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외적으로 보면 신경을 써야하는데, 우린 잘 모르고 신경 안 씁니다. 사실 그 비정규직 법안이 통과되면 장기적으로 우리(정규직)한테도 손햅니다. 그렇긴 해도 먹고살기도 바쁜데…, 조합에서 파업한다면 가기는 하겠지만 뭐 별로 신경 못 씁니다.”
총파업 찬반투표 일정을 정하는 임시대의원대회를 하루 앞둔 10월19일 아침 일곱시, 을씨년스런 구름 사이로 해가 제 모습을 다 드러내지 못했고, 눅눅한 바람에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정문 앞 식당의 낡은 유리문이 덜컹거리고 있었다. 공장에 다닌 지 20년 가까이 되었다는 40대 초반의 노동자는 밥숟가락을 기계적으로 퍼 올리며 경상도 특유의 무뚝뚝한 억양으로 대답을 이어갔다.
[ 지난달 20일 82차 임시대의원대회 통해 총파업을 결의한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
‘구조조정’의 추억과 각인된 고용불안
“그래도 그네들은 버틸만하지. 그 사람들(사내하청노동자들)은 아직 젊잖소. … 지금 같이 일하는 그 친구들이 정규직으로요? 그렇게 된다면야 대환영이지, 아무래도 비정규직으로 생활도 해봤으니까 현장에 잘 적응할 테고.”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정규직들의 평균연령은 39.5세, 평균 근속년수는 14.7년, 그러므로 이 노동자와 비슷한 마흔 살 안팎 된 남성 가장이 이들의 ‘전형’이다. 경제발전의 수혜를 누리는 공장 밖의 많은 중년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도 15년의 직장생활은 가족과 집이라는 따뜻한 울타리, 즉 애써 못 본 척하고 고개를 조금 숙이고 버티더라도 지켜야할 것들이 많아지는 과정이었다.
지금 현대자동차에서 현안인 1만여명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불법파견 판정처리 문제나 민주노총의 ‘총파업 선언’ 계기가 된 비정규직 관련법 개악안은, 노조간부나 활동가가 아닌 대부분의 조합원들에게는 그렇게 지키기 위해 고개를 좀 수그리고 봐야 하는 것들일지도 몰랐다.
1998년 여름,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은 ‘전쟁터’였다. 36일간의 뜨거운 파업이 있었고, 1만명이 넘는 인원들이 경제위기와 자동차시장 구조조정을 빌미로 정리됐다. 즉 ‘전사’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러한 정리해고 투쟁의 후폭풍은 살아남은 노동자들에게도 테러 수준의 정신적 상흔을 남겼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날아들지 모르던 ‘노란 봉투’(해고통지서)의 급습과 민주노조운동의 선봉을 자부하며 막강한 조직력을 자랑하던 노조도 결국에는 막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구조조정으로 인한 고용불안의 ‘공포’를 노동자들의 의식 깊숙이 새겨놨고 공동체의식과 회사에 대한 자부심을 파괴했다.
2004년 현재, 어쨌건 경제위기는 지나갔다. 구조조정을 마친 현대자동차 자본은 2003년 당기순이익만 1조7천억원을 넘어서고 올해도 그에 버금가는 이익이 예상된다. 정말 잘 나가고 있다. 비록 ‘희망퇴직자’들을 제외한 것이긴 하지만, 98년 당시 노란 봉투를 받아들었던 정리해고자와 무급휴직자들은 대부분 현장으로 돌아왔다. 노조의 조직력과 현장 공동체도 어떤 식으로든 복구됐다. 그러나 잘 나가는 자본과 튼튼한 노조 덕에 “귀족” 소리까지 들으며 시샘과 부러움을 받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속에서도 98년의 상처에서 누런 고름을 쥐어짜는 ‘고용불안’이 점점 구체적인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왜 사내하청 증가에 침묵했는가
그 중심에 해외생산기지 비중을 높이고 생산을 글로벌화하여 2010년까지 ‘세계 빅5 브랜드’로 성장하겠다는 현대자동차 자본의 야심 찬 경영전략이 있다. 지금이야 노조가 단협 등을 통해 그럭저럭 막아내고는 있지만, 그러한 경영전략이 해외공장에서 생산한 핵심부품 및 완성차의 역수입과 이를 통한 국내 생산기지의 ‘구조조정’ 시도로 구체화될 것이고, 이를 막는 건 시간이 갈수록 어려운 싸움이 되리라는 것을 조합원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10월20일 울산공장에서 있었던 토론회에서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정규직 조합원 35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노동조합이 해결해야 할 장기정책과제 중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해외투자·고용불안’(59%)으로 나타났다. 2위를 차지한 ‘실질노동시간 단축’(22%)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이렇게 과거의 악몽과 불투명한 미래 사이에 갇힌 정규직들의 불안한 심리는 사용자들이 현장 통제전략으로 활용하기 좋은 것이었다. “벌 수 있을 때 벌어둬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친 정규직 노동자들은 시키지 않아도 24시간 기계를 돌리며 잔업·특근에 매달렸다. 그리고 연대와 단결이라는 노동조합의 기본정신이 훼손될 수 있는 것을 알면서도 “98년과 같은 구조조정 시 먼저 들어낼 수 있는”, 즉 자신들의 ‘고용안정판’인 사내하청들이 증가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방조했고, 또 일부는 직접 차별하기도 했다. 결국 주5일제 실시는 ‘휴일, 휴가’(18%)보다는 ‘특근철야’(44%)’를 늘렸고(앞에서 인용한 설문조사), 급증하고 있는 사내하청노동자들의 숫자는 2000년 노동조합의 양보합의였던 마지노선 16.9%도 훌쩍 넘어선 지 오래다.
이러한 대공장 노동자들의 ‘실리주의’와 그를 제어하지 못하는 노조에 대한 비판은 내부로부터도 꾸준히 제기되었다. 하지만 노동시장 양극화의 거센 흐름을 거스르는 실천들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대공장 노조가 스스로를 ‘실리주의자’로 자임하지 않는 이상에야 정말로 뭔가 구조적인 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조건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다. ‘비정규직’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된데다가, 노동운동의 내부 비판을 넘어서 “대공장 귀족노조 이기주의”가 2003년, 2004년 임단협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 상당히 위협적인 이데올로기 공격으로서 등장한 것이다.
불법파견이라는 ‘뜨거운 감자’
게다가 보다 직접적인 현안도 생겨났다. 법으로 금지된 제조업 파견노동이 사내 하도급을 가장한 형태로 대공장에도 만연해 있던 것에 대해, 노동부가 최근 ‘불법’으로 판정을 내리고 회사측에 개선책을 요구했다. 현대자동차 사측은 금속연맹과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노조(울산 공장), 금속노조 사내하청지부(아산공장)가 진정한 21개 하청공장의 불법파견 판정에 대해서 10월19일 ‘정규직화’가 없는 ‘완전도급화’를 골자로 하는 개선책을 밝혔다. 현대자동차 노조가 진정한 113개 업체에 대해서는 아직 노동부 조사가 진행중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단위노조로서 보수언론 이데올로기 공세의 최대 표적이자 금번 불법파견 문제의 직접적인 당사자인 현대자동차 노조는 사내 비정규직들의 ‘조직화·정규직화’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계획과 실천을 내올 것을 강하게 요구받고 있다.
물론 2004년 하반기 현대자동차 노조에게는 불법파견 외에도 현안이 산적해 있다. ‘간부사원 취업규칙 일방제정 및 강행’, ‘입실론 엔진 역수입’, ‘중국 상용차 합작공장 설립을 위한 합작의향서 체결’ 등 사측의 단체협상 위반이라든지, ‘한일FTA 저지’와 ‘파견법 철폐’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노총 총파업 투쟁 지침 수행 등도 불법파견 못지 않은 굵직한 사안들이다. 그렇지만 단협위반 사항이야 노사협의를 통해 쉽게 풀 수도 있고, 보다 직접적으로 정규직들의 노동조건 저하와 고용불안을 야기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노조집행부로서도 사측을 압박하기 위한 동력을 형성하는데 그리 큰 어려움이 없다.
그리고 민주노총 총파업 투쟁 지침, 그 자체만을 실천하는 것은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와 조직력이 살아있는 현대자동차로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제 1996년 이후 ‘남발되는’ 총파업 지침을 수행하지 못한 적은 2001년 7·5 총파업 단 한 차례뿐이다. 더욱이 “그 때문에 온갖 수모를 당했던” 당시 9대 집행부가 현 11대 집행부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올 총파업에 보다 적극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결국 2004년 하반기 가장 ‘뜨거운 감자’는 “노동자는 하나다”는 당위적인 선언과 실질적인 동력의 묘한 불균형 속에 방치되어 있다가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 불법파견 문제일 수밖에 없다.
현대자동차에서 불법파견이 실질적인 ‘현안’으로서 등장한 것은 작년 4월, 월차를 사용한 하청노동자에게 하청업체 관리자가 “식칼테러”를 자행한 사건을 계기로 비정규직 노조들이 만들어지면서부터다. 조금은 준비가 덜 된 출범 이후 비정규직 노조들의 활동은 불법파견 노동부 진정, 불발에 그쳤지만 임단협 시 독자 파업 추진, 비정규직노조 안기호 위원장의 38일 단식투쟁 등, “정규직노조의 내부준비를 넘어설 정도로” 급격하게 진행됐다. 한편 정규직노조는 ‘공동투쟁’의 동력을 형성하기 위해서 비정규직들의 현대자동차 노조 ‘직가입’을 추진했다. 올해 1월에 있었던 정기대의원대회를 통해 미조직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직가입 규약개정을 위한 세부방안을 마련할 것을 결의하였고, 현재 미조직특위에서 확정된 안은 10월 말 공청회 등을 거쳐 조만간에 있을 규약개정을 위한 조합원총회를 기다리고 있다.
[ 불법파견 노동자의 정규직화를 위한 출근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현자 비정규직 노조원들 ]
구체적인 계획과 지도부 결단이 필요
“불법이라는데 뭔 말이 필요 있습니까. 아니 노동부에서조차 우리가 합의해 준 것들이 ‘불법’이라는데, 지금 직가입 총회를 하네 마네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요. 우선 정규직화 투쟁을 전면적으로 벌여서 따낼 수 있는 만큼 따내고, 그래도 남은 비정규직들 가지고 직가입 문제를 고민해야지요. 그냥 이대로 어영부영 가다가 만약 직가입 규약개정 총회가 부결된다면 어디 고개나 들고 다니겠습니까. 이거 우리가 진짜 ‘악의 무리’가 되는 거란 말이여, 대기업 노조의 집단이기주의니 하는 소리를 우리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될 거란 말입니다.”
임시대의원대회가 있던 20일 아침 만난 전직 노조간부는 현재의 상황을, 전환을 위한 ‘결정적인 선택’을 해야하는 국면으로 여기고 있었다. 현 집행부와 전직 위원장들까지 나서서 불법파견을 사용한 것을 노조가 합의 또는 묵인해준 사실에 대해서 ‘대국민 사과’를 하자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지도부들이 ‘대오각성’하고 나서는 모습을 보여주면 조합원들 사이에서도 “아 우리가 잘못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만들어지고 실리주의니 뭐니 해도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성장한 조합원들은 지도부의 선택을 지지하고 따를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러한 주장이 현실화될 수 있을까? 현재 뭔가를 의심하거나 단정하는 것은 섣부르다. 그러나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정규직노조와 전체 사내하청들을 추동하지 못하고 있는 비정규직노조의 당위적인 ‘공동투쟁’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널찍한 틈새를 뛰어넘어 현대자동차 자본의 두터운 벽을 뚫기 위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당위적으로 주장하는 ‘전면적 정규직화’의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비정규직들이 솔깃해하며 움직일 수 있고, 정규직들이 “그 정도는 당연하지” 수긍할 수 있고, 자본에게 싸워 얻어내는 것이 가능한, 단계적이고 구체적인 요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울산본부에서 만난 활동가는 그러한 ‘요구의 적절성’을 갖춘 것으로, 최소 불법파견 판정 노동자에 대한 현대자동차의 (기간제) 직접고용과 사내하청의 정규직화 기준에 노동조합이 개입하여 예측 가능하도록 ‘계량화’하는 것, 그리고 단계적 정규직화 계획 등을 제시했다.
비정규직을 ‘동맹군’으로 만들기 위해
그런데, 아직 현대자동차 정규직노조는 불법파견 투쟁과 관련하여 대응계획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현대자동차 이상욱 위원장은 10월25일자 『매일노동뉴스』의 인터뷰 기사에서, “대응계획을 자체적으로만 만들기는 대단히 어렵다. 민주노총, 금속연맹, 비정규노조와 긴밀한 논의가 필요하다”며, “내부계획이 있다” 그러나, “지금 회사 쪽 대응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밝히긴 어렵다”고 말했다. 고민이야 있겠지만, 1차 불법파견 판정이 19일이었고, 예정대로라면 직가입 총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감안한다면 투쟁계획의 공론화가 늦는 감이 있다.
물론, 불법파견 투쟁은 쉽게 끝날 것이 아니고 민감한 대응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금호타이어의 사례에서도 드러나듯 결국 문제해결을 주도하는 것은 정규직노조이다. “투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정규직노조가 구체적인 입장을 터놓고 정규직들을 설득해 가는 과정을 빨리 시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재 현대자동차에서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고용안정판’으로만 여기고 함부로 막말을 하거나, 돈도 안주면서 커피심부름을 시키는 등 ‘제2신분’으로 취급하는 풍토는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안기호 위원장의 단식 등 비정규직들의 투쟁을 정규직들도 지켜봤고, 정규직노조와 활동가들의 지속적인 교육이 이어졌던 덕택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같은 사업장 내 같은 일을 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선이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닐 것이다.
정규직노동자들이 잘 알고 있듯이, 현대자동차 자본이 ‘약속한’ 2010년에 가까이 갈수록 ‘고용안정 투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현재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내하청노동자들은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든든한 ‘동맹군’이 될까, 아니면 ‘깨진 범퍼’나 혹은 투쟁의 울타리를 갉아먹는 ‘진드기’가 될까? 이는 지금부터 시작되는 ‘공동투쟁’을 실질적으로 만들려는 구체적인 노력을 어떻게 보여주는가에 달려 있다. 이 공동투쟁을 통해 비정규직들이 요구를 쟁취하는 것뿐만 아니라 현대자동차 노조가 대공장 노동운동의 새로운 영역에 힘찬 첫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건승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