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달 참으로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정세가 변화하고 그에 대응하는 민주노조운동진영의 움직임 역시 한달 전과 비교하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변화들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청와대와 노동부의 기습적인 노동법 개악안 입법예고에 맞서 비정규노조 대표자들이 희생과 구속을 각오하고 벌인 일주일간의 열린우리당 의장실 점거농성투쟁은 그러한 변화를 선도하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런 투쟁조차도 즉흥적이고 일회적인 충동에 의해서 진행된 것은 아니다. 민주노총 소속 비정규직노조들의 자발적인 연대결사체인 전국비정규연대회의(준)(이하 연대회의)은 석 달 전부터 노동법 개악을 저지하고 권리입법을 쟁취하기 위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전국적 공동투쟁을 논의해왔고, 지난 한달간 진행된 노동법개악 저지투쟁은 바로 그러한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 지난 9월 열린우리당 당의장실 점거 때 '양심건국' 앞에 '비'글자를 붙여 '비양심건국'으로 바꿔놓은 모습 - 출처: 오마이뉴스 ]
무엇을 의제로 함께 싸울 것인가
비정규연대회의가 지금까지 진행해온 수많은 회의와 간부수련회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주제가 있다. 업종과 지역, 고용형태를 불문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전국적 공동투쟁을 만들어야 하는데, 과연 그 투쟁은 어떤 투쟁일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특수고용·간접고용·직접고용·지역일반노조·이주 부문 등 너무나도 다양한 존재형태로 나뉘어져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과연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공동의 요구'라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점에서부터 막혀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던 중 민주노동당이 의회에 진출하고 7월 초에 '비정규권리보장법안'을 입법 발의하게 되었고, 얼마 후 7월24∼25일 대전에서 개최된 전국비정규노조 간부수련회에서는 자연스럽게 하반기 비정규직 공동투쟁의 핵심이슈로 '권리보장입법 쟁취투쟁'이 떠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비정규직노조들은 역사가 짧다보니 현장투쟁과 제도개선투쟁의 관계에 대해 이해수준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민주노총을 형성해온 정규직노조운동의 경우 'ILO 공대위'를 비롯해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까지 겪으며 제도개선투쟁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현장조직력 강화까지 이어낼 수 있는지를 경험해본 반면, 비정규노조들의 경우 길어야 5년의 역사를 갖고 있어서 제대로 된 공동의 제도개선투쟁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권리보장입법의 구성 또한 특수고용의 경우에는 노동자성 인정으로 특화시키고, 간접고용·사내하청의 경우에는 파견법 철폐와 원청 사용자성 인정으로 특화시켰으며, 상시고용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근로기준법을 엄격히 해석하여 정규직화를 완성한다는 식의 '특화' 조항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한 묶음(패키지)의 법안"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공동'투쟁이라는 의미를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하는 데에서 확고한 답을 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결국 수련회에서는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하고, 차기 대표자회의에서 논의한다는 내용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민주노총은 하반기 총력투쟁계획을 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정작 비정규주체들은 스스로의 공동투쟁의제조차 정하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악안 저지! 권리입법 쟁취!
그런데 엉뚱하게도 답은 다른 쪽에서 나왔다. 바로 노무현 정부가 '정규직의 비정규직화', '모든 일자리를 비정규직으로 만들려는' 노동법 개악안을 들고 나온 것이다. 9월 초부터 노동부를 앞세운 강공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했는데, 비정규노조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로 개악안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에서 공동투쟁의제를 찾기 시작했고, 마침내 9월16일 비정규노조 대표자들이 구속과 희생을 각오하고 열린우리당 의장실 점거농성에 돌입했다.
노무현 정부가 내놓은 노동법 개악안은 비정규직의 신세 하락을 겨냥했다기보다는 정규직 일자리와 신규 일자리를 비정규직으로 만들겠다는 것으로서, 사실상 정규직을 겨냥한 법안이었다. 이러한 개악안에 맞서 비정규노조 대표자들이 가장 먼저 선도적인 투쟁을 결의하게 된 것은, "우리 스스로가 비정규직의 설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1,400만 노동자 전체를 비정규직화하려는 법안을 목숨걸고 막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1,400만 전체 노동자의 이해와 요구를 내걸고 비정규직노조의 대표자들이 구속과 희생을 각오한 선도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이번 노동법 개악안의 핵심은 비정규직을 겨냥한 것이라기보다 '정규직의 비정규직화'를 획책하는 것이었다. 점거농성투쟁 내내 "차별받을 대로 차별받은 비정규직은 더 잃을 것 없다. 개악안의 타겟은 정규직 노동자"라는 입장을 밝혀왔다. 대표자들이 희생을 각오하고 고강도 투쟁을 전개한 것은 이미 차별받을 대로 차별받은 상황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을 비롯한 전체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의 설움을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이 먼저 나서서 경각심을 일깨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비정규직의 절실한 요구인 '권리보장입법'을 법제화하는 요구를 사회화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비정규노조 대표자들의 투쟁목표는 단순히 개악안의 저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비정규권리보장입법안에는 단순히 법률적으로 타당한 문구들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지난 4∼5년간 특수고용·간접고용·직접고용 노동자들의 투쟁의 기록이 배어있는 것이었다. 거대한 비정규투쟁이 있을 때마다 사회화된 요구를 법률전문가들이 법안으로 성안시켰던 것이다.
열린우리당 점거농성의 성과
열린우리당 의장실 점거농성에서 비정규노조들은 진정으로 업종과 지역, 고용형태를 넘어선 단결을 이루어냈고, 개악안 저지와 권리입법 쟁취를 내건 전국 노동자의 공동투쟁으로 이어나가는 단초를 마련했다. 당시 투쟁의 성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비정규직노조의 대표자들이 단순히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라는 수준을 넘어서서 '정규직의 비정규직화를 획책하는 개악안 저지'를 내걸고 1,400만 전체 노동자의 이해관계를 앞세우며 점거농성에 돌입했다. 그리고 비록 정부 입법안 완전 철회를 따내지는 못했으나, 여당 최고책임자인 이부영 의장과의 면담을 성사시켰고 당의장으로부터 정부 입법안에 문제점이 많다는 답변을 이끌어냈다.
둘째, 여러 가지 개혁입법과제를 걸고 4시간 경고파업을 계획했던 민주노총의 하반기 총력투쟁계획에서, "노동법 개악안을 완전 저지하고 비정규 권리보장입법을 쟁취하기 위해 개악안 상임위 상정시 총파업투쟁"으로 결의를 끌어냈다. 그리고 점거농성 직후 한국노총 또한 노동법 개악안에 맞서 '하반기 총력투쟁'을 선언하게 되었다.
셋째, 정부의 입법예고가 법안의 이름처럼 '비정규직 보호'를 위한 법안이 아니라 비정규직을 확대·양산하고 차별을 합리화하는 '개악안'이라는 사실을 확산시키고 분명히 하였다. 그리하여 노동·사회·시민단체들이 빠르게 집결하여 '비정규 개악안 저지와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공대위'를 결성함으로써 전국적이고 사회적인 전선을 형성하였다. 민주노동당 또한 노동법 개악저지와 비정규 권리보장입법 쟁취를 하반기 핵심투쟁으로 결의하게 되었다.
넷째, 비정규노조 대표자들이 직접 희생을 각오한 점거농성에 들어감으로써 소속 노조의 조합원들이 노동법 개악저지 투쟁의지를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통해 그리고 전국비정규연대회의(준)이 명실공히 민주노총 산하 비정규직노동조합들의 대표체로 발돋움하는 등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다섯째, 점거농성 마무리 전날 각 지역에서 전개한 열린우리당 시도지부 점거농성 및 항의투쟁은 비정규직 투쟁의 역동성을 잘 보여준 사례이고 또한 이번 투쟁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다양한 직종과 고용형태의 비정규직노조 대표자들이 일주일간의 농성을 전개하며 하반기 비정규직 공동투쟁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에 대해 심도깊은 토론을 벌였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과정을 거칠 수 있었다.
[ 지난 10월 10일 열린 노동자대회에서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개악철폐 권리법안 쟁취'라고 씌어진 붉은 천을 펼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출처 : 오마이뉴스 ]
모두를 위한 비정규직의 공동투쟁
지난해 비정규노동자대회에 이어 올해 10월10일 또다시 양대 노총 주최의 비정규노동자대회가 열렸다. 지난해에는 충분한 목적의식 없이 모인 자리에서 열사의 분신을 접하고 자각하는 자리였다면, 올해 대회는 비정규직노조들이 목적의식을 갖고 정규직 노동자들까지 포함한 전체 노동자를 조직하고 함께 공동투쟁을 결의하는 자리로 기획되고 집행되었다.
10월8일 대표자회의 점검결과 약 4,000여명의 조직동원이 가능할 것으로 예견하였는데, 이날 대회에 실제로 조직동원 예상치를 그대로 달성하였다. 전국에서 몰려온 비정규노조들이 집회 시작 전인 오후 1시30분부터 대회장 맨 앞을 차지하며 대열을 정비하는 모습 속에, 그리고 하나같이 웃음 띤 모습으로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연대와 교류를 하는 모습 속에, 지난 1년 간 비정규노조들의 전국적 연대결사조직이 참으로 괄목상대한 성장을 했구나 하는 감상에 젖기도 했다.
대회의 절정은, 박준 동지의 문화공연 도중에 붉은 색의 손 현수막이 배포되며 노래장단에 맞추어 "개악안 저지! 권리입법쟁취!"의 물결이 대회장 전체를 붉게 물들일 때였다. 그 붉은 물결 속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따로 있지 않았고,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따로 있지 않았으며, 한국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가 따로 있지 않았다. "노동자는 하나다 비정규직 철폐하자!", "개악안을 저지하고 권리입법 쟁취하자!", "입.법.쟁.취.승.리.투.쟁!"
10월17일 다시 한번 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비정규연대회의를 총파업투쟁 준비체계인 '전국비정규노조총력투쟁본부'로 전환하고, 투본 산하에 총괄조직팀·교육팀·선전팀을 두어 전국 비정규노조들의 총파업 찬반투표, 권리선언운동, 조합원 교육과 간부간담회, 인터넷 속보 등을 책임지기로 하였다. 방아쇠는 당겨졌고, 비정규노조들도 이제 총파업의 첫단추를 끼우기 시작했다.
두려움을 뚫고 하반기 총파업투쟁으로
"동지들! 저도 두렵고 외롭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끌어낸 전국적 총파업투쟁입니다. 주저하면 더 크게 다칩니다!"
10월16∼17일 100여명의 비정규노조 간부들이 계룡산 갑사 유스호스텔에 집결했을 때, 이 운동을 가장 앞에서 이끌고 나갈 지도자 동지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얘기했다. 그러나 그 솔직함 속에 이 운동의 미래가 있다. 비정규운동은 아직 전국적 총파업을 조직해본 경험이 없다. 그렇기에 지도자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정부는 노동법 개악을 밀어붙일 의도를 노골적으로 하고 있는 가운데, 열린우리당 측에서 뭔가 '수정'의 가능성에 불을 지피고 있으나, 그간 열린우리당의 태도를 보건데 의심만이 증폭될 뿐이다.
또한 이번 하반기 총파업투쟁의 핵심 목표는 단순히 개악안의 저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개악안만 저지한다면 우리 비정규직들은 평생을 그저 비정규직으로 살아라하는 것에 불과하다. 특수고용 노동자도 노동자로서 온전한 노동3권을 보장받기 위해, 그리고 지긋지긋한 간접고용과 중간착취를 합법화해온 파견법을 철폐하기 위해, 그리고 하도급과 하청업체의 뒤에 숨어 우리 노동자를 괴롭히고 있는 원청 자본의 사용자성을 인정받기 위해, 기간제 사용을 엄격하게 제한하기 위해 투쟁에 나서는 것이다.
개악안의 저지만이 아니라 비정규권리입법 쟁취라는 우리들의 분명한 목표의식이 있는 한, 정부와 여당이 개악안을 수정한다거나 유보한다고 해도 우리들의 투쟁은 결코 멈춰지거나 중단·유보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