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의 희생으로 따낸 승리

노동사회

동지의 희생으로 따낸 승리

admin 0 4,279 2013.05.12 04:17

2003년 12월18일, 용석이의 49재를 마지막으로 장례일정은 모두 끝났다. 채 뿌리가 내리지 못해 마른 풀 같은 잔디, 주변 것보다 두 배는 큼직한 열사묘비, 아직도 어머님의 오열과 눈물이 우리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지만, 그렇게 용석이의 장례는 이제 모두 끝났다.

49재를 마치자마자 기념사진을 찍고 난리가 났다. 서로 얼싸안고 볼을 만지며 투쟁할 때 보다 몰라보게 변해버린 조금은 낯선 동지들의 모습을 몇 번이고 확인하고, "반갑습니다. 동지", "잘 지냈습니까. 동지", "보고 싶었습니다. 동지"라고 저마다 인사를 나누는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 조합원들을 보며 용석이의 분신일인 10월26일 종묘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10월26일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의 마지막 순서를 끝내고 막 행진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기분 나쁜 냄새가 대회장 장내를 진동하며 "꺄악", "물, 물, 물을 가져와"하는 소리와 함께 대오 뒤쪽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 조합원들은 온몸에 불이 붙어 타오르고 있는 한 동지의 분신을 떨리는 가슴으로 보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신문이나 영화에서나 봤음직한 그 살 떨리는 장면을 시각과 청각, 후각 온몸의 감각이란 감각은 본능적으로 다 기억하고 말았다. 

용석이가 대회 내내 조끼 주머니에 꼽고 다녔던 신나가 든 물통인 줄 알고 물 좀 나눠 마시자고 했다가 괜한 타박만 맞은 동지, 옆에서 투쟁가가 나올 때마다 누군진 몰라도 팔뚝질 정말 힘차게 한다고 생각했던 여성 동지들은, 갑자기 "동지들 비키세요! 비정규직 철폐하라!"고 외치며 분신하는 용석이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것이다.

급작스런 동지의 분신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경찰들의 폭압에 정신을 잃고 실려간 여성 동지만도 서너 명이던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 동지들이 42일간의 파업투쟁과 이용석 동지의 장례를 모두 마치고 '우리 애들'이 아닌 '동지'들을 얼싸안고 있는 것이다.

jang99_01.jpg
[ 2003년 10월 26일 근로복지공단비정규노조 이용석 광주본부장이 분신 한 뒤 노조는 영등포 공단앞에 집결해 27일부터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



복지공단은 정부를 대행해 1,418만 노동자들의 산재보험, 고용보험 등의 보험서비스와 재활상담, 실업대책, 복지기금 관리 등의 복지행정을 담담하고 있는 정부출연기관이다. 2003년 현재 본사 및 6개 지역본부, 40개의 지사, 2개의 재활훈련원에 근무하는 3,500명의 직원중 34%에 해당하는 1,187명이 비정규직이다.

이들 비정규직은 공단 마음대로 작성한 '비정규직 관리세칙'이란 규정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공단에는 1995년 창립이후 1997년까지는 비정규직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98년 IMF를 겪고 난 후 실업대책사업을 하면서 1백명의 인력을 비정규직으로 채우는 것을 시작으로 비정규직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다른 공기업은 구조조정의 여파에 기구축소, 업무축소에 강제로 내몰려 인력이 축소될 때 근로복지공단은 오히려 업무도 늘고 인력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만 늘어난 인원은 거의 비정규직으로 채용되었다.

근로복지공단은 대량해고와 실업자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국가가 책임져야할 사회안전망을 갖추고 돌보는 손발의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 그러나 수많은 사업을 추가하고 이관하면서도 정부는 정원과 예산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늘어난 사업을 비정규직의 고용으로 해결하려했던 것이 비정규직 양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비정규직 남발은 정규직으로 채워야할 신규 사업에까지도 무작위로 적용되었다. 1998년 4월 실업대책사업을 실시하면서 100명, 산재사업을 전 사업장으로 확대 적용하면서 240명, 산재재활 5개년 사업 중 재활상담원 110명 이렇게 총 450명을 비정규직으로 채웠다. 이러한 현상은 기획예산처에 의한 공단의 정원과 예산 통제와 공단의 각종 규정과 '비정규직관리세칙'에 의해 현재까지도 진행되고 있다.

노동조합 결성과 교섭해태

근로복지공단의 비정규직은 평균 근속년수가 3.5년이며 전체 인원의 70%가 여성이고, 90%가 전문대졸 이상의 고학력자이다. 그나마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쟁점화된 2003년 3월23일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동조합'을 670명의 조합원 손으로 창립하였다. 그러나 교섭은 5월23일 노사상견례가 사측의 불참으로 무산되면서 출발부터 험난한 길을 걸었다. 근로복지공단은 처음 한동안은 아예 교섭에 응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중앙노동위원회의 조정안에서 공단이 교섭당사자란 결과가 나오고 난 뒤에야 그나마 실무교섭이 진행될 수 있었다.

교섭관련 공방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노동조합은 노동부 앞 1인 시위 등을 했다. 노동조합을 만들면 뭔가 희망이 있을 거라 믿었던 이용석 동지는 교섭조차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며 비정규직 철폐라는 과제의 높은 벽을 실감했으리라 짐작된다. 
중앙노동위원회의 조정안이 나오고 난 뒤에도 공단 이사장은 교섭에 코빼기도 내보이지 않고 대신 서울본부장만 보냈다. 그러나 서울본부장은 웬만한 것은 "권한 없음"이란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노동조합 창립이후 그 해 여름을 지나 늦가을인 10월18일 열린 임시대의원대회에서 공공연맹에 교섭권을 위임했다. 필자는 이용석 동지를 비롯한 교섭위원과 함께 10월23일 위임 이후 첫 교섭을 수행하며 공단 이사장이 교섭에 직접 나와 노사가 책임 있게 교섭을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그 날 이용석 동지는 연맹에서 대책 논의를 끝내고 난 뒤, 광주행 심야 우등버스 안에서 유서를 작성하였다.

jang99_02.jpg
[ 12월 8일 이용석 본부장의 장례식이 죽은 지 38일 만에 열렸다.  - 출처 : 참세상 ]

사흘짜리 파업이 42일간의 투쟁으로

10월27일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조 정종우 위원장은 파업을 선언했다. 위원장은 분노와 떨리는 심정으로 "동지 여러분, 우리는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온몸에 불을 당긴 용석이의 뜻을 받드는 총파업투쟁 돌입을 선언합니다" 하고 외쳤다. 노동조합에 대한 기초교육과 조직정비를 위한 3일간의 파업계획이 전국을 뒤흔드는 분신정국과 맞물려 무기한 파업투쟁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는 전국 조직이다. 같은 본부 안에서도 서로 얼굴도 잘 알지 못한다. 같은 지부라도 동지 의식은 고사하고 동료 의식도 미처 가지지 못할 정도로 비정규직의 근무환경이 열악하여 파업이 아니고서는 전체를 불러모아 교육을 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렇기 때문에 애초에는 3일 정도 파업을 통해 서로 얼굴을 익히며 노동가요부터 간부교육까지 체계적인 교육을 할 요량이었기에 조합원은 고사하고 조합 간부까지도 아무런 파업투쟁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 이런 조직으로 분신대책 투쟁을 이끄는 건 마치 유치원 애들 앞세우고 독립전쟁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 조합원들의 자세가 점점 달라져갔다. 팔뚝질에 힘도 들어가고 노동가요도 크게 따라 부를 줄 알고 '이사장님'이라는 존칭도 '김재영 ×××'로 바뀌었다. 공단을 다니게 된 것이 대부분 '소개'를 통해서라 얼굴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깊게 눌러썼던 모자와 마스크도 벗어 던지는 동지들이 점점 늘어났고, '반드시 용석이의 장례를 치르고 가겠다'는 각오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470명으로 출발했던 파업대오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줄어들어 타결 전 까지는 80명까지 떨어졌다. 이 과정에서 조합원들은 노조를 결성하자마자 분신정국이란 회오리의 정점에서 '죽음, 분노와 좌절감, 배신감, 국가의 폭력, 동지애, 의리'와 같은 평생을 통해 겪을 법한 희로애락을 42일만에 모두 경험하였다. 천막노숙 생활, 비바람과 추위를 동지들의 체온으로 버티며 온몸으로 동지애를 체득해 나갔던 42일간의 투쟁. 경찰들에 의해 철통같이 둘러싸인 공단본부를 보며 느낀 분노와 배신 그리고 무력감. 사람이 죽었는데도 눈도 깜짝하지 않는 정부와 공단을 보며, 심지어는 동료들의 외면과 배신을 보며 어떤 생각들을 하였을까.

처음에는 민주노총 관계자들이 자신들을 이용한다는 경계심으로 연맹조차 의심의 눈초리로 보던 조합원들이 연대의 경험을 통해 진정한 노동의 가치를 깨우쳐 가는 과정은 그리 쉽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은 가족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광주서 올라오자마자 "바로 화장하겠다"는 단호한 가족의 입장을 설득과 부탁, 애원을 통해 그야말로 하루하루 버텨나가는 형국이었다. 5일장, 7일장, 9일장 … 홀수일만 되면 장례를 치르겠다는 초긴장 상태가 이어졌다. 전담 임원과 담당 국장이 24시간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였고 서로간에 신뢰가 쌓이기까지 무려 25일이나 걸렸다. 그때서야 가족들은 용석이를 개죽음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고, 어머니는 청와대에 관이라도 메고 가겠다, 끝까지 싸워달라며 우리의 손을 잡아 주었다.

비정규직 대책과 향후 우리의 과제

이용석 동지의 죽음으로 비정규직 문제는 다시 한번 사회문제화 되었다. 특히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는 그 어느 때보다 쟁점화 되었다. 국무총리 담화를 통해 연내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마련'이라는 입장을 끌어냈지만 여전히 정부의 대응은 더디고 미온적일 뿐이다.

공공부문의 비정규직을 양산한 주범은 바로 정부, 특히 기획예산처다. 예산심의권이라는 권한을 이용하여 마치 조자룡 헌 칼 쓰듯 구조조정을 강요하고, 그 실적에 따라 예산을 배정하는 기획예산처의 횡포를 박살내지 않고서는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문제는 근본적으로 풀 수 없을 뿐더러 차별철폐도 이루어 낼 수 없다. 이번 근로복지공단과의 합의에서 '비정규직 확대금지, 단계별 정규직화, 비정규직 제도개선 및 고용안정'이라는 기본틀을 그나마 끄집어 낼 수 있었던 것도 이용석 동지의 희생 덕이었다.
 
앞으로 근로복지공단의 비정규직 문제는 향후 3년 내에 상당 부분 해소될 것이다. 재활상담원처럼 정규직 정원을 비정규직으로 채웠던 부분은 정부 대책에 의해 정규직화되고 앞으로 증원되는 인력의 50%는 무조건 공단 안의 비정규직으로 채워야 한다. 전문계약직을 빼고 약 800여명의 비정규직은 결원이 생겨도 더 이상 채워지지 않고 단계별로 정규직이 된다. 또한 노사 동수의 '비정규직 제도개선위원회'를 통해 불합리한 제도, 특히 차별과 관련해서는 규정개정을 통해 개선시켜 나가면 된다. 하지만 이러한 개선은 근로복지공단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가능한 것일 수 있다. 근로복지공단은 노동행정 서비스의 선진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직도 해야할 신규사업과 그에 따른 인력소요가 계속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반면 대부분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상황은 그렇지 않다. 정부의 마인드 즉 정부 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공공부문의 투쟁 대상은 여전히 정부이다. 

이번 투쟁은 준비되지 않은 투쟁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투쟁에서는 아무래도 괄목할 만한 투쟁성과를 낼 수 없다. '공부방의 아이들만이 내 삶의 등불이요 위대한 삶'이라고 외쳤던 이용석 동지가 그 아이들을 남겨두고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목숨을 던졌다. 이제 이용석 동지의 꿈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이 우리에게 요구된다. 이제는 준비된 투쟁을 하자. 그것만이 8백만의 비정규노동자에게 희망을 주고 다시는 용석이와 같은 동지가 나오지 않게 하는 방법이 아닐까.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