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조 하면 인간답게 살수 있다고 해서, 민주노조 하면 강제잔업, 강제특근 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해서 민주노조에 가입했습니다. 민주노조 가입했더니 제가 좋아했던 형은 쇠갈고리에 맞아 죽고 지회장님은 그거 해결해 보겠다고 공장 안에 들어가서 분신하셨습니다. 인간답게 살겠다는 그 의지가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입니까?"
장기판으로 머리를 맞는 것을 보면서 노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던 21살의 세원테크 조합원이 2003년 11월9일 전국노동자대회의 조합원 발언대에서 했던 말이다. 이 조합원의 말처럼 '정말 인간답게 살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어 2001년 12월12일 충남지역의 총파업으로 민주노조를 사수했고, 2003년 12월12일 '민주노조 사수'를 외쳤던 이현중·이해남 동지의 장례식을 치러야 했다. 딱 2년만이었다.
한여름이면 공장 안의 온도가 40도를 넘나드는 열악한 노동환경과 연일 계속되는 현장관리자들의 폭언과 폭행, 강제잔업과 특근에도 한 달에 80만원 밖에 못 받는 노동조건 속에서 민주노조는 세원 노동자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금속노조 충남지부 세원테크 지회는 2001년 10월16일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이해남 지회장과 이현중 동지와 현재 구속되어 있는 전영웅 부지회장, 이용덕 대협부장, 구재보 사무장이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다.
[ 2003년 11월12일 대구총파업 집회 민주노총 대구본부 대회 ]
도를 넘어선 노조탄압
세원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자 사측에서는 용역깡패 150명을 동원하여 폭력을 행사하고 노동자들을 공장 밖으로 몰아냈다. 그러나 세원테크 지회는 충남지역의 연대파업을 이끌어내면서 민주노조의 깃발을 지켜냈고 조합원들은 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느꼈다. 그 후 조합원들은 잔업거부·조퇴·연월차를 이용한 연대투쟁을 활발히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조합원들은 단결되고 노동조합은 단련되었다.
노조를 인정하지 않던 사측에게 노동조합은 '어떻게든 죽여야할' 대상이었다. 노동조합을 결성한 후 세원 측의 노조 죽이기는 참으로 혹독했다. 2년 동안 사측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노조를 탄압했으며, 이에 맞선 노동조합의 투쟁 또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투쟁이었다.
2001년 용역깡패 투입 후 사측의 노조 죽이기는 그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2002년 노조파괴전문가를 대표이사, 관리이사, 생산이사로 고용하고 '노조파괴 시나리오'를 만들기 시작했다. 2002년 7월8일 공장 사무실에서 발견된 이 문서에서는 △ 물량 이원화로 파업무력화, △ 대량 고소고발, 손배·가압류로 노조 탈퇴유도, △ '회사살리기 비상대책위' 구성, △ 노노 갈등조장, △ 민주노조 파괴·어용집행부 구성이라는 사측의 계획이 적혀 있었다.
이 노조파괴 시나리오에 따라서 사측은 제일 먼저 물량을 이원화하고, 2002년 5월22일 임금협상 파업에 돌입한 노동조합의 파업을 무력화했다. 또한 파업참가 조합원들에 대한 출입금지 가처분 신청을 낸 후, 공권력을 투입하여 조합원들을 또 다시 공장 밖으로 몰아냈다. 사측은 조합원의 현장 출입을 막기 위해 회사 진입로에 거대한 철문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조합원들에 대한 성향 분석을 시작으로 대량의 고소고발과 손배·가압류를 들이밀며 조합원들에게 노조 탈퇴와 퇴사를 유도하였다. 9억8천만원이라는 임금가압류, 19억원의 재산가압류와 고소고발을 견디지 못한 몇몇 조합원들은 구사대가 돼야만 하는 노조 탈퇴보다는 차라리 퇴사를 선택했다. 노동조합의 문화체육부장이었던 이현중 동지 또한 7월말 휴가 기간중 사측의 계속되는 회유에 강제사직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8월초 곧바로 강제사직서를 철회하고 파업투쟁에 동참했다.
2002년 8월16일 세원 조합원들과 충남지역의 동지들은 합법적인 노동조합 출입보장을 요구하며 공장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거대한 불법구조물인 철제 바리케이드는 열릴 줄 몰랐다. 조합원들은 바리케이드 철문에 갈고리를 걸어 끌어당겼고 사측의 구사대는 산소용접기로 당기고 있던 쇠갈고리까지 끊어내었다. 이때 끊어진 쇠갈고리가 퉁겨 나와 쇠갈고리를 당기고 있던 이현중 동지의 머리를 강타했다.
이현중 동지는 얼굴뼈가 부스러지고 두개골이 함몰되는 중상을 입고 병원에 후송되었다. 목숨이 위태로웠던 이현중 동지의 부상. 조합원들은 파업을 하는 와중에도 십시일반 이현중 동지의 치료비를 모았고 그 정성 때문인지 이현중 동지는 기적적으로 살았다.
그 해 10월22일, 154일의 기나긴 세원 조합원들의 파업투쟁은 △ 이현중 동지의 치료비 일체 사측이 지급, △ 임금인상 등에 노사가 합의하면서 끝이 났다.
그러나 사측은 노사합의 이후 파업참가 조합원들을 현장업무에 복귀시키지 않았으며 약속했던 이현중 동지의 치료비마저 거부했다. 이현중 동지는 부상의 통증을 계속해서 호소했으나 사측은 이를 무시했다. 사측은 이때부터 이현중 동지를 죽이고 있었다.
[ 세원테크 이해남, 이현중 조합원의 장례가 전국노동자장으로 치러졌다. - 출처:금속노조 ]
세원 자본의 냉대와 지회장의 분신
2003년 8월26일 투병생활을 하던 이현중 동지가 결국 사망했다. 사측의 냉대 속에서 투병생활을 하던 이현중 동지. 세원물산과 세원정공을 거쳐 십년을 세원자본을 위해 일하며 민주노조 사수가 꿈이라고 이야기했던 이현중 동지의 사망은 조합원들에게 슬픔을 넘어 사측에 대한 분노로 나타났다. 노동조합은 7월2일부터 돌입했던 임단협 부분파업을 전면파업으로 전환하고 8월26일 대구 카톨릭병원으로 집결했다.
노동조합은 유족들과 함께 공동요구안을 가지고 대구에 있는 세원테크 본사인 세원정공을 찾아갔으나 세원자본은 "책임이 없다"며 도의적 책임마저 거부했다. 유족들은 분노했고 장례식을 미루고 9월1일부터 대구 세원정공 앞에서 천막농성에 돌입했다. 늦더위가 한참인 대구에서의 눈물어린 투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9월3일 밤 11시 유족들은 세원자본의 도의적 책임을 요구하며 세원정공 앞 연좌농성에 들어갔고, 사측은 구사대를 동원하여 유족들을 폭행하고 짓밟았다. 이것을 본 세원 조합원들과 대구·충남지역의 동지들은 이것을 방치하고 있는 공권력에 강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64명 전원연행과 3명의 세원 조합원 구속, 8명의 불구속, 그리고 이해남 지회장의 수배였다. 이에 '세원자본 규탄·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9월5일 금속노조 대구지부 총파업, 충남지부 확대간부파업이 시작되었고 투쟁은 확산되었다.
금속노조와 민주노총 대구본부·충남본부를 중심으로 세원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위가 구성되었고, 10월1일부터 매주 수요일 세원자본을 규탄하는 집중집회가 잡혔다. 그러나 충남의 세원테크 현장은 사측의 회유와 협박에 의해 파업에 동참하지 않는 40여명의 조합원과 관리자들이 기계를 돌려 파업의 영향력이 없었다. 세원 사측은 '책임 없음'을 고수했고, 이현중 동지의 투병생활을 방치했던 것처럼 또다시 유족과 조합원들의 투쟁을 외면하고 방치하고 있었다.
그렇게 투쟁을 전개한지 60여일이 지난 10월23일 오후 8시30분 수배 중이던 이해남 지회장이 대구 세원정공 안에서 분신했다. 이해남 지회장은 유서를 통해 "한 달여 수배기간동안 이현중 열사와 고생하는 조합원 동지들께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미약했다"는 자신의 심경을 밝히고, "마지막 바램이 있다면 내 한 몸 희생으로 노동탄압, 구속, 수배, 해고, 가압류라는 것들이 정말 없어지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했다.
이현중 동지의 장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민주노조를 지켜내기 위해서 분신한 이해남 지회장은 생사를 오가는 투병생활 중에도 "투쟁은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라는 질문만 하였고, 결국 11월17일 사망했다. 분신을 결심했던 이해남 지회장은 이틀 후 찾아올 둘째 인호의 생일 케이크를 걱정했고, 이해남 지회장이 사망한 날은 그렇게 사랑했던 첫째 경호의 생일이었다.
어려운 승리, 지켜야할 민주노조
이해남 지회장의 분신이후 세원테크의 투쟁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악질 세원자본과 노무현 정권의 노동탄압에 항거한 이현중·이해남 열사 전국투쟁대책위'가 구성되었고, 10월24일과 29일, 11월 매주 수요일 파업투쟁 등 투쟁은 확산되어 갔다. 이현중 동지의 죽음과 세원자본의 노조탄압에 대해 전혀 몰랐던 조합원들도 '악랄한 세원자본의 노조탄압'에 혀를 둘렀으며 투쟁은 확산되어 갔다.
그리고 2003년 12월10일 새벽 노사는 합의를 하였다. 이현중 조합원 사망 106일째, 이해남 지회장 분신 48일째였다. 노사는 △ 노조파괴자 3인 퇴진, △ 이해남 지회장 명예 복직과 1인 복직, 2명의 해고자는 생활비 지급 추후논의, △ 바리케이드 철거, △ 임금인상과 현안문제 해결 및 고소고발 취하, △ 금속노조 기본협약·조합 통일요구안 수용 등의 내용이었다. 조합원들이 생각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합의안이었다. 이현중·이해남 동지를 잃고 나서야 얻어온 성과가 아무리 좋은 안이었다 해도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세원사측은 12월10일 노사가 합의했던 고소고발 취하를 아직까지 이행하지 않는 대신, 구재보 사무장이 구속되었다. 사측은 또다시 노조를 파괴하기 위한 전초전을 준비하고 있다. "나 하나의 죽음으로 동지들의 염원인 민주노조 사수, 노동해방이 앞당겨 진다면 나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는 이해남 지회장의 말이 또 다시 가슴에 파고든다. 세원 조합원들은 시린 가슴을 쓸어 내리며 또다시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두 동지가 목숨 바쳐 지켜내고자 했던 민주노조를 세원의 조합원 모두가 이현중·이해남이 되어 지켜내겠다는 결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