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1일 오전 9시, 창원에 머무르고 있는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를 찾았다. 전국을 순회하며 신년특강을 하는 권영길 대표는 전주로 출발하기 앞서 자택에서 기자와 인터뷰를 가졌다.
아 직 민주노동당내에서 공식적인 대선평가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지만 권대표는 지난 대선을 통해 "잠재적 지지층 확보"와 "당이 약진한 것"을 성과로 꼽고 있다. 대선기간 동안 쌓인 피로가 채 가시기도 전에 시작하는 전국투어 때문일까, 권대표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이틀 전 두산중공업 배달호 조합원 분신이 있었기 때문에 권대표는 두산중공업 현장방문과 창원대 강연을 병행하며 신년특강 전국투어의 첫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조 촐한 아침식사를 마친 권대표가 화초에 물을 한 번, 두 번, 세 번, 정성스럽게 줬다. 그리고 보니 민주노동당은 창당 이후 모두 세 번의 전국적인 선거(2000년 4·13 총선, 2002년 지방선거, 대선)를 치렀다. 과연 세 번의 선거를 치른 민주노동당은 국민들의 마음속에 화초처럼 잘 자라고 있을까.
2012년엔 집권한다
"대선 이 끝난 뒤에 드는 생각은 이제 민주노동당은 집권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구호로 그친 감이 있지만 이제부터는 모든 사업과 내용, 방향에서 집권을 목표로 설정해야 합니다. 2012년에는 집권을 할 수 있습니다."
권대표는 대선을 겪으며 한층 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래서 "집권 10개년 계획을 세우고 올해를 그 1차 년도로 설정한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그렇다면 권대표가 말하는 집권 10개년 제1차 년도인 2003년의 과제는 무엇일까?
" 물론 내년 총선에서 원내진출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내년 원내진출을 위해 올 한해는 끊임없이 정책사업을 계발해야 합니다. 또한 이미 제시한 정책들을 책임있게 추진하는 모습이 중요합니다. 부유세 신설을 위한 입법화 운동, 비정규직문제 해결과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평화군축운동을 전개할 생각입니다. 노동자, 농민, 빈민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정책을 생산하고 이를 관철하기 위한 활동을 하는 해가 바로 올해입니다."
권대표는 '정책'을 강조했다. 정책정당을 표방하는 민주노동당 대표로서 어쩌면 자연스러운 말이다. 정 확히 1년 전 권대표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2년 동안 지역에 뿌리내리고 정책정당으로 발돋움하려 애썼지만 갈 길이 멉니다…아직 정책정당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어요. 올바른 정책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정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권대표는 지난해 지방선거와 대선을 통해 국민들이 민주노동당을 '운동권 정당'에서 '정책정당'으로 인식하게 됐다고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꾸준한 정책생산만이 민주노동당의 상승세를 이어갈 수 있는 전략이라 생각한다.
얘 기는 자연스럽게 최근 일고 있는 중대선거구제 논의로 흘렀다. "정당간에 정책대결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정당명부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정치개혁의 핵심은 중대선거구제가 아닌 완전한 정당명부제와 선거공영제입니다. 또한 당비를 내는 당원들에 의해 당이 움직이고 의사가 결정돼야 합니다. 올해 민주노동당은 완전한 정당명부제 도입을 위한 입법화 운동에 온 힘을 기울일 겁니다."
평가는 정확한 분석에 의해
민주노총 서울본부 배기남 정치위원장은 민주노동당 기관지 『이론과 실천』 1월호에 지난 대선에서 노동조합의 활동을 평가한 글을 실었다.
" 노동자정치세력화의 관점에서 연맹 지도부를 비롯한 단위노조의 간부들이 거점유세와 단위노조의 교육활동, 재정모금 운동 등에서 얼마나 활동적으로 움직였나는 점이다…결론적으로 말하면 (97년 대선과 비교해 볼 때)조합원의 지지는 높아진 데 비해 간부들의 활동수준은 매우 저조했고, 심하게 표현하면 이들은 선거과정과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관망했다고 볼 수 있다…재정모금은 6억 목표에 2억7천만원 정도를 모금함으로써 45%의 납부율을 보였다. 97년 대선에 비하면 그 집요함이 뚝 떨어진 것이다."
권 대표는 어떨까. "민주노총 산하 노동조합의 대선활동 평가보다는 객관적인 자료에 의해 정확한 분석이 선행돼야 할 것입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어떤 의식을 가지고 대선에 임했으며 실제로 투표는 어떻게 했는지, 유권자는 얼마인지에 대한 분석이 이제까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전문기관에 의뢰하면 제대로 된 결과를 얻을 수 있겠죠. 전 그 점이 더 중요하고 생각합니다."
민주노총의 대선 활동에 대한 평가보다는 민주노총 조합원의 정치의식에 대한 면밀한 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평가는 일단 유보하자.
바탕이 다른 노무현 정부
"노무현 후보 당선의 의미를 어떻게 보십니까." " 노무현 정권의 탄생은 비상식에서 상식으로 비정상에서 정상적인 세계로 나아가는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나라당으로 상징되는 냉전 세력이 점차적으로 퇴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죠. 유권자들이 점차 세상을 이성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노무현 후보의 당선 의미에 대해서 긍정성을 갖고 바라본 권대표이지만 '노무현 정권'의 성격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 노무현 당선자는 빚을 가지지 않고 출발합니다. 정몽준과의 단일화로 정치적 부채가 있었지만 단일화 파기로 인해 빚이 없어진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업과 노동자 문제에서 노무현 당선자는 이회창 후보보다 더 강경했어요. 농업개방에 대한 부분도 이회창 후보는 유예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에 비해 노무현 당선자는 오히려 개방을 강조하고 그 보완을 얘기했습니다. 노동자에 대한 정리해고도 필요하다고 말했죠. 이런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무현 당선자가 재벌개혁은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김대중 정권과 마찬가지로 반노동자, 반민중적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민주노동당과는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권대표는 "노무현 정권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대가 아닌 사안별로 대응을 하겠다"고 말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바탕으로 둔 정권이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은 노무현 정권과 대결의 한 축으로 설 수밖에 없다"고 못박았다.
실 제로 지난 9일 두산중공업 배달호 조합원 분신이 있은 후 민주노동당은 진상조사단을 구성해 사망원인과 사측과 정부의 불법행위 등을 조사해 법률적, 정치적 대응을 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노동당과 노무현 당선자와의 힘 겨루기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강한 당내 민주주의, 모자란 기동성
권 영길 대표는 올해 전당원들에게 신년 음성메세지를 남겼다. 민주노동당 대표는 다른 당의 대표와는 달리, 당원을 늘 생각해야 하는 입장이다. 당원들의 당비로 운영되는 정당이다보니 당연히 당이 살아남기(?) 위해서 당원에게 신경 써야하고, 제도권 언론에서 소외받는 상황에서 당원들이 움직여 주지 않으면 국민들에게 당의 정책과 활동을 알릴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권대표가 올해의 시작을 전국의 당원들을 만나는 순회강연회로 잡은 것도 당원이 움직이지 않는 민주노동당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권대표 역시 자발적 당원의 힘과 당원이 만들어 내는 당내 민주주의를 민주노동당이 가지는 강점으로 꼽았다.
"민주당에서 정치개혁의 요체로 내걸고 있는 진성당원, 당의 민주적 운영 등은 이미 민주노동당이 창당부터 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민주노동당은 그 토대위에서 건설됐죠. 도덕적 자질면에서 타당에 비해 우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당에 비해 정책중심의 활동을 하고 있고 이 부분이 선거과정에서 힘을 발휘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미약한 부분도 있다. "기동성에서 문제점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노사모는 정몽준씨가 지지 철회를 선언했을 때, 신속하게 움직였죠. 민주노동당이 만약 그런 경우에 처했을 때, 전국적으로 당원들이 대응을 할 수 있었을까요. 민주노동당은 아마도 논쟁국면으로 갔을 것 같습니다. 인터넷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1년이 걸렸는데 달라진 게 많지 않습니다. 논의하는데 그쳤다는 거죠. 이런 부분을 탈피하지 못하면 발전이 없습니다."
얼마 전 박노자 교수는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민주노동당의 문제점으로 '복잡한 내부정파'를 언급했다. 박교수 뿐 아니라 당외곽에 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정파문제 해결을 민주노동당의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이에 대한 권대표의 대답은 단호하다. "문제가 없습니다. 한가지 밝혀 둘 것은 내부정파가 복잡하다고 말하는 사람중에 정말 그렇게 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민주노동당이 내부정파 때문에 어려운 국면에 처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 남은 민주노동당
민 주노동당은 최근 북핵문제, 두산중공업 배달호 조합원 분신, 정치개혁문제 등에서 적극적인 목소리와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대선전 100만표의 위력이라면 보수 정치권에서 민주노동당의 목소리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란 예측과 달리 현재까지 언론에서 민주노동당의 주장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언론은 선거운동 과정에서도 민주노동당을 외면했습니다. 대선후보 토론회 다음날은 보도가 됐지만 그외 선거운동 기간에는 한 두 신문을 빼놓고는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방송도 마찬가지입니다. 메인 뉴스시간에 거의 보도되지 못했어요. 이 부분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권대표는 "선거때보다 선거가 끝난 후에 거리에서,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반응이 더 적극적이고 강도가 강한 것 같다"며 실망하긴 이르다고 말한다.
권대표는 누가보더라도 전에 비해 한층 부각된 정치인임에 틀림없다. 마지막 질문은 가볍게 던져봤다. 권영길과 민주노동당 중에서 속칭 누가 더 '떴을까'.
" 사실 선거운동기간 동안에는 후보중심으로 거론된 게 사실이죠. 하지만 둘 다 뜨지 않았나요.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권영길을 앞세우기보다는 민주노동당을 강조했습니다. 의도적으로 당을 내세운 거죠. 당의 정책이 일반 국민들에게 선명하게 각인된 걸 보면 성공한 것 같은데…."
선거가 끝났다. 노무현 당선자는 청와대로 갈 것이고 정계를 은퇴한 이회창 후보도 어딘가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것이다. 선거기간 동안 대선후보들은 너나할 것 없이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찾아다녔다. 모두가 떠난 텅빈 현장에 민주노동당 권영길이 남아있다. 그는 아직 선거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