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대의 노동운동(1)

노동사회

식민지 시대의 노동운동(1)

admin 0 6,759 2013.05.12 06:06

헤겔은 어딘가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동방에서는 한 사람만이 자유로왔는데 지금도 그렇다
그리스 로마에서는 몇사람이 자유로왔다
게르만 세계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다

마르크스는 어딘가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시아적 봉건사회에서는
한 사람만이 자유로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몇 사람이 자유롭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만인이 자유로울 것이다

그러나 헤겔도 마르크스도
다음과 같이 각주 붙이는 것을 잊어버렸다

식민지 사회에서는
단 한 사람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김남주의 1987년 제2시집 “나의 칼 나의 피”에 실린 ‘각주’에서


일제, 조선을 집어삼키다 

조선후기 자본주의의 싹이 채 트기도 전에 조선반도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사냥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일제(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조선왕조는 제국주의의 침략을 목전에 두고 갈팡질팡했지만 민중은 거세게 저항하였죠. 동학농민전쟁에 이어 전국 곳곳에서는 의병들이 끈질기게 항쟁을 벌였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조선지배의 선봉장이었던 이또 히로부미를 사살하여 일본 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지요.

일제는 미국, 영국의 지지를 배경으로 1905년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을 강압적으로 맺었습니다. 일제는 조선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각종 국유재산과 토지를 약탈하였으며 이를 위해 1908년 동양척식 주식회사를 설립하였죠. 그리고 5년 후인 1910년 8월29일에는 마침내 한일합방을 선포하고야 말았습니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온 나라 민중들은 땅을 쳤지만 때는 이미 기운 것이었어요. 1909년 조선에는 이미 12만6천명 이상의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습니다.

을사보호조약에서부터 40년, 한일합방부터 36년 동안 조선은 일제 식민지였습니다. 조선은 처음부터 일본의 일부분일 뿐, 독자적인 발전이란 일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경제와 사회는 일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지요.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조선에서는 일제에 의해서 세 단계, 곧 일본인의 식량 공급기지로, 일제의 상품소비시장으로, 그리고 중국 대륙을 침공하기 위한 병참기지의 역할을 하는 과정이 진행됩니다.

일제 식민지시대 제1기는 1906년 통감부 설치에서 1919년 3·1운동에 이른 시기입니다. 이는 일제가 조선에 대한 지배와 착취를 위해 기초시설과 토대를 구축한 시기로, 1910년 조선총독부를 세우고 무단통치를 펴나갔죠. 조선 총독은 군부 출신으로 나라의 모든 지배 권한을 틀어진 절대군주였습니다. 모든 고위 관리는 일본인이 앉았고 조선인은 면장 이하의 직책이나 끄나풀로만 삼았으며, 전국은 헌병과 경찰들이 장악하여 감시 지배하면서 조선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었지요. 기본인권이란 아예 허용되지 않았고 학교도 크게 줄여버렸습니다. 일제는 무단통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서울 용산과 나남에 육군을 두고 진해와 영흥만에는 해군을 주둔시켰습니다. 지금의 서울 용산 미8군 기지는 당시 일본군 사령부였고 1945년 이후에는 미군이 주둔하였던 민족의 비애가 서려 있는 곳이지요.

이처럼 일제는 조선 민중을 숨도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잔혹하게 억누르는 한편에 조선의 경제를 식민지적 종속경제로 재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을 위한 가장 큰 작업이 조선의 땅을 빼앗는 일, ‘토지조사사업’이었어요. 인구의 절대 다수가 농토에 목줄을 대고 사는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땅을 빼앗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었죠. 일제는 ‘토지 조사령’을 만들어 1918년 10월까지 약 8년8개월 동안 이 사업을 실시하였습니다. 명분은 세금을 공평하게 하고 토지 소유권을 명확하게 하여 보호한다는 것이었죠. 이를 위해 측량을 하고 토지소유를 신고 등록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선인 사이에서는 땅 소유관계가 분명치 않고 조선인들이 측량과 토지신고방법을 잘 모른다는 약점을 악용하여 땅을 빼앗아 간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제는 왕실재산에서부터 일반 농민의 땅에 이르기까지 모든 토지를 가로챘죠. 그러면서도 조선인 대지주에게는 은혜를 베푸는 척 토지 소유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합방 전부터 이이 일본인의 토지 약탈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만, 이 토지조사사업으로 일본인 토지 소유는 5년 사이에 4배 이상 급격하게 늘어났습니다. 그 반면에 조선 농민들은 자작농에서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1918년에는 그 숫자가 8할 가까이나 되었어요. 그 나마도 소작을 부치는 것은 다행이었죠. 일본인이나 지주들에게 찍혀서 소작지조차 얻지 못하게 된 수많은 농민들은 가족을 이끌고 살길을 찾아 고향을 등져야 했습니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 경제체제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제도가 ‘조선회사령’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만 회사를 설립할 수 있게 만든 법령이었습니다. 한일합방 이전부터 조선의 지주나 상인들은 회사를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통감부의 억압과 일본자본의 경쟁력에 밀려서 무산되고 있었던 판이었죠. 그런 상황에서 조선회사령은 조선의 민족자본을 싹마저도 잘라버리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지요.

하지만 당시 일본자본은 아직 조선에 투자할 여유를 갖고 있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일본 회사가 조선전체를 통틀어 151개 밖에 없었어요. 1910년대 후반에 가서야 총독부의 보호를 받으며 많이 들어옵니다. 그러나 업종은 주로 방적, 양조, 정미업 등 농산물 가공공장이나 경공업 등 원료약탈을 위한 것들이었죠. 조선인회사도 많이 생겨났으나 일본자본과 경쟁할 수가 없었고 따라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제에 빌붙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렇게 일제는 산업, 무역, 재정, 금융, 교통, 운수, 체신 등 모든 경제영역에 걸쳐 식민지 지배체제를 급속하게 확립하였습니다. 무단통치에다 토지조사사업으로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빼앗긴 채 소작으로 내몰리거나 고향을 등진 식민지 조선인의 생활은 비참하기 그지없었죠. 하지만 조선의 민중은 언제까지나 굴종의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거대한 민족적 저항투쟁이 준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서 지배체제를 굳혀 가는 동안 세계는 커다란 변화를 경험합니다. 1914년 제국주의 나라 사이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1917년에는 러시아에 서 혁명이 일어나 사상최초로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사회주의체제가 등장했죠. 그리고 제국주의 나라들의 싸움이 치열해지면서 세계는 혁명의 회오리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1919년 2월8일 일본 동경에서 조선유학생들이 독립을 선언하는 시위를 벌였고 조선 식민지에서는 1919년 3·1운동이 폭발했습니다. 3·1만세운동은 극소수 친일파와 지주를 제외하고 2백여만의 민중들이 참여하여 전국의 도시와 농촌에서 전개되었습니다. 이들 투쟁은 농민이 주도하였어요. 농민들은 시위와 폭동을 벌였고 관공서와 지주들을 습격하기도 하였죠. 만세운동은 만주, 연해주, 일본 등지에서 대중집회와 시위운동으로 번져갔습니다. 다들 잘 알다시피 3·1운동은 이후 본격적인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식민지 노동자계급의 비참한 생활 뚫고 3·1만세운동에 뛰어들다

우리나라 임금 노동자는 이미 18세기 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만,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지배가 이루어지면서 더욱 빠르게 늘어났습니다. 그 직접적 계기가 ‘토지조사사업’이었죠. 수많은 농민들은 농토를 빼앗기거나 소작인이 되었다가 일본인과 조선인 지주의 수탈에 못 견디고 농토를 떠나거나 농업 노동자로 남아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살았습니다. 많은 농민들은 국내에서 살길을 못 찾고 일본, 만주 등지로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토지조사사업은 조선판 ‘엔클로저운동’과 다름없었어요.

이렇게 땅을 잃은 농민들은 1910년대에는 노동자를 받아줄 공장이 적어 부두나 광산에 들어가거나 도시의 막일꾼이 되었지요. 그 나마도 일자리가 없어 대부분은 거지와 같은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런 속에서도 점차 식민지공업이 시작되면서 공장노동자수도 늘어갔죠. 1911년에 노동자수는 66,000명 정도로, 그 가운데 공장노동자는 14,000명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1918년에는 노동자가 146,000명으로 늘어나고 그 가운데 공장 노동자는 31.5%인 46,000명이나 됩니다. 그렇긴 해도 아직 공장들은 영세하였고 제법 크다는 공장은 모두 일본인 것이었죠.

일제 식민지 시대 내내, 조선 노동자들은 세계적으로 가장 낮은 임금을 받았다는 일본 노동자들보다도 훨씬 못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풍토는 1910년대에 정착되고 있었습니다. 조선 노동자임금은 일본인 노동자의 절반을 밑돌았고 여성은 남성의 1/3, 연소노동자는 1/4수준에 머물렀습니다. 노동시간은 하루 평균 12-14시간으로 집계되었으나 실제는 16-18시간까지 연장되었고 휴일은 1년 내내 거의 없었죠.

그나마 임금이 물가폭등을 따라가지 못하여 노동자들은 지독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 때문에 의식주 기본생활이 비참하기 그지없었지요. 한 신문 보도에 의하면 음식은 좁쌀과 보리, 그리고 참외, 오이, 일본인이 먹다 버린 수박껍질, 부식은 고추, 된장이었고, 1인 하루 생활비가 3전 정도, 1개월에 1원, 1년에 12원이었다고 합니다. 1912~16년 사이 조선인 한사람이 먹은 쌀 소비량은 평균 0.7석에 지나지 않았어요. 쌀은 먹을 수도 없고 잡곡으로 그저 하루 하루를 연명하기 급급했다고 하죠. 거기다가 열악하기 그지없는 작업환경은 빈번하게 산업재해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고, 노동자들을 폐결핵을 비롯한 각종 질병의 위험으로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일제의 자본가와 싸울 수밖에 없었죠. 이것은 누가 가르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본능적으로 체득한 진리였습니다. 노동자투쟁은 한일합방 이전부터 부두, 광산, 철도, 전차 등의 분야에서 일어났습니다만 1910년대에 들어서는 서서히 공장 노동자가 앞장을 서게 됩니다.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처우개선을 내걸었어요. 물론 1912~1917년 사이 파업건수는 총 36건에 지나지 않을 만큼 아직은 그 힘이 미미하였지만 점차 투쟁의 강도가 높아졌죠.

그리하여 1918년에는 50건에 6,105명이 파업에 참가하였고 1919년에는 84건에 9,011명이 참가하였습니다. 사실 이 통계는 일제가 축소하여 발표한 것 일수도 있어요. 하지만 1918년을 분수령으로 하여 노동쟁의가 질적 양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한 유력한 수단으로서 노동쟁의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런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은 조직을 만들어갑니다. 노동조합을 포함한 노동단체는 한일합방 전부터 지역별, 직종별로 결성되어 왔고 매년 늘어나고 있었죠.

이런 상황에서 3·1만세운동이 폭발하고 노동자들은 아직 그 숫자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습니다. 1919년 3월3일 겸이포 제철소에서는 200여명의 노동자들이 반일시위를 벌였고 3월7일 경성 동아연초 공장에서는 500여명이 파업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3월9일 경성전차 운전부 및 차장들의 파업, 3월19일 괴산 노동자들의 만세시위, 3월27일 직산 금광노동자 100여명의 일본헌병 주재소 습격 등이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특히 만세운동이 사그러들었던 7월 이후에도 노동자들은 과감하게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8월18일 경성전기 노동자들의 파업은 전차운행을 정지시키고 경성시내를 암흑천지로 만드는 위력을 떨쳤지요. 그리고 10월12일에는 경성 동아연초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을 계속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며 11월11일 겸이포 제철소 250여 노동자들은 용광로를 점령하고 파업을 탄압하려는 일본 관헌과 맞서는 투쟁을 벌였어요.

이것은 전국적으로 노동자수가 크게 늘어나면서 의식이 높아진 결과였습니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은 조직을 만들고 단체행동을 벌였습니다. 3·1운동은 당시 노동자들이 단순히 경제적 요구를 넘어서서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에 나서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경제투쟁과 민족해방이라는 정치투쟁을 같이 진전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화정치에 숨겨진 착취와 억압

1919년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 들어서자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치’라는 유화정책을 폅니다. 헌병제도도 없애고 조선인 관리도 늘리고 언론·집회·출판의 자유와 지방자치 실시 등도 약속하였지요. 그러나 허울일 뿐이었습니다. 실제로는 경찰 헌병과 같은 감시 통제기관을 대폭 증강시키고 친일분자를 대폭 양성하여 민족분열을 추진하였죠. 또, 후기에는 사회운동이 활발해지자 다시 무단통치로 전환했습니다. 1925년 치안유지법 실시가 그 한 예이지요. 그리고는 중국대륙 침략을 준비합니다. 문화정치란 무력에 의한 식민지 지배의 본질을 감추면서 새로운 지배정책으로 전환하는 고도의 기만정책인 셈이었던 거지요.

일제는 문화정치를 내세우면서 식민지 수탈정책을 강화하였습니다. 먼저 일제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벌어들인 자본을 조선에 진출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조선회사령을 철폐하였고 일본인 기업은 급증했습니다. 5인이상 공장이 1911년 252개에서 1921년 2,384개, 1930년 4,261개로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국의 자본축적을 위한 식민지 산업의 육성에 그치는 것이었죠. 일제는 농림, 수산업, 광업 등 기초산업과 농산물 약탈과 연관된 식품가공공업이나 방직 등 경공업에만 집중투자하고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중화학공업 특히 산업연관도가 높은 기계공업이나 대기업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조선인에게도 회사설립이 허용되었으나 일본자본에 눌려 클 수가 없었어요. 이는 해마다 줄어들었습니다. 다만 일제에 빌붙은 일부 조선의 자본가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지요.

1920년대에도 여전히 조선은 일본의 식량공급기지 역할을 강요받고 있었는데 ‘산미증식계획’이 그것이었습니다. 산미증식계획이란 쌀 생산을 늘리기 위한 농사개량과 수리관개시설 구축과 경지정리 등 토지개량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일본 국내의 식량부족을 해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조선 쌀 생산과 수출을 늘리기 위한 것이었어요. 이 정책으로 일제는 조선의 쌀을 대량으로 빼앗아 갔고 조선 농민들은 수리조합 건설에 따르는 조합비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토지를 내놓고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인의 토지소유가 크게 늘어났지요.

1910년대의 토지조사사업에 이어 이번에는 산미증식계획으로 일제는 조선의 농민들을 벌거벗겼던 겁니다. 이와 같이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는 이른바 문화정치의 기만극 아래서 전형적인 식민지 약탈을 위한 경제구조가 정착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20년대 말 세계대공황이 폭발하여 자본주의체제가 결정적 위기에 봉착하고 일본 경제가 극심한 불황에 빠졌죠. 그러자 일제는 중국대륙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면서 다시 무단통치로 회귀하였습니다.

일제의 잔혹한 식민지정책 아래 농민은 몰락을 거듭하였습니다. 자작농 및 자작 겸 소작농은 계속 감소하고 지주와 소작농은 현저하게 증가하였지요. 농민들은 높아만 가는 소작료와 고리대, 각종 세금, 유통과정에서의 중간착취 등으로 허리를 펼 수가 없었고 ‘보릿고개’로 얘기되는 굶주림은 숙명처럼 달라붙었어요. 농촌의 빈곤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도시나 국외로 살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1932년 만주에는 32만명, 일본에는 40만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이 불안정한 취업상태에서 저임금으로 혹사당하면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국내 공장 노동자도 농촌의 몰락에 따라 매년 늘어났어요. 공장 노동자는 1911년 14,000명에서 1921년에 5만명, 1931년 10만1천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광산노동자, 운수, 건설 노동자까지 합하면 임금노동자는 22만명에 이르렀죠. 노동자들은 방대한 실업자들의 존재를 배경으로 지독한 저임금과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어요. 성인 남자의 경우 조선인의 임금을 1로 본다면 일본인 남자는 2.32, 조선인 여자는 0.59, 일본인 여자는 1.01로 조선인은 일본인 임금의 절반도 안되었고 여성은 남자의 절반이었습니다.

게다가 물가 등귀로 실질임금은 1920년의 100에서 1925년 85, 1929년 83으로까지 낮아지기만 했어요.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이 일반화하고 있었습니다. 노동자 중에서 여성의 비중은 매년 늘어나 전체 노동자의 35.2%에 이르렀고 연소 노동자도 7.5%나 되었습니다. 이들은 가족의 기아를 면하기 위해 지독한 저임금이라도 감수해야 했고 기업주들은 이 같은 한계이하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통해 막대한 식민지 초과이윤을 거두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식민지적 착취와 수탈은 다른 한편에 일제 및 지주, 자본가에 대한 민중들의 투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소작쟁의와 노동쟁의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었지요. 소작쟁의는 1920년 15건에 4,140명이 참가했지만 매년 늘어나 1930년에는 726건에 13,012명이 참가하였습니다. 1924년 암태도 소작쟁의, 북률면 소작쟁의, 1926~32년의 용천 소작쟁의는 장기에 걸친 격렬하고 강인한 농민들의 투쟁을 대표적으로 표출시켰습니다.

또한 3·1만세운동의 영향과 문화정치의 변화를 배경으로 사회, 정치운동도 활발해졌습니다. 상해에는 임시정부가 들어섰고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결합하여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죠.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비롯한 조선어 매체들도 쏟아져 나왔습니다. 민족주의운동이나 사회주의운동은 일제의 분열공작과 탄압으로 수난을 겪었어요. 그렇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1926년 6·10만세운동을 계기로 신간회를 결성했습니다.

신간회는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민족해방운동 세력의 통일을 추진합니다. 봉건시대 최하층 천민으로 취급받던 백정들도 형평사를 결성하여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고 1929년 10월에는 광주 학생운동이 폭발하여 민족해방운동의 불길을 당겼습니다.

조선 노동자, 전국적인 단결을 성취하다

1920년대의 이러한 정세변화 속에서 노동운동은 전례 없이 활발한 모습을 보였어요. 두말할 것도 없이 임금 노동자의 증가가 큰 원인이었지만 3·1운동의 경험과 1917년 러시아혁명의 성공에서 파급된 노동자 계급의식의 고양 등도 크게 작용한 것이었죠. 노동운동의 성장은 노동조합의 급증과 전국조직의 결성으로 나타났습니다. 노동자조직은 1900년대부터 1920년에 이르기까지 50여개, 1920년 이전에는 30여개이었습니다. 그런데 1920년 33개였던 것이 1921년 90개, 1925년 128개, 1930년 561개로 급증했지요.

이들 노동단체의 대부분은 처음에는 선진적인 지식인이나 노동운동가들이 주도하여 지역을 중심으로 만들었으나 점차 노동자 스스로의 역량이 쌓여가면서 노동자들 자신에 의한 운동으로 발전해 갔죠. 노동단체들은 지식계발이나 상호부조, 환난상구(질병, 초상 등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서로 돕는 일) 등을 주요한 목적으로 했습니다. 하지만 의식의 계몽과 단결 및 연대성의 추구에도 보다 많은 관심과 역량을 경주하게 되었죠.

노동단체들은 처음에는 운송 노동자들을 주축으로 하여 지역내의 여러 직종들을 망라한 지역별 노동조합 곧 지역합동노조들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공장 노동자수와 투쟁이 늘어나고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노동조합에 대한 인식과 위상이 바뀌었죠. 곧 공장 노동조합이 늘어나고 지역별노조는 1920년대 중반 직업별노조로 바뀌어갔습니다.

그리고 전국각지에서 노동단체들이 활발하게 조직되면서 전국적인 노동단체가 등장하였습니다. 전국단위의 최초의 조직은 1920년 4월11일에 결성된 조선노동공제회와 2월에 조직된 조선노동대회이었습니다. 조선노동공제회는 박중화 등 선각적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었습니다. 조선노동공제회는 인권의 자유평등과 민족차별의 철폐, 식민지교육의 지양과 대중문화의 발전, 노동자 기술양성과 직업소개, 각종 노예의 해방과 상호부조를 강령으로 내걸었습니다.

조선노동공제회는 노동자와 소작인들을 개인자격으로 가입시키고 노동자들을 하나로 묶는 활동에 진력하였죠. 그리하여 전국 각지의 산업도시에 대부분 노동자로 구성된 지부를 설치하였고 인쇄공노동조합 같은 직업별노동조합을 많이 만들어냈습니다. 또 노동자들의 의식을 계몽하고 노동문화를 보급하는 한편 공제활동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조선노동공제회는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받았어요. 결성대회 당시 678명이던 회원수는 1년 후인 1921년 3월에는 17,889명으로 급증했습니다.

이렇게 조선공제회는 당시의 어린 노동계급을 하나의 중요하고 거대한 사회세력으로 성장시키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조선노동공제회는 노동자계몽과 상호부조 등에 집중하여 증가일로의 노동자 요구와 투쟁을 모두 담아내지 못했어요. 그리고 지식인 중심의 중앙 지도부 내부에서 사상대립과 분열이 일어나면서 해체되었습니다. 그리고 1922년에 결성된 조선노동연맹회와 1924년 4월에 출범한 조선노농총동맹으로 자신이 해왔던 역할을 넘기게 됩니다. 

조선노동대회는 조선노동공제회와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전국조직이었습니다. 이 조직은 조선노동공제회와 비슷한 목표를 내걸고 노동자와 소작인들을 회원으로 규합하고 전국 주요도시에 지부를 두었습니다. 회원수는 한때 8천여명에 달했지만 지도부의 사상대립으로 오래 안가 해체되었죠. 그 후 1924년 4월, 이들은 조선노동공제회 잔류파와 조선노농총동맹으로 합류하게 됩니다.

조선노동공제회와 조선노동대회에 이어 등장한 전국조직은 1922년 10월15일에 결성된 조선노동연맹회입니다. 이 조직은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을 비판하고 만국의 노동자와 단결하여 분투하겠다고 선언했어요. 사회역사의 진화와 사회적 계급의식에 의한 단결 등을 강령으로 내걸기도 하였죠. 민족적 차별 철폐를 내걸었던 조선노동공제회보다는 계급적 입장을 분명하게 나타낸 것입니다. 조선노동연맹회는 조선노동공제회와는 달리 노동조합 조직을 회원으로 받아 연맹체를 지향함으로써 조선노동공제회보다는 좀 더 노동단체다운 면모를 갖춘 발전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조선노동연맹회는 1920년대 전반기에 발생한 노동자들의 투쟁에 직·간접의 지도와 지원을 행하였고 조직도 여러개 만들어냈습니다. 또한 3·1운동 이후 산발적으로 치러오던 노동절 행사를 1923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전국적인 차원의 운동으로 추진하였죠. 이렇게 조선노동연맹회는 전국조직으로서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조선노동연맹회는 당시 사회주의운동에 따라다녔던 파벌과 분파투쟁에 휩쓸려 전국연맹체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확보하지 못한 채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노동운동은 사회주의 세력간 분파로 인해 혼란에 빠졌어요. 노동자 투쟁이 격화하고 노동조합 조직이 늘어가는 상황에서 이러한 분열의 극복이 노동운동의 지상과제로 제기되었죠. 더욱이 노동조합 조직은 점차 지역별조직에서 직업별조직으로 전환해감으로써 새로운 전국조직이 요구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소작쟁의도 격화해가고 있었어요.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1924년경 사회운동의 단합과 노동자, 농민운동의 통일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전국 각계 각층에서 일어났습니다. 실천적인 노력들이 기울여졌죠. 그 결과로 전국의 노동운동, 농민운동 단체가 모두 모여 1924년 4월18일 조선노농총동맹을 출범시킬 수 있었습니다. 조선노농총동맹은 노·농계급의 해방과 신사회의 건설,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한 자본가계급과의 철저한 투쟁, 노동자들의 복리와 경제생활의 향상을 강령으로 내걸었습니다. 이처럼 무산계급의 해방운동 노선을 제시함으로써 조선노동연맹회 보다 한 걸음 더 계급적 투쟁을 분명하게 내건 것이죠. 그러나 일제가 창립대회 이틀만에 해산명령을 내렸어요. 그리고 가혹하게 탄압을 했습니다만 전국의 노농단체들이 조선노농총동맹으로 속속 가입함으로써 조선의 무산계급을 위한 명실상부한 전국 중앙조직으로서의 위상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조선노농총동맹이 구성원의 성격에 따라 독립적인 전국적 조직으로 재조직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분리가 추진되었습니다. 그리고 1926년 4월22일 분리대회를 열기로 하였죠. 그러나 경찰의 집회불허로 실현되지 못하고 1927년 9월7일에야 서면 대회 형식으로 조선농민총동맹과 조선노동총동맹으로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조선노동총동맹은 출발부터 일제의 탄압정책으로 적극적이고 공개적인 활동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럼에도 조선노동총동맹은 유일한 전국적인 조직으로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 지도하였습니다. 1920년대 후반에는 전국 곳곳에 지역별 노동조합연합회들과 산업별노동조합을 조직했습니다. 이 당시 결성된 지역별 노동조합연합회들이 원산노동연합회, 목포노동총동맹, 전남노동연맹, 전북노동연맹 등 26개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지역의 직업별노조에서 전국 산업별노조로 발전한 것은 ‘전조선인쇄직공조합총연맹, 조선직공총동맹 전조선신문배달조합총연맹 등이었습니다.

이처럼 1920년대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조직을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이것은 노동자수가 늘어나고 노동자 의식의 높아진데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만, 전국적 조직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적극적인 활동에도 힘입은 바가 큽니다. 특히 진보적 지식인들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그 중 중요한 하나가 노동야학이었죠. 당시 일제의 수탈과 탄압 아래에서는 노동자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란 불가능하였습니다. 더욱이 공식적인 교육은 모두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위한 것이었죠. 이런 상황에서 지식인들은 노동자와 그 아이들, 빈농과 소작인들의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1920년부터 1930년 초까지 계속된 노동야학은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전국적으로 수백개가 설립되었습니다.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야학에서 민족해방과 계급의식에 눈을 뜨고 노동운동전선으로 뛰어들었죠. 그래서 노동쟁의 현장에는 노동야학 출신과 노동야학 선생들이 자주 나타났어요. 노동야학은 교육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노동운동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9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