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격과 배고픔과 분단 그리고 노동운동의 부활1945년 8월15일. 마침내 일본제국주의는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하였고 우리나라는 지긋지긋한 지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해방의 감격과 환희가 넘쳐났습니다. 꿈과 희망이 가득하였죠. 그러나 우리 민족의 새로운 비극이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했어요. 해방과 함께 남북으로 분단된 것입니다.
그것은 미국과 소련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북으로 나누어 점령하고, 특히 남쪽에 들어온 미국이 사회주의 확산을 두려워 한 나머지 1945년 9월6일 일방적으로 남한 군정을 선포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에는 민족의 자주적인 대표기구로서 ‘건국준비위원회’와 산하 ‘인민위원회’가 수립되어 있었죠. 그러나 미국은 이를 전면 부정하고 미군정이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미군정은 일제하의 조선총독부 기구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어요. 그리고 일본인의 재산 보호령을 발동하고 해방이 두려워 잠복한 일제 앞잡이들을 불러내 관리로 등용하기도 했죠. 사실상 우리나라는 해방된 것이 아니라 일제와 미군정이 점령자로서의 자리를 바꾸었을 뿐이었던 겁니다.
미군정은 일제의 각종 탄압법을 폐지하고 표면적으로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며 자유로운 분위기를 허용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모든 정치 사회활동이 폭발적으로 전개되었지만, 그 내부에는 친미 보수 우익과 사회주의 좌익, 민족주의 세력간의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죠.
경제상황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혼란스러웠어요. 가난과 배고픔은 가장 큰 문제이었죠. 일제하의 산업이 전쟁을 위한 군수경제체계였기 때문에 급속히 평화적이며 자주적인 경제체제로 바꾸기 어려운데다가 각 기업체의 기술자나 관리인들이 대부분 일본인들이었기 때문에 공장 문을 닫거나 작업을 단축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생활물자가 부족하고 물가가 폭등했습니다.
해방 2년 후인 1947년 3월 남한의 사업장(전매사업장 및 국영사업장 제외)은 1943년에 비해 55.3%, 노동자 수는 47.5%로 줄어들었죠. 그리고 일본인들이 귀국하기 전에 돈을 마구 찍어냈고 미군정도 필요에 따라 화폐를 남발하였기 때문에, 도매물가는 끝없이 치솟아 1936년을 100으로 볼 때 1944년 241, 1946년 7월 12,806, 1947년 12월 58,305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로 실질임금은 1937년을 100으로 할 때 1944년 93.1, 1946년 7월 54.6으로 줄었으며, 마침내 1947년 12월에는 29.3으로까지 떨어졌어요. 해방은 되었지만 노동자들은 외세의 지배 하에서 실업의 위협과 엄청난 물가고에 눌리며 하루 하루를 고통 속에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겁니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결성
해방이 되고 일본인들이 물러가자 노동자들은 일본인이 소유하였던 회사와 공장을 접수하여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자주관리를 시작한 것이죠. 지금까지 일본인 아래서 땀 흘리며 일해 온 공장은 바로 우리 자신들의 것이라는 생각과 물건을 만들어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자주관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진행되었습니다. 해방과 함께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는 각 단위의 자치 기구를 만들려고 했고 공장 노동자들이 공장을 접수하여 자주적인 관리를 하도록 촉진하였죠.
이러한 상황변화 속에서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열망하는 정치세력들은 앞으로 독립국가 건설을 하기 위해서는 대중적 조직기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고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조합 결성은 일제 하 지하에 잠복했던 노동운동가들의 주도 하에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어요. 노동자들은 각 공장, 사업장에 조직을 만들고 이를 16개의 산업별 조직으로 묶어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1945년 11월5일과 6일, 전국적인 중앙조직을 결성하게 되었는데, 바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였습니다.
해방후 불과 두달 반만의 일이었어요. 전평에 참가한 노동조합은 남북한을 합쳐 1,194개였고 조합원은 55만명을 넘어섰죠. 전평은 ‘일반행동강령’으로 최저임금제 확립, 8시간 노동제 실시, 7일 1휴제와 연 1개월간의 유급휴가제 실시, 노동자를 위한 주택, 탁아소, 오락실, 도서관, 의료기관 설치, 단체협약권 확립, 공장폐쇄 및 해고 반대, 사회보험제 실시, 일체의 청부제 반대, 언론·출판·집회·결사·파업·시위의 절대 자유 보장을 내세웠고 특히 일본 제국주의자와 매국적 민족반역자 및 친일파의 일체 기업을 공장위원회(관리위원회)에서 관리하고 노동자는 그 관리권에 참여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친일파·민족반역자를 제외한 진보적 민주주의에 입각하는 민족통일전선 정권의 수립에 적극 참가하고 민족자본의 양심적인 부분과 협력하여 산업건설에 매진하며 이러한 운동을 통해서 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하고 노동자대중을 교육, 훈련하여 자체 조직을 확대, 강화한다는 것을 실천강령으로 천명하기도 했죠.
전평은 결성대회 선언에서 산업별노조 체계와 ‘전국평의회’를 강화하고 광범한 대중운동을 통해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진보적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전평은 생산관리라는 중대한 책임과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되며, 조선 산업의 재건과 건전한 발전에 공헌할 것임을 분명히 하였어요. 이에 따라 노동조합의 핵심부서인 ‘쟁의부’를 두지 않고 산업건설부를 두게 되었습니다.
전평의 결성에 대해 미군정은 처음에는 방관하는 듯 했습니다. 당시 미군정은 남한에서 실시할 노동정책의 방향을 미리 준비하지는 않았던 거죠. 그 때 그 때의 필요에 따라 결정되었는데, 당연히 그 정책결정의 기준은 노동자 권익옹호보다는 사회적 안정을 유지하는데 두어졌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노동기본권을 제약하는 독소조항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45년 10월30일 공포한 군정법령 제19호였습니다. 이 법령은 각 개인의 취업 자유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를 방해하는 행위는 노조든, 파업단이든 노동자 각 개인에게 공동행동에의 참가를 호소하는 행동이라면 모두 불법이라고 규정하였으며 방해를 가져오지 않는 쟁의라도 노동조정위원회의 강제중재에 따라야 한다고 밝히고 있어요. 이는 결국 노동조합의 쟁의행위를 제한하거나 사실상 금지하는 것이었죠.
미군정은 미국의 냉전정책 강화에 따라서 사회주의 세력과 전평에 대해 적대적인 경향으로 치닫기 시작했습니다. 미군정은 한국 노동자의 대중적인 운동이 전평으로 결집되어 가는 것을 목격하고 초기에 취했던 일본인 재산 처리에 관한 정책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죠. 특히 전평 주도 하에 노동자의 공장자주관리운동이 수그러들지 않자, 미군정은 당시의 모든 혼란의 궁극적인 원인이 노동조합에 의한 공장의 접수, 자주관리운동과 배후에서 이를 조종하고 있는 조선공산당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압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였던 겁니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군정법령 제33호(1945년 12월6일)를 공포하여 일본인의 재산은 군정청에서 임시로 소유하고 한국인 가운데 적당한 관리자가 나타나면 그 경영을 맡긴다는 관리인제도를 규정하였습니다. 이제 노동자의 자발적인 접수와 관리는 불법이 되고 말았고 전평과 미군정과의 대립 갈등은 피할 수 없게 되었죠.
전평은 미군정의 정책의도와 영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조선민족의 통일과 자주국가의 건설은 외세가 아닌 전평이 담당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노동자 관리운동을 산업건설운동으로 전환시킨다는 방침을 갖고 있었어요. 그러나 미군정의 관리인제도에 의해 지금까지의 자주관리운동의 기반이 침해받으면서 공장마다 친일파와 악덕 기업인이 관리인으로 등장하게 되자, 전평의 산업건설 운동은 근본부터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전평은 미군정이 악덕 관리인과 비양심적인 기업인을 채용하여 산업부흥을 가로막고 있다고 하면서 반대투쟁을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당시 식량부족으로 인한 민중의 고통을 대변하여 쌀 획득 투쟁을 전개하고 ‘쌀 요구회’의 조직화도 동시에 전개하게 됩니다. 이러한 쌀 획득 투쟁은 노동자 대중의 일상적인 이익에 기초를 둔 조직적 동원을 통해 민중적 정권을 실현해 나간다고 하는 전평의 기본노선에 따라 전개된 것으로, 춘궁기에는 연일 파업과 궐기대회가 계속되었죠.
한편, 전평과 미군정 사이의 대립은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과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계기로 급속도로 격화합니다. ‘미·소공동위원회’란 1945년 말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에서 조선에 10년간의 신탁통치를 하자고 주장한 미국 측의 제안이 거부되고, 조선인으로 구성된 민주정부를 즉각 수립시키고 ‘미·소공동위원회’는 단지 이것을 원조·후견하고 그 기간도 5년 이내로 하자고 한 소련 측의 제안을 기초로 하여 탄생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전평은 이 공동위원회가 오히려 어느 한 나라에 의한 반(半)식민지화를 방지하는 것이고, 양국이 한국민중 대표의 참가 아래 협조만 잘 한다면 조선의 완전 해방을 추진할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성공리에 수립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미·소공동위원회’를 전폭적으로 지지하였어요. 이것은 미군정과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우익진영과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죠. 마침내 미군정은 1946년 5월15일 공산당의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발표하고 당 간부 10여명을 체포함으로써 공산당 탄압정책을 노골화하였습니다. 전평에 대해서도 적대적인 태도를 분명히 하였죠.
[ 전평 기관지 「전국노동자신문」 ]
전평 타도를 목표로 한 대한노총의 결성
전평이 결성되고 좌익 세력의 힘이 갈수록 강대해지자 이에 반대하는 우익진영에서는 그 대응책을 서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대해 전평이 산하 노동조합을 동원하여 막대한 조직력을 보이며 지지 시위를 벌이자, 그때까지 대중적인 기반이 없었던 우익 진영에서는 노동자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 조직화를 서둘렀습니다. 이들은 1945년 11월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동맹’을 결성한데 이어 미군정과 협의 하에 전평에 대항하는 조직으로 1946년 3월10일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하, 대한노총)을 결성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열린 결성대회에는 15개 직장에서 45명만이 참석하였는데, 이들은 노동자대표가 아니라 청년운동하던 사람들이었죠. 이날 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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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노총 결성대회 채택 강령
1. 우리는 민주주의와 신민족주의를 원칙으로 함
1. 우리는 완전독립을 기하고 자유노동과 총력발휘로서 건국에 헌신함
1. 우리는 심신을 연마하여 노동자로서 국제수준의 질적 향상을 기함
1. 우리는 현안분석으로서 노·자 간의 친목을 기함
1. 우리는 전국노동전선의 통일을 기함.
*************************************************************************************대한노총은 결성 후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서고 전평 조직을 파괴하는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 일환으로 대한노총은 1946년 5월 12일 독립전취국민대회에 참석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조직에 착수하여 철도의 경성공장에 노조를 세웠는데 이것이 오늘날 철도노조의 기원입니다. 이후 대한노총은 미군정의 절대적인 지원과 우익세력의 비호 아래 조직을 늘려가면서 전평의 투쟁과 활동을 분쇄하는데 모든 수단방법을 동원하였어요. 이처럼 대한노총은 미군정과 우익 진영 인사들이 전평의 대중적인 기반을 무너뜨리고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 조직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것보다는 전평 세력의 타도와 반공 및 우익 정치인 또는 단체의 하부조직으로서 역할을 하였던 겁니다. 조직방식도 철저한 하향식 조직으로서 전국총연맹이 먼저 결성되고 그 다음 지구연맹을 결성했으며, 이 지구연맹이 단위조합결성을 위한 투쟁을 전개해 간 것이었죠.
미군정은 전평을 무너뜨리고 대신 대한노총을 자리잡게 하기 위해 참 많은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한 모습은 잠시 뒤에 말씀드릴 ‘9월 총파업’에서도 잘 나타났고, 대한노총 경전노조를 유일 합법노조로 인정하기 위한 ‘기명투표방식’에서 노골적으로 나타났죠. 즉 경전에 전평의 지부 외에도 대한노총 경전지부가 생기자 미군정은 전 종업원에게 전평과 대한노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기명투표를 실시하게 한 겁니다. 당시 전평 산하 노조원들이 ‘9월 총파업’과 ‘3월 총파업’으로 수천명씩 검거되는 상황에서 공개적으로 선택하라는 것은 바로 대한노총의 경전지부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죠. 미군정은 이러한 방법으로 운수부 해원노조, 부두노조 등에서 전평노조를 무너뜨리고 대한노총의 노조를 유일한 합법노조로 만들어 갔습니다.
전평, 총파업으로 미군정에 맞서다
한국노동운동사상 최대규모인 ‘9월 총파업’은 1946년 9월 13일 서울의 철도국 경성공장의 투쟁을 시발로 개시되었습니다. 당시의 엄청난 물가상승과 식량난 때문에 도저히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에서 9월 1일 월급제가 일급제로 바뀌자, 이 공장 노동자 3,000여명은 13일 노동자대회를 열고 다음과 같은 요구조건을 미군정청 운수부장에게 제출하며 태업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1주일 내 성의 있는 회답이 없으면 다시 파업에 돌입하겠다는 결의를 한 것입니다. 그 요구조건은 ① 종래 대로 중식 지급, ② 3년 이상 근무한 종업원에게 철도 전구간의 승차권을 교부할 것, ③ 일급제를 폐지하고 월급제를 실시할 것, ④ 소두 한 말 당 85원으로 정해진 새로운 쌀값에 의해 임금을 인상할 것(현 임금은 38원으로 쌀값이 정해진 때의 임금), ⑤ 경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에게는 1일 4홉, 중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에게는 1일 5홉의 식량을 배급할 것 등입니다.
그러나 노동자의 요구조건이 운수부장과 노동자대표 사이의 협의에서 관철되지 못하자, 9월 23일 3,000여 노동자들은 다시 운수부장에게 요구조건의 수락을 진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운수부장인 코넬슨이라는 작자가 “인도사람은 굶고 있는데 조선사람은 강냉이를 먹으니 행복하다”라고 폭언을 하며 이들의 요구를 거부했죠. 이러하던 중에 철도국 산하의 부산, 전남지구의 공장에서도 경성공장의 결의에 호응하여 똑같은 요구조건이 제출되고 9월 23일에는 부산 철도공장에서 파업이 시작되었어요. 이 소식을 들은 철도 종업원들은 ‘남조선 철도종업원 대우개선 투쟁위원회’를 만들고 9월 24일 오전 9시부터 만족할 만한 결정이 있을 때까지 파업할 것임을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남한의 동맥인 철도는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이에 미군정장관 러치는 25일 담화문을 발표하여 파업에 강력히 대처할 것임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경성 철도공장 노동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죠. 시위행진을 했고, 기관구 1,000여명의 노동자들은 직장에서 농성을 하고 자위대를 조직하는 등 강경한 자세를 개시하였습니다. 26일에는 파업을 계속하자는 파와 합법적인 투쟁을 하자는 파로 의견이 갈렸으나 결국 ‘파업계속론’이 우세하여 파업을 계속하게 되었죠. 이리하여 총파업이 본격화되었는데 ‘남한 총파업 위원회’는 9월 26일 총파업 선언서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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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쌀을 달라. 노동자와 사무원, 모든 시민에게 3홉 이상 배급하라!
1. 물가등귀에 따라 임금도 인상하라!
1. 전재민, 실업자에게 일과 집과 쌀을 줄 것!
1. 공장폐쇄, 해고 절대 반대!
1. 노동운동의 절대 자유!
1. 일체의 반동 테러 배격!
1. 민주주의적 노동법령을 즉시 실시할 것!
1. 민주주의 운동의 지도자에 대한 지명수배와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
1. 검거, 투옥 중인 민주주의 운동가를 즉시 석방하라!
1.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 파업의 자유를 보장하라!
1. 학원의 자유를 무시하는 국립대학교안을 즉시 철회하라!
1. 해방일보, 인민일보, 현대일보, 기타 정간된 신문을 즉시 복간시키고, 그 사원을 석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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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군정은 이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죠. 미군정은 9월 29일 종업원의 취업을 요구하는 한편 30일엔 경찰관 3,000명과 대한노총, 청년단체가 용산철도공작창에서 농성중인 파업단을 습격하였습니다. 이 습격으로 간부 16명, 조합원 1,200명이 검거되고 2명이 사망하였으며 투쟁위원회 총본부마저 해체되었어요. 총파업이 이렇게 끝나버리고만 것입니다. 그러나 철도파업에 대한 동정파업은 계속 확대되어 9월 28일부터 10월초에 걸쳐 남한 일대의 운수, 통신, 기타 각 산업기관은 마비상태에 빠졌고 학생들도 동맹휴학에 들어감으로써 사회적인 투쟁열기는 극에 달했죠. 그리고 이렇게 ‘9월 총파업’은 ‘10월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10월 1일 대구에서 40여개의 공장이 요구조건을 내걸고 파업을 시작하였으며, 이들 파업노동자와 학생, 시민 1만여명은 데모를 벌여 경찰과 대치했습니다. 이들은 하룻밤을 철야하였고, 그 이튿날에는 경찰과 군중사이에 폭력적인 충돌사태에까지 일어났어요. 이 충돌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미군정은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뒤로도 이러한 봉기는 주로 경찰서, 경찰관을 습격하는 형태를 취하여 11월까지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죠.
이와 같이 파업과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은 전평 주도 하의 노동운동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노골적으로 가해지자 전평 산하의 조직들이 폭발적으로 모든 역량을 동원해 싸웠기 때문에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러나 전평 산하가 아닌 많은 노동자, 농민들도 이와 같은 전평의 저항투쟁에 동조했습니다. 그만큼 당시 서민들의 생활이 어려웠죠. 특히 농민들에 대한 양곡의 강제공출제도는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던 건국준비위원회 계통 사람들의 주동으로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전국에 걸쳐 조직된 인민위원회를 미군정 당국이 무시하고, 오히려 일제시대에 일본 제국주의의 앞잡이로서 민중을 탄압하던 경찰과 조선총독부 등의 행정조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대한 불만도 여기에 덧붙여진 것이었죠.
9월 총파업이 미군정 당국과 대한노총의 강력한 탄압으로 실패하자 전평은 1947년 3월에 제2차 총파업을 벌입니다. 이때의 요구조건이 경찰 간부의 처단, 경찰의 민주화, 테러방지, 실업 방지 및 생활 확보, 구속된 좌익 지도자 석방 등이었습니다만, 이들이 파업하게 된 실제 내용은 미군정이 우익 노동단체인 대한노총을 옹호하고 전평을 타도하려는 방침을 진행하고 있는데 대한 반발이었죠. 이에 따라 전평은 24시간 시한부의 파업을 전개했습니다. 헌데, 이 파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미군정 당국은 이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대대적인 검거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어수선한 가운데서 세계노동조합연맹(WFTU) 대표들이 서울을 방문하여 한국노동운동의 실태를 조사하였습니다. 미군정의 폭력적인 탄압을 목격한 이들은 미군정의 노동정책을 비난하는 한편, 전평을 한국노동운동의 중심단체로 인정하였죠. 그러나 미군정은 1947년 6월 “정치색을 띤 노동조합은 정당한 단체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전평의 합법성을 정식으로 부인하고 말았어요. 이제 전평은 지하로 들어가 투쟁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겁니다.
그럼에도 전평은 1948년 2월 7일 유엔 한국위원단의 방한을 반대하는 파업을 단행하였죠. 이른바 ‘2·7구국투쟁’이었습니다. 이 투쟁은 식민지화와 조국분단과 분열정책에 대한 전국적 반대투쟁이었으며,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위해 단독선거가 분명해지자 선거를 보이콧하는 투쟁이었어요. 구체적인 요구조건은 월급 5할 인상, 소비조합 적립자금 반환, 쌀·공목 특배, 양군(미국·소련) 철퇴, 단독선거 분쇄, 민주개혁 실시, 이승만·김성수 타도, 노동법과 사회보험제 실시, 토지개혁 등이었습니다.
이 투쟁에는 전평산하 노조 30만명이 전국적으로 참가하였고 남한 전역에 통신, 운수 및 송전이 전면 단절되었습니다. 학교 동맹휴학에 일부 관리들이 참가하기도 했죠. 제주도에서는 2·7투쟁이 3·1절 기념행사에서의 충돌로 이어져 끝내는 4·3봉기로 분출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2·7투쟁과정에서는 수십명이 군경에 의해 살해되었고 8,479명이나 검거 및 투옥되었어요. 이후 전평은 1948년 5월 10일 남한단독총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5월 8일 남조선 단선단정반대투쟁총파업위원회를 구성하여 총파업투쟁에 나섰습니다. 11월 30일에는 미군철수를 요구하는 파업을 벌이기도 했습니다만, 이 때는 이미 조직이 붕괴되고 대중과는 유리된 상황이었죠. 자기조직력을 동원한 마지막 투쟁에 불과했습니다.
전평에 대한 평가
전평이 주도한 파업 가운데서 최대규모였던 9월 총파업은 처음에는 철도노동자들의 경제투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그 파업을 노동자들의 생활개선투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들과 대립되는 전평 세력에 의한 파업으로 간주하고 무조건 탄압을 가하였죠. 당시 미군정은 남한에 소련을 견제할 수 있는 친미정권을 세우고 남한을 그들의 새로운 시장권으로 편입시키려고 했는데, 전평은 철저히 반미적인 성격을 가지고 민족자주노선을 관철하려고 했기 때문에 두 세력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미국의 냉전정책에 따른 미군정의 이 같은 조치는 가까운 일본에서도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미군정은 산별회의가 주도한 총파업투쟁을 좌절시켰고 이른 바 ‘레드퍼지’(Red Purge, 적색분자 적발 추방의 반공선풍)를 통해 진보 세력을 괴멸시키고 노동운동을 분열시킨 끝에 일본 노동운동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던 것입니다.
전평은 민족해방의 감격과 죄우대립의 격동 속에서 조선 민중의 요구를 결집해 내고 폭발시킴으로써 조선 민중이 꿈꾸어 온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든 역량을 발휘하였습니다. 총파업은 그 반대세력에 대한 저항이었죠. 훗날 사람들은 전평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습니다. 미군정의 성격을 잘못 판단하여 자주관리운동에서부터 철저히 대중적 조직기반을 강화하여 운동역량을 축적해 나가지 못하였고, 결국 미군정과의 대결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고. 일면 맞는 지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오’라기 보다는 당시 운동역량의 ‘한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일제의 탄압에 시달려 온데다 매우 빠르게 변화하는 나라 안팎의 정세 속에서 냉정하고 과학적인 판단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세계 지배전략과 그로부터 형성되는 냉전질서는 우리 민족이 소박한 꿈을 결코 허용할 수 없는 잔혹성을 그 본질로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