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이데올로기가 몰려온다

노동사회

자본의 이데올로기가 몰려온다

admin 0 3,744 2013.05.12 04:00

"기업은 이윤추구만 열심히 하는 게 빈부격차 같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하는 거다, 정부의 시장 개입은 문제를 악화시키기만 한다. … 교수님들이야 계속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지만 저희가 그걸 다 믿지는 않죠. 그래도 그런 시각이 새롭긴 했어요. 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구나, 뭐 그런 거죠." 

2003년 12월16일 늦은 오후의 숭실대 교정에는 해가 떨어지기도 전에 슬그머니 어둠이 깔려있었다. <시장경제와 법>과목의 기말시험을 막 마치고서, 후련하다는 듯 눈을 깜박거리며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이 학생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천만원으로 산 강좌 개설권

ljh_01.jpg"그래도 시험문제 답을 쓸 때는 아무래도 교수님들이 수업시간에 하셨던 말씀에 맞춰가게 되더라구요. 공부할 때도 자유기업원의 자료들을 주로 참고했고요. 이전까지는 자유기업원이 뭔지도 몰랐는데…." 

<시장경제와 법>은 대표적인 친기업 연구소인 자유기업원(Center for Free Enterprise)이 지원하는 강좌다. 그 과목의 학기말 시험에는 '독일 노동시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교육문제에 대한 정부의 실패이유를 시장경제적 입장에서 볼 때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와 같은 문제들이 포함되어 있다. '독일처럼 노조가 강하면 노동시장이 경직되고 경제가 망한다', '경쟁을 가로막는 평준화가 전체 학력을 저하시켰다.' 좀 거칠지만 이것이 자유기업원의 '시장자유주의자'들이 원하는 답이었음에 틀림없다. 

"추천이요? 글쎄요. 1, 2학년들한텐 좀 얘기하기 힘들 것 같아요. 그래도 들어볼 만은 해요. 이런 유명한 분들 얘기 직접 듣는 기회가 그렇게 흔한 건 아니잖아요." 이 학생은 그 수업내용 때문에 가치관이 바뀌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기말고사의 답안지에 스스로 되새김질하며 적었을 송자 총장, 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 같은 "유명한 분"들의 주장이 앞으로 그 학생의 내면에서 갖게 될 권위 또한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닐 것이다. 

2003년 8월 자유기업원은 경희대, 홍익대, 전남대 등 전국의 8개 대학과 계약을 체결했다. 강사료 650만원과 행정지원비 100만원, 강좌운영비 250만원 등 1천만원을 각 대학에 지원하고, 그 대신 자유기업원이 제공하는 강사진과 커리큘럼으로 짜여진 <시장경제의 이해>라는 경제강좌를 대학에 개설하겠다는 것이었다. 약 200여명이 수강한 숭실대학교의 <시장경제와 법>도 이렇게 해서 개설된 강좌들 중에 하나다. 자유기업원은 이러한 강좌들이 높은 호응을 얻고 있다며, 2004년 1학기에는 20여개 대학으로 확대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 

ljh_02.jpg재계의 친자본 교육실천 

재계가 공교육의 교육내용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나 2003년 후반기 들어 재계가 내뱉는 목소리의 울림은 예년과 사뭇 다르다. 강좌를 늘리려는 자유기업원의 정력적인 계획에서 볼 수 있듯 그냥 '목소리'만이 아닌 것이다. 그 울림은 여러 곳에서 구체적인 실천을 확대하고 다부지게 계획을 세우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3년 11월20일 대한상공회의소는 청소년과 교사, 학부모들을 위한 경제교육 웹사이트 (hi.korcham.net)를 개설했다.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의 인사말에 따르면, "우리 경제의 지속적 발전을 가로막는 격렬한 노사분규와 위험수위에 이른 반기업정서"가 잘못된 경제교육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경제교육을 잘 해야"겠다는 것이 이 웹사이트가 목표하는 바이다. 
11월26일에는 <젊은 시장경제 지도자 양성위원회>가 500여명의 기업인과 학자들을 모아놓고 삼성동 코엑스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창립 기념행사를 가졌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2002년 여름부터 방학마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5박6일의 '영리더스캠프(Young Leader's Camp)'가 2003년 100명 모집에 452명이 지원하는 등 성공의 조짐을 보이자 이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사업을 확장한 것이다. 영리더스캠프의 수료자 명단에는 몇몇 대학 비운동권 학생회장 등 자칭 '젊은 보수'들의 이름이 눈에 띈다.

"반기업정서를 해소하기 위한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자"는 재계의 의지가 결집된 <젊은 시장경제 지도자 양성위원회>는 앞으로 5년간 총 22억2천만원을 투자하여 2008년 한국형 경제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이 목표다. 그리고 올해 대학총학생회 간부, 중고교 교사 등을 시작으로 예비성직자, 군 정훈장교, 실업계 고등학생으로 교육대상을 확대할 계획이다. 

1999년부터 교사, 대학교 신입생, 언론인 등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프로그램 '이코데미아(Ecodemia)'를 꾸준히 운영해 온 자유기업원에는 최근 문의전화가 부쩍 많아졌다. 자유기업원 경제교육실의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 두 달 사이 재계 단체의 교육담당자와 재정경제부 서기관 등을 포함하여 자유기업원이 축적해 놓은 친기업 교육의 노하우를 묻는 사람들이 급증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친기업적 경제교육을 확대하려는 기운은 밖으로 드러난 모습보다 더 활기차고 움직임이 크다. 

재계와 보수신문의 콤비플레이

사실, 이러한 움직임은 연말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사건'이 아니다. 이러한 흐름은 오랜 동안 수면아래서 꿈틀대며 자기 기반을 확장하고 구체적인 모습을 갖춰왔다. 이점은 재계가 시장경제교육 확장의 정당성 근거로 내세우는, "세계최고 수준의 반기업정서"가 보수언론을 통해 사회적 의제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따라가 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2003년 4월28일부터 5월2일까지 『중앙일보』는 총 5회에 걸쳐 '反기업 정서 위험수위'라는 기획시리즈를 게재했다. 한국, 중국, 일본 국민의 기업인식을 각각 『중앙일보』 여론조사팀, 베이징 방송대학 조사통계연구소, 닛케이 리서치가 조사하여 그 결과를 비교한 것이었다. 이는 2003년 들어 처음으로 반기업정서를 직접 다룬 기획기사다. 

이 기사를 작성한 기획팀 기자들과 자문위원들에 따르면, 대한민국 사람들은 중국이나 일본 사람들에 비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왜곡된 기업관"을 갖고 있으며, 부자는 마음이 악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충격적인 결과"를 보였다. 그리고 이렇게 반기업정서가 심각해진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중국인들의 실용주의 의식"에 대비되는 한국인들의 "평등주의 의식"과 부실한 경제교육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기업의 목적은 이윤의 극대화이며 사회공헌은 그 다음 문제라는 인식을 분명히 해야 하고", 재계는 "시장경제체제 유지를 위한 투자에도 적극 나서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기사가 나간 지 이미 반년 넘게 지났다. 그러므로 1% 차이를 과장하여 친기업적 주장에 조사결과를 억지로 꿰어 맞추는 『중앙일보』의 '충격적이고 왜곡된 언론관'을 지적하는 것은 지금 시점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중국인보다 강한 반기업정서"라는 『중앙일보』의 '조사결과'가 이후 다른 보수언론들에서 기정사실처럼 다뤄지며 확대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기획에 집약된 주장들, '이윤 추구를 원칙으로 하는 기업에게 사회적 책임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 '효율성보다 형평성을 강조하는 평등주의 국민의식은 잘못이다', '우리나라의 경제교육은 부실하며 기업에 적대적이다' 등이 재계와 보수언론의 손발 잘 맞는 주고받음 속에서 구체적인 제안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반기업정서와 관련된 이러한 주장들은 이후 『동아일보』가 "대한상공회의소와 공동으로" 작업한 '기업하기 힘든 나라' 기획시리즈 등 보수신문과 경제신문들의 기획기사, 사설, 칼럼 등을 통해 더욱 구체화되고 풍성해졌다. 재계가 제공한 1차 자료들이 밑거름 역할을 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쨌든 이러한 '오피니언 리더'들의 우려와 '여론'은 '위험수위의 반기업정서'를 해소하기 위해서 친기업적인 시장경제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고, 사용자단체들이 찬바람이 슬금슬금 밀려오는 세밑 즈음하여 이를 적극 현실화한 것이다. 

대한민국 반기업정서가 세계 최고라고? 

그런데, 재계가 주장하는 것처럼 대한민국의 반기업정서는 정말 세계 최고 수준일까? "그렇다"라고 주장하는 재계의 1차 자료들을 검토해 보면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대한상공회의소에서 2003년 8월 발간한 『우리나라 반기업 정서의 현황과 과제』보고서가 "기업가에 대한 부정적 인식 세계1위"라고 주장하며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다국적 종합컨설팅회사인 '액션추어'의 조사이다. 이 조사에서 대한민국은 '기업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70%로 조사대상 22개국 중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2001년 단 한 차례, 겨우 22개국 880개 기업을 대상으로, "기업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있다고 보는가?"라는 오직 하나의 질문만으로 이루어진 이 조사는 그나마 대상도 일반 국민이 아니라 기업인 자신들이다. 즉, 조사결과를 인정하더라도 우리 기업인의 '자격지심'이 세계1위라는 점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대한상공회의소의 보고서는 "중앙일보와 공동으로" 전국 성인 2,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기업인에 대해서 67%가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다는 주장을 덧붙인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아주 존경스럽다(2%)', '대체로 존경스럽다(31%)', '별로 존경스럽지 않다(60%)', '전혀 존경스럽지 않다(7%)'로만 이뤄져 중립적인 항목이 없는 이 설문 구성은 부정적인 대답을 '유도'한다. 일반적으로, '그저 그렇다'라고 대답하고 싶은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대체로 ∼하다'보다는 '별로 ∼않다'를 선택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이는 11월에 발표된 전경련의 『초·중·고생 경제마인드 분석 및 대응과제』보고서와 비교하면 보다 분명해진다. 전경련의 보고서는 재벌기업, 대기업, 중소기업, 영세상인, 노동조합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을 조사했다. 그 결과 중립적인 대답을 할 수 있는 전경련 보고서의 조사에서는 '그저 그렇다'가 46%∼59%로 가장 인기 있는 항목이었다. 게다가 이 조사에서는 모든 경제 주체들에 대해서 긍정적 인식이 부정적 인식보다 높았고, 노동조합에 대한 부정적 인식(18.6%)이 재벌기업(22.6%)을 제외한 다른 어떤 주체들의 경우보다 높았다. 학생과 성인이라는 차이점은 있지만 조사결과가 너무 다르다.

경제교육은 민주시민 육성을 위한 것

재계가 이렇게 억지까지 써가며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대한상공회의소가 2003년 10월에 발표한 한 보고서가 경제와 사회 교과서 39권을 검토한 끝에 내리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많은 교과서가 기업과 자유시장은 그 자체만으로는 바람직한 사회적 결과를 낳지 못하므로 정부가 개입하여 교정해야 한다는 논리적 귀결"로 이어져 있다. 그러므로, 기업과 자유시장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기 어렵도록 암묵적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이는 교과서를 직접 가르치는 교사들의 느끼는 바와는 큰 차이가 있다. 전국사회교사모임의 박현희 선생님(서울 구일고등학교)은 오히려, 경제교과서의 문제는 "대부분의 사회가 혼합경제체제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시장경제가 우리가 추구하는 경제적 이상향인 듯이 전제하고 있다는 점", 학생들 대다수가 노동자가 될 텐데 "최저임금제, 최저생계비,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노동권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공교육에서 이뤄지는 경제교육은 "민주시민교육이라는 우리 교육 전체 목표에 복무"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리경영'에 관한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제5단계까지 있는 기업의 윤리적 발달단계에서 우리 기업들은 대부분 제2단계에서 제3단계로 이행 중이란다. 즉, "위법만 안 하면 비윤리적이 아니라고" 여기는 데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기업에 이익이 되는 것"으로 인식이 바뀌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윤리경영은 재계가 반기업정서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내놓는 또 다른 핵심 화두이자 급부상하는 '글로벌 스탠더드'이다. 그런데, 교과서가 반기업적이라는 주장은 기업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윤리경영'과 부딪힌다. 결국, 재계가 바라는 경제교육이 '기업과 시장의 책임 없는 자유에 대한 무한긍정'이라는 낡은 이데올로기라면, 이는 기업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퇴행적이라는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 재계가 주장하는 '세계최고 수준의 반기업정서'는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요즈음 기업인들은 위기감과 반감을 아마 피부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는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와 치부가 드러나고 있는데서 비롯되었을 터다. 우리 국민들이 미워하는 것은 기업 자체가 아니라 기업이 저지르는 범죄이고, 죄를 짓고도 태연한 기업가들일 뿐이다. 침체된 경기 때문에 모든 경제 주체들이 힘들어하는 상황에서 반기업정서 타령하면서 '왜 나만 미워해'라고 칭얼대는 거대 권력의 모습, 정말 보기 흉하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