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민주노총 임원 선거가 끝났다. 유래 없는 언론의 관심 탓에 일반시민조차 '중앙파'니 '국민파'니 하는 낯선 용어들을 접하게 되었고, 각 진영 후보들의 구속 전력부터 주량에 이르는 시시콜콜한 정보까지 섭렵하게 되었다. 대통령도 이번 선거에 관심이 많았다는 후문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사심 있는 세력들의 악의적인 관심 때문에 언론이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는지 어떤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어쨌든 민주노총의 임원 선출 결과가 온 국민의 뉴스거리가 되어야 함은 분명하다. 필자의 기억으론 노동운동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경우는 딱 둘이다. 총파업 혹은 무분규 선언을 했을 때, 그리고 노동자가 연이어 죽었을 때뿐이다. 기억해 보라. 검증 받지 않은 일개 연구소의 리포트가 신문 사회면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되는 마당에, 민주노총의 「노동운동발전전략위원회」 전략 보고서 내용이 보도되는 경우가 있었는지. 이는 노동운동이 일반 시민들의 삶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다뤄지는 현실을 보여주는 사소한 예이다. 노동운동은 일반 시민들의 삶에 영향력을 미쳐야 한다. 그리고 영향력은 파업권을 행사했을 때만 나오지 않는다.
조직 이해를 넘어 사회적 지지 확보해야일반 시민들의 삶에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서 신임 민주노총 지도부는 우선적으로 노동조합의 사회적 위상을 확보하는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해야 한다. 민주노총은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을 바탕으로 다른 진보세력과 함께 우리 사회를 개혁시킬 책임이 있는 주체로서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실제 선언적으로나마 그동안 이를 자임하면서 분투해 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노동조합이 조직된 노동자들만의, 조합원들만의 기득권적 이해를 대변해왔을 뿐이라고 질타한다. 물론 조합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해 대변의 도덕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명분이 충분히 담보되지 못할 때 노동조합은 임금인상에만 골몰하는 경제 조직으로 전락한다. 그동안 외쳐왔던 노동자 경영참가, 기업별 노사관계 탈피, 정치세력화 등의 과제를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노동조합이 제대로 된 사회적 위상을 확보한다는 것은 전 사회적 지지와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노동운동이 정직한 노동을 하면서도 사회 밑바닥에서 고통받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받아 안는 것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신임 집행부는 지난 여름 여론을 들끓게 했던 현대자동차 임금인상률을 둘러싼 사회적 여파를 제대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조직된 노동자가, 노동조합이 '누구를 위해서 기계를 멈추었냐는 것'이다.
노동조합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는 사회운동 내부에서 민주노총의 지위 하락이라는 모습으로 종종 나타나곤 한다. 필자가 시민운동 단체에 있으면서 이러저러한 연대사업에 관여하면서 겪은 일이다. 예전 모든 사회개혁 투쟁의 중심에 민주노총이 있을 때는 민주노총의 사업 제안이나 중심성이 반대에 부딪히는 적이 없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민주노총의 입장에 무조건 '들러리'서는 역할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움직임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물론 민주노총의 주도적 위상을 절대적으로 인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어쩌면 이는 사회운동이 다양화되고 분화되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볼 수도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의 바탕에는 민주노총이 사회운동의 중심 역할을 방기한 채 자기 조직의 이해에만 충실하다는 비난이 함축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다행히 이수호 신임 위원장은 당선 인터뷰에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임금과 권익에만 치중한다는 비난여론이 있다"면서 "물론 보수언론의 과도한 비난이 문제이지만, 사회개혁과 공공성 확보, 국민 전체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정책을 마련해 추진할 것"이며 "사회개혁을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 바, 이를 통해 한국 사회운동사에서 노동조합이 짊어져 왔던 사회적 역할과 제대로 된 위상을 되찾기를 고대한다. 그 길이 바로 민주노총이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노동자가 사회개혁 세력의 핵심'임을 증명해내는 유일한 방도이다.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운동으로
사회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또 한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민주노총의 요구가 사회적으로 정당함을 설득할 수 있을 정도의 구체적인 대안 제시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일각에서는 시민운동이 전통적인 사회운동에 비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고 단순히 '언론 플레이' 때문이라고 시비를 걸기도 한다. 그러나, '언론 플레이'조차도 먹히게 하기 위해서는 주장의 설득력이 몹시 중요하다는 점까지 잊어서는 안 된다.
무릇 모든 운동에는 대상이 명백히 있다. 눈 시퍼렇게 뜨고 무슨 소리를 하나 지켜보는 적은 그저 떠들기만 하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아니오'라고 외치는 것만으로 통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전투에서는 '아니오' 다음에 대안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또한 그 대안은 반드시 사회적으로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민주노총의 많은 운동이 싸워야만 쟁취됨은 분명하다. 하지만 초기 노동조합 형성기처럼 선명성과 전투성만을 내세워선 안 된다. 또한 조합원만을 설득해서도 안 된다. 뚜렷한 적을 빼놓고는 모두를 설득시킬 수 있는 대안 제시가 있어야 한다. 시민운동 활동가끼리 모여서 방담을 한 적이 있는데, 어떤 조직은 현안이 발생하면 농성캠프부터 차리고, 어떤 조직은 성명서부터 내고, 어떤 조직은 굶기부터 시작하고, 어떤 조직은 모처로 전화부터 한다는 우스개 소리를 한 적이 있다. 민주노총은 이 모든 전술을 입체적이고 효과적으로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게다가 사회적 설득력이 있는 대안을 가진다는 것은 새로운 조직 기반을 형성할 기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민주노총 조합원은 현재 70만뿐이다. 언제까지 노조의 깃발이 바뀌는 것을 통해서만 조직을 확대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 민주노총이 전 사회적 지지와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노동자 내부의 연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 출처:노동과세계 ]
의제의 확대와 선점이 중요
이 과정에서 사회적 연대는 필수적이다. 민주노총은 그동안 헌신적으로 투쟁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진실은 포위되고 고립된 섬처럼 외롭게 투쟁했을 뿐이라는 점이다. 노동조합이 직면한 과제는 더 이상 노동조합 내부의 과제만이 아님은 비정규 노동자의 존재가 극명히 보여주고 있다. 비정규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 실업자, 빈곤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은 노동조합의 적극적 조직 전략중의 하나일 것이다. 동시에 야만의 이윤 경쟁에 내몰려 생존의 벼랑끝에서 신음하는 취약계층을 위한 전 사회적 운동이기도 하다.
최근 보건의료노동조합이나 전국금속노동조합 등에서 중앙교섭에서 최저임금관련 요구를 내놓을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힘있고 조직되어 있는 노동자들이 나서서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계층의 차별 해소와 보호방안에 대해서 목소리를 낼 때야 비로소 노동조합이 사회적 연대의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런 산별 연맹의 움직임을 적극 지원하고 확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진보세력과 더불어 비인간적인 우리 사회가 양산해 놓은 각종 사회문제에 적극 개입해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 과제는 노동시장 내부에서 비정규, 여성 등 불안정 취약계층의 이해를 조직 노동자의 이해와 연계시키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소득재분배, 공공선 확대, 부패와 정경유착 근절, 참여민주주의의 확대에 이르기까지 끝이 없다.
이를 위해 의제를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우리 사회의 개혁과제에 대한 청사진이 제출되곤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노동운동이 주도권을 쥔 적은 한번도 없다. 최근 노동자들의 잇따른 분신상황에서도 민주노총은 개별 현안의 타결에만 안간힘을 썼을 뿐이다. 우리 노사관계가 어떻게 재편되어야 하는지, 안타까운 상황의 반복을 방지할 근본적인 방책이 무엇인지 대해서는 답을 내놓지 못했으며 뒤늦게 뒷북치듯 나온 정부의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에 대해 논평 한 장 냈을 뿐이다.
먼저 의제를 선점해야 한다. 이런 고민은 시민운동도 마찬가지여서 허겁지겁 정부의 입장에 대해 방침을 세우기에 분주하기만 하다. 시민운동의 경험을 얘기해보겠다. 시민운동은 예전 우리 사회에 핵심적인 문제 중 하나로 부패를 지목하고, 이 부패의 사슬을 끊기 위해서 부패방지법 등 제도 대안이 마련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운동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모든 사회관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고 이는 큰 파급력을 가졌다. 하지만 결국 이런 의제 선도성은 과거 정부보다 반보라도 앞서는 정권에게 모두 빼앗겨 버렸다.
노동운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임 집행부가 의제를 선점하기 위해서 최우선적으로 집행해야 할 과제는 노무현 정권의 지겨운 로드맵을 일거에 혁파할 수 있는 신 노사관계 로드맵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로드맵이 선거 과정에서도 쟁점이 되었던 노사정위원회 참가 여부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방향을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노동자의 성찰 이끌어내기를
마지막으로 시민단체 활동가로서 하고 싶은 말 하나만 사족처럼 달고 싶다. 참여연대에서 일하다보면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민원이나 부정부패에 관련된 비리 제보 때문에 방문하는데, 노동조합에서도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납득이 안가는 점이 있다. 항상 투쟁시기에만 사용자나 회사의 비리가 들추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투쟁시기에 교섭력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밖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모든 경우가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업장 내부의 비민주주의적인 관행을 타파하는 것과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는 일은 모두 노동조합의 핵심적인 기능이 아닌가.
평소에는 자녀들에게 노동자로 살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임금협상 때만 되면 스스로의 정체성을 노동자로 규정하고, 일상시기에는 회사 비리의 방관자이다가 파업시기가 되면 내부고발자가 되는 '이중생활(?)'을 청산하기 위해서 우리 사회의 가치와 규범, 문화가 바뀌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사회 탓이오"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찜찜한 구석이 있는 게 사실이다. 신임 집행부는 무엇보다도 이 시대에 노동자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고민거리를 많이 던져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