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연대 '3일 파업'이 가르쳐 준 것

노동사회

궤도연대 '3일 파업'이 가르쳐 준 것

admin 0 4,145 2013.05.12 06:01

장마가 끝나고 열대야가 슬슬 기승을 부릴 무렵이었던 7월21일, ‘궤도연대 공동파업’이 시작됐다. 궤도연대 투쟁에 참여한 서울지하철, 서울도시철도, 부산지하철, 대구지하철, 인천지하철 등 전국 지하철공사 5개사 노동조합의 주요 ‘공동요구’는 공공부문 주5일제 시대를 맞이하여 “신규인력 충원으로 청년실업 해소하자”는 것이었다. 반면 공사들은 흑자경영 달성 또는 경영합리화를 위한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인력 감축’과 ‘교대제 근무형태 개편(3조2교대→3조3교대)’을 관철하려고 했다. 그리고 보수언론의 ‘뜨거운 관심’ 속에 진행된 파업은 삼일만에 허섭 서울지하철노조 위원장의 ‘돌출발언’과 함께 힘없이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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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 공세나 사용자들의 완고한 태도, 보수언론이 부풀린 ‘내부 이탈자들’ 자체는 이번 공동파업이 애초 노조의 요구와 비교하여 별다른 성과 없이 ‘작심삼일’로 끝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대국민 접촉면이 가장 큰 공공운수노동자들의 파업에서 언론을 통한 이데올로기 공세가 없거나 사용자들이 개방된 태도를 취한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또, 소수의 목소리 큰 파업 이탈자들이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고, 언제든 돌출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서울지하철에서 발생한 리더십의 허망하고 우발적인 붕괴,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던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은 당연히 옳지 못하다. 결국 이번 파업이 붕괴된 원인과 우리가 거기서 교훈 삼아야 할 과제는 투쟁을 준비하는 중첩된 과정들을 차근차근 되짚어 보는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복기의 시작은 우선 3월29일 서울지하철 노조 12대 집행부의 출범이다.

구조조정, 황폐해진 현장 그리고 새 집행부  

‘반 배일도 진영’, 소위 ‘민주파’ 단일후보였던 허섭 후보는 현장을 초토화하는 거센 후폭풍을 몰고 왔던 1999년 4·19파업 이후 9, 10, 11대에 걸쳐 4년6개월 동안 장기 집권했던 배일도 전 위원장을 64%의 높은 지지율로 꺾고 12대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김종식 서울지하철노조 위원장 직무대행은 이러한 선거결과를 “공사가 주5일제 노동시간 단축을 삶의 질 향상이 아니라 인원감축과 근무형태 개악 등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더불어 진행하려고 하는 것이 조합원들의 불안감을 자극하는 가운데 투쟁하지 않는 배일도 집행부가 신뢰를 잃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작년 10월 배일도 위원장이 공사의 구조조정 안과 동일한 ‘3조3교대 근무형태 위원장안’을 들고 나왔을 때 현장의 반발로 인해 철회된 일이 있었다. 그리고 공사 사장과 배일도 위원장의 ‘21세기 협약서’는 조합원 총투표에 부쳐져서 폐기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서울지하철의 조합원들이 당면한 구조조정을 헤쳐나가기 위한 길잡이로서 배일도 집행부를 불신임한데는 단지 구조조정 앞에서 ‘투쟁하지 않는다는 것’ 이상의 보다 근본적인 ‘염증’이 있었다. 토론과 의견 수렴 없는 이른 바 ‘배일도식 직접민주주의’ 등을 통한 패권적이고 독단적인 조직운영, 불투명한 회계 처리 등으로 인해 제기되었던 조합비 관련 의혹(12대 집행부에서는 ‘조합비 관련 3대 의혹’의 진상규명위원회를 특별위원회로서 공식 발족하였다), 공사와의 담합을 통해서 인사권을 사적으로 이용했다는 의혹 등에 대한 피로가 누적되면서 배일도 집행부에 대해 조합원들이 근본적으로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지적이다.

물론, 이러한 지적이나 ‘비민주성’에 대한 비판, ‘비리’에 대한 의혹은 주로 소위 ‘민주파’에 의해서 제기되는 것이다. 이번 파업에서 ‘파업유보 성명서’를 작성했고 배일도 집행부와도 함께 활동했다는 홍순용 군자정비 지회장은 “그런 의혹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만일 조합비 횡령이나 인사 비리가 있었다면 검찰에 고발해 시비를 가려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쨌거나 배일도 집행부 시기의 ‘피로’와 ‘염증’ 자체는 보편적인 것이었다. 홍순용 지회장도 “독단적인 부분이 배일도 집행부 고유의 스타일임을 인정해줘야 한다”면서도 “배일도 집행부 시기 일할 맛 나는 직장, 신뢰받는 조합이 약화되었다”는 지적에는 동의했다.

이처럼 노조로의 단결을 통해서 집단적 의지를 표출하고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것보다는 개별적으로 ‘줄을 잘 서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예년보다 강해진 현장, 그리고 이에 따라 취약해진 현장조직력을 가지고서 일대 전환을 요하는 주5일제 투쟁에 긴급하게 나서야 하는 상황, 허섭 집행부의 출발로 인해서야 탄력을 받은 궤도연대의 조직적발전과 투쟁계획이, 5년 만에 들어선 서울지하철노조 ‘민주집행부’가 처음으로 발 딛은 곳의 위치였다.          

공동투쟁, 공동교섭의 원칙과 현실    
      
“사실 4년6개월 동안 현장이 많이 썩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4개월만에 제대로 된 파업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고 봅니다. 그 잔재를 청산하면서, 지금 노조도 못 믿고 공사도 못 믿는 조합원들에게서 노조가 신뢰를 회복하는 과정이 우선되었어야 했죠. 예를 들어, 전 집행부에게 제기됐던 ‘의혹’들에 대해서 조합을 중심으로 조사해서 투명하게 공개하고 시비를 가리는 일 같은 것 말입니다. 또 시간이 없긴 했지만, 노조가 조금씩 조합원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 자동차를 출발하기 전에 예열시키는 것과 비슷한 과정이 훨씬 많이 있었어야 했습니다. 제가 지켜본 걸로 봐서는 주5일제 관련해서 현장교육이나 총회도 잘 안 됐고…, 물론 함께 책임감을 느껴야할 입장에서 이런 말 할 처지도 아니고 열심히 한 집행간부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조합원 입장에서는 투쟁준비가 많이 형식적이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도 파업에 마지막까지 참여했다는 서울지하철 역무지부 장경태 조합원(91년 입사)은 이번 파업의 준비과정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실패한 파업’을 돌아보는 것은 씁쓸한 안타까움을 곱씹는 일일 것이다. 장경태 조합원은 현장에서 느끼는 부족한 준비 때문에 그 시점에 파업에 돌입하는 것이 ‘잘한 선택’이었는지 우려스러웠다고 했다. 차라리 상반기에는 배일도 집행부가 남긴 비민주적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을 확실하게 실시하면서 조직력을 확보하고, “노조가 인감도장을 꼭 쥐고 있다가”, 공사의 경영평가가 진행되는 즈음인 연말에 주5일제 투쟁을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실제 파업의 집행과정에 지도부로서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이들은 대부분 “당시 시점에서 파업 돌입 자체는 피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강조한다. 노조가 예고한 파업 시점까지 서울시와 각 공사들이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었겠냐는 것이다. 한편, 김재길 운수연대 위원장은 ‘돌입 시점'과 관련한 비판에 대해, “사후적으로 외부에서 파업을 하는 게 옳았냐 틀리냐를 중심으로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입장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는 시민단체와 대중과 호흡하면서 날짜를 박아놓고 찬반투표해서 조직적으로 정한 일정대로 움직이는 노동조합은 다르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4개월 동안 정신 없이 달려온 서울지하철노조를 비롯하여 궤도연대는 파업에 돌입했다. 그런데 그 때는 이미 ‘공동요구·공동투쟁·공동교섭·공동타결’의 기본적인 원칙이 진작에 무너져 버린 상황이었다. 궤도연대가 그 원칙을 기본으로 세웠던 계획과 전략들은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주5일제와 일자리나누기라는 사회공공성의 결합’이라는 사회적 의제는 촉박한 시일과 약화된 현장조직력 속에서 일상적인 투쟁으로 만들어지지 못 했다. 이에 대해 김갑수 공공연맹 수석부위원장은 개인적인 의견임을 전제하고, “궤도연대의 공동요구안도 조금 과한 면이 있었다. 그리고 단사별 현실적인 상황 차이를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지 못 했다”는 부분을 지적했다. 원칙이 지켜질 때 발휘될 수 있는 배가된 투쟁력을 위해선, 좀 더 정확한 주체역량에 대한 판단과 이에 기반한 정교한 계획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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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연대·공공연맹·민주노총의 소통

한편, 외부적인 여건들도 대부분 안 좋게 작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론이야 우선 차치해 두더라도, 사실 궤도연대 투쟁을 보호하는 울타리를 만들어낼, 민주노총·공공연맹·궤도연대 지도부의 내부적 소통에도 문제가 있었다. 중간 다리 역할을 해야할 공공연맹에서는 오랜 공백 끝에 6월에야 지도부가 섰고, 6월 초 보건의료노조 파업 시기에 보였던 노정 유화국면은 김선일씨의 죽음이 알려진 이후 민주노총 파병반대투쟁이 진행되면서 7월 들어 급속하게 경색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궤도연대는 6월말부터 7월 중순까지 다양한 통로를 통해 정부 관련부처와 정당관계자 면담을 실시했지만, 직권중재를 막아내거나 서울시의 태도를 조금이라도 바꿔놓는 ‘정치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삼자 소통의 공백과 관련하여, 이호영 서울지하철노조 선전홍보부장은 “작년 관련법이 개악된 상태에서 단위노조들의 투쟁만으로 주5일제 전선을 뚫는다는 것이 일정정도 한계가 있는 것”이지만,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에 비중을 두고, 주5일제라는 사안을 전국적인 투쟁으로 확산시키는데는 소홀했던 것 아닌가”하는 아쉬움을 조심스럽게 드러냈다. 한편, ‘삼자 소통’에 개입했던 김명호 민주노총 기획국장의 판단은 이와 달랐다. 노정관계가 경색되면서 “궤도의 경우는 보건의료노조와 다른 방식으로 풀려갈 것이고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7월 들어 민주노총 내에서 팽배해 있었다”는 것이다.

“최소한 70만 민주노총 조합원 내에서라도 궤도투쟁을 엄호하는 울타리를 치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선전사업을 강화하고 투쟁 확대 준비를 할 필요가 있었고, 이런 생각을 밝히고 민주노총 차원에서 협조를 하려고 했지만 결국 잘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체계상 공공연맹을 두고 민주노총이 적극적일 수 없는 상황에서 삼자 지도부의 보고와 소통이 원활치 않아, “민주노총은 궤도연대가 인력충원을 어느 정도까지 해야 성과 있는 타결인 건지 ‘주관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고, 막상 노정교섭라인을 발동하려고 해도 거기 가서 할 말이 없었다”는 것이다.

파업 실패가 가르쳐 준 것, “조합원에 대한 신뢰”   
      
3월 말 서울지하철에서 새 집행부가 들어서면서 탄력을 받아 정신 없이 달려온 궤도연대의 투쟁은 예정된 파업을 향해 치달을수록 이렇듯 조금씩 고립되어 왔다. 비록 외부관찰자였긴 하지만 궤도연대투쟁에 책임감을 느끼는 많은 노동운동가들이 궤도연대 집행부가 느꼈을, 급박한 투쟁준비 속의 피로를 이해하면서도 “투쟁 진행과정에서 기회를 놓쳐 못한 것들”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다양한 의견을 내놓고 아쉬워했다. 원인이야 어찌됐건 그만큼 함께 할 수도 있었던 많은 이들이 함께 하지 못 했던 파업이었다.

내부적으로 현장 조합원들을 투쟁을 위해 ‘예열’시키는 과정도, 외부적으로 더 큰 사회적 파급력을 갖기 위해 대국민 선전사업을 준비하고 상급단체와 공동모색을 통해 정치적 울타리를 치는 과정도, 없진 않았지만 부족했다. 뭔가 모르게 형식적이었고, 성급했다는 지적들이었다. 그리고 이번 투쟁을 되짚어보면서 인간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실수들, 그런 복잡한 것들을 다 들어내 보면 결국 파업실패의 결정적인 원인은 ‘촉박한 시간’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직적으로 파업을 준비하며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무시된 ‘작은 인간적 실수’들이 쌓여 결정적인 오판을 만들어낸 것이다. 서두름이 투쟁지도부의 시야를 가리고 조금씩 투쟁의 울타리를 좁혀갔다. 그 결과 정점이어야 할 파업은 파괴력을 갖지 못한 채, 투쟁의 정당성과 ‘단결과 연대’에 눌려 조합원들 마음 속 저류에만 흐르고 있던 불안과 고립감을 출렁거리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지도부가 아주 잠시 순간적인 흔들렸고, 파업이 깨져버렸다.

인터뷰를 했던 대부분의 활동가들은 이번 투쟁에서 얻을 수 있는 개인적인 교훈으로 “조합원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했다. 이러한 믿음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깊은 호흡과 긴 시선을 갖고 함께 걸으며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는 누구나 잘 알고 있는 평범하고 추상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교훈을 살리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구체적 경험과 함께 되새겨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 파업 중인 대구지하철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임원 및 집행간부 총사퇴, 총선거 권고’를 결의한 서울지하철을 비롯하여 궤도연대투쟁에 참여했던 모든 노동조합에게 이번 파업의 아픔은 이러한 교훈을 다시금 새겨 넣는 성장통이었을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9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