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에는 일본자본이 본격적으로 들어와 공장을 많이 세웠고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도 크게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임금은 기아임금이라 할 만큼 낮았고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작업조건 때문에 노동자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습니다. 노동자의 투쟁은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났고 점차 조직적이고 강인한 모습으로 변화하였어요.
노동조합은 계급성을 강하게 띠면서 전국적인 통일 단결을 지향하게 되었죠. 일제는 1925년 치안유지법을 만들어 노동자들의 조직과 투쟁을 억압하였지만 노동자들은 오히려 더 완강하게 저항하였습니다. 1920년대 말에 이르면 노동자들은 작업장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지역별 직종별로 동맹파업을 벌이는 통일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일제는 치안이 안정되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노동쟁의를 축소하여 집계하였습니다만 그런데도 노동쟁의는 1921년 36건에서 매년 증가하여 1925년 55건, 1929년 102건에 이르렀습니다. 참가한 노동자도 1921년 3,400여명에서 1925년 5,700여명, 1929년 8, 200여명으로 급증하게 됩니다.격화일로의 노동쟁의(1920년대)
노동자들의 큰 투쟁은 1921년 9월 부산 부두에서 시작됩니다. 부두노동자 5천여명은 운송업자들이 임금회복 약속을 안 지킨데 항의하여 열흘 동안 동맹파업을 벌였습니다. 일제 경찰과 운송업자들은 노동자들을 위협하였으나 노동자들은 동맹파업을 계속하여 경찰과 업주들을 굴복시켰습니다. 이 투쟁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노동야학을 통해 맺어진 지식인과 노동자들이 사전에 계획하여 성사시킨 것입니다. 이 투쟁은 이후 부산 절영도 일대의 각 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에 영향을 미쳤고 전국 각지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촉진시켰습니다. 1922년말 경성의 양화직공 280여명은 임금을 깎으려는데 대항하여 동맹파업을 벌입니다. 직공들은 조선노동연맹회 지도 아래 20여일 동안 파업을 계속한 끝에 마침내 요구조건을 관철시키고 다시 취업을 인정하게 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부 업주들이 이에 불응하여 많은 직공들이 취업을 하지 못하였는데 이때 조선노동공제회의 간부였던 이수영, 임일근이 이들을 위해 경성양화직공조합에 작업부를 설치하여 직공들의 일자리를 제공하기도 했죠.
1923년 7월 경성 광희문 부근에 있는 4개 고무공장의 여직공 백수십명은 임금인하를 반대하고 여공에게 폭행을 한 감독의 파면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에 돌입했습니다. 여직공들은 공장측이 해고하려 하자 ‘아사동맹’을 조직하여 농성을 벌이고 새로 파업에 참가한 5개 공장 직공들과 경성고무여직공조합을 결성, 조선노동연맹회에 가입합니다. 이에 대해 경성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노동, 사회단체들은 물론이고 일본의 노동단체에서도 동정연설회를 열고 동정금을 보내 성원했습니다. 경찰은 조선노동연맹회 간부를 검거하고 공장주들은 여러 방법으로 노동자들을 위협했지만 노동자들은 10여일간 파업을 계속하여 마침내 공장주들을 굴복시켰습니다. 경성 고무여공 파업이 끝난 직후 평양 양말직공 1천여명은 임금 인하에 반대하여 동맹파업을 시작합니다. 노동자들은 조선노동연맹회와 오월회 등 전국 각지 40여개 노동단체의 후원을 얻어 대연설회를 열었고 수백명의 노동자들은 각 공장을 다니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일제 경찰은 노동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괴롭혔으나 노동자들이 일사불란한 모습으로 완강하게 버티자 업주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마침내는 요구조건을 수락합니다.
노동자들이 지역별로 동맹파업을 벌이는 일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정미소 직공과 인쇄공들 사이에서도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1923년 진남포, 인천 정미공들의 임금인하와 관리자 횡포에 반대한 동맹파업, 1924년 군산 정미공들의 파업과 정미소 습격, 1925년 평양, 경성, 부산 등지의 인쇄공 파업 등이 그 예들입니다. 이런 투쟁과정에서 인쇄공들은 직업별노조를 넘어 전국적 산업별노동조합인 ‘전조선인쇄직공총연맹’을 결성했습니다. 또 1926년 1월 목포 제유공들은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인상을 요구하여 동맹파업을 벌이다가 회사측이 노동자들을 해고 분열시키고, 외지에서 노동자를 데려오자 결사대를 조직하여 공장을 습격하여 파괴하고, 파업이탈 노동자에게 폭행을 가하고, 집에 불을 지르는 격렬한 투쟁을 벌였습니다. 이와 같이 1920년대 노동자들은 사업장의 범위를 넘어 지역내 직종별 동맹파업을 벌였고 점차 다른 직종 노동자가 참여하는 일도 나타났습니다. 1929년 영흥과 원산의 총파업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최초의 지역 총파업 영흥과 원산 총파업
1927년의 영흥 노동자 총파업은 광산의 일본인 기사들이 조선인 우차부를 구타해 중상을 입힌데서 발단했습니다.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이에 항의하였고 영흥 청년동맹과 신간회가 이를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이목이 집중되었죠. 이 와중에 10월21일 영흥광업소의 흑연광 광부 220명이 영흥노동연맹의 산하단체인 광부조합의 지도 하에 8시간노동제 실시, 임금인상, 노동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광부들도 비슷한 요구를 내걸고 파업을 벌였죠. 원산노동연합회에서는 파업동정금을 보내는 한편 응모규찰대를 조직하여 새로운 노동자의 취업을 가로 막기도 했습니다.
이에 회사와 경찰은 노조 대표자들을 해고하거나 구속하였고 ‘영흥인쇄공조합’, ‘운수노동조합’, ‘전영흥우차부조합’ 노동자 500여명이 동정파업에 돌입합니다. 또 영흥읍에서 30리나 떨어진 광산의 노동자들은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지어 행진해 들어와 가두시위를 벌였죠. 파업은 점차 확산되어 12월2일 전기공장 노동자, 유기직공, 양조공, 곡물무역상 노동자들까지 참가하여 끝내는 영흥 전 지역의 산업을 마비시켜 버렸습니다. 마침내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은 50여일만에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영흥 노동자 총파업은 한 지역의 노동자들이 모두 하나의 목표를 중심으로 뭉쳐 투쟁하였다는 의미에서 한국노동운동사상 가장 최초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투쟁이 원산에서 더 큰 규모로 일어나고 있었죠.원산총파업은 1928년 9월 함경남도 원산 교외에 있는 문평제유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회사는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조선인을 혹사시킬 뿐만 아니라, 일본인 현장감독들이 민족적 멸시와 차별대우에 폭행까지 행하는데 대항하여 120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파업이 발생하자 회사측은 3개월 후에 해결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조합을 결성하여 ‘원산노동연합회’(노련)에 가입하는 한편 약속한 3개월이 지나자 회사측에 문제 해결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회사측은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노동문제는 회사의 취업규정에 따라 노동자와 직접 해결해야 한다는 억지주장을 하고, 이전보다 더 열악한 내용의 취업규정을 발표했죠. 이에 ‘노련’은 이듬해 1월 긴급 집행위원회를 열어, 회사측이 요구조건을 들어주고 노동단체를 승인하여 단체협약에 응할 때까지 ‘문평제유노동조합’과 ‘문평운송조합’은 동맹파업을 단행하고 원산 부두노동자들은 이 회사 물품은 일체 취급하지 말 것을 결정합니다. 그러자 운수회사 측은 노동자 해고를 선언하였고 동정파업은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일본인 운송업자와 원산 상업회의소(상의)는 노련의 회원은 사용하지 않겠다고 통고하고는 시내 곳곳에 삐라를 뿌려 노련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파업을 시켰다고 선전했습니다. 노련은 다시 긴급 위원회를 열어 각 단체의 자유의사에 맡긴다는 형식을 취하여 1월23일부터 전 사업장에서 총파업에 돌입합니다.
총파업이 확산되자 경찰은 노조간부 7~8명을 구속하고 약 400명의 일본인 재향군인과 청년회, 소방대원을 동원하여 시가지를 엄중 경계하고, 함흥 보병대에서 300여명의 군인을 원산으로 데려와 시가행진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노련은 이에 굴치 않고 상의에 공동대중토론회를 갖자고 제의하였고 양복공 노조 등이 파업에 새로이 가담했죠. 일제 경찰은 폭행이니 협박이니 하여 노련 간부들을 계속 검거하였고 1월29일에는 노련 규찰대 10명을 검거하고 노련 장부를 압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경찰은 모든 사회단체의 활동을 금지시키고 2월 7일에는 노련 위원장 김경식과 상무집행위원 4명을 구속했습니다. 또 2월 21일에는 노련의 검사 위원장 이영로와 기타 주요한 집행위원들을 마구 구속하고 노련 간부들의 집을 모조리 수색했죠. 그러나 노동자들은 간부들의 계속적인 검거, 투옥에도 동요하지 않고 노련의 지도 아래 철석같이 단결하여 새로운 간부를 보충하며 하루 두 끼만 먹고 술 담배를 끊는 등 실로 눈물겨운 투쟁을 계속했습니다.
이렇게 엄혹한 탄압에도 총파업 대열이 흩어지지 않자 일제는 분열책동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상의는 2월19일 ‘함남노동회’라는 어용노동단체를 설립하고 서울의 변호사인 김태영을 위원장 직무대리로 앉혔습니다. 김태영은 ‘원산상의’와 일제의 주장대로 간부와 강령을 바꾸고 투쟁을 포기하고 무조건 자유취업케 하자고 떠들고 다녔죠.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지도부를 만들려 하였으나 경찰의 잇따른 검속으로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더욱이 장기간에 걸친 파업으로 파업자금도 바닥이 나고 1만여 노동자와 가족들의 생계는 파탄 직전에 이르렀죠. 상의는 이 약점을 이용하여 복업을 유혹하였고 노동자들 사이에는 파업을 이탈하여 취업하는 자가 늘어났습니다. 그런 와중에 4월1일 노동자들이 함남노동회 사무실을 습격하여 기물을 부수고 간부들을 난타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고, 4월3일에는 어용단체 책임자의 집이 습격당하여 중상을 입는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경찰은 이를 빌미로 수많은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검속했습니다. 총파업은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4월6일 남아 있는 노련의 간부들은 전체 회원들에게 무조건 자유 복업하도록 지령을 내리고 한국노동운동사상 최대규모의 원산 총파업의 깃발은 이렇게 내려졌습니다.
조선 노동계급과 일본의 일대 결전
이처럼 원산총파업은 문평제유라는 조그만 공장에서 시작되었지만 일본의 자본가와 그 집단, 일제 경찰과 군대 같은 식민지 권력기구, 일제의 신문사와 청년단체 등의 연합전선에 대한 원산지역 노동자들의 대응이라는 형태로 전개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일제의 총자본과 식민지권력기구에 대한 노동자의 투쟁으로서, 원산 총파업은 일제가 침략전쟁을 감행하기 위해 조선의 노동계급과 벌인 일대 결전이었죠. 이후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은 비합법운동의 영역으로 옮아갑니다. 이점에서 원산총파업은 1920년대 합법적 공개적 노동운동을 결산하면서 동시에 1930년대 비합법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원산총파업은 일제하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파업 이후 1930년의 신흥탄광노동자들의 폭동을 비롯한 격렬한 투쟁이 전국에 걸쳐 계속 일어났습니다. 또한 원산총파업은 그 지속성, 강인성, 격렬성, 조직성에 있어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노동운동사에서도 보기 드문 투쟁으로서 이후 민족해방운동의 단계를 한 차원 높이는데 기여했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와 배경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투쟁에 대비한 철저한 준비와 탁월한 지도부의 헌신적인 노력을 들 수 있습니다. 원산노련은 1925년 10월 결성된 이래 산하 조직의 쟁의를 적극적으로 조직, 지도하여 노동자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착실하게 기금을 모아 파업자금을 꾸준히 준비하는 한편, 노동자의 복지향상을 위하여 노동병원, 노동자 이발부까지 설치하여 노동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어 왔습니다. 따라서 원산의 노동자들은 ‘원산노련’을 굳게 지지하고 있었으며, 노동자가 단결하여 싸운다면 반드시 정의를 실현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죠.
이 밖에 원산총파업은, 식민지 노동운동은 그 자체가 바로 반제국주의 민족해방투쟁의 일환이고 민족의 해방 없이는 결코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생활권을 근본적으로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각성시켜 주었습니다.
원산총파업을 마지막으로 1920년대 노동운동은 막을 내리지만 그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무엇보다 노동운동의 조직역량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노동자들은 전국적인 조직체뿐만 아니라 산업별노동조합과 지역별노동조합의 연합체를 만들어냄으로써, 자연발생적인 폭발에서 목적의식적인 조직운동로 전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노동쟁의도 훨씬 격렬했고 강인했으며 쟁의기간 또한 길어져 노동자계급의 투쟁역량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1920년대 노동자들은 초기에 노조 조직결성과 노동야학에 있어서 지식인의 도움을 받았으나 오랜 투쟁경험을 쌓아 스스로 각성하여 지식인의 도움에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의 힘으로 노동운동을 전개할 수 있을 정도로 노동운동의 대중성을 넓혔습니다. 아울러 노동운동을 농민운동과 분리해 내면서 경제적인 요구투쟁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투쟁으로까지 발전시켜 점차 민족해방투쟁의 성격을 갖추어 갔습니다. 이것은 조만간 일제와 일본자본가와 충돌하면서 혁명적 운동으로 나아가게 될 것임을 예시해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세계 대공황과 일제의 침략전쟁 도발
1929년 10월24일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 증권시장에서 주식값이 폭락하면서 전 세계는 역사상 최악의 재앙에 휩쓸립니다. 바로 세계 대공황이 시작이었죠. 세계대공황은 일제에도 여지없이 엄습해왔고 위기에 몰린 일제는 군국주의의 길로 치달았습니다. 곧 나라 안에서 천황제 군부독재체제를 확립하여 민중저항을 짓누르고 밖으로는 본격적인 침략전쟁에 나선 것입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에서 1932년 1월 상해사변, 1937년 7월 중일전쟁, 1941년 12월 미국 하와이 진주만 공격은 일제가 살아남기 위한 일련의 전쟁수순이었죠.
이를 위해 일제는 조선을 ‘병참기지’로 만들었습니다. 조선의 모든 자원을 최대한 뽑아 올려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였죠. 일제는 만주침략을 시작하면서 ‘문화정치’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엄혹한 탄압을 가했습니다. 일제는 경찰과 군대를 매년 크게 늘리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자유를 전면 제한하였으며 수많은 조선 민중들을 사상범이라 하여 혹독한 고문을 가하고 감옥에 가두어 죽였습니다. 일제가 발표한 사상범은 1930년에 38,779명, 1934년에는 66,055명이나 되었죠. 그리고는 일본과 조선은 한 핏줄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소위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전개하고 조선 민중에게 “천황의 충성스러운 신하(皇國臣民)”가 되라고 강요했습니다.
일제의 파쇼적 탄압은 1937년 중일전쟁 도발 이후 ‘전시체제’라는 이름으로 더욱 가속화했습니다. 특히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은 극에 달했죠. 일제는 ‘사상범 보호관찰령’에 이어 ‘사상범예방구금령’을 만들고 치안유지법을 강화하여 해방운동에 대해 탄압의 범위를 대폭 늘리는 동시에 쉽사리 사형을 언도할 수 있게 했습니다. 나아가 일제는 침략전쟁에 조선의 모든 자원을 동원할 수 있게 1938년부터 국가총동원법을 실시했습니다. 이에 근거하여 340여만명이 강제징용 당하거나 보국대에 끌려갔고 태평양전쟁 도발 후에는 ‘비상전시체제’라는 미명하에 지원병제도와 국민의용군제도를 실시하여 조선의 청소년들을 모조리 침략전쟁의 총알 받이로 만들려 했습니다. 또한 1944년에는 ‘여자정신대근무령’을 만들어 12살에서 40살까지의 조선 여자 수십만명을 강제 징집하여 군수공장에 보내는 한편 중국과 남양군도의 전쟁터에서 일본군의 위안부 노릇을 강요했습니다. 또한 일제는 황국신민화정책을 일층 강화하여 신사참배 등 일제 의식을 강요하였고, 1940년대에는 모든 조선어신문과 잡지를 폐간시키고 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 하여 조선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라고 강요했습니다.
그야말로 1930년대 이후 식민지 조선은 참혹한 암흑천지였고 조선 민중은 거의 짐승이거나 죽은 목숨이나 진배없는 취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지주들과 자본가, 그리고 상당수의 지식인들은 조선인의 ‘무지’와 ‘게으름’을 탓하면서 일제에 빌붙는 작태를 보였으며 일본군대에 자원하여 독립운동가들을 학살하는데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이른바 친일파라는 이름의 군상들이었죠. 이들은 어쩌면 일제 지배자 보다 더 가증스러운 세력이었을 겁니다.
침략전쟁을 위한 조선 식민지의 수탈과 착취는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농촌에 대해서는 식량증산과 군사품목의 원료 생산에 집중되었고 전쟁 말기에는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농산물을 약탈해가고 숟가락, 젓가락, 비녀에서 요강에 이르기까지 쇠붙이는 모조리 거두어갔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 농민들은 배고픔과 생활 용품의 부족으로 갈수록 비참한 삶을 이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죠.
침략전쟁을 전후하여 조선에는 일제의 내노라하는 대기업들이 들어왔고 이미 들어와 있는 기업들도 투자를 확대했지만 그것은 오로지 침략전쟁을 위한 것뿐이었습니다. 1930년 현재 4261개이었던 공장은 1943년에는 1만 4856개로 늘었고 생산액도 2억6천만원에서 20억 5천만원으로 급증했습니다. 1937년 이후에는 공업생산액이 농업생산액을 넘어설 만큼 공업은 급성장하였고 공업구조도 1920년대의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로지 전쟁을 위한 산업일 뿐이었죠. 게다가 조선의 자본은 전체의 6%에 불과하였고 일제 말기에 이 비율은 더욱 줄어듭니다.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은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을 더욱 곤궁하게 만들었습니다. 실업자는 급증하였고 삶의 수준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극한 상황으로 몰렸습니다. 참담한 생활은 직장을 가진 것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실업의 불안과 공포 속에서 자본가들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죠. 일제는 침략전쟁을 위한 군수산업화로 돌파구를 마련하려 하였고 조선에 독점자본을 대거 진출시켰습니다. 조선에는 공장이 크게 늘고 그에 따라 노동자들도 급증했습니다. 1930~36년 사이에 공장 노동자는 10만 6천여명에서 20만 7천여명으로, 광산노동자는 3만 5천명에서 16만 1천여명으로 늘어났습니다. 1943년 공장 노동자는 54만 9천여명에 광산, 토건, 운수 노동자를 합하면 그 수는 대략 200만명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의 처지는 개선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화 했습니다. 노동시간은 12시간 내지 14시간이 보통이었고 방직공장의 여성노동자들은 15~18시간까지 일했습니다. 그런데도 임금은 극도로 낮은데다 해마다 내려갔죠. 1929년도 조선인 남자 성인의 1일 최고임금은 1원, 남자 소년공은 44전이었는데, 1937년의 그것은 각각 95전, 42전에 불과했습니다. 해마다 급상승하는 물가와 전쟁을 빙자한 각종 부담금을 고려한다면 생활은 가히 파탄상태였죠. 40%에 달하는 여성노동자와 유년노동자에 대한 착취는 훨씬 심했습니다. 1936년에 직장에서 죽은 광산노동자는 전체의 5.2%인 8,083명에 이르렀죠.
농민의 생활도 비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농업공황으로 쌀값은 폭락하고 파산농가가 줄을 이었습니다. 지주의 착취로 땅을 잃는 농민도 속출하였고 일제가 강요한 농촌진흥정책 때문에 부채는 늘어났고 고리채가 농민들의 어깨를 짓눌렀습니다. 침략전쟁이 확대되면서 일제의 농산물 약탈은 더욱 심해졌고,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끌어가는 바람에 농촌 노동력부족은 극에 달해 생산량은 격감하고 배고픔은 일상사가 되었습니다. 해마다 소작과 화전민은 늘어만 갔고 보릿고개에 허덕이는 농가는 전체의 7~8할이나 되었습니다. 농촌에서 살수 없게 된 농민들은 도시로 나가든가 해외로 나가야 했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은 1936년 70만으로 급증하고 중국동북지방으로 이주한 조선인은 1930~40년 사이 60만에서 154만으로 격증했습니다.
극으로 치닫는 일제 탄압, 노동운동의 지하 잠복
일제 하에서 조선의 민중들은 인간다운 삶은 고사하고 한시도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조선 민중들의 투쟁은 필연이었습니다. 모든 투쟁은 모두 민족해방이라는 한 목표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전쟁광이 되어버린 일제는 1920년대 문화정치의 허울을 벗고 조선 민중을 철저하게 탄압했습니다.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었죠.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에 굴치 않고 줄기차게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노동자 투쟁은 훨씬 조직적이며 치열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1930~34년 5년간 투쟁건수는 897건에 참가인원수는 7만 7천여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1920년대 10년간의 투쟁과 맞먹는 것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파업과 태업을 벌이는 한편 시위, 공장 점거, 공장 습격 등 새로운 방법으로 일제에 대항했습니다. 일제가 노동자들의 모든 움직임에 대하여 노동운동가들을 검속하여 고문을 가하거나 감옥에 넣고 경찰, 군대를 동원하여 노동쟁의를 무차별 탄압하는 일이 갈수록 많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제가 폭력으로 탄압하는 한 조선 노동자의 투쟁 또한 폭력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경성방직공장 400여명 노동자의 파업과 공장점거, 김제 노동자 6백여명의 경찰서 습격(1931년 6월), 함북 웅기 하천 공사장 200여명 노동자의 폭동과 식량 창고 습격 및 진남포 삼상정미소 130여명 여공파업과 공장점거(1932년 1월), 인천 조선성냥공장 400여명 노동자들의 파업과 공장점거(1932년 5월), 진해 동양제사 여공들의 파업 농성 시위(1933년 1월), 부산 조선방직 400여명 노동자들의 파업(1933년 5월), 평북 정주유기 직공들의 파업과 폭행(1933년 9월) 등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일제는 중국 침략전쟁을 준비하면서 조선 민중에 대한 지배체제를 강화해 나갑니다. 그 일환으로 일제는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노동조합활동을 전면 금지시킬 뿐만 아니라 노동쟁의를 제기하면 주동자를 무조건 검거 투옥시켰습니다. 1920년대말 이미 조선노동총동맹, 조선농민총동맹 등 노동자, 농민의 전국적 조직을 해산시켜 계급적 단결과 통일을 차단해 버렸지만 1930년대 중반이 되면 모든 집회, 결사의 자유를 봉쇄합니다. 노동운동가들은 일제의 눈을 피하여 지하로 숨어들어 비밀리에 혁명적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노동운동은 본격적으로 공산주의운동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이렇게 된 데에는 과거 지식인 중심에서 노동자 중심으로 방향을 전환한 공산주의운동의 변화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곧 1930년에 이르러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을 파괴한 것은 파벌투쟁으로서 이 파벌투쟁은 조선공산당이 인텔리겐챠를 중심으로 조직된데 기인하므로 앞으로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당을 조직해야 된다”고 지적하였고 국내 운동가들은 이 방침에 따라 노동자들 속에 열심히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노동자들도 일제의 탄압이 극심하여 작은 생활상의 요구도 내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갈망하여 적극 혁명적 노조운동에 참가하게 된 것입니다. 혁명적 노동조합은 대규모 산업시설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결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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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은 제3인터내셔널(The Third International)로 인터내셔널이란 국제노동자협회이며 제1차 인터내셔널은 1864년 칼 맑스와 엥겔스가 주도하여 결성되었고 제2차 인터내셔널은 칼 맑스가 사망한 후 1889년에 엥겔스가 주도하여 파리에서 결성되었지만 제1차세계대전 참전을 각 나라 사회주의정당들이 결정하면서 해체됩니다. 제3인터내셔널은 레닌이 주도하여 결성되었고 1943년까지 활동합니다. 코민테른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라고도 하며 각국에 하나의 공산당만 두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추진합니다. 조선공산당도 1920년대에 가입하였고 이 뒤를 이어 1947년에는 코민포름이 결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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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일제는 적색노조운동이라고 불렀죠. 노동조합운동이 얼마나 광범하게 좌경화하였는가는 사상범의 검거 건수와 인원수가 급증하여 중일전쟁 이전까지 1,913건에 22,205명에 이르렀다는데서 잘 나타납니다. 또한 1931~35년에 좌익노동조합운동으로 검거된 건수는 70여건에 1,759명이나 투옥되었습니다.
농민들도 치열하게 투쟁했습니다. 농민들은 지하 농민조합을 만들어 소작권문제, 소작료인하문제, 기타 공과금, 부대비용의 부담문제로 투쟁을 벌였고 나아가 일제의 식민통치와 지주의 반봉건적 수탈에 반대하여 격렬한 투쟁을 벌였죠. 1930년대에 지하농민조직은 전국 220개군과 섬 가운데 80여곳이었으며 가장 대표적인 곳은 함남 정평과 함북 명천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 농민들의 투쟁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크게 줄어들고 1937년부터 1940년의 4년 동안 노동쟁의는 430건에 24,967명이 참가했다고 일제는 발표했습니다. 중요한 파업으로는 1937년 2월에 있었던 부산진 매립공사장 1,300여명의 노동자 파업, 1938년 3월의 해주 조선 시멘트 공장 600여 노동자의 파업과 청진 부두노동자의 파업, 그 해 5월 평북 후창 광산노동자의 노동절 파업 시위와 부산 동래 스미토모 광산노동자의 파업, 그 해 6월 인천부두 노동자 1,200명의 임금인상 요구 동맹파업과 12월의 대구 각 직조공장 290여 노동자의 파업, 그해 7월 평양 제사공장 여공들의 착취와 장시간 노동, 성희롱에 반대하는 동맹태업, 1939년 1월 평양 군화제조공장의 임금인상 동맹파업, 3월 신의주자동차 운전수 100여명의 파업, 8월 평양 동우고무공장 150여 노동자의 파업, 10월 경성고무 여공 200여명의 파업 등이 있습니다.
1940년대 태평양전쟁하의 극악한 탄압 아래에서도 노동자들은 파업과 태업을 계속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만이 아니라 일제의 전시정책을 파탄내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반일 반전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노동자들은 공사 방해나 방화, 폭발, 시설과 기계의 파괴 등을 광범하게 전개하였고 광산이나 토목 건설공사장 같은 곳에서는 폭발을 방해하거나 기계에 모래를 넣고 원료의 배합을 제대로 하지 않는 등 기술적으로 방해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또한 노동자들은 공개적인 파업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주동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태업을 전개하였고 집단으로 공장을 이탈하거나 탈주함으로써 일제에 항거했습니다. 일제 말기에 노동생산성이 감퇴하고 생산력이 크게 감퇴한 것을 이를 말해줍니다.
한편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짐에 따라 노동운동은 더욱 더 지하로 잠복합니다. 거기에는 노동조직이 통일되지 못하여 일제의 대량검거가 있고 나면 그 공백을 다시 메울 만한 노동운동가가 갈수록 적어졌다는 사실도 작용했습니다. 이와 아울러 노동자들 사이에는 일제 말기에 무장봉기를 계획하고 투쟁하는 움직임도 늘어가고 있었고 국경지대의 무장독립운동에 참가하는 노동자들도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은 무기를 만들기 위해 비밀 철공소를 설치하기도 하고 무장투쟁 계획을 수립하거나 만주 독립군에 참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북쪽의 중요한 거대 공업단지에서는 전쟁 수행을 반대하기 위한 파업과 파괴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일제를 궁지로 몰아넣었죠. 노동자들과 공산주의운동가들은 수없이 많은 정사복 경찰과 헌병, 밀정들의 거미줄 같은 감시망과 생명을 앗아가는 엄혹한 탄압 속에서도 이처럼 생존문제의 해결과 민족해방을 위해 치열한 투쟁을 계속했습니다. 이는 민족주의자들이나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변절 혹은 침묵으로 일관했던 모습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노동자들의 투쟁과 저항이 얼마나 끈질기고 철저했던가는 해방 이후 다시 터져 나온 노동운동의 엄청난 조직력과 투쟁력이 입증해주었습니다.
일제하 노동운동이 남긴 과제
18세기말 처음으로 이 민족의 역사에 그 이름을 올린 노동자들은 일본제국주의, 군국주의라는 혹독한 압제자, 착취자를 상전으로 하여 36년간이나 참담한 삶을 강요당했습니다. 일제시대는 아직 농경방식이 지배하였고 일제의 식량공급기지로서만 존재했습니다. 일제가 근대공업을 옮겨다 놓았지만 그 수준은 미약했죠. 그것도 상품시장 확보와 침략전쟁의 병참기지라는 일제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착취와 수탈은 상상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었고 민족차별과 모멸은 그 어떤 식민지의 그것보다 극심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쉽사리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삶을 위해 끈질긴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처음에는 지식인들의 지원과 협력을 많이 받기도 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조직을 만들고 발전시켰습니다. 우리나라 보다 훨씬 앞서 자본주의가 생성되었다는 일본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고 전국조직을 만들었고 혁명적 정당도 결성했습니다. 일본으로 끌려간 노동자들도 격렬한 투쟁을 벌여 일본 노동운동의 발전과 궤를 같이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노동운동의 핵심부문으로서 노동조합 조직형태도 일찌감치 직업별 지역별노조에서 산업별노조로 전환하는 선진적인 노력을 보였습니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 대응하기 위해 지하로 잠복한 사회주의운동과 결합하여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고 일제말기에는 항일 무장투쟁을 준비하거나 참여하기도 했죠.
일제 식민지 조선반도에서의 노동운동은 곧 민족해방운동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식민지 조선의 노동운동은 그럴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노동자의 생활조건을 개선해야 하는 경제투쟁과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정치투쟁을 같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외세와 식민지가 청산되지 않는 한 노동운동은 이 두 가지 투쟁을 무기로 하여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겨놓았습니다.(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