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표라도 더'가 부추기는 침묵이 두렵다

노동사회

'한표라도 더'가 부추기는 침묵이 두렵다

admin 0 3,224 2013.05.12 04:32

차가운 바람이 살갗을 찢어 놓을 듯한 겨울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하도에서 장사를 하시던 아주머니들이 다들 철수를 했는지 보이지 않는다. 이 지하도는 오로지 보행자들의 통행만을 위한 지하도다. 그곳에는 야채, 과일, 옷핀 등을 파는 가판대 몇 개가 늘 있었다. 그렇게나마 몇몇 사람들이 여기서 장사를 했지만, 지금은 자취를 감췄다. 

하루치 약값 천원을 언제쯤 해결할 수 있을까

이곳에서 장사를 하는 육십삼세의 할머니, 강냉이와 고추, 양파를 팔던 그 할머니는 어찌 됐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강냉이 한봉지 천원, 고추 한사라 천원, 양파 한무더기 천원"이라고 힘없는 목소리로 지나가는 이들에게 호소라도 하듯, 처량하게 외치던 그 할머니는 어찌 됐을까. 그 푼돈으로 남매를 먹여 살렸는데….

스물일곱살에 고향인 속초에서 올라와 평생 행상을 하며 살았던 할머니. 
96년 여름 경동시장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장사를 하던 할머니는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의사는 땡볕에서 오래 장사를 해서 뇌혈관에 피가 제대로 흐르지 않고 있다며 앞으로 햇볕에 노출되는 시장에 나가서 장사를 하면 위험한 상황이 올 것이라고 경고를 했다.

"지하도에서 장사는 하는 건 괜찮겠지"하며 다시 장사를 시작한 할머니는 보름치 약 값 2만원 벌기도 버거워했다. 아침 8시 경동시장에서 물건을 사다가 오전 10시면 햇볕을 피해 지하도로 내려오는 이 할머니는 지금 겨울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보험이 적용돼서 부담 없이 구입한다는 그 약, 보름치 약값 2만원. 하루 천원이 조금 넘는, 담배값보다도 못한 가격이지만 할머니는 그조차 구입하기 힘들어 하셨다. 동대문 월세집에 돈을 내지 못해, 자는 것 마저 위협을 당하고 있다. 그 할머니와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던, 혹 비슷한 사연으로 지하도에서 장사를 하는 것일 수도 있는 다른 할머니들은 어디서 장사를 하고 있을까.
나는 그 지하도를 다닐 때마다 두렵다. 

사연 많은 그 사람들이 이 겨울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과연 민주노동당이 그들 하루치 약값 1천원을 언제쯤 해결할 수 있게 될까라는 생각을 하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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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을 향한 가시 돋친 말

현재 서울에 있는 민주노동당 모든 지구당의 핵심사업이라고 한다면 단연코 학교급식조례제정청구 서명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마포을지구당 역시 매일 오후 서명운동을 한시간 이상씩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지하철 역사 안에서 나이 드신 한 분이 서명 가판대에 찾아와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게 뭐하는거야. 애덜 학교급식을 좋게 바꾸자는 거지. 좋은 일하는구만. 아, 그럼 당연히 해야지."
조례제정 청구 서명에는 주민등록번호와 주소는 물론 도장 혹은 지장까지 찍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지갑을 꺼내 어렵사리 주소를 적고, 지장까지 찍는 할아버지. 덤으로 웃음 한번 보여주며 "추운데 수고하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가시면서 저희가 제출할 조례안도 한번 읽어보세요."
그리고 한 오분쯤 흘렀을까.

방금 서명을 한 할아버지가 당 특보를 손에 쥔 채 허겁지겁 달려온다. 상기된 얼굴은 비단 숨이 차서만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서명한 거 어딨어."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이거(당 특보) 보니까 민주노동당에서 하는 거구만. 그렇지. 민주노동당이지. 아니, 누가 민주노동당에서 하는 걸 서명해. 내꺼 이리줘. 어, 빨리 달란 말이야."
결국 그 할아버지는 우리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서명한 용지를 빼앗다시피 했다. 처음의 온화한 모습은 간데 없고, 좋은 일 한다던 그 다정스러운 말투가 어찌나 그렇게 사납게 변할 수 있던지. 왜 취지에는 동감을 하면서 민주노동당이 하는 것은 무조건 반대를 하는 것인지….

나는 서명운동이나 선전을 하고 나면 늘 두렵다. 
우리를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을 과연 당의 지지자로 만들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민주노동당에서 하는 서명임을 알고 가시 돋친 말을 하고 떠나는 사람을 보고 혹시나 내 스스로 실망을 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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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나서가지고 자극할 필요 없어요"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농수산물센터에 입주한 상인들과 농수산물센터의 운영권을 가지고 있는 마포개발공사가 지난해부터 대립하고 있다. 얼마전 상인 대표자가 내게 전화를 했다.

"아, 위원장님이세요. 저 마포농수산물센터 김종국(46.가명)입니다. 지금 기자한테 전화가 왔는데, 그거 없던 일로 해주세요. 지금은 언론보도가 별로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뭐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니, 얼마 전까지도 함께 회의를 하면서 여론형성을 위해 언론작업을 하자고 했는데 이제 와서 이게 무슨 소리일까. 지난해 당에 직접 전화를 해서, 마포개발공사의 불합리한 경영에 대해 지구당이 적극적으로 나서 주길 요청했던 상인들이었는데, 어렵게 신문에 기사 한 줄이라도 나오게 하기 위해 '작업'을 했는데 이제 와서 필요가 없다니….

마포개발공사는 여느 지방공사와 마찬가지로 지역 주민들의 복리증진을 위해 설립됐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특히 양자간에 체결한 계약서가 그랬다. 마포개발공사와 상인들간에는 수수료 계약을 체결했다. 통상 수수료 계약이라고 하면, 판매액의 일정부분을 수수료로 지급하면 된다. 예를 들어, 백화점과 입주 점포간에도 수수료 계약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 경우 월 매출액의 몇%를 수수료로 입주 점포가 백화점 측에 납입하면 된다는 식이다. 

그런데 마포개발공사는 상인들에게 월 매출액을 환산하지 않고, 점포의 크기대로 월 얼마의 임대료를 받아왔다. 그러다 보니, 장사가 잘되건, 잘되지 않건 마포개발공사가 임의대로 정해놓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 이건 임대차 계약이나 다름이 없다. 또한 수수료 매장의 경우, 통상적으로 관리비를 받지 않는 것이 관례임에도 마포개발공사는 매달 관리비를 받아왔다.

지난해 서울시의회에서도 사실상 임대차 계약이므로 수수료 계약을 임대차 계약으로 전환하라는 권고를 내렸다. 상인들도 상가임대차보호법의 적용을 받으며 안정적으로 영업을 할 수 있는 임대차 계약을 원했다. 지구당이 조사를 한 결과 적지 않은 상인들이 이자율이 턱없이 높은 고리채를 쓰고 있었는데, 이는 언제 계약이 해지될지 모르는 수수료 계약을 체결한 상태라 장사할 물건을 구입할 때도 어음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임대차 계약일 경우 안정적인 영업이 가능하기 때문에 어음을 쓸 수 있다).

하지만, 마포개발공사는 상인들의 임대차 계약요구에 요지부동이었다. 지난해 지구당은 상인들과 함께 마포개발공사에 압력을 넣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몇 차례 회의를 하면서 대응책을 함께 논의했다. 농수산물센터는 모두 190여개 점포로 이뤄진 대형 시장이기에 지구당에서는 두 명의 변호사가 직접 상인들과 마주앉아 법적인 소송이 가능한지 여부를 판단하는 회의를 가지기도 했다. 

결국 최선의 방법으로 언론을 통해 마포개발공사의 부도덕함과 상인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로 결정했고 언론작업은 중앙당 민생보호단이 맡았다. 그런데 기자가 지구당에 전화를 해서 취재협조를 요청했고, 상인들과 연결까지 시켰건만, 이제는 필요없단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마포개발공사 사장이 새로 바꿨는데, 지금 분위기가 좋아요. 그러니까 괜히 민주노동당에서 (마포개발공사를)자극하는 건 좋을 것 같지 않네요."

이래서 나는 두렵다. 

근본적인 구조를 바꾸고 싶은 내 맘이 당장의 선거에서 '한표 더'라는 명분으로 상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침묵할까하여, 긴 시간 설득을 통해 다시 사람들을 부조리에 맞서게 하는 일을 회피할까 하여.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