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대안은 노동자 생존권의 문제

노동사회

생태적 대안은 노동자 생존권의 문제

admin 0 3,147 2013.05.12 05:47

최근 "노동운동이 '왕자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둘러싸고 말들이 많다. 바로 내 일이라는 생각에 오고가는 말들을 주의 깊게 경청했다. 여러 가지 말들이 오가면서 진의가 왜곡되기도 하고 그 가운데 감정이 격앙되기도 했지만, 일단 이런 토론(?)이 자주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몇 년째 똑같은 얘기들이 반복되는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방향을 찾아간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느낌이 또렷하게 실감나게 다가오는 데는 물론 좀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처음에 제기된 중요한 쟁점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지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논란을 촉발했던 최초의 글은 "노동운동에 만연한 경제 발전, 성장의 모델을 폐기하고 생태적 대안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한다"고 노동운동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 한 전직 노동운동가는 '현실을 모르는 소리'로 희화화시키는 것으로 대꾸했는데, 아마 상당수 노동자들도 그런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환경문제를 해결하고 생태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은 과연 '배부른 소리'일까? 나는 생각이 다르다.

도둑맞은 '건강한 삶과 미래'

최근 민주노동당에서는 "5세 이하 유아 5명 중 1명이 천식이나 아토피성 피부염을 앓고 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천식과 아토피성 피부염은 대표적인 환경성 질환이다. 그리고 대개 공장이 밀집된 지역일수록 아이들이 천식이나 아토피성 피부염에 걸릴 확률은 높아진다.

물론 이런 주장에 대해서 기업 측은 강하게 반발하곤 한다. 환경오염과 천식이나 아토피성 피부염 사이의 과학적인 연관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항의를 하면서 들이대는 대표적인 논리가 "우리 공장의 노동자들과 아이들은 다 건강하다"는 주장이다. 정말 그럴까?) 하지만 그런 과학적 연관 관계를 규명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천식을 앓고 아토피성 피부염을 앓던 아이들이 공기가 좋은 곳으로 사는 곳을 옮기면 증상이 호전되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공기 좋은 주거 환경이나 상대적으로 비싼 유기농작물은 당장 살아가기도 벅찬 노동자들에게는 먼 미래의 꿈일 뿐이다. 어릴 때 천식이나 아토피성 피부염을 치료하지 못할 경우 체질로 아예 굳어져 평생 고생하는 경우도 꽤 있으니, 돈이 없으면 건강도 없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셈이다.

좀더 충격적인 것도 있다. 최근 불임률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아이가 없어서 불임클리닉을 찾는 부부도 점점 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일단 과거보다 늦은 결혼이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 통상적으로 30대가 되면 남녀 모두 불임률이 3~5배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근에 불임률이 급격히 증가한 데는 환경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는 주장이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다. 바로 '환경호르몬'이라고 불리는 내분비계 장애물질이 불임률을 높이는 데 큰 영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환경호르몬은 "지난 50여 년 동안 남성의 평균 정자수가 50%나 감소했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담고 있는 『도둑맞은 미래』(사이언스북스, 2000)라는 책으로 그 위험성이 처음 알려졌다. 환경호르몬이 대중적으로 관심을 받은 지 4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여전히 암울하다. 연초에 한 방송사는 주로 도심에서 자동차 배기가스에 노출된 노점상들의 정자 움직임이 느리다는 것을 보도해 충격을 준 적이 있다. 최근에는 대표적인 환경호르몬인 다이옥신이 서울, 인천, 시흥에서 다량으로 검출돼 불안감을 더욱더 자극한다.

지금은 나의 건강과 아이들의 건강한 삶을 보장할 수 없는 시대일 뿐만 아니라, 더 이상 다음 세대를 기약할 수 없는 '인간 종의 절멸'까지 걱정해야 하는 시대이다. 물론 가장 먼저 피해를 볼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환경호르몬에 더 노출될 수밖에 없는 바로 우리 노동자들이다.

유전자 조작된 먹거리의 피해

농업이 갈수록 산업화되면서 먹을거리 문제도 심각하다. 잘 아는 한 선배는 식당에서 절대로 두부 요리를 먹지 않는다. 술안주나 아이들 군것질거리로 자주 이용되는 '옥수수 통조림'도 그 선배가 입에 대지 않는 음식 중의 하나다. 채 백만 원도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며 시민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하는 그 선배가 그렇게 음식을 가리는 이유는 바로 우리나라에서 유통되는 콩과 옥수수의 대부분이 유전자 조작된 미국산 콩, 옥수수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유럽연합(EU)이나 우리나라와 달리 유전자 조작된 농작물과 자연 그대로의 농작물을 구분하지 않고 판매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 수입한 콩, 옥수수의 대부분은 유전자 조작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게 그 선배의 주장이다. 그리고 사실이 그렇다. 우리나라의 경우 미국산 옥수수의 70% 정도가 유전자 조작된 것이라는 보고가 있었고, 심지어 소비자들에게 친환경기업으로 알려진 한 식품업체의 두부도 유전자 조작된 콩으로 제조됐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유전자 조작된 작물을 생산하는 미국의 초국적 기업들은 "유전자 조작된 식품은 안전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역시 반론이 만만치 않다. 유전자 조작 작물이 알레르기를 유발하고, 장기적으로 인체에 유해할 가능성에 대한 많은 연구가 나와 있다. 그것이 유전자 조작 농산물 농장을 벗어나 외부로 유출됐을 때 가져올 생태계 교란도 우려되는 점 중 하나다. 실제로 옥수수가 주식인 멕시코에서는 미국산 옥수수를 대량으로 수입한 뒤, 인근 토종 옥수수 밭에서 유전자 조작된 옥수수가 발견돼 충격을 주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유전자 조작 작물의 위험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돈 많은 미국인들의 소비 행태다. 유전자 조작 작물을 따로 구분해서 팔지 않는 미국에서 부자들은 유전자 조작 작물을 거의 먹지 않는다. 그들은 유전자 조작 작물이 아님을 인증 받은 작물만을 찾는다. 대부분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유전자 조작 작물에 어쩔 수 없이 노출되는 반면에 부자들은 그것을 기피하고 있는 것이다.

빈부 격차가 반영되는 먹을거리

이런 미국의 현실은 조만간 우리나라에서도 그대로 재현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유전자 조작 작물에 대한 규제를 최소화하는 안을 우리 정부에게 지속적으로 강요해왔다. 농산물 시장 개방과 맞물려 조만간 대규모 유전자 조작 작물이 국내 시장을 강타할 경우 우리나라 서민들도 유전자 조작 농산물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사실 이미 우리나라 역시 빈부 격차가 먹을거리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소위 '웰빙' 바람을 타고 갖가지 유기농작물과 친환경 식품을 표방한 비싼 식품이 시장에 널리 유통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최근에는 초국적 기업들도 우리나라 '웰빙' 식품 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미국 최고의 유기농·비타민 회사인 시커스는 발 빠르게 국내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가까운 미래에는 노동자들은 몬산토같은 유전자 조작 작물 생산 기업에게, 부자들은 시커스같은 유기농 기업에게 먹을거리를 의존하는 상황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이외에도 환경이 악화되고, 농업을 비롯한 모든 것이 산업화되면서 우리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문제는 무궁무진하다. 그나마 천혜의 자연 조건 때문에 비교적 양질의 물을 아직까지 저렴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나 할까? 물론 지금도 부자들은 노동자와는 다른 물을 먹는다.

환경 문제 곧 '경제적 생존'의 문제가 될 것

이런 얘기를 해도 여전히 환경 문제가 실감이 안 날 이들이 많을 것 같다. 특히 지금처럼 '경제적 생존'의 문제가 절박한 상황에서 환경 문제는 정말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환경 문제에 대한 무관심은 곧 '경제적 생존' 자체를 뒤흔드는 문제로 다가올 수 있다.

최근 산업 공동화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중국을 비롯한 후발국들이 급성장하면서 국내 제조업의 가격 경쟁력 상실이 큰 문제로 떠오른 것이다. 그런데 '중국 효과'만큼 경제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바로 '지구 온난화' 문제이다.

지난 1997년 합의된 기후변화협약 교토의정서는 주요 선진국들에게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이산화탄소(CO2)와 같은 온실 가스 배출량을 1990년 대비 평균 5.2%로 줄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온실 가스 배출국인 미국이 자국 이익을 고려해 의정서 비준을 거부하고 있는 사이 유럽연합(EU), 캐나다, 일본에 이어 러시아가 연말에 비준을 할 것으로 예상돼 발효가 임박한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돼 일단 의무 대상국에서 제외됐으나, 당장 2008년부터 자율적으로 참여할 것을 강하게 요구받고 있다. 이런 요구를 '생태 제국주의'로 딱지 붙이며 거부하기도 민망한 형편이다. 이런 요구가 무리도 아닌 게, 우리나라는 2000년 기준 4억3400만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해 배출량 면에서 세계 9위를 차지했다. 1990년 이후 배출량 증가는 85.4%로 세계 최고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만약 우리나라가 의무 부담국에 포함된 뒤 기후변화협약이 요구하는 수준으로 온실 가스 배출량을 줄이지 못하면, 이미 청정 기술 개발이나 에너지 사용 효율화 등으로 온실 가스 배출을 줄인 다른 나라에게 배출권을 사야 한다. 배출권을 사지 못하면 그만큼 공장 문을 닫을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2012년을 마지노선으로 대책을 강구하고 있는 만큼, 당장 2008년부터 의무 부담국이 될 경우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로부터 배출권을 살수밖에 없다. 이 경우 막대한 외화를 지출해야 할 뿐만 아니라, 결국 가격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게 불 보듯 뻔하다.

이렇게 기후변화협약으로 인한 국제 사회의 압력이 우리나라에 닥칠 때, 제일 먼저 피해를 보는 사람은 누굴까? 바로 노동자들이다. 환경오염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노동자들이, 환경오염에 대한 대가로 또 한번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부자가 되라! 가능하다면...

환경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기는 하다. 바로 그런 것에 신경 안 쓰고 살아갈 만큼 경제적 여유를 획득하면 된다. 그렇게 되면 지금 당장은 환경오염의 위협에서 비켜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역시 다음 세대의 생존과 안녕 까지 보장하지는 못하겠지만……. 하지만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노동자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주 운이 좋은 극소수의 행운아도 있을 수 있다. 그런 행운을 위해서 훨씬 많은 동료들이 더 나쁜 상황으로 추락하는 것을 전제했을 때 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만일 사람들이 쏙독새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나, 밤의 연못가에서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인생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를 외우는 소박한 삶이 아니라, 바로 생존을 위해 '생태적 대안'을 치열하게 모색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노동운동이 '뜬구름 잡는 소리'로 폄하한다면, 감히 말하건대 노동운동의 미래는 없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92호