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세기초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제반 세력 현황
봉건적인 전근대성을 떨쳐버리고 현대적 모습의 이탈리아가 형성되는 시기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격동기였던 만큼 이탈리아 노동운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던 것도 바로 이 때였다. 통일 후의 북부 중심의 산업개발정책으로 노동자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였고, 이미 산업혁명을 거친 다른 서유럽 국가들과의 교류, 그리고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이민으로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한 노동운동의 조직화 등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따라서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전반적 틀을 재조정하고 가다듬어야 할 필요성이 여러 노동운동 세력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이 시기의 이탈리아 노동계는 이미 많은 면에서 변화된 모습들을 보였고, 무엇보다 다양한 세력들에 의해 노동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사회주의 정당, 신다칼리스트(노조 운동가), 온건 공화주의자, 마찌니적 급진주의자, 개량주의자들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상적 스펙트럼을 통하여 조직된 단체와 조직들로 인해 이탈리아 노동운동이 다소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이고 있던 시기였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구심점을 올바르게 선택하기 어려웠고, 유럽의 다른 노동운동과 달리 정치 투쟁이 효율적으로 동반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노동운동 안의 대립은 운동 방향이 아니라 방법론적인 측면을 통하여 표출되었다.
노동운 동 자체의 목표를 사회주의로 설정하면서 이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 문제를 두고 뚜렷한 입장 차이를 보이게 된다. 특히 사회변혁을 어떻게 바라보고 설정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하여 양분하게 되는 노동운동의 커다란 두 흐름은 개량주의(개혁주의)와 혁명주의였다. 혁명적 노동운동가들은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성을 통하여 총파업이라는 수단으로 사회주의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개량주의자들은 정치영역에서 합법적인 정당 활동을 통한 사회주의의 조직화로 사회변혁을 점진적으로 이루어야 한다고 믿었다. 결국 이와 같은 입장 차이는 당시의 그리고 이후의 노동운동을 주도하는 거의 모든 단체 안에서 벌어지는 세력 투쟁의 변천과 궤를 같이 하게 된다.
20 세기 이전까지 노동조합 역할을 했던 업종별 또는 단위별 동맹체들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도시별로 노동회의소 조직을 정비하고 업종별 단위 조직들을 출범시키게 된다. 특히 1903년 이미 철강 분야의 단일 조직이 또리노와 밀라노 그리고 사보나(Savona)까지 잇따라 결성된다. 그러나 순조롭던 노동회의소의 조직화 사업은 다른 노동 조직의 출현으로 주춤거린다. 1901년 창설된 전국산업연합(Federazioni nazionali di Industria)은 앞서 설명한 개량주의 세력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새로운 노동운동 단체였다. 이미 1886년 창립한 건설협회를 시작으로 1893년 서적협회, 1900년에는 철도협회 등이 창설되었고, 1901년에는 단일 철강연합(FIOM)을 비롯하여 직물, 화학, 목재 등의 업종별 협회들이 주축이 되어 출발하였다. 이탈리아는 근대산업이 더디게 발달하였기에 이들 산업을 주축으로 하는 전국산업연합 역시 그 성장이 느렸지만, 업종별로 노동운동이 조직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 두 단체의 성격이나 노선은 사뭇 달랐다. 당시 가장 중요한 투쟁방식은 총파업이었는데, 이를 공식적인 운동의 도구로 삼은 것이 노동회의소였다. 이는 노동회의소를 지배하고 있던 주류가 혁명적 노조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회원들 역시 일용직이나 임시직 노동자가 대부분이어서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띠었다. 이에 반해 전국산업연합은 산업별 업종을 기준으로 직업성에 바탕한 숙련 노동자들과 점진적 개혁을 원하는 개량주의자들 주축이 되어 조직을 이끌고 있었다.
두 단체의 상이한 정치적 방향성은 조직이나 지향하는 전술도 달랐다. 노동회의소는 계급연대라는 방식을 통하여 일반시민들까지 끌어들이는 ‘시민 총파업’을 유효한 투쟁수단으로 사용했으며, 이와 같은 정치 전술은 1904년의 총파업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개량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전국산업협회는 소모적인 총파업보다는 제도 정치를 지향하고 세력확장을 위해 온건 노선을 취했으며, 이를 통해 조직강화에 노력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하부 조직인 철강노조(FIOM)를 중심으로 이러한 원칙을 천명하기도 하였다.
표면적으로 노동회의소의 노선은 상대적으로 비타협적이고 극단적으로 보이고 전국산업연합은 온건하며 유화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당시 노동운동을 이끌었던 노동회의소는 상황 변화에 더 유연하게 대처하였고, 때로는 합의로 때로는 선동으로 의견일치를 끌어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이에 반해 개량주의자들은 수직적 조직 형태를 갖고 있었으며, 너무나 신중하고 보수적인 활동 방향을 선호함으로써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노동회의소에 넘겨주고 말았다.
2. 노동총연맹(Confederazione Generale del Lavoro)의 창설
혁 명적 노조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노동회의소는 유연한 운동방식과 총파업이라는 투쟁수단에도 불구하고, 1904년 총파업 실패 이후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된다. 이는 개량주의 노조주의자들에게 주도권이 넘어가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그 결과 새로운 전국 조직인 노동총연맹(CGdL)이 창설되었다.
노동운동의 두 축이었던 노동회의소와 전국산업연합의 대립을 해소하고 노동운동의 공고한 조직화를 위한 예비작업으로 1902년 저항국민사무국(Segretariato nazionale della resistenza)이 만들어졌다. 노동운동의 통일과 효율성을 목적으로 창설되었던 저항국민사무국 역시 선출된 지도부의 성향에 의해 운동의 방향을 설정하게 된다. 초기에는 리골라(Rigola) 등이 주축이 된 개량주의 노선에 이끌렸지만, 곧이어 혁명주의 노조운동가들에게 주도권이 넘어왔다. 혁명주의자들은 여전히 시민 총파업, 대중운동의 선도, 1904년 총파업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극단적인 투쟁의 결과는 노동회의소와 전국산업연합의 조정과 협력 및 조직화라는 창설 취지를 살리지 못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일반 노조운동가들의 동의를 얻는데 실패하게 된다.
결국 또다시 운동의 주도권은 개량주의자들에게 넘어왔고, 이들은 노동회의소의 재정립 요구도 수용함으로써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확립하고 이를 전국적인 통일노동단체의 창설을 기획하였다. 바로 이 단체가 노동총동맹이었으며, 창립 위원회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던 혁명적 노조운동가들을 제외하고 노동회의소와 전국산업연합, 그리고 저항국민사무국까지 아우르는 전국적 규모의 노동총동맹(CGdL)을 창설하는데 성공하였다.
노동총동맹의 임무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국가에 요구하고, 노동운동의 전국적인 조직화, 노동자의 교육과 훈련 등을 통하여 노동자 계급을 통일하고 지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강력한 운영위원회를 구성하고, 노동자 임금의 보호(간접세 부과, 가격통제, 곡물의 보호무역제도 반대 등을 통하여)와 고용에 대한 노조의 통제(이는 자본가들의 생산독점에 반대하는 노동독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계급주의에 기초한 통일된 일반강령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일반강령을 통해 노동총동맹은 점진적이고 개량주의적 노선을 추구하였고, 투쟁의 목표 역시 정치적 입장보다는 노동자들의 경제적 입장과 지위에 집중하게 되었다.
노동총동맹의 창립총회 참석을 거부하였던 혁명적 노조주의자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노동운동의 주도권이 개량주의자들에게 넘어간 뒤 이들은 정치적인 활동을 모색하게 되었고, 1908년 사회당을 창당하게 되었다. 사회당의 창당이후 정치 투쟁에 전념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을 표출할 새로운 노동조직의 필요성을 느낀 이들은 1912년 이탈리아노조연합(Unione Sindacale Italiana)이라는 노동조직을 창설하게 된다. 이탈리아노조연합은 빠르마(Parma)에 본부를 두고 이 곳에서 『인떼르나찌오날레』(Internazionale)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였고, 각 지역의 노동회의소와 연맹 운영에 대한 자율성을 주장했다. 그리고 1913년 한때 전국적으로 15만의 회원이 등록할 정도로 세를 확장하다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자 이에 대한 입장 차이로 조직이 분할되었다.
[ 이탈리아노조연합(USI) 회의 ]
1 차 대전에 참전할 것인가 중립을 지킬 것인가라는 두 입장은 노동자들뿐만이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문제였다. 노동자들 역시 참전을 주장하는 이들과 중립적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는 이들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다수의 입장을 점하고 있던 쪽은 전쟁 불개입론이었다. 결국 이와 같은 입장 차이는 이탈리아노조연합(USI) 안에서도 벌어지게 되고, 참전을 주장하는 이들이 떨어져 나와 이탈리아노동연맹(Unione italiana del lavoro)을 창설하게 되었다.
노동운동의 이와 같은 분리는 혁명적 노조주의자들에게서만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노동총동맹 안에도 여러 입장을 대변하는 계파들이 있었다. 소수였지만 혁명적 노조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적 입장 그리고 카톨릭 성향의 종교적 분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 계파들 가운데 당시 주요한 세력을 이루고 있던 것이 카톨릭 성향의 노동자들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탈리아 카톨릭은 당시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민 대다수가 카톨릭 신자일정도로 여러 면에서 카톨릭이 이탈리아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였다. 노동자들 역시 카톨릭 신자들이 대부분이었으며, 부지불식간에 이와 같은 카톨릭적 입장은 노동운동에서 표출되었다. 이탈리아가 산업화를 거치면서 노동자들이라는 새로운 신분과 계급이 등장하자 교황청 역시 이에 대한 관심과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반대하였던 교황청은 노동자들이 이들 사조에 물들어 정신 생활을 지탱하고 있는 카톨릭을 멀리하는데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소요와 총파업을 사회적 갈등의 대표적 현상으로 인식하고 있던 교황청은 이와 같은 불안을 잠재우고 사회 평화와 정신 무장 그리고 사회 약자에 대한 배려를 표명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를 드러낸 것인 교황 레오네(Leone) 13세의 교시였으며, 그 결과 1918년 백색 동맹(Leghe Bianche; 카톨릭의 신성과 성스러움을 흰색으로 대표하여 이를 토대로 연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이 결성되었다.
20세기 초 노동운동이 이념에 따라 활성화된 것은 여러 이유가 있다. 단지 이 시기가 전쟁이라는 유럽적 현상, 또는 카톨릭이라는 종교성에 의해서 노동운동이 분리되고 여러 이념들을 대표하는 노동조직들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죨리띠(Giolitti) 시대(1901년~1914년 죨리띠(Giolitti) 수상이 집권한 시기)라고 하는 정치 상황 변화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당시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생성과정과 성격 등의 변화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이 시기에 대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3. 죨리띠 시대의 노동운동 상황
신 생 이탈리아는 영국이나 프랑스 등 유럽 강대국들과의 산업 경쟁에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는 요인을 갖고 있었다. 산업혁명을 거치지 못한 산업구조의 후진성과 프랑스에 종속적인 하청구조 때문에 열등한 입장에서 산업 발달을 꾀할 수 없었다. 유럽의 기존 강대국들 역시 새로운 경쟁국의 출현을 달가워하지 않았기에 외교적 고립과 종속 관계를 유지하는 쪽으로 외교 정책을 전개하고 있었다. 여기에 해결되지 않은 북부와 남부의 불균형 발전구조와 카톨릭의 영향은 새로운 이탈리아를 어렵게 만드는 요소들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1870년 프랑스로부터 로마를 수복하여 명실상부한 통일을 이룬 뒤인 1890년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유럽의 오랜 경제 불황과 자유주의 경제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던 이탈리아 경제는 불황의 터널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수상이었던 끄리스삐(Crispi)는 이를 타개하기 위한 정치적 방편으로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제로의 전환을 모색하기까지 했다. 끄리스삐의 뒤를 이어 죨리띠가 수상에 취임하면서 이탈리아는 경제적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1899년에 또리노에서 설립된 피아뜨(Fiat)를 비롯하여 공업과 화학 분야에서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하게 된다. 특히 1903년부터 적용된 철강에 대한 수입면세 정책은 이탈리아 북부에 관련 산업, 철강, 자동차, 조선업 및 기계산업을 발전시켰다. 산업 발전에 따라 노동자 수도 급격하게 증가하였고, 이들은 정치적으로 하나의 세력으로서 중요성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전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탄압적이고 보수적 정책을 견지했다면, 죨리띠가 집권하면서 노동정책에도 많은 변화가 수반되었다.
죨리띠의 노동자들에 대한 접근은 계몽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이는 당시 증가한 노동자의 수만큼 노동계급의 지적이고 정신적인 의식 발전이 뒤따르지 않으면서 이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국가와 정부라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그는 국가의 안정과 발전 그리고 권력 유지를 궁극적인 정치 목표로 생각하였다. 노동자들을 자극하여 국가의 안정에 불필요한 해를 끼치거나 국민 대중을 국가의 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 죨리띠 노동정책의 핵심이었다. 이는 노동쟁의나 노사문제에 국가가 개입하지 않고 중립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기존의 노동정책이 급변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즉 이전 정부는 국가의 공권력으로 노동자의 파업이나 투쟁에 적극 대처했던 반면 죨리띠 정부는 제3자로서 중립적 입장을 오랫동안 고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죨리띠 정부의 중립적 태도는 노동조합 조직의 팽창과 위상에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되었다. 노조원들의 수가 증가하고, 노조의 독립성과 자율성은 더 많이 허용되었다. 더욱이 정부 차원에서 사회개혁과 노동과 관련하여 입법을 통한 법률적 보장으로까지 이어져, 노동자의 권리 보호가 잠깐이나마 제도로 보장되었다. 그 가운데 입법된 주요 정책들은 1902년에 시행된 12세 이하 아동 노동 금지와 여성 일일노동시간의 11시간 제한 법령, 1907년에 발효된 주당 1일 휴무 의무화 법안, 1910년 출산기금 제정법, 특정 전문직 종사자들의 질병기금과 노후기금 제정 등이었다.
물론 노동자들이 사회적 지위를 어느 정도 획득할 수 있게 된 게 죨리띠라는 한 인물에 의해 달성된 것은 아니었다. 이에는 당시 주요 산업자본가들이 죨리띠의 노동정책에 우호적이었다는 요인도 있었다. 피아트 사의 죠반니 아넬리(Giovanni Agnelli), 올리베띠 사의 까밀로 올리베띠(Camillo Olivetti), 삐렐리 사의 죠반 바띠스따 삐렐리(Giovan Battista Pirelli) 등의 기업주들은 비교적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최고 경영자들이었다. 이들이 비록 전적으로 죨리띠 정책에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노동자들의 이익 증진이 기업의 이익에도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러나 산업자본가들은 죨리띠의 이와 같은 중립적 노동정책에 심각한 우려와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많은 산업자본가들의 반발은 경제적 호황을 누렸던 1907년까지는 외부로 표출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07년부터 시작한 5년 간의 경제적 불황을 지나면서 산업자본가들은 죨리띠의 정책에 적대적인 모습을 드러나게 된다. 후발 산업국이었던 이탈리아가 영국이나 독일과 같은 노동조건을 갖고서는 국가 경쟁력이 뒤쳐질 수밖에 없으며, 무엇보다 기업 생산이 사회 정의나 분배보다 우선 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죨리띠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1906년 죨리띠 정책에 조직적으로 대항하고 노동조직에 맞서 기업가들과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표할 수 있는 조직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또리노에서 산업동맹(Lega Industria di Torino)을 창설하였다. 이 조직은 또리노 뿐만 아니라 전국 규모에서 조직 확장을 꾀하여 1910년 꼰핀두스뜨리아(Confindustria)로 조직의 명칭을 바꾸었고, 1919년 모든 업종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재창립하게 된다.
죨리띠 정책에 반기를 들었던 것은 산업자본가들만이 아니었다. 노동 조직과 사회당 내부에서도 죨리띠의 노동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도 많았다. 특히 혁명적 노조지도자들은 죨리띠 정부가 노동자의 진정한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정부가 아니라 그저 부르주아 정부의 하수인으로 산업자본가의 이익을 보호하는 대리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지만, 1907년 시작된 경제 위기이후 등장한 민족주의 세력은 잠재적으로 가장 강력한 죨리띠, 그리고 노동자들의 적대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죨리띠 정부가 결정적으로 실책을 범하게 되었던 정책은 리비아에 대한 전쟁 선포였다.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강력한 이탈리아를 건설하기 위한 식민지 정책을 지지하자, 사회의 분위기는 전쟁을 요구하는 쪽으로 흐르게 되었다. 죨리띠는 이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는데 이용하고자 1911년 리비아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죨리띠의 의도는 정치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리비아를 식민지로 만들었으나 완전한 통제에는 실패했다. 또한 사회주의자들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에도 성공하지 못하여 정권 유지의 기반 확충에 실패하였다. 결국 죨리띠는 자신의 세력기반을 노동자 속에서 찾다가 카톨릭 세력으로 눈을 돌림으로써 보수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기반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4. 혁명의 좌절과 파시즘의 등장
1914 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이탈리아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처음에는 참전에 대한 국민여론이 여전히 불투명했고, 실제로 이탈리아가 전쟁 수행 능력이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존재하였다. 오히려 전쟁에 불참하자는 쪽이 다수였을 만큼 참전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죨리띠는 국왕의 암묵적 동의 하에서 전쟁에 참여하는 밀약을 맺게 되었다. 결국 의회와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15년 5월 참전이 결정되었다.
전쟁 준비가 돼있지 않은 이탈리아가 갑자기 전쟁으로 내몰리자 많은 손실이 발생하였다. 많은 이들이 전선에서 사라져갔으며, 군수물자를 위해 국민들은 궁핍한 삶을 감수해야 했다. 1917년 10월의 까뽀레또(Caporetto) 전투에서 치욕의 패배를 당하면서 이탈리아는 전쟁으로 최대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 위기를 타개하고자 죨리띠가 물러나고 오를란도(Orlando)가 새 수상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승전국이 되었다.
인 명 손실이 컸지만, 승전국으로서 이탈리아는 놀랄만한 경제 성장을 이룩하였다. 군수산업이 성장의 중심이었고, 이것은 곧이어 강력한 이탈리아라는 신화적 허상으로 표출되었다.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고취한 애국심과 국가라는 단어는 당시의 자유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이념들을 내몰기에 충분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들은 결국 1919년과 20년의 ‘붉은 2년’의 혁명기간 이후 도래하게 될 이탈리아 파시즘의 국가적 증표였다.
전쟁이 종식되기 전에 일어났던 기념비적 사건 ‘러시아 혁명’은 이탈리아뿐만이 아니라 유럽의 노동자들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그리고 지식인 계층에까지 혁명의 당위성을 주장하게끔 하였다. 혁명은 이제 시간이 되면 도래할 숙명적 사건에 불과할 뿐이라고 거의 모든 이들이 믿었다. 이탈리아의 노동자들 역시 혁명의 도래를 확신하였고, 혁명적 노조주의자들은 운동의 주도권을 다시 넘겨받았다.
전국 각지에서 파업과 공장 점거 등의 투쟁이 조직되었고, 이에 영향을 받아 각 지역에는 자치정부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1919년에는 1백만이 넘는 이들이 파업에 동참할 정도로 수많은 이들이 혁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혁명은 오지 않았으며, 오히려 반동의 파고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파시즘이라는 현상이 갑자기 하나의 정치적 사실로, 이념으로, 그리고 실체로 등장하게 된 게 바로 이 시기였다. 혁명 분위기를 우려하던 산업자본가와 우익 세력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새로운 세력에게 이탈리아를 맡기려 했고, 이에 합당한 세력이 바로 민족주의 세력인 파시스트였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