 국가의 정체로 급진적 공화주의를 표방하였고 노동자 계급을 국민적인 차원에서 노동자들간 그리고 자본과 노동 사이에 동맹과 협회를 통하여 사회제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의도를 갖고 있었다. 마찌니주의는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이 된 뒤에도 1893년 계급주의적 노동운동 주류 입장의 암초에 부딪쳐 와해될 때까지 이탈리아 사회와 노동계의 대표적 입장의 하나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이탈리아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는데, 이는 노동운동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교적 온건주의적 성격을 가진 노동자 동맹조합(Le Socie? operaie affratellate)과 함께 당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 1881년 탄생된 롬바르디아 노동자 연합회(Confederazione operaia lombarda)와 미래의 이탈리아 사회당의 모태가 된 이탈리아 노동당(Partito Operaio Italiano) 등이었다. 비교적 급진주의자들에 의해 창설된 롬바르디아 노동자 연합회는 1882년 밀라노에서 창당된 이탈리아 노동당과 불화를 빚으면서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주인공이 되었다. 특히 파업을 원칙적으로 반대하던 노동자 동맹조합이나 지나치게 정치적이었던 이탈리아 노동당과 차별성을 갖고 독자적인 노선을 구축하면서 19세기말까지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흐름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변화는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색채가 보다 다양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이전의 마찌니주의가 전(全)이탈리아의 사상계를 지배하였던 상황에서 사회주의를 비롯한 보다 급진적인 외래 사상이 소개되면서 노동운동 부문에서도 이를 반영한 다양한 형태의 노동조합과 단체들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당시 노동계의 전반적 분위기는 여전히 중세 수공업적 기원을 갖는 직인 중심이었다. 다소 배타적인 조합적 성격을 갖고 있던 이들 직인들은 일반노동자들에 비하여 동맹이나 연합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고,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뭉쳐 싸우는 것이 몸에 밴 이들이었다. 이에 반해 일반노동자들은 위험스러워 보이는 노조나 동맹에 선뜻 가입하려 하지 않았다. 간혹 직인들이 주도하는 지역 조합에 가입했다 하더라도 그 배타적인 성격과 조합 이기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대중적인 성격을 갖는 노동조합이란 결성 자체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또한 영국의 트레이드 유니언(Trade Union)이나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주도하였던 노동운동과 달리 이탈리아에는 경제적 동기에 의한 노동운동과 정치적 동기에 따라 그것을 분리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결국 정치적 투쟁을 위하여 1892년 제노바(Genova)에서 이탈리아 사회당(Partito Socialista Italiano)이 창당되면서 노동운동의 진로가 두 영역으로 구분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노동운동의 영역 분할은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임금이나 노동조건과 같은 경제적 투쟁은 노동조합이나 관련 단체들이 거의 전적으로 담당하고, 사회 개혁이나 경제 관련 정책 등의 입안 및 자본과 노동간의 관계 설정까지도 정당에 맡겨버리는 탈정치화 성격을 보이게 되었다. 이는 근대 산업국가의 건설과 형성에서 자본과 노동이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탈리아 노동운동이 조합주의적이고 탈정치적이었다는 한계와 특성을 갖게 된 일차적 요인이었다. 물론 경제성장이 지속적이고 튼튼한 힘을 갖게 된다면 이것이 그다지 문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실 제로 당시 영국이나 독일의 경우에는 이탈리아에서와 같은 문제를 경제성장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즉, 경제가 지속적으로 안정이 되면 그에 따른 고용 불안정과 실업 및 노동조건 등이 비교적 유화적이고 노동자들에게 우호적일 수 있지만, 경제가 구조적으로 불안정할 경우 이러한 문제들은 정치적 해결이 선행되지 않고는 해결 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바로 이탈리아가 이와 같은 후자의 입장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사회구조의 후진성과 통일국가로서 전국토의 균형적인 경제성장을 도모하기보다는 통일왕국의 수도였던 또리노를 비롯하여 북부의 주요 도시들인 밀라노와 제노바 등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개발에만 집중함으로써 실업과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이 상존 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런 상황때문에 한동안 남부와 농촌 등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아닌 바쿠닌(Bakunin)에 가까운 무정부주의가 강력한 힘을 얻게 되었으며, 이는 20세기를 넘어설 때까지도 계속된다. 이와 더불어 그람쉬가 그토록 심각하게 제기했던 남부문제가 영원한 이탈리아의 사회문제로 각인되었던 시기 역시 바로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항구적인 사회구조적 실업과 노동시장의 불안정은 ‘이민’이라는 새로운 사회현상을 낳게 되었다.
[ 이탈리아 이주노동자들 ]
3. 이민과 노동시장의 확대
유 럽에서 이민의 역사를 거론할 때 흔히 떠오르는 장면은 영국이나 북유럽의 노동자들이 신대륙 미국을 향하여 떠나는 것이다. 물론 이들 지역에서 미국으로의 이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탈리아인들의 미국 이민 역시 바로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수백만의 이탈리아 남부와 북부의 일용노동자들이 일을 찾아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장면은 주로 이 시기에 일어났으며, 그것도 그 처음은 미국이 아닌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아래에서 위로의 이동, 즉 남부에서 북부로의 이동이 시작이었으며,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와 독일로의 이동이 초기 이탈리아 이민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단순히 일을 찾아 떠난다는 보통 의미의 이민과 달리 당시 이탈리아 이민 현상은 이탈리아가 갖고 있는 내부적인 사회문제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던 대표적인 사회학적 현상이었다. 1880년 이후 20세기 초까지 이탈리아는 인구과잉 상태였으며, 더군다나 높은 실업률과 북부에 집중된 산업구조는 남부 농민과 노동자들의 지리적 이동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통일된 하나의 국가였음에도 남부인들이 북부로 이주하여 정착하고자 할 때에는 오늘날 외국인들이 다른 나라에서 체재할 때 필요한 체재허가증이 필요할 정도로 국가적 통일과 정체성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또한 높은 실업률은 노동운동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이었고, 노동시장에서 노동자들의 출신 지역에 따른 편재 역시 노동운동의 발전에 장애였다.
이탈리아 반도의 내부 사정이 다소 복잡하고 이질적으로 진행된 데 반하여 이탈리아에서 다른 국가들로의 이민은 양적으로 거대하고 비교적 단순하게 이루어졌다. 1879년부터 1900년까지 북부의 주요 3개 주-삐에몬떼(Piemonte), 베네또(Veneto), 프리울리 베네찌아 줄리아(Friuli Venzia Giulia)-에서 프랑스와 독일 등의 유럽 국가를 향해 300만에 가까운 이탈리아인들이 이동했다. 즉, 남부인들은 북부로 북부인들은 국경 넘어 다른 유럽으로 이민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인구의 과잉만큼 노동시장과 노동인구도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었다. 인근 유럽국가, 특히 프랑스와 같은 국가에서의 노동 경험은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의식적 발달을 가져오기도 했으며, 경제적 발전과 정치적 민주화가 동시에 전개되었던 이탈리아에서 노동운동의 방향이 영국이나 독일 등과 다른 형식과 경로를 갖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노조와 정당의 이념이나 목표가 그다지 커다란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노동조합과 정당들이 이탈리아 노동운동을 이끌게 되는 다소 특이한 현상이 오랜 동안 지속될 수 있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와 같은 다소 이중적인 노동운동의 발전 경로에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주역으로 등장한 것은 바로 노동회의소였다.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20세기의 본격적인 노동조합 단체들의 등장에 앞서 그 기반과 초석을 마련했던 노동회의소는 노동조합의 전국적 규모가 가능케 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조직화된 기구였다.
4. 노동회의소(Camera del lavoro)와 농민운동
1891 년 밀라노, 또리노, 삐아첸짜(Piacenza)에서 창설된 노동회의소는 프랑스의 부르스 드 트라빌(Bourses du travail)을 모델로 하여 당시의 상공회의소(Camera di commercio)에 대항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이다. 이 노동 조직이 중요성을 갖는 것은 조직의 구성이 도시 중심이었기에 전국적 규모의 연합이나 협조가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었고, 밀라노 노동회의소의 창설자인 오스발도 뇨끼-비아니(Osvaldo Gnocchi-Viani)의 사상이 많이 반영됨으로써 직인이나 단일 직종 중심의 다소 배타적이던 노조에서 노동자와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노조로의 방향전환이 가능했다는 점이었다.
노 동회의소의 주요 업무는 노동자들에 대한 법률적 지원, 상담 지도, 노사간 중재행위, 여성과 미성년 노동에 대한 입법활동과 그 적용, 노동조합 조직의 진흥 등등이었다. 그러나 노동회의소의 정관에는 노동권을 위한 저항과 투쟁에 대한 어떠한 명시도 없었다. 이는 궁극적으로 노동회의소가 추구했던 비정치적 성향을 나타낸 것이었지만, 모든 지역 단위 조직에 강제적으로 적용되던 조항은 아니었다. 1901년의 제4차 전국대회까지 노동권에 대한 투쟁의 조항이 정관에 포함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역별로 노동권을 위한 투쟁의 선두에는 이들 지역 노동회의소가 항상 선두에 서서 지도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노동운동의 정치적인 상황변화는 노동회의소의 위상이 약화되는 쪽으로 흐르게 되었다. 다시 말해, 파업이 점차로 노동운동의 주요 수단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투쟁적 방법에 대한 거부의사를 가지고 있던 노동회의소의 위상은 점점 낮아지게 되었으며, 이탈리아 자본가들과 결탁한 정부의 노조 유화정책에 따라 더더욱 노동회의소의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다. 더욱이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적 상황은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성장을 더디게 만들었는데, 이에 대한 설명은 다시 후술하겠다.
따라서 당시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성장과정은 정치가 그룹들의 성향과 파업을 주요 무기로 삼았던 자발적이고 급진적이었던 노동운동가들의 활동이라는 상호변동적인 조건에 의해 특징 지워지게 되었다. 오히려 이 시기에 두드러진 변화의 핵은 도시노동자들보다는 농촌의 농민들이었다. 프랑스의 경우 소농들의 사회적 힘이 강하였기 때문에 노조가 활동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었고, 독일은 농촌의 일반적 성향이 지나치게 보수적이어서 농촌에서의 노조 활동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탈리아의 농촌은 곧 후진 그 자체였고, 사회적 후진성과 모순을 종합적으로 상징하는 대표적 지역이었다. 또한 남부와 도서 지방에서 오랜 동안 농민들을 이끌었던 바쿠닌 계열의 무정부주의는 더더욱 농촌지역의 노동운동을 더디고 힘들게 만들었다. 다만, 롬바르디아 주와 에밀리아 로마냐 주를 중심으로 다소 강력하고 급진적인 농민운동이 성장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19세기말부터 시작된 인구과잉은 농촌에 심각한 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산업지대에 근접한 지역은 농촌의 과잉인구를 흡수할만한 여력이 있었지만, 전통적인 농업지대는 이를 해결할 여지가 없어 이민이나 이농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사회문제 또는 국가의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사회주의 사상의 확산과 더불어 자신들의 권리 주장에 목소리를 높이게 되었다. 이들 농촌지역의 노동운동의 초기 구심점은 앞서 이야기했던 상호부조회였다. 그러나 이후 일용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동맹이 결성되면서 이들의 투쟁은 보다 조직적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이들은 제도적 또는 법률적 지원이나 해결방안을 가질 수 없었던 조직 자체의 한계로 인해 투쟁 수단으로 일찍부터 파업이나 무력시위라는 보다 급진적 형태를 띠게 되었던 것이다.
상 황이 이렇게 흐르자, 이탈리아 정부는 이들의 정치활동을 규제하기 위하여 1894년 특별법을 제정하여 타격을 가한다. 활동자체를 규제하고 일부 기능을 정지시켰던 이 특별법으로 농촌운동은 한동안 소강상태에 들어갔고, 1901년이 되서야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다. 토지연합(Federterra)이라고 하는 단체가 그것인데, 규모부터가 전국적인 것이었고(주축이 되었던 지역은 일용직 농촌노동자가 밀집해 있던 지역으로 오래 전부터 일용직 동맹이 건설되었던 곳이었다; 만토바, 페라라, 베로나, 삐아첸짜, 노바라 등등이 주축이 된 북부 농업지대와 에밀리아 로마냐 지방이 그 중심이다), 그 회원수도 15만 명이 넘었으며 단위 동맹의 수도 800개가 넘는 거대한 조직이었다.
회원의 대부분은 임시직 일용노동자들이었으며, 소작농과 임대농이 가입회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창립대회에서 토지연합이 내세운 강령 중의 하나는 ‘토지의 사회화’였다. 당시 어떤 노동운동의 기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내용이었을 만큼 급진적이고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한 노동단체였다. 더군다나 토지연합을 창설한 이는 아르젠띠나 알또벨리(Argentina Altobelli)라는 여성운동가였다. 남성중심이었던 당시의 노동운동계에서 여성이 전국적 규모의 노동조직체를 창설했다는 사실은 매우 독특한 경우였다. 토지의 사회화라는 강령을 놓고 일부 온건론자들이 이탈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 단체의 정치적 목표는 토지의 재분배를 통한 평등사회 건설이었다.
토지연합이 주도가 되어 조직했던 1901년과 1902년 사이의 파업투쟁이 실패로 끝나면서 다시 조직이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었고, 1903년과 1904년 사이의 정비 기간을 거쳐 1906년에는 재창설이라는 변화를 거치게 된다. 특히 1906년의 재창설 시에는 보다 구체적인 투쟁 강령과 정책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가장 주요한 것은 고용과 직업 안정을 위한 투쟁과 고용의무를 위한 투쟁이 그것이었다. 이 두 가지의 새로운 정책은 노조 설립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응책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토지연합은 사업장 내에서의 노조 사무실 확보라든가 연령과 숙련에 따른 임금지불 등의 실질적인 과업을 통하여 일용직 농촌노동자들의 권리와 복지를 위하여 오랜 동안 농촌에서 투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