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병원 노동조합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경기도 성남시 곳곳에서 집회를 합니다. 저는 작년 11월부터 인하의료원 지부장을 겸하게 된지라 하루 두 번씩 소리를 질러가며 연설을 해야 합니다. 어떤 조합원은 어떻게 매일같이 그렇게 광분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목도 아프고 똑같은 조합원 앞에서 하루에 두 번이나 해야 하는 부담이 있지만 연설하는 순간은 늘 뿌듯합니다.
지나가는 시민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경청하고 박수를 칩니다. 아이들도 무슨 소린지 알고 하는지 "돈보다 생명이야" 라며 노동가요에 맞춰 손짓도 따라합니다. 집회를 할 때마다 시민들의 분위기가 더욱 좋아지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인하병원 폐업철회 투쟁을 넘어 성남 시민들과 함께 하는 시민운동으로 성장시키는 우리들의 투쟁이 자랑스럽습니다.
[ 작년 여름 인하병원 폐업 반대 투쟁 - 출처:보건의료노조 ]
지역에서 희망 일구는 인하병원 정리해고자들
2003년 7월10일은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안타깝게도 제가 다니던 인하병원이 폐업했던 날이기 때문입니다. 1989년, 학교를 졸업한 바로 그 해 입사하여 평생 다닐 줄 알았던 곳, 한진그룹의 계열사라 중학교에서 대학교까지 자녀학자금을 지급하고 병원이라 진료비도 감면되는 등 근무조건이 괜찮은 직장이었습니다. 경로당을 지어서 정년퇴직하고 만나자는 농담을 노조 간부들과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그런 인하병원이 폐업을 하고 6백여 직원들이 직장을 잃어버렸습니다. 입원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이송하고 외래진료는 중단하고, 용역인 청소·경비직원들과 임시직 등은 2003년 7월 말일로 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정규직을 위로금과 함께 희망퇴직 형식으로 내보냈고 희망퇴직을 거부한 170명은 정리해고란 이름으로 해고되었습니다.
'병원이라는 곳이 적자를 이유로 이렇게 문을 닫아도 되는 것인가? 병원이 폐업하면 시민들은 아프면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폐업철회 투쟁의 방향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 고민하였습니다. 그리고 병원 폐업철회 투쟁을 성남 시민과 함께 하는 투쟁으로 만들 때 희망이 있다고 판단한 후, 성남시의 특성을 파악하였습니다.
인구 백만명의 대도시인 성남시의 구시가지인 수정구과 중원구는 신시가지인 분당구에 비해 모든 것이 낙후되었습니다. 사실 성남시의 구시가지는 서울 청계천 철거민들이 모인 곳이라 다른 곳보다 서민이 많이 사는 곳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응급의료센터를 갖춘 인하병원마저 없어졌을 때 일어날 상황의 심각성을 성남 시민에게 알려나가기로 하였습니다. 인하병원이 폐업하면 응급상황 발생 시 생명이 위험하다는 점을 부각시켰고, 멀리 분당과 서울에 있는 병원을 이용할 경우 드는 비용과 시간상의 어려움을 성남 시민들에게 알렸습니다.
한 달만에 성남시민 10만명에게 인하병원 폐업반대 서명을 받았습니다. 구시가지에는 인하병원 폐업, 성남병원의 축소·이전으로 시민들이 갈 병원이 없어졌는데, 신시가지인 분당구에는 서울대병원 등 대학병원급 병원이 3개 이상 존재하는 현실적 차이가 많은 구시가지 시민들에게 사안의 절박성을 와 닿게 했습니다.
전국 최초 주민발의 공공병원 설립 운동
서명운동을 완료한 후 민간 부분에서 적자를 이유로 병원을 운영할 수 없다면 성남시가 시의 예산을 들여서 시립병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인하병원을 시립병원으로 만드는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돈보다 생명을' 이라는 기치 아래 '성남 시민 걷기 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성남시 역사에서 2천명 이상이 모인 집회는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없었다며 무려 7천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한 이 날을 성남시의 새 역사를 창조한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2천명만 모여도 해결될 거라는 기대와 달리 성남시는 엄청난 지역주민들의 외침을 외면하였습니다. 성남 시민들의 의견을 담은 공청회를 열기도 하고, 2003년 12월 성남시청 앞에 모여 '시민건강권 쟁취를 위한 시민한마당 집회'도 개최하였으나 성남시의 이대엽 시장은 자신의 공약도 무시한 채 여전히 딴청만 피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마지막 카드로 시민의 힘으로 시립병원을 세우기 위해 주민발의 조례 제정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2003년 12월4일부터 2004년 3월3일 사이에 성남시민 유권자 중 11,000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야 했습니다.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아무리 시민들의 반응이 좋다지만 요즘과 같이 무서운 세상에 누가 주민등록번호를 쓰고 지장을 찍겠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기우였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찾고자하는 시민들의 호응은 놀랄 정도로 높았고 20여일만인 2003년 12월29일에 성남시청에 18,595명의 주민발의 서명을 접수시켰습니다. 드디어 전국 최초로 주민발의에 의한 공공병원 설립 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그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시의회를 통과하는 일입니다. 지난 해 시의회는 의료공백 해소를 위한 특별위원회 구성을 부결시킨 바 있습니다. 공개 토론장에서는 반대의견을 낸 의원이 한 명도 없었는데 무기명 비밀 투표가 진행된 후 결과는 반대표가 훨씬 많이 나온 것입니다. 뼈저린 경험이었습니다. 정치인의 현주소를 보는 듯하였고 사심 없는 훌륭한 일꾼들이 정치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올 3월 말이면 시의회에서 공공병원 설립에 관한 주민발의 조례를 심의하게 됩니다. 이번에도 무기명 비밀투표의 장막 뒤에서 부결되는 일이 없도록 치밀하게 준비하려고 합니다. 모든 동별로 시립병원 추진단을 발족하여 동별 지역 주민들이 시의원에게 시립병원 설립 추진단장을 맡기도록 하고 시립병원 설립 조례제정 찬성 약속 받기 운동도 전개할 예정입니다. 시립병원 설립에 시장이 나서도록 압박하는 시장 면담도 동별로 추진할 예정입니다.
[ 성남 시민에게 공공병원 설립 조례제정 서명을 받고 있는 인하병원 조합원들 - 출처:보건의료노조 ]
의료공공성 실천과 일자리 만들기를 하나로!
현재 인하병원 조합원들은 지역선전전과 함께 경로당을 매주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사랑과 격려를 보내 주신 어르신들 혈압도 체크해 드리고 든든한 우리들의 울타리가 되어주시는 그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동별 모임도 경로당에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어느 분은 이곳, 성남 인하병원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들을 보고 있노라면 굉장히 놀랍다고 합니다. 모든 동별 모임을 지역 시민들과 하려는 발상이 놀랍고, 실제로 그게 가능하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합니다.
성남시는 언덕이 많은 구릉지로 눈이라도 오면 미끄러워서 움직이기도 힘듭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조합원들이 추위와 싸우며 아직도 꿋꿋이 버티고 희망을 만들어 가는 것은 이곳 성남 시민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 때문입니다. 어떤 조합원은 더 이상 춥고 힘들어서 투쟁을 그만 두려했지만 기념비를 세워주겠다는 경로당 회장님을 만나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장이 우리를 다 죽이려 한다"며 흥분하는 아주머니들, "이대엽 시장을 찍은 내 자신의 발등을 찍고 싶다"던 아저씨, 모두가 든든한 버팀목입니다.
성남시청 공무원들의 분위기도 많이 좋아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자신만을 위해서 일자리를 찾는 것이 훨씬 쉬운데도 더위를 넘어 추위와도 싸우는 인하병원 직원들의 꾸준한 투쟁을 보며, 신념을 가진 사람들로 저희를 보는 공무원도 있음을 느낍니다.
시립병원 설립 공약은 이대엽 시장 자신의 공약이었습니다. 그리고 인하병원 문제를 작년 연말까지 해결한다고 약속했고, 3개월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으면 시립병원을 짓겠다는 약속도 한 바 있습니다. 이 모든 약속이 거짓말로 드러나지 않길 바랍니다. 약속을 지키는 시장의 모습을 기대합니다.
따뜻한 봄날을 기원하며, 마치 지역운동가처럼
저는 1989년 인하병원 입사와 함께 노동조합 일을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찾아온 노조 편집부장의 요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해 편집부원으로 시작해서 교선부장, 인하병원 지부장, 보건의료 경기지역본부장까지, 노동조합 일을 해 온지 어느새 15년이 돼 갑니다. 그런데 요즘 저는 노조 간부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병원폐업철회 투쟁은 지역운동이야. 난 요즘 지역운동 하는 것 같다"라고 말입니다. 지금껏 조합원을 대상으로 교육하고, 선전하고, 조직했던 운동이 아니라 성남 시민의 입장에서 고민하고 판단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마치 지역 운동가처럼.
인하병원 조합원들의 이번 투쟁은 바로 성남 시민이 함께 하기에 승리를 예견하고 있습니다. 인하 조합원들과 성남 시민은 하나입니다. 성남 시민을 살리고 인하병원 조합원들의 일자리를 만드는 시립병원 설립 투쟁은 바로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끼리 모여 의료공공성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건강하게 살 자신의 권리를 알고 행사할 수 있게 할 때 비로소 의료의 공공성 실천이 가능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조합원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추운 겨울을 무사히 넘기고 다가올 봄날은 시립병원을 세우고 인하병원 조합원 모두가 그 곳에서 성남 시민을 위해 일하는 따뜻한 날들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 날에는 성남 시민께 조합원 모두와 함께 큰절 올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