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

노동사회

러시아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

admin 0 7,817 2013.05.12 05:14

 

“승리하기 위해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조직이며 운동의 지도적 중심체다. 공장에서 공장 파업위원회를 즉각 선출하라. 파업위원회의 대표가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를 구성하고, 이 소비에트가 운동의 조직적 역할을 맡아 임시 혁명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 뿌려진 볼셰비키 전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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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선 러시아 민중들. ]

혁명 전야의 러시아

1917년 초 러시아는 제2차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입구에 들어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혁명의 사회적?경제적 조건들은 20세기 초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죠. 바로 제1차 세계대전(1914~18) 상황이 그것입니다. 1871년 파리코뮌을 탄생시킨 배경이 부르주아지의 민족전쟁이었듯, 1917년 2월 혁명의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이었던 거죠. 말하자면 전쟁으로 혁명적 정세가 도래한 겁니다.  

앞서도 여러 번 지적했던 것처럼, 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의 내적 모순으로부터 발생했습니다. 자본주의 발전의 불균등성과 세계 재분할을 둘러싼 독점자본가들 사이의 투쟁, 그리고 민중들의 혁명적 저항을 억누르려는 지배세력의 노력이 복잡하게 얽힌 결과였던 것이죠.

rusia_02.jpg차르(tsar)가 지배하는 러시아는 교전국가들 가운데서도 특히 심각한 경제적 황폐와 기아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금속, 석유, 석탄 등의 생산이 매우 위축되었어요. 연료와 전력이 부족해지면서 공장의 생산량이 줄어들었고, 철도 수송이 혼란에 빠지면서 도시의 식량공급 상황도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당시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이 식료품 가게 앞에 길게 늘어선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죠. 

1916년부터는 극심한 기아현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군수산업에 국가경제가 무리하게 집중되면서, 국민들에게 필요한 생필품의 생산이 경시되었던 겁니다. 공업 제품이 턱없이 부족해졌죠. 그리고 수백만명에 이르는 농민들이 전쟁터로 징집 당하면서 농업 생산도 심각하게 위축되었고 식량의 절대량이 매우 부족해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도 차리즘 체제의 부정부패는 그칠 줄을 몰랐어요. 민중들은 굶주리는데 무능한 관료들은 지위를 남용해서 공금횡령을 하고 횡포를 일삼았던 거죠.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는 전쟁 수행을 위한 재정도 부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차리즘은 대략 80억 루불의 대외차관을 들여왔는데, 이것이 영국, 프랑스 등 강국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한편, 전쟁은 필연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17년, 러시아의 총인구에서 노동자계급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20%였고, 임금노동자 수는 총 1850만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약 350만명이 대공업에 종사했죠. 노동운동과 혁명운동의 선두에서 중핵 역할을 맡았던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들도 그 수가 급증하였습니다. 1914년 20만명이던 것이 1916년에는 40만명으로 불어났어요. 

이에 따라서 노동운동도 급속하게 고양되었죠. 1916년 한 해 동안에 발생한 파업이 1,500건을 넘어섰고, 여기에 참가한 노동자 수가 100만명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규모는 1914년 전쟁이 시작하면서 행해진 탄압으로 인한 침체를 극복하고, 노동운동이 다시 활력을 회복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당시 노동자들의 요구는 주로 극심한 경제적 궁핍에 따른 절박한 생활의 문제들이었습니다만, 전쟁 반대와 같은 정치적 요구도 광범위하게 제기되곤 했죠.

이런 노동운동 성장의 영향을 받아 군인들의 저항행동도 점점 빈번해지고 규모도 훨씬 커졌습니다. 연대 병사 전체가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는 사태도 벌어졌어요. 또 도망병이 속출하고 전선 지역에서 적군(赤軍)과 교류하고 협조하는 일도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농촌에서는 농민들이 지주의 곡물과 농기구를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쌓여온 설움과 증오심이 터지면서 지주의 저택에 불을 지르는 일도 있었죠. 한편, 피억압 민족도 행동에 나섰습니다. 1916년 중반기에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에서 수백만명이 가세한 봉기가 발생했습니다. 바야흐로, 혁명적 기운이 도처에서 무르익고 있었던 것입니다.

차르 전제에 대한 혁명적 투쟁

1917년 1월 전국적으로 노동자 25만여명이 파업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2월이 되자 파업 참가 노동자수가 40만명을 넘어섰습니다. 정세가 극도로 긴박해졌죠. 이러한 대규모 파업은 점차 혁명으로 전화될 조짐을 보였습니다. 

특히 수도 페트로그라드는 혁명적 분위기로 팽배해 있었습니다. 페트로그라드 최대 공장으로, 이미 1905년 혁명의 1월 봉기에서도 도화선 역할을 했던 푸틸로프 공장에서 2월17일 파업이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회사측은 2월22일까지 공장을 폐쇄했죠. 

rusia_03.jpg2월23일(그레고리력의 3월8일), ‘국제 여성의 날’이 되자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들은 시위대를 조직하여 수도 중심부를 향해 행진해 갔습니다. 그 와중에 다른 공장의 많은 노동자들이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그리고 가게 앞에서 식료품을 사기 위해 줄을 서있던 부인들까지도 시위에 가세했죠. 이날 시위에는 ‘빵을 달라’, ‘전쟁을 중지하라’, ‘차르를 타도하자’는 등의 플래카드가 등장했고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는 12만8천명에 이르렀어요.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차리즘과의 결정적인 투쟁으로까지 진전되면서, 볼셰비키 지도부는 ‘노동자들의 파업투쟁과 대중적?정치적 시위를 발전시킬 것’, ‘병사들에게 노동운동 지원을 촉구하는 선동을 할 것’, 그리고 ‘노동자 부대의 무장을 확보할 것’ 등을 결정했습니다.

2월24일(3월9일), 파업은 페트로그라드 전역으로 확대되고 시위 규모도 더욱 커졌습니다. 수도에서만 대략 20만명이 파업에 참가했는데, 이 수치는 페트로그라드 전체 노동자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이었어요. 아침부터 시작된 집회는 곧바로 정치적 시위가 됐습니다. 볼셰비키의 방침은 파업과 시위를 ‘최대 규모’로 발전시키고, ‘전제 타도’를 슬로건으로 내걸어 정치적 총파업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죠. 물론 거기에는 병사들의 적극적인 투쟁 참가를 조직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2월25일(3월10일), 파업은 이제 정치적 총파업으로 발전했습니다. 대략 38만5천에서 39만명 정도였던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 가운데 30만명 이상이 파업에 참가했어요. 경찰과 충돌이 발생하고 사상자가 생겨났습니다. 그러자 사태가 확대되는 것을 겁낸 차르 정부는 전선에 나가 있는 부대에게까지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니콜라이 2세는 모든 형태의 소요를 금지한다는 포고를 발표했죠. 이날 밤 경찰은 노동자 주거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벌여 노동자들을 무더기로 체포했습니다.

2월26일(3월11일), 노동자들의 정치파업은 무장 봉기로 전환했습니다. 성난 노동자들은 경찰대를 무장해제 시키고 대신 스스로 무장했어요. 충돌 과정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 40여명이 죽거나 크게 다쳤고, 수도의 길거리는 붉은 피로 물들었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페트로그라드에 주둔한 병사들도 동요하기 시작했죠. 볼셰비키는 동요하는 병사들을 향해 노동자 투쟁에 합류하라고 호소하면서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노동자계급과 혁명적인 군대의 형제적인 동맹만이 노예화된 인민에게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이며, 형제를 살육하는 무의미한 전쟁을 끝장낼 것이다.” 드디어 파블로프스키 연대의 한 중대 1천여명 병사들이 시위대에 대해 발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며 노동자측에 합류했습니다.    

2월27일(3월12일), 노동자 파업은 봉기로 이행되어 전 도시를 휩쓸었습니다. 노동자들은 무기고를 점령하고 자신들을 무장시켰습니다. 한편으로는 병사들이 혁명 진영으로 합류하여 이날 저녁 무렵에는 수비대 병사 6만명 이상이 민중 봉기에 가담한 상태였습니다. 사거리와 광장에서 집회가 열렸고, 각지에서 경찰서가 불탔습니다. 형무소가 점령되었고 정치범들이 석방되었습니다. 드디어 노동자와 병사들의 봉기가 수도를 장악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전제적인 차르 정권이 실제로 타도된 것이었죠.

노동자와 병사의 외투를 걸친 농민의 승리

볼셰비키는 차리즘에 종지부를 찍고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할 것을 호소하는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임시혁명정부의 역할은 민주적인 공화제를 수립하여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고 지주의 토지를 농민을 위해 몰수하는 것, 그리고 전 세계의 노동자와 협력하여 제국주의 전쟁을 즉시 중지시키는 것이라 규정되었죠.

이날 볼셰비키는 노동자들이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를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페트로그라드의 가두와 광장에서 탄생한 노동자와 병사의 전투적 동맹이 단일한 혁명적 조직인 노동자?병사대표 소비에트의 결성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노동자 소비에트와 병사 소비에트가 별도로 존재한 1905년의 혁명운동과 1917년의 혁명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었습니다.

페트로그라드 봉기의 승리는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었어요. 모든 대도시와 대부분의 군청 소재지에서 노동자ㆍ병사대표 소비에트가 설치되었습니다. 많은 공업지역에서 소비에트는 8시간 노동제를 실시했고, 기업의 보안과 혁명 수호를 위해 적위대를 창설했으며 차르 정부의 판사들을 내쫓고 새로운 인민재판사를 선출했습니다. 또 소비에트는 노동자들을 특히 가혹하게 부렸던 공장 관리자들을 추방했습니다. 그런 기업에 대해서는 노동자관리를 실시했죠. 이런 사실들은 소비에트가 봉기의 실제적인 지도기관이었으며, 혁명에서 승리한 노동자와 농민의 권력기관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혁명적 사태에 대해 속수무책이던 골리친 내각은 2월27일(3월12일) 총사퇴했습니다. 사퇴한 정부 관리들은 봉기한 민중들 손에 체포당했죠. 게다가 국회(두마)는 이미 차르가 해산시킨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부와 의회가 전선에서 진압군을 동원하기가 어려웠지요. 막상 동원하려고 해도 철도 노동자들이 수송을 거부했고, 또 겨우 수도에 도착한 부대조차 곧 혁명운동에 가담해버리는 실정이었습니다. 이처럼 체제를 유지하던 권력의 중심은 무너져 버렸으며, 차르 체제는 분명하게 타도된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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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대표 소비에트의 부의장 알렉산더 케렌스키 (Aleksandr Fyodorovich Kerenski, 1881 ~ 1970) ]

2월28일(3월13일), 봉기에 가담한 병사의 수는 아침에 7만2천7백명, 낮에는 11만2천명, 밤에는 12만7천명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그리고 3월1일(3월14일) 아침에는 14만4천7백명, 낮에는 17만명으로 증가했습니다. 2월28일 아침에는 니콜라이 2세가 전선 대본부에서 짤스코에 살로로 이동을 시도했으나 이미 통로가 막혀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부득이 푸스코프에 있는 북부전선사령부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1917년 3월2일(3월15일) 거기서 퇴위했습니다. 

이로써 차리즘은 민주주의 혁명을 지향하는 정치적 부대의 힘으로 완전하게 붕괴되었습니다. 이 부대는 노동자계급과 병사의 결합으로, 즉 노동자와 병사의 외투를 걸친 농민과의 동맹으로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이 혁명군을 이끈 주력은 프롤레타리아트였으며, 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조직은 볼셰비키였죠.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 창설

민중봉기가 전 도시를 휩쓸고 혁명이 첫 승리를 거둔 2월27일 소비에트가 출현했습니다. 이것은 멀리는 파리코뮌을 계승한 것이면서 가깝게는 1905년 혁명에서도 이미 경험한 것이었죠. 정치파업을 봉기로 전환하도록 호소했던 볼셰비키는 “파업위원회의 대표가 소비에트를 구성하고, 이 소비에트가 운동의 조직적 역할을 맡아 임시혁명정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혁명정부 활동 강령의 핵심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첫째 모든 인민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는 임시법규의 제정과 비밀투표를 통한 보통?직접?평등 선거권으로 헌법제정회를 소집할 것, 둘째 수도원?지주?내각 및 황실 소유지를 몰수하여 인민들에게 양도하고 8시간 노동일제를 도입할 것, 셋째 차르 정부와 시 자치단체가 가지고 있던 식량 공급 권한을 모두 몰수하고 주민 및 군대를 위한 식량공급체계를 새 정부로 즉각 이양할 것, 다섯째 일체의 반혁명적인 행동과 책동의 금지, 여섯째 자국의 억압자와 독재권력 그리고 자본가 집단에 반대하고 피억압 민중에 가해지는 살육을 곧바로 종식시키기 위해, 만국 인민의 혁명적 투쟁을 모든 교전국가들의 노동자계급에게 호소할 것 등이었습니다. 

당시 볼셰비키 두마 의원들은 대부분 유형지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소비에트 결성 초기에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SR: Sotsial-Revoliutsioner)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죠. 2월27일(3월1일) 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등 좌익계의 두마 의원과 노동자?병사?주민대표들이 참가한 소비에트 회의가 국회 건물이었던 타우리다 궁에서 열렸습니다. 이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임시집행위원회는 노동자 1천명 당 한명, 군대 각 중대 당 한명씩 대표를 선출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이날 오후 9시에 소집된 첫 회의에는 연락 불충분으로 50명 정도밖에 모이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복잡한 상황에서 열린 수도의 노동자대표 소비에트에서 멘셰비키는 소비에트 의장 후보로 N.S. 치헤이제를, 부의장 후보에 M.I. 스코벨레프를 추천했고, 사회혁명당은 부의장 후보에 A.F. 케렌스키를 추천하여 모두 그대로 선출되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선출된 임시집행위원회는 정력적으로 활동했어요. 차르 군대가 전선에서 파견될 것에 대비하여 장교와 병사들로 참모진을 조직하고, 수도의 주요 전력 요충지를 급습하여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 무장 의용군을 조직하기 위해 수도 각 지구에 집행위원들을 파견하기도 했죠. 

그리고 하루가 지난 2월28일에는 대부분의 공장에서 대표가 선출되었습니다. 병사 대표의 수도 증가하여 총회에 참석하는 대표 수는 3월 첫째 주 1천2백명, 중순에는 거의 3천명으로 불어났습니다. 그리고 4월 중순 무렵에는 회의의 효율성을 위해서 노동자와 병사 대표가 각각 절반씩으로 하여 6백명으로 이루어진, 축소된 노ㆍ병 소비에트가 운영되었습니다.

이처럼 러시아의 정치적 중심지 페트로그라드에서 일어난 혁명적 사태는 차리즘에 대한 전러시아적 무장봉기의 발단 구실을 했습니다. 모스코바, 볼가 연안지방, 우크라이나, 발트 연안지역 등에서 봉기가 일어났죠. 그리고 혁명적 소비에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17년 3월에는 소비에트운동이 전국으로 널리 퍼져, 393개 도시와 지역에 513개에 이르는 노동자ㆍ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출현했습니다. 

이 소비에트들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상호 교류를 확장해 갔습니다. 1917년 3월29일부터 4월3일에 걸쳐서는 전국적 조직 틀로서 ‘제1차 전러시아 노ㆍ병 소비에트 협의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는 138개 지방의 노동자ㆍ병사대표 소비에트와 46개 병사 소비에트를 대표하는 480명의 대표가 참석했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소비에트 통제 하에서 임시정부를 구성할 것과 혁명적 방어전쟁을 지지할 것 등의 중요한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졌죠. 소비에트 협의회는 이후 체계적이고 확고한 조직을 구축해야한다는 요구에 따라 ‘제1차 전러시아 노동자ㆍ병사 소비에트 대회’(6월3일~24일에 열림)로 발전했습니다.   

의회 임시위원회의 활동과 이중 권력의 성립

한편, 이런 구조와 성격을 가진 소비에트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와 지주의 지배 기관인 임시정부 또한 탄생했어요. 수도에서 혁명이 성공했다는 보고가 있자, 의회는 곧 임시위원회를 선출하고, 이 임시위원회에 ‘질서확립’을 위임했습니다. 그리고 의회 임시위원회는 곧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ㆍ병사 대표 소비에트와 교섭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비에트, 특히 간부회의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의회 임시위원회가 창설한 부르주아 정부를 지지하기로 했죠. 그런 과정을 거쳐 3월2일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보프를 수상을 포함하여 임시정부 대부분의 각료는 10월혁명당과 입헌민주당 소속 사람들이었습니다.

소비에트 내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지도자들은 부르주아지에게 자발적으로 권력을 양도하여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지지했습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와 노동자ㆍ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병존하는 이중권력 체제가 구축되었습니다. 즉, 두 개의 독재, 즉 부르주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가 매우 독특한 형태로 얽혀 병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중 권력의 출현과 존재는 혁명이 과도기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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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비에트와 함께 이중권력의 한 축이었던 임시정부를 구성한 의회 임시위원회 ]

부르주아지가 실질적인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일련의 정세와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국민 대다수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동요하는 소부르주아지층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소부르주아지의 물결이 소비에트 내에서 사회혁명당원과 멘셰비키에게 우위를 차지하도록 기회를 줬고, 소비에트의 성격이 부르주아적인 것에 영향을 받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노동자계급과 농민들의 자각과 조직의 활동이 미처 성숙하지 못했다는 사실, 러시아 부르주아지에 대한 외국자본가의 강력한 지원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부르주아 정권 수립을 가능하게 한 요인으로 작용했죠.     

러시아 부르주아혁명이 일어난 것은 전세계적으로 민중의 곤궁이 극심한 상태에서 반전운동과 혁명운동이 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러시아 민중이 차리즘에 투쟁하여 얻어낸 승리는 모든 나라의 노동자계급과 피압박 민족의 해방투쟁에 큰 자극을 주었죠. 이는 전세계적으로 계급세력들 사이의 양극화를 심화하고 국제노동운동 내의 혁명적 경향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전투적 노동운동 세력의 국제적 결합을 유리하게 이끌었습니다. 

사회주의혁명의 예비 단계

1905~1917년은 비교적 짧은 기간이었지만, 세계사 발전에서나 국제노동운동의 발전에서 매우 중대한 사건들로 채워진 시기였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대결이 새로운 양상을 드러냈어요. 이 대결의 귀추를 결정한 것은 두 세력 사이의 역량과 조직성의 차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중간적’ 계급들과 계층 -도시와 농촌의 광범한 소부르주아지 대중, 사회생활에 눈뜬 수천만명의 피압박민족- 을 어떻게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었습니다.

20세기 초 들어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대결은 새로운 국면에 돌입했습니다. 부르주아지의 보수성과 반민중적 성격이 점점 명료하게 나타나났습니다. 부르주아지들이 역사의 진보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반동적 행동을 자행했어요. 1914~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은 이 같은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반면에 노동자계급은 독점자본의 억압과 전횡에 맞서면서 봉건제의 잔재 청산과 정치생활의 민주주의 확립을 위해 투쟁했습니다. 그리고 제국주의의 식민지 팽창에 반대하고 군국주의와 전쟁 억제를 위해 정력적으로 투쟁하기도 했죠. 

반제국주의와 반군국주의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국제노동운동 전체의 공통적인 슬로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노동자 투쟁은 경제적?정치적 발전의 불균등성이라는 자본주의적 특성 때문에 모든 나라들에서 일제히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우선 한 나라, 즉 러시아에서 출발했습니다. 이는 제국주의 체제가 안고 있는 모순이 20세기 초두에 이곳에서 집적되어 최고로 첨예한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전제체제에 대한 투쟁의 전개과정에서 이미 권력을 둘러싼 두개의 중심 세력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의 대립이 두드러지게 표출되었습니다. 투쟁의 귀결은 어느 세력이 더 조직적이고 더 단결되었으며, 어느 쪽이 동요하는 소부르주아지 즉 농민들과 병사의 외투를 입은 수백만 민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느냐에 달려 있었죠.

당시 러시아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세력 강화가 괄목할 정도로 진행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과정은 숱한 곤란을 수반했고 매우 복잡한 양상을 취했습니다. 지배세력 측이 권력과 조직력, 부와 지식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계급은 그런 가운데서도 2월 혁명의 결정적 시기에 그들의 역량과 조직 그리고 혁명적 에너지를 놀라울 정도로 발휘했어요. 1917년 2월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 이후 몇 달이 지나자 노동조합은 엄청나게 성장해 있었습니다. 1917년 혁명 초기 노동조합은 세 곳에 조합원이 1천500명이었지만, 1917년 6월에 조합원은 147만 5천429명이나 되었습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는 노동자계급이 쌓은 혁명적 경험과 사회주의 지향의 이념적 목표, 그리고 노동조합과 정당 형태의 조직적 결집 등은 다음 단계 혁명의 튼튼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2월 부르주아 혁명으로 시작하여 10월 사회주의 혁명으로 끝난 1917년은 러시아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