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하면 단병호 위원장이 떠올랐다. 이제 민주노총을 상징하고 대변했던 단병호 위원장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지도부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선 그간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헌신해 오신 단 위원장님께 감사와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새 지도부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갖는 것은 70만 민주노총 조합원만이 아닐 것이다. 서로 다른 시각에서 정권은 정권대로, 자본가들은 자본가들대로, 정당, 민족민주운동단체, 언론 모두가 우리 사회에서 한 축을 담당할 노동계급의 최고 지도부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대를 한 몸에 안고 당선되신 신임 집행부에 축하의 인사를 드린다
선거운동 기간 동안 각종 토론과 유세에서 그 동안 민주노총의 사업집행에 대한 비판과 앞으로 수행해야 될 과제들에 대한 정책방향, 그리고 민주노총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대안이 제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조 운동 과제의 총론적인 부분은 대부분 언급되었다. 그러나 새 지도부는 총론 수준에서 제기된 정책방향을 현장조합원 대중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행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여러 한계가 있겠지만 민주노조 운동의 새로운 전형을 창출하겠다는 신념으로 차분하고 질서 있게 함께 투쟁하는 민주노총을 만들어 주셨으면 한다.
[ 2003년 12월6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민중대회 - 출처:노동과세계 ]
천만노동자를 조직할 꿈을 갖자
흔히들 천만 노동자의 대표 민주노총이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노동부 통계를 보면 취업노동자는 1400만명에 육박하지만 이중 민주노총이 포괄하는 조합원은 70만명뿐이다. 민주노총이 명실상부하게 대한민국 노동자의 대표라는 위상을 갖기 의해서는 현재의 5% 조직률을 비상하게 높여야한다는데 이견은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민주노총 중앙이나 지역본부 또는 연맹들이 관할 지역, 산업별로 무노조 사업장을 파악하는 것부터 이뤄져야 한다. 각 사업장의 규모와 노동자 상태에 대한 일정한 분석이 이뤄지면 조직 담당자가 배치되어야 한다. 연맹이나 지역본부의 역량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 부족함은 여력이 되는 사업장 노조가 결의를 모아 역할을 분담하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으로 보완하면 될 것이다. 또한 대규모사업장 노조들의 상근 인력을 중앙조직으로 집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과정은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될 수 있으므로 최고 지도부의 직접적인 설득과 헌신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스웨덴의 경우 노동자 조직률이 90%가 넘지만 지역지부의 핵심 사업은 조합원의 이탈을 막기 위해 설득하는 작업과 신규고용자, 비조합원에 대한 조직사업이다. 그런데, 조직률 5%인 민주노총의 모습을 보면 부분적으로 신규로 노조가 설립하여 가입하는 경우도 있지만 주로 한국노총 소속의 사업장들이 민주노총으로 상급단체를 전환한 것이 더 눈에 띈다. 또한 각급 조직담당자가 일상적으로 진행하는 주요업무는 조직된 사업장의 관리나 집회의 주도 정도다. 이러한 일상의 업무를 내팽개칠 수는 없겠지만 조직담당자들은 신규노조를 만들어 내고 그들의 활동을 지원하며 조직의 외연과 질적 수준을 확장시키는 것이 주된 업무가 되어야 한다.
후보들 모두 임기 안에 100만 민주노총 시대를 열겠다고 할 정도로 조직화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만큼, 새 지도부는 조직사업에 대한 새로운 모범을 창출해 주길 기대한다.
함께 하는 총파업을 반드시 이뤄내야
이번 경선 과정에서 가장 논쟁이 되었던 부분은 준비 안 된 파업을 남발했다는 주장과 현실조건에서 불가피한 파업이었다는 항변이다. 민주노총의 역할과 산하 연맹의 역할을 구분해서 단위사업장의 현안은 연맹이 담당하자는 논의들은 이전부터 줄곧 제기됐다. 하지만 현장대중의 볼멘소리 앞에서는 결국 동조 총파업이 선택되곤 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총파업이 남발되었다고 주장한 후보측에서 두산 배달호 열사 투쟁 때 현장에 민주노총의 간부들이 없었다고 비난하고, 이에 대해 상대후보는 현장에 있었다고 열을 올리는 운동 풍토나 수준에서는 단위사업장의 투쟁이 격화되면 민주노총은 어떤 형식으로든 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영세사업장 노조들의 힘겨운 조건,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극한적인 투쟁 그러고도 수세에 몰리는 상황…. 대충 넘어갈 수 없는 이러한 현실을 민주노총이 어떻게 지원하고 함께 투쟁할 것인가?
우선 민주노총이 담당해야 할 영역과 산하 연맹이 담당해야 할 영역을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어느 시기에 어떤 이슈를 가지고 투쟁을 벌일 것인지 계획과 결의가 분명해야 한다. 물론 이전에도 이런 형식으로 진행되었지만 대단히 관성적이었다. 사안에 대해 현장조합원의 관심과 이해가 있는지에 대해, 또는 그렇게 만들어 나가야 할 간부들이 결의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너무 쉽게 판단했던 것이다. 이는 결국 항상 하는 조직만 움직이는 결과를 낳았고 총파업은 부분파업이 되었다.
모두들 이야기한다. "준비된 파업을 하자", "각자의 역량에 맞는 파업을 하자" 그러나 한해에 몇 차례 이뤄지는 민주노총의 총파업은 우리의 집중된 요구를, 정말 필요한 요구를 빛을 바래게 한다. 총자본에게 두려움을 주거나 압박할 수 없게 되고, 조합원들도 쉽게 피로해 한다. 국민들에게는 맨날 파업만 하는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굳히게 되고 국민의 지원과 조력을 얻기 어려워진다. 국민은 절대다수가 노동자이고 우리의 조직대상이자 우리의 부모형제이다. 70만 조합원이 함께 하는 총파업이 필요한 만큼 신중하게 결정하고 충분히 준비하자.
비정규직 조직화 구체화되어야
해마다 민주노총은 비정규직의 조직사업 방침을 최고의 과제로 설정해 왔다. 그런데 현장 곳곳에서 자생적으로 조직된 비정규직 노조는 있었어도 민주노총이나 연맹들이 나서서 그들을 조직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이것은 정책방향이 제기되었지만 이것을 현장에서 현실화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 못한 데 일차적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업장에서 비정규직들은 정규직과는 다른 독자적인 노조를 결성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기업별 노조운영에 익숙한 현장의 정규직 간부들, 조합원들이 비정규직 노조를 일단 내 식구가 아닌 것으로 여기도록 만든다. 결국 정규직 노조는 정규직 노조대로 임금이나 단협 투쟁을 전개하고 비정규직 노조는 그들대로 임단협을 전개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것도 상황이 좋을 때의 이야기고 현실에서 대부분의 비정규직 노조들은 자본의 무차별적 공세 앞에서 노조를 유지할 기반마저 갖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현장활동가들이 비정규직을 정규직 노조에 직접 가입시키자는 주장을 하게 되었고, 일부 사업장의 경우 정규직 노조의 규약개정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비정규직들이 정규직 노조의 조합원과 동등한 위치의 조합원이 된다고 해서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엄청나게 벌어져 있는 임금, 근로조건, 후생복지 격차를 어떻게 좁혀 나갈 것인가? 한 조직의 동등한 조합원이 차별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용납될 것인가? 같은 일을 하는 조합원이 왜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류되는가?
잘못된 현실을 깨부수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집단이 형성되는 순간 단위노조의 지도부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다. 또한 현장에서 각자가 맡은 업무의 불공정을 개선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문제이다. 지난 시기 현대자동차 노조에서 산별전환 총회를 앞두고 만들어진 비정규직 노조의 활동은 분명히 역사적 정당함을 바탕에 둔 것이었다. 하지만 정규직 조합원들에게는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난 배경이 되기도 했다.
개별 사업장에서 비정규직 노조가 어떤 형식과 경로를 거쳐 만들어지는 것이 바람직 한 것인지 민주노총은 다양한 사례를 연구하고 검토하여 일관된 방침을 가져야 한다. 정책은 있으되 구체적 현실에 대한 방침이 없으면, 현장에서는 노조 간부끼리만 논쟁하게 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정파 문제, 운동의 초심으로 풀자
모두가 알고 있듯 정파는 민주노총뿐만이 아니라 운동현장 곳곳에 스며있고 대규모 사업장에는 정파를 대변하는 현장조직이 구축되어 있기도 하다. 정파 문제는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 때마다 거론되었고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를 옭아매고 있다. 특히 이번 선거는 예년과는 다르게 부위원장 후보들 마저 마치 정당을 표기하듯 소속 정파를 명확히 했다. 이 때문에 이미 표는 갈라져 있는데 굳이 선거운동이나 토론이 필요한가라는 뒷말도 있었다. 분류된 구도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치러지는 선거의 결과는 사업의 집행과정 곳곳에서 잡음을 일으킨다.
정파간의 부딪힘을 해소하기 위한 대책으로 인사의 탕평, 정책의 타협, 실천과 조직력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등의 방법들이 제시된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이렇다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정파, 파벌, 분파가 이뤄지도록 하는 핵심은 작게는 '나' 중심의 사고로부터 조금 더 나가서는 '우리' 중심의 사고가 지배하는 현실 때문이다. '내가 혹은 우리가 더 옳다'에서 시작된 생각은 역할을 '내가 맡거나 우리편이 맡아야 한다'는 사고로 확장된다. 흔히들 '아름다운 경선'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되는 이러저러한 말, 행동은 감정을 쌓고 틈을 키우고 불신을 확장한다. 이는 가장 원초적이고 인간적인 문제여서 특별한 방법이나 시스템으로 해소될 것은 아닌 것 같다.
운동하는 사람들이 대의를 위해 무장된 구도자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민주노총의 지도부부터 이러한 운동의 초심으로 돌아가서 정파의 문제를 인간성의 문제로 풀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사업영역과 사람의 배치에서 각 정파를 대표하는 다양한 사람을 기용해야한다. 일을 통해서 차이를 극복하고 이해하고 융화되고 단결의 기운이 솟아나도록 해야 한다
[ 1월16일 치러진 민주노총 4기 임원 선거의 당선자들 - 출처:보건의료노조 ]
원칙 지켜지는 협상틀이 필요
1996∼97년에 있었던 제1기 노사정위원회의 경험은 혹독했다. 그리고 이후 민주노총은 마치 뜨거운 불에 데인 아이처럼 사회적 합의의 틀을 거부해 왔다. 물론 제1기 노사정위원회 이후 지도부가 바뀌었고 현장 역시 양보와 타협이 전제되는 노사정을 신뢰하지 않았다. 민주노총의 요구는 거리에서 외쳐지거나 혹은 성명서로 낭독되었고, 대중이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 당국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노사정 위원회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당국자와의 협의나 협상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민주노총은 협의틀을 거부했지만 현장은 현장대로 다양한 형태로 협상을 해왔다. 모든 투쟁은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마무리하고 정리하고 조율하는 장소는 결국 협상테이블이다. 조합원 대중은 협상이 없는, 뭔가 성과가 나올 가망이 없어 보이는 투쟁을 두려워한다. 혹자는 우리의 요구를 수용하느냐 마느냐만 들으면 된다고 하지만 현실에서 동그라미나 가위표만으로 해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는 별로 없다. 원론적으로 협상의 틀이 필요하다고 본다.
신자유주의 정권과 자본의 반노동자성에 비춰봤을 때 저들에게 이용만 당하는 협상은 필요 없다고 말하는 동지들도 있다. 구차스럽게 구걸하듯 협상하려면 안 하는 게 낫다고 하지만 운동은 지도부 자신을 위해 있는 게 아니고 대중을 위해 있는 것이다. 자그마한 하나라도 우리의 성과로 축적되어야 지도부의 현실적 위상이 서는 것이다.
그런데 노정 교섭의 구조이든 노사정 교섭의 구조이든 지켜져야 할 몇 가지 원칙이 반드시 필요하다. 협상에서 채택된 결과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약속이다.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지만 이러한 부분이 안 지켜진 경험을 우리는 갖고 있다. 두 번째로는 협상의 결과를 반드시 문건으로 채택하되, 해석의 여지가 있는 문구는 회의록의 형식으로 주석을 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약속의 불이행도 부분적으로는 해석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협상 이후 반드시 투명하게 과정을 공개해야 한다는 점이다. 투명하게 과정과 결과를 그때그때 공개해야 지도부만의 협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간 간부, 그리고 조합원들이 최종결과를 예측하고 대책을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산하 연맹과 현장간부의 참여 절실
위에서 언급한 것들 외에도 수많은 과제들이 있다.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 산별노조 전환사업과 법·제도 장치의 확보, 노무현 정권의 노사관계 로드맵 대응, 손해배상 소송대응 등 모두 열거하고 지적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모두의 지혜를 모아 싸워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랫동안 현장활동과 민주노총의 대의원, 중앙위원 등의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이 새 지도부에 이런 저런 말씀을 드리는 게 쑥스럽기도 하다. 현재 우리 운동이 앓고 있는 여러 유형의 문제들은 지도부의 역량만으로 해소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민주노총의 과제들을 수행하는 데에도 산하 연맹들과 현장간부들의 참여 없이는 어렵기 때문이다. 웃기는 얘기가 되겠지만, 지도부의 지도력 문제가 '지도부만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규정해야 할 만큼 노동운동 내부는 심각하게 자기중심으로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도 지도부의 노력과 역량에 따라 조직의 성과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는 않다. 새 지도부의 건투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