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0년 2월쯤.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생활을 시작하려던 무렵, 우연한 기회에 이수호 선생님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잠교육'을 받았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콩나물시루 같던 교실에서 졸다가 자다가 하품하다가… 그렇게 보냈습니다. 잠교육은 죽은 교육입니다. 거기에 점 하나만 찍으십시오. 그러면 '참교육'이 됩니다. 전교조가 하려는 게 바로 참교육입니다."
14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 강연은 막 촌티를 벗고 상경한 어린 나에게 신선한 메시지였다. 지금도 가끔 이수호 선생님을 만나면 그 때 얘기를 하며, "나를 이 판으로 인도하신 분이니 책임지시라"는 농반진반을 건네기도 한다.
그런 그가 65만 노동자를 조직하고 있는 민주노총의 수장이 되었다. 먼저 이수호 위원장-이석행 사무총장을 비롯, 4기 임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축하 인사드린다. 그리고 유덕상-전재환 후보 진영에도 끝까지 수고 아끼지 않으셨다는 마음의 박수를 보낸다.
[ 지난해 11월 '열사' 정국에서 단행된 민주노총 총파업 결의대회 - 출처:오마이뉴스 ]
"투표 기준을 달라"
누군가가 그랬다. "너무 차이를 부각시키려고 애쓰지 마라. 두 후보 진영이 이제까지 걸어왔던 노선이나 운동방식의 차이는 클지 모르겠지만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서는 수렴되고 있는 거 아니냐." 지난 1월10일 『매일노동뉴스』가 주최한 민주노총 4기 임원선거 후보초청 토론회가 막 끝난 뒤였다.
실제 그랬다. 지도부의 지도력에 대한 평가, 그동안의 투쟁방식에 대한 평가, 교섭과 투쟁간 무게중심 등 몇몇 쟁점들을 제외하고는 강조점에서 조금 차이가 있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사업내용에 대한 입장차는 크게 발견하기 어려웠다. 후보토론회라는 '형식적' 한계도 있었겠지만, 또한 아주 구체적인 사업계획들을 제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그러기도 했겠지만, 만약 내가 대의원이었다면 누굴 찍을까, 여간 고심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짧게 먼저 바람을 얘기하자면, 적어도 다음 민주노총 임원선거부터는 "그래서, 뭐가 다르다는 거지?"라는 '물음표'를 주기보다 이전 집행부의 공약과 집행결과에 대한 냉정한 평가, 자신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운동의 방향과 노선, 방침이 좀 더 구체화되었으면 한다. 그것을 쟁점으로 토론이 이뤄져 대의원(또는 조합원)들이 단지 사람 얼굴이나 연줄이 아닌 정책 내용으로 지지후보를 택할 수 있는 선거로 치러졌으면 좋겠다.
고용문제에 답을 갖고 있는가
민주노총 새 집행부가 앞으로 3년 동안 해야 할 많은 과제들 가운데 이 한가지만은 꼭 말하고 싶다. 바로 '고용' 문제다. 좁게 말하면 비정규직 조직화와 차별철폐, 남용근절 등에 대한 대안을 제대로 제시하고 성과를 내야 한다는 것이고, 좀 더 넓히자면 지난해 말부터 우리 사회의 최대 화두로 부상한 '일자리' 문제에 대해 민주노총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은 '양질의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적인 구호만 있을 뿐 '어떻게?'에 대한 답은 없다.
비정규직 관련, 이수호 위원장은 선거기간동안, "과거에도 비정규직 등에 대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가시적 성과는 없었다"고 이전 집행부를 평가하면서, "예산과 인력을 대거 투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03년 민주노총 예산을 보면, 전체 예산 48억여원 가운데 1.4%인 약 7천만원이 미조직·비정규사업비로 책정돼 있다. 예산은 크게 교부금(44.6%)과 운영비(30.0%), 사업비(17.2%) 등으로 구성되는데, 사업비 항목에서는 미조직·비정규사업비가 8.3%로 기관지 발행비와 쟁의사업비에 이어 3번째로 많은 예산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 지난해 1월, 이 사업을 담당하던 조직2국이 '미조직비정규실'로 승격됐고, 전담자 3명이 배치되었다. 이 자체만 놓고 보면 비중이 극히 낮다고 할 순 없지만 민주노총 예산이 규모 있는 기업노조의 1년 예산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수준임을 감안하면 '지속가능한 사업'을 해 내기에는 역부족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예산과 인력을 대거 투입'하겠다 -이석행 사무총장은 선거기간 동안 국회를 통해 비정규직 보호 관련 예산을 확보하겠다는 발언도 했다- 는 공약은 환영할 만하다.
하지만 지난 2000년 미조직사업기금 5억 모금 사업부터 본격화된 민주노총의 그간 미조직·비정규 조직화 등의 사업이 왜 그렇게 가시적인 성과를 못 냈는지에 대한 평가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몇 노조에서 비정규직 채용을 제한하고 차별을 축소하고 정규직화하는 성과를 내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민주노총 조합원의 다수는 대공장(대기업) 정규직이기 때문에 '약간'의 -계급의식의 발로라기보다는 단지 인간적 차원의- 처우개선은 모를까 적극적인 조직화 및 남용근절 노력에 어느 정도나 적극적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위원장과 사무총장이 소속된 전교조와 금속연맹만 봐도 그렇다. 다수의 기간제 교사와 일용직·계약직 도서관 사서, 영양사, 또한 사내하청노동자와 제2, 제3의 하도급을 거친 하청노동자, 파견노동자 등 학교 현장과 제조업체에 만연한 비정규직을 조합원으로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 이 현실을 단지 과거 집행부의 '지도력 부재'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오륙도, 사오정을 넘어 이태백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는, '고용 없는 성장'이 연일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악화된 고용구조 속에서 정규직들의 고용불안 지수는 더 높아질 것이고 '밥그릇 지키기'에 대한 욕구는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최근 들어 각종 설문조사 결과, 기업들은 비정규직 채용을 더 늘리겠다고 하고, 적지 않은 구직자들은 비정규직으로라도 취업을 할 의향이 있다고 한다. 자칫 비정규직으로라도 취업하는 것이 다행이라며 일자리 '창출'에만 열을 올릴 뿐 '어떤 일자리냐'라는 건 문제도 안 된다는 식의 여론몰이가 우려된다. 실제 정부 역시 공공부문에서 일자리를 7만개 이상 늘리겠다는 등의 공언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채워질 것이란 예상은 아마 맞아떨어질 것이다.
이런 가운데 노사정위를 중심으로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회협약'이 추진되고 있다. 만약 체결이 된다면 노동계는 과도한 임금인상을 자제하고, 경영계는 투명경영, 성과배분 등을 추진하면서 투자를 확대하고, 정부는 고용창출 기업에 일정한 세제혜택을 주는 등 노·사·정 각각의 역할을 명시하고 일자리 만들기에 다함께 노력하자는 내용이 될 텐데, 과연 이런 현안들에 대한 민주노총의 입장과 대응방향은 무엇인지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 1월26일 노사정위에서 주최한 '일자리 만들기 사회적 연대' 토론회 - 출처:매일노동뉴스 ]
정규직의 양보?
이수호 위원장은 1월말 한 인터뷰에서 "필요하면 정규직도 일자리를 나누는 등 비정규직 지원을 위해 양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지만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하청노동자들과 함께 체육대회를 하자는 집행부의 제안에 "왜 우리(정규직) 조합비로 하청들에게 혜택을 주느냐"는 반발이 우리나라 최대 기업노조인 현대자동차노조에서, 그것도 대의원의 입에서 나오는 현실을 반면교사로 삼아 그의 구상대로 '정규직 조합원'의 이익만을 좇지 않는 사업이 추진되길 기대한다.
이 연장선에서 조직화도 시급히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말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이 그해 8월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전체 비정규직 784만명 가운데 19만명만이 노조에 가입, 조직률이 2.4%에 불과했다. 그동안의 비정규 조직화 사업 과정을 봤을 때 정규직 노조의 노력은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노조 만들자마자 업체 계약해지로 졸지에 실업자가 돼 버리고, 노조에 가입하고 싶어도 계약해지의 위협을 막아줄 대상이 없어 '목숨' 내놓지 않으면 노조의 '노'자도 꺼내기 힘든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민주노총이 지난해 사내하청, 건설일용, 지자체 비정규직, 특수고용, 서비스노동자 등 5대 전략 조직화 계획을 짜고 조직활동가를 500명 발굴, 교육시켜 현장에 투입키로 한 내용은 연속성을 유지하며 이어나갈 필요가 있는 사업인 것으로 평가된다.
덧붙여 이수호 위원장은 '사회개혁'에 신경 쓰겠다고 했다. "파업을 해 임금이 10% 올랐다고 하자. 그런데 사교육비, 집값 등이 급등하면 임금 올린 게 아무 소용없다. 이런 부분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데 민주노총 활동의 초점을 맞추겠다."
100% 동의한다. 단지 구호로서만이 아니라 대안을 갖고 그것을 관철시켜내는 과정으로서의 투쟁이 조직되길 바란다. 선거 당시 구호였던 '저지와 분쇄를 넘어 확보와 쟁취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