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분 교통정보입니다. 주말 도심 곳곳은 이어지는 집회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서울역 앞에서 시작된 농민집회 대열이 시청 앞으로 이동중이고, 종로에서는 빈민대회를 마친 대열이 시청으로 이동중입니다. 여의도에서는 기독교단체의 구국기도회가…”
토요일 오후 노동자, 농민, 빈민들의 분노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노동자도 농민들도 빼앗긴 자 그 누구도
“아씨 열 받는다 이번에는 끝장내자!”는 ‘2004 전국민중대회 민주노총 사전결의 대회’가 진행중인 서울시청 앞 광장을 향해 ‘식량주권 사수’, ‘쌀 개방 반대’가 적힌 만장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농민대회를 마친 노동자, 빈민대회를 마친 노점상, 학생들이 사방에서 집결하기 시작했다.
무대에 오른 김흥현 전국빈민연합 의장의 “노농빈씨? 노농빈씨~?”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에 생경해하던 참가자들은 이내 노동자, 농민, 빈민을 부르는 외침임을 알고 힘차게 화답했다. 김흥현 의장은 “오늘 이곳을 시장바닥이라 생각하고 시장바닥에서 난장을 트고 갑시다. 각자 손에 들고 있는 빨간 부적에 내가 하고픈 말이 다 담겨있다”며 대회사를 대신했다.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지지발언을 통해 “지금까지 우리는 노동자 싸움, 농민 싸움, 빈민싸움 따로 했지만 오늘은 함께 싸우고 있다”며 민중연대가 어느 시기보다 필요할 때임을 역설했다.
문경식 전농의장이 낭독한 결의문에서는 “세계사적 모순이 중첩되어 집중되는 곳에 우리 민중이 서있다”며 “우리 뒤에는 전쟁과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4천5백만 민중, 칠천만 겨레, 세계의 양심”이 있다며 승리를 위해 앞으로 나아갈 것을 다짐했다.
한편 민중대회가 진행 중이던 뒤편에서는 농민들과 경찰의 충돌도 되풀이되었다. 광장과 이어진 도로에 차량통행을 재개시키자 대회를 방해하려는 의도라며, 농민들이 경찰과 대치에 들어갔고, 이후 7시경까지 격렬한 대치가 이어졌다.
추위 따윈 날려버려
전야제가 열린 13일 밤은 추웠다. 참가자들은 무대공연이 이어지면 일어나 열광하며 추위를 녹였고, ‘장기투쟁사업장 후원주점’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한잔 술로 추위를 달래는 모습들이었다.
행사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늘어선 기업형 포장마차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했지만, 이내 반세계화마당, 이주노동자마당, 국가보안법 폐지 마당, 비정규 노동자 마당, 반전평화마당, 장애인마당, 최저생계비 마당 등 20여개 부문마당들이 투쟁의 현장에 왔음을 깨닫게 해줬다.
예정 시간보다 30여분 뒤늦게 시작된 전야제는 추위와의 한판싸움이기도 했다. 참가자들은 수도권연합노래패의 노동가요 공연, 울산문화패의 연합공연 ‘단결투쟁가’, ‘밴드 바람’의 공연이 이어질 때마다 일어나 열광하며 추위를 녹였고, ‘장기투쟁사업장 후원주점’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한잔 술로 추위를 달래는 모습들이었다.
한편 이날 전야제 행사 중에 진행된 제13회 전태일 노동상은 전남동부건설노조와 타워크레인기사노조가 공동수상 하였다. 전남동부건설노조 김완철 수석부위원장은 “열심히 하라는 채찍으로 생각하겠다. 파업 후유증이 남아있지만 이번 수상으로 큰 힘이 될 것이라 본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타워크레인노조 이수종 위원장은 “노동자가 차별 받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데 우리가 앞장서서 투쟁하겠다”는 강한 의지표현으로 수상소감을 대신했다.
한편 전야제에 참석했던 전태일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여사가 “피나는 노력을 해서 민주노총 만들고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10명이 된 것을 보면서 전태일 어머니로서 용기가 난다”고 하자 참가자들은 “오래오래 사세요”로 화답했다. 또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함께 투쟁해줄 것을 당부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또한 노동자 탄압을 일삼는 LG정유, 풀무원에 대한 불매운동을 알리는 선전장들은 많은 노동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2004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 ]
7만의 힘으로 “총파업 투쟁 승리!”
“총파업 투쟁으로 비정규악법 박살내자!”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2004 전국노동자대회’가 이석행 민주노총 사무총장과 조은숙 보건의료노조 부위원장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각 연맹, 노조별로 사전집회를 하고 광화문에 집결한 7만여 노동자들은 대열 중간에서 나부끼는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의 선명한 깃발에 술렁대기도 했다.
교보문고 앞부터 종각역까지를 가득 메운 7만 노동자 대오 사이에는 공무원노조 1500여 조합원과 일본, 호주, 대만, 필리핀 등 7개국 철도·버스노조 지도자 50여명과 일본 신사회당, 전노련 간부들이 참석하여 한국 노동운동의 힘을 표현해주었다.
처음으로 민주노총 노동자대회에 참석한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정권의 일방적인 공격에 맞서 공동투쟁을 결의했다”며 “농민, 노동자, 여성, 빈민을 소외시키는 노무현 정부는 참여정부가 아니라 비참여정부”라며 일성을 토했다.
노동자대회의 백미는 이수호 위원장의 총파업 투표 결과 공표 및 향후 투쟁계획 발표순간이었다. “민주노총은 중앙집행위원회 결의로 26일 총파업에 돌입할 것을 결정했다”는 위원장의 외침에 7만 노동자는 함성으로 지지와 결의를 다졌고, “노동자는 하나다!”, “총파업투쟁으로 생존권을 쟁취하자!”는 구호로 정리집회를 가졌다.
어느 해보다 뜨거웠던 열기
초겨울의 아스팔트 위를 가득 메운 각지의 노동자들은 저마다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일각에서는 총파업은 성사되지 못한다는 말도 들리고, 위기다 아니다 논쟁도 오가는 것을 보며 기자는 각계의 노동자들의 입을 통해 현실을 듣고 싶었다.
“총파업합니다! 비정규직이든 공무원노조든 교육도 받아 잘 알고 있고, 공감대 형성도 잘되어 있습니다. 이 많은 노동자가 한곳에서 한목소리를 내는 모습 아름답지 않습니까? 노동자 서민이 원하는 것들이 산적해 있지만 우리만의 목소리로 그쳐 아쉬웠는데, 이렇게 한 목소리를 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 대구농협노조 월배분회원.
“몇 년째 노동자대회에 참가하고 있지만 오늘은 기분 따봉입니다. 갈수록 단단해진다는 느낌이 들어요. 노동법개악은 남의 일이 아닌 바로 내 일입니다. 왜 나쁜지, 뭐가 나쁜지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물러설 수만은 없어요. 생존이 걸려있으니까요. 투쟁!” - 전남대 원내하청노조 아주머니 노동자.
“비정규법안에 대해 선전지도 보았고 각 학교별 교육에서 교육도 받았다. 이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교조든 공무원노조든 자기가 자기노동의 주인임은 명백한데 단체행동권을 주지 않는 건 말도 안 된다” - 전교조 서울지부 노조원.
“노동자들의 인식이 높아졌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함께 교육도하고, 시민선전전을 지속적으로 해야한다. 다른 지역은 모르겠지만 우리 지역에서는 공무원 파업에 대해서도 정당하게 생각하고 있다” - 민주노동당 동해·삼척 당원.
“공무원 17년째다. 노동자로서 노동자대회에 참석하니 너무 좋다. 노동자가 지금처럼만 하나된다면 세상은 변하지 않을까? 공무원 노조원들의 의식은 높지만 용기가 아직은 부족하다. 하지만 내일 파업은 꼭 성사된다.” - 공무원노조 인천 계양지부.
60만 민주노총 조합원 가운데 7만은 미약할지 모르지만 이들이 현장으로 돌아가 끌어낼 파괴력은 대단하리라 믿는다.
노무현정부는 미쳤습니다. 맞습니까?
21일에는 한국노총도 대규모 노동자대회를 개최했다. 2만 5천여 한국노총 조합원들은 대학로에서 ‘2004 총력투쟁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하고, △비정규직 법안폐기 △한일 FTA 협정반대 △국민연금·연기금 개악반대 △공무원노조 탄압 중단 등을 한목소리로 외쳤다. 이용득 위원장은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지 3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노동자들에게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며 현실을 진단하고, “한국노총이 투쟁하면 (4대요구) 이룰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제대로 된 투쟁을 해보지 않았지만 이젠 투쟁할 때이다. 우리는 할 수 있다”며 총력투쟁에 전 조합원이 나서줄 것을 요구했다.
함께 참석한 민주노총 이수호위원장은 연대사를 통해 “지금 민주노총 집회인지 한국노총 집회인지 구분이 안됩니다. 부르는 노래도 똑같고, 외치는 구호도 같습니다. 역시 노동자는 하나입니다”며 “함께 연대하여 저 천박한 자본과 정권과의 한판 싸움을 해봅시다”라고 연대투쟁을 당부했다.
이날 노동자대회는 한국노총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고, 자본과의 싸움에 소속은 중요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YMCA까지의 가두행진 동안에도 방송차에서 들려오는 선전방송에서는 온건했던 한국노총마저 거리로 나서게 된 이 엄혹한 현실을 시민들도 이해해줄 것을 방송하고 있었다.
양대노총이 공동투쟁을 결의하고 공동투쟁본부를 구성했고 각 노동자대회를 통해 투쟁의 파고를 높이자 비정규관련법 개정을 내년으로 미룬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다. 하지만 그 언제라도 정부가 지금처럼 일방적인 개악의 움직임을 보인다면 바로 그 순간이 총파업 개시일이 될 것이다. 지난 96년 노동법개악 때처럼 양노총이 연대하여 총파업의 깃발을 펄럭인다면 얼마만한 위력을 발휘할지 자본과 정부는 익히 알고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